우리역사

규원사화 위서론과 반론들

평창군 대하리 2007. 6. 6. 09:46

 

위서론-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론-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위서론-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

반론-문맥상 '文化'는 당시에 쓰이던 '문치교화'의 의미로 해석되며,

壬辰之役, 先民, 民氣의 단어들도 그 이전 시대의 서적에서 확인된다

 

 

위서론-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틀리다

반론-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위서론-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책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반론-산속에 숨겨둔 도교 계열의 책이어서 규칙을 지킬 이유가 없다

 

위서론-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반론-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이후 2백여년 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규원사화는 산속바위굴에 보관한 진역유기를 참조 했으면

진역유기는 고려말 청평이 저술했다

 

진역유기는 조대기를 참조 조대기는세조때 책을 구하는 유시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수 있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