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Chandragupta)왕의 손자요,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이었던 아쇼카(Ashoka, B272~231;불교에서는 법륜성왕<Dhrma Raja>라 부름) 왕이 기원전 200년경 실론,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당시 유럽 소아시아의 최강대국=그리스)...등으로 불교 포교사겸 사신사를 대대적으로 파견한 일은 역사를 아는 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주 유명한 사실이다. (요새말로 하면 미국이 세계 곳곳에 파견하는 외교관겸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
△아쇼카(Ashoka, B272~231)대왕
아쇼카왕은 위에서 언급한 알렉산더가 정복한 영토일대는 물론 유럽과 중동 구석구석까지 파견하여 불교를 대대적으로 포교하였음이 역사적 문헌과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명백히 증명되었다. 물론 팔레스틴 유대지방에도 불교는 여지없이 알려졌다. (관련 글이 본 메뉴에 있으므로 참조)
△아쇼카왕의 불교포교사 파견 지역, 유대지방,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로마를 넘어 유럽의 서극 영국까지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불교를 배타적으로 보고 100% 배격하였을까? 아니면 수용하였을까 하고 기독교인들은 물론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매우 흥미롭게 생각할 것이다. 대답부터 하면 "수용하였다"이다.
유대교도(훗날 기독교를 창작한 파당 포함)들이 불교를 수용해 자기 종교에 많이 반영했다는 사실은 한국 종교학계에는 생소하다. 그러나 인터넷을 비롯한 해외의 자료를 살펴보면 관련 연구결과가 참으로 방대하다는 점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그만큼 기독교의 실체에 대해서 다각도의 시각이 부재했음을 여실히 말해준다 하겠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불교를 수용했을까? 어떻게 얼마만큼 그랬을까? 궁금증을 안고 같이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참고: 이스라엘의 고대 불교 흔적 (고대 유대교 회당에서 발굴된 힌두.불교 유적;인도문명→그리스.중동+이스라엘)
_랍비 쉬로모 아비네르의 고대 이스라엘 불교 유물에 대한 설명_
이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 유대인들의 어마어마한 문화식성이다. 유대인들은 유럽과 중동, 아시아 대륙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실크로드도 지나간다. 또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갖어본 일이 불과 몇년 되지 않는다. 수천년간, 그들의 역사 90%이상 주위 강대국의 식민지였다. 그들은 수백년, 수천년간 이집트, 바빌로니아,아시리아,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 한반도와 견주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는데, 우리는 통일신라 초기에 당나라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그 후로 명나라, 원나라(몽골;징기츠칸), 청나라의 절대 영향권 아래 있었는데, 중국 한족의 나라인 당,명나라 시절에는 신하국으로 조공을 바치며 나라의 생존을 그들에게 맡기고 살아왔다. 원나라 때에는 식민지였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을 통하여 국권을 빼앗겼고 절대적으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하에서 후기 고려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거쳐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36년은 완전한 식민지였다. 자! 이 부분이 중요하다. 아무리 우리 한민족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당→원→명→청→일본→미국]의 직간접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우리 민족이 그들의 종교와 문화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을까?
한번 대답해 보라! 이렇게 생각해 보면 등골이 오싹할 것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런 방향의 사고는 지나쳐 와 버렸기 때문일게다.
아마 이렇게 대답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우리것이 어딧소? 99.9999%가 다 [한-당→원→명→청→일본→미국]의 문화지...!
맞다!
우리것이랄 게 뭐가 있나 싶을 정도로 종교, 문화, 정치... 거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그들의 문화 그 자체를 삶의 바탕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제 기독교인들이 고개가 까딱거려질 지점이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직간접 식민지 기간과 비중으로 비교하면 깸이 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수천년간 몇년도 쉬지 못하고 주변의 초강대국들의 절대 식민지 통치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렇다면 그들이 강대국으로 부터 영향받은 종교와 문화는 얼마일까?
생각이 이쯤에 이르면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다.
유대인들의 종교나 문화랄게 거의 없다. 유대교? 기독교?
마치 우리가 미국으로 부터 기독교란 문화를 전폭 수용하였듯이 유대인들의 유대교나 기독교(유대본토는 거부)는 전적으로 주위 강대국들의 것이다.
엥? 유대교와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것이 아닌 주변 강대국의 문화라고요? 그렇다!
유대교 하면 유대인의 독창적인 종교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유대교도 주변 강대국들의 문화에 불과하다. 쉽게 말하면 우리 조선의 문화 하면, 불교, 유교,도교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이게 우리의 것인양 언듯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미안하지만 불교, 유교,도교....모두 주변 강대국들의 문화다. 기독교? 우리것인가? 미안하지만, 일제가 물러간 틈새를 타고 들어온 아메리칸 문화다. 그렇다.
약소국들의 문화는 90%가 주변 강대국의 문화일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신앙심이 깊고, 이스라엘을 마음속으로 깊이 동경하는 기독교인이라면 마음 속으로 부터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단군을 배격할 때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다가도 이스라엘의 종교들이 모두 주위 강대국의 것이라고 하면 속이 편치 못할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은 겉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은양 하여도 깊고 깊은 심정적 원천을 파들어가 보면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하리 만큼 우리나라 보다는 이스라엘이나 미국을 더욱 그리워하고 동경하고 그들을 옹호하고 그들을 변호하려는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 마치 조선의 선비연 하던 썩은 성리학 사색당파들이 모두 조선 자체보다 명나라에 올인했던 기억과 일치하니 기독교인들이 심중 깊이 이순신이나 세종 보다는 다윗이나 예수를 더 사모하는 역심과 비슷하다 하겠다.
이제 차근차근 살펴보겠지만 유대교는 유대인들의 것이 아니다. 유대교는 물론이요 특히 기독교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페르시아,그리스,로마의 것들이 섞여진 짬뽕이다. 자! 이제 이해가 갈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느 문화든지 수용해온 역사를 갖고 있고 주위의 여러 국가의 문화와 종교를 기꺼이 수용해 자기의 것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아주 아주 오랜 전통과 습성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진화론이나 사회주의 이론...등도 사실은 유대인들이 만든 것과 연관해 사고해 보라!) 둘째는: 아쇼카 왕이 파견한 불교 포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어떻게 불교를 기독교에 반영해 새 종교를 만들어 냈을까?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불교 수용과 새 종교 창안의 과정이 어떠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관련한 역사적인 유물이나 문헌은 충분할까? 하는 의문이다. 대답부터 말하면 '충분하다'이다. 물론 기독교를 만들어낸 유대인들은 불교만 믹스해 기독교를 만든건 아니다. 유대교라는 그들의 종교 토대위에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스의 당대 종교와 신화들과 아쇼카의 불교...등이 모두 녹아들어 있다. 이런 관점으로 기독교를 해부하고 연구하는 학문은 근대부터 유럽에서 일어나기 시작해 현재는 일반적 결과를 도출해 방대한 결과물을 내 놓았고 유럽과 북미에서는 충분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
①수태고지 (*.아래 일부를 제외한 사진과 설명은 민희식 선생 지음 '법화경과 신약성서 124~128p'을 인용하였습니다.)
①수태고지(임신사실을 알림)
|
불교원전
|
마야부인은 여덟 가지 계행을 지키기 위해 남편과 동침하지 않고 신령으로 석가모니를 잉태했다. (◁마야왕비의 탁태영몽도; 본생경)
|
기독교차용
|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만 하고 동침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마태,누가복음)
|
비고 |
기둥이 있는 건물의 묘사와 앉아 있는 인물의 구도까지 동일 | 너무도 똑같은 탄생 이야기 석가모니와 예수 모두 태몽을 통해서, 남녀의 동침 없이 잉태된다는 점이다. (고대의 거의 모든 촌장,부족장,영웅,왕...들의 신화가 처녀천잉이며, 고대의 제사에는 '처녀 제물'이 공통 코드로 등장한다.) 마야부인이 여덟가지 계행을 지키느라고 그의 남편과 동침하지 않고 있었는데, 석가모니가 흰코끼리가 되어 어머니의 오른쪽 갈비뼈를 헤치고 그 태(胎)안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된 것으로 불경『본생경』에 기록되어 있고, 기독경 또한 요셉의 태몽에 주(主)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성령이 임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됨을 알린 이후 예수가 태어나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②시므온 이야기
②탄생(예언과 경배)
|
불교원전
|
아시타 선인(仙人)이 왕궁에 서린 서광(瑞光)을 보고 찾아와서 아기 석가에게 경배하고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했다. (◁과거현재인과경)
|
기독교차용
|
우리(동방박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아기예수)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마태복음 2장 2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누가복음 2:28~30)
|
비고 |
아기를 안고 예언이 맞았다며 축복하는 동일한 코드 오른쪽이 남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기로 유명했던 렘브란트의 그림이다. 마치 복제한 듯 인물의 배치까지 흡사하다. | 똑같은 성자의 탄생 이야기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아시타 선인(仙人)이 왕궁에 나타났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이와 비슷하게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동방박사가 마굿간에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시타 선인이 왕궁에 서린 서광(瑞光)을 보고 찾아왔듯이 동방박사는 별빛의 인도를 받아 찾아왔다. 갓 태어난 석가모니를 보고 아시타 선인이 "장차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했다고 불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바이블 또한 아기 예수를 본 예언자 시메온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경의 『불소행찬』에는 노부인이 어린 석가모니를 보고 찬탄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에도 노부인이 아기예수를 보고 예수를 찬탄하는 대목이 똑같이 실려 있다.
③신전의 똑똑한 어린이
③신전의 똑똑한 어린이(당대 신학자들을 놀라게 하다)
|
불교원전
|
브라만 제사장들을 놀라게 하는 어린 석가 (◁과거현재인과경,『불교성전 불전(佛典)』)
|
기독교차용
|
유대교 제사장들를 놀라게 하는 어린 예수 (▷누가복음 2장 41~50절)
|
비고 |
기독교 창작가들은 제사장을 놀라게 했다는 코드에 집중한다. 석가는 크게, 예수는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총명함을 상징해 그렸다. | 소년시절의 성인될 징조 석가모니와 예수 둘 다 어렸을 때 스승을 놀라게 할 정도로 총명하였고, 이미 성인(聖人)이 될 징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똑같은 코드를 갖고 있다.
④세례
④강에서의 세례(세례의식은 본래 인더스강->페르시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
불교원전
|
석가의 태자책봉식에서 왕이 손으로 태자의 이마에 물을 끼얹고 ‘그대는 나의 후계자이니라’하고 선언하자, 하늘에서 ‘좋도다! 좋도다!’하는 음성이 들려오고 또 연꽃이 피어났으며 청작(파랑새) 5백 마리가 내려왔다. (◁과거현재인과경)
|
기독교차용
|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하늘에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흰 비둘기가 날아 내려왔다. (▷마태복음 3장 13~17절)
|
비고 |
예수신화를 만든 유대인 학파가 요한의 명성을 도용하고 타문화의 세례의식과 비둘기 상징성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청작새를 유대인들은 중동의 상징조인 비둘기로 바꿨다. | 똑같은 책봉식과 세례식 불경『과거현재인과경』에는 석가모니의 태자책봉식 때 강가에서 왕은 손으로 태자의 이마에 물을 끼얹고 '그대는 나의 후계자니라'하고 선언하자 하늘에서 '좋도다!좋도다!'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로부터 청작(靑雀) 5백 마리가 날아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기독경에도 요단강에서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할 때 하늘에서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기독경과 불경 모두 의식(儀式)이 '강가'에서 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⑤광야의 시험과 극복
⑤시험을 이기다(마구니의 유혹, 시험을 이기다)
|
불교원전
|
마귀가 금식하며 수행하고 있는 석가에게 먼저 음식으로 유혹하자,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사느니라’고 대답한다. (◁상응부경전)
|
기독교차용
|
마귀가 금식하는 예수를 시험하여, 먼저 음식으로 유혹하며,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고 대답했다. (▷마태복음 4장 1~4절)
|
비고 |
이 부분은 불교원전과 마태복음의 차용부분이 토씨까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 완전히 동일한 악령의 시험 코드 석가는 49일 단식했을 때 마라라는 악령의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40일간 단식 후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기독경『마태복음 4:1∼11』『마가복음 1:12∼13』『누가복음 4:1∼13』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악령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악마의 시련을 받는 이야기가 『본생경』『아함경』『불소행찬』『불본행경』『잡아함경』등 불경에도 많이 실려 있으며 그 이야기의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강조하려 한 것까지도 불경과 기독경이 서로 거의 똑같은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귀가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를 금식시켜 주리게 해놓고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한 것이나, 석가모니에게 걸식을 못하도록 해서 주리게 해놓고 다시 걸식하게 권해서 '식욕의 유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나, 마귀와 악마가 한 짓은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향해 던진 미끼였다. 이 때 예수는 배고픔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식욕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치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대답하였고, 석가모니 또한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광음천처럼 기쁨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고 똑같은 대답을 했던 것이다. 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데려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한다. 마찬가지로 악마도 석가모니에게 '나라 전체를 직접 통치'하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예수는 '신에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였으니 이는 곧 신의 진리대로만 살 것이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요, 석가모니가 '물욕을 따르는 자 물욕에 결박될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그 결박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진리, 곧 법을 취했다는 점에서 똑같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돌에 부딪혀 죽게 하려 한 것이나 데바닷타가 높은 산에서 돌을 던져 그 돌에 맞아 석가모니가 죽게 하려고 한 점이나 '돌'로 해치려고 한 점에서는 그 발상이 같다.
[①음식유혹(밥으로만 살지 않는다)→②세상권력 유혹(법과 신)→③돌로 죽이려하다.] 이 3단계 줄기와 세부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⑥물위를 걷다
⑥물위를 걷다
|
불교원전
|
강 위를 걷는 석가모니, 제자가 두려워 물에 빠져가자 구해주다. (◁증일아함경 15-2, 본생경 무쌍품)
|
기독교차용
|
갈리리 호수 위를 걷는 예수, 제자가 두려워 물에 빠져가자 구해주다. (▷마태복음 14장 22~29절)
|
비고 |
간혹 불경의 붓다의 이적이 예수보다 적게 기록된 것으로 착각하거나 붓다에게는 이적이 없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러나 불경에서의 붓다의 기적은 예수의 그것에 비교가 안될 만큼 더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물위를 걷는 이적 이야기에서는 물에 빠져가는 제자를 구해주는 장면까지 똑 같을 뿐 아니라 신약의 거의 모든 기적 이야기가 불경의 기적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과 똑같은 경우가 너무 많다.
물위를 걷는 설화는 세계 도처의 신화에서 수도 없이 많이 발견되고, 불교 선가의 달마나 여러 고승, 선승들도 물위를 걸었거나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설화는 무수하다. | 물위를 걸어가는 이적(異蹟) 불경『불전(佛典)』『아함경』『본생경 무쌍품』에는 석가모니와 그 제자가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으며, 기독경『마태복음 14:22∼29』에는 예수와 그 제자(베드로)가 역시 물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고 있다. 두 제자 모두 강한 신앙심으로 물을 건넜다는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이다. 석가는 갠지스강물 위를 걸어서 건넜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건넜다.
신앙의 힘으로 잠재운 폭풍 불경『자타카(본생경)』에는 배를 타고 떠난 신자들이 바다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파선을 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깊은 신앙심으로 구원을 받는 이야기가 나오고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믿고 염하면 어떤 태풍이나 환난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완전히 불경과 똑같이 기독경『마가복음 4:36∼41』『누가복음 8:22∼25』『마태복음 14:29∼33』에도 예수가 바다에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잠재우는 대목이 있다. 불경과 성경 모두 한결같이 믿음이 강하면 거센 파도와 폭풍도 잠재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놀랍게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이다. '빼도박도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쯤 되면 신약의 불경 차용설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된듯 하다. ⑦우물가의 여인
⑦우물가의 여인
|
불교원전
|
아난존자가 우물가에서 파카티(Pakati;기독교의 사마리아)라는 처녀 (상종을 기피하는 천민: Matana caste)에게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자, 그녀는 자신이 천민의 딸이므로 귀하신 분께 물을 떠 바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난다는 자신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빈부귀천 상하의 차별을 하지 않으니 물을 달라고 한다. (◁마등가녀경:The Sutra of The Matanga Girl))
|
기독교차용
|
예수가 우물가에 앉아 유대인들이 천하게 여겨 상종을 하지 않던 민족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자, 사마리아 여자임을 들어 물을 떠주기를 사양한다. 예수는 자신은 사람을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4장 3~5절)
|
비고 |
이야기의 등장인물, 등장인물의 신분, 접근법, 대화내용, 물대접의 거절, 메시지의 주제까지 완벽히 똑같을 뿐 아니라 토씨까지 비슷하게 차용하고 있다. | 마아탕가와 사마리아 여인 불경『마등가녀경』에서 아난다가 우물가에서 여자를 만나 물을 청한 것이나 성경『요한복음 4:3∼15』예수가 우물가에 앉아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청한 것이나 그 장소 설정과 주고받는 이야기까지도 똑같다. 마아탕가 처녀가 출가사문과는 감히 상종도 할 수 없는 천민의 딸임을 이유로 내세워 물을 떠바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나 사마리아 여자가 유대인과는 상종치 못하는 사마리아 여자임을 내세워 물을 떠바치기를 사양하는 것이나 똑같다. 또한 아난다가 출가 사문이므로 나의 마음에는 빈부귀천 상하의 차별이 없으니 물을 달라고 한 것이나,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네게 물을 달라고 한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 대답한 것은 예수도 사람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나중에 석가모니가 직접 마아탕가 처녀를 만나 설법을 통해 전법에 성공한 점과, 예수가 이 우물의 물을 매체로 해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는 데 성공한 점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같은 점은 석가모니가 '애욕의 갈증으로 인하여 모든 생명은 영원히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욕심을 멀리하여 애욕의 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난다'고 설법한 내용이나, 예수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설교한 내용은 똑같이 '영원히 잘 사는 길'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경의 마아탕가 이야기와 성경의 사마리아여자 이야기는 지명과 인명만 다를 뿐 설정된 무대와 등장인물,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 가르침까지도 완벽히 똑같다.
⑧빵과 물고기 기적(오병이어의 기적)
⑧빵과 물고기의 기적(일명 '오병이어'의 기적)
|
불교원전
|
유마거사가 음식이 없는 상황에서 기적으로 신도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았다. (◁유마경 향적불품) 난다가 신도 모두를 떡 한 덩어리로 먹였으니 떡은 여전히 남았다. (◁증일아함경 20, 28)
|
기독교차용
|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군중을 먹이고도 남았다. (▷마태복음 14장 17~21절)
|
비고 |
말씀을 듣는 군중이 배가 고파서 떡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아 거두었다는 내용이다. 다른 불경에는 물고기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완벽히 같다고 볼 수 있다. | 오,칠병이어의 기적 이야기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야기는 불경『본생경 길상초품』『본생경 바수나품』 『아함경 카필라성의 비극』『유마경 향적불품』등과 기독경『마가복음 6:35∼45』의 '오병이어(五餠二魚)' 『마가복음 8:1∼9』 『마태복음 15:32∼39』의 '칠병이어(七餠二魚)'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불경의 유마힐과 성경의 예수가 똑같이 수많은 사람을 앉혀놓고 없던 음식을 순식간에 만들어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킨 사실이 완벽히 똑같다는 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을 듣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 먹을 것이 없는 상황, 기적을 일으키는 유마힐과 예수, 배불리 먹는 신자들, 그러고도 남는 여유있는 음식, 이 얼마나 똑같은 구성과 전개이며, 이 얼마나 똑같은 공식에 의해 이야기가 엮어져 있는가?
⑨돌아온 탕아 비유
⑨돌아온 탕자의 비유
|
불교원전
|
‘장자 궁자 이야기’에서 ‘궁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참된 뜻을 모른 채 미혹에 빠진 중생들로 비유되고, 마침내 불성을 찾아 돌아온 가난한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전 재산을 넘겨주는 ‘장자’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한다. (◁법화경 신해품)
|
기독교차용
|
‘돌아온 탕자’는 곧 이 세상의 죄 지은 사람들로 비유되고, 죄를 용서해준 탕자의 아버지는 곧 신과 신의 아들인 예수를 상징한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
|
비고 |
'부모님의 은덕을 모르고 방황하여 집을 나간 아들, 산전수전 겪으며 깨닫고 집에 돌아온 아들, 무조건 용서하고, 재산도 넘겨주는 아버지, 대목까지 포괄적으로 보면 사건 전개 하나하나, 그리고 그 의미까지 같다.
| 장자 궁자와 돌아온 탕자 기독경『누가복음 15:11∼32』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한 번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반성하고 돌아오면 용서해주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한 '장자 궁자(長子 窮子)'의 이야기가 불경『법화경 신해품』에 고스란히 거의 그대로 실려 있는 데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경에서 '돌아온 탕자'는 곧 이 세상의 죄지은 사람들로 비유되고 있고 죄를 용서해준 탕자의 아버지는 곧 유대신과 유대신 야훼의 아들인 예수를 상징하고 있으며, 불경의 '장자 궁자'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던 부처님의 제자들로 비유되고 돌아온 가난한 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고 보배까지 안겨주는 '장자'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상징되고 있다. '돌아온 탕자'나 '장자 궁자'의 이야기는 모두 '죄있는 자','허물있는 자'도 반성하고 믿고 따르면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을 똑같이 강조하고 있다. ⑩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
⑩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
|
불교원전
|
불경 ‘현우경비녀난타품’, ‘본생경’, ‘잡보장경’의 가난한 처녀 난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헌금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액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성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내용이다. (◁법화경 신해품)
|
기독교차용
|
가난한 처녀 난타의 헌금 이야기는 윤색이나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신약성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로 차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
|
비고 |
엘레인 페이절스, 루돌프 사이델...등 많은 학자들이 모두 '과부와 헌금 이야기' ...등 신약이 불경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에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가난한 여인의 공양과 헌금 불경『근본설일체유부』『현우경빈녀난타품』『본생경』『잡보장경』의 '가난한 여자걸인'이야기와 성경 『마가복음 12:41∼44』의 '가난한 과부'이야기는 헌금에 하는 데 있어서 그 액수의 많음을 칭찬하지 않고 액수가 적더라도 그 정성과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은 누가 보아도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는 과부의 두 냥 헌금이 정말 값지다고 했다. 예수는 과부의 한 냥 헌금이 거룩하다고 했다. ⑪간음한 여자
⑪간음한 여자 이야기
|
불교원전
|
귀중품을 훔쳐 달아난 창녀를 잡아 돌로 치려 ?아 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급하겠느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부끄러워 대답도 못하다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불전(佛典))
|
기독교차용
|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자신의 죄도 돌아보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보고는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요한복음 8:1~11 )
|
비고 |
자신의 죄는 모르고 남 정죄에만 여념이 없는 사람들, 너도 죄가 없거든 정죄하라는 말에 사람들이 부끄러워했다는 내용이다. 기독교를 만들던 유대인들이 불경의 이 이야기도 문학적 세부분까지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 네 자신을 뒤돌아 보라 기독경『요한복음 8:1∼11』에서 예수는 간음한 여자(창녀)를 잡아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였다. 이 는 '너 자신부터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되돌아 보라'는 이야기이고 여자를 잡아왔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도망쳐 나간 것이다. 불경『불전(佛典)』에도 석가모니가 물건을 훔쳐 도망친 창녀를 잡으려고 찾아다니던 젊은이들에게 '죄지은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들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급하냐'고 힐문하자 젊은이들은 한동안 아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다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급하다'고 대답하고는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여자와 값진 물건을 훔쳐 도망쳐버린 창녀, 그리고 그 여자를 벌주기 위해 끌고온 사람들과 도망친 창녀를 붙잡기 위해 찾아다니던 젊은이들, 그들에게 너 자신부터 되돌아보라고 요구한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⑫산상수훈
⑫산상수훈
|
불교원전
|
귀석가모니가 영취산상에서 대중들에게 설법한 산상수훈은 신약의 그것과 그 내용이 거의 같다. 그 유명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가 이에 해당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법화경 분별공덕품...등)
|
기독교차용
|
갈리리산에서 예수가 설교했다는 장문의 설교는 석가모니의 산상수훈과 그 내용이 거의 같다. (▷마태복음 5-7장 )
|
비고 |
산상수훈은 유대교 토라, 탈무드, 타냑의 여러 격언을 모아 가르치던 유대인 랍비들의 요약집의 일부라고 소개한 바 있는데, 신약저자는 이런 불교적 자비와 사랑이란 요소를 유대교적인 여러 파편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 ⑬제자의 배반
⑬제자의 배신
|
불교원전
|
석가모니는 제자 데바다타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가 석가모니를 해치기 이해 난폭한 코끼리를 보내 위험에 처하게 하자 5백이나 되는 제자들 모두 도망쳤다. (◁아함경)
|
기독교차용
|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신하고 팔아 넘길 줄 알고 있었다. 예수가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제자들과 따르는자는 모두 다 도망쳤다. (▷누가, 마태복음 )
|
비고 |
산제자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알았다. 제자들 모두 도망쳤다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고대 사회에서 스승은 제자를 둘 때 보통 주요 제자 12을 두는 것이 철칙처럼 되어 있었다. 고대의 여러 신화 속 스승이나 종교의 지도자가 모두 제자 12을 둔다.
| 한 명의 배신과 도망친 제자들 이야기 불경『아함경』과 기독경『누가복음 22:20∼21』『마태복음 26:20∼25』『마태복음 26:31∼35』 『마태복음 26:45∼56』을 보면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기를 배반하고 팔아넘길 줄 미리 알고 있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 데바달타가 자기를 배반할 것을 미리 알고 제자들에게 얘기했던 점과 같다. 그리고 예수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자 그의 모든 제자들이 모조리 다 도망갔듯이 석가모니의 제자들도 그의 스승이 코끼리의 위해(危害)에 처했을 때 5백 명이 모두 도망쳤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경고한 것처럼 석가모니는 '악은 악으로 망하는 법'이라고 경고한 점에서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상 사진과 설명, 민희식 선생 지음 '법화경과 신약성서124~128p을 인용하였음' ◈아래 부터는 사진 자료가 없다. 백방으로 노력하면 거의 모든 사진이나 조각, 부조...등 자료를 구할 수 있겠으나 금전과 시간적 노력을 기우릴 여가가 없어 경전 비교 자료만 실게 되었음을 알린다.
(14)고향에서의 푸대접
불교원전
|
석가모니가 부처님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자 처음에 석가족들은 석가모니를 부처님으로 얼른 인정하려 들지 않은 채 '저 싯달타 태자는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조카뻘이다, 손자뻘이다,동생뻘이다'하면서 경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석가모니의 신통력에 친족들이 모두 인정하고 경배하게 된다. [ 불경『본생경』]
|
기독교차용
|
마찬가지로 예수가 고향에 돌아 간 후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려들지 않고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업신여기자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하고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셨다고 한다. 『누가복음 4:20∼24』『마태복음 13:53∼58』]
|
비고 |
석가모니가 고향에 가서 법을 전하려 하자 고향 사람들이 '저 녀석은 어려서 누구 아들, 누구 형제, 내 손자뻘 ,동생뻘 운운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석가의 설법과 신통력을 확인 하고는 경배했다고 하는데, 예수의 고향 방문 에피소드와 거의 같다. 세상사 어디나 있을 법한 이야기 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여러 유사 에피소드와 종합하면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15)평등한 사랑
불교원전
|
비는 모든 초목에 골고루 내리듯이 부처의 자비와 은혜는 어떤 차별도 없이 골고루 모든 중생들에게 내린다. 『법화경 약초유품』, 『법화경 신해품』 |
기독교차용
|
신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린다. 『마태복음 5:45』 |
비고 |
불경과 기독경을 비교해 보면 석가모니의 길고 긴 설법 내용 가운데서 그 핵심부분만을 간단히 추려내어 다이제스트처럼 축약시켜 놓은 대목이 기독경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불경『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기독경『마태복음 5:39∼47』의 경우도 이와같은 예(例)라 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은 산상수훈 부분인데 법화경의 『법화경 약초유품』『법화경 신해품』과 거의 같다. 또 '악인과 선인에게 해와 빛을 고루 비춘다'는 속담은 희랍과 고대 여러 철인들의 한결같은 금언이다.
구약경 전도서(Ecclesiastes) 9:2 ,시편 97:11, 특히 민수기 6:25은 위 예수가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해와 비 격언'과 거의 같다. 법화경 약초유품에는 해와 비의 골고루 내림과 부처의 자비 대목이 나온다.
|
(16)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
불교원전
|
'착한 인(因)의 나무를 심지 않고 어찌 좋은 열매(果報)를 얻을 수 있겠느냐' '선한 나무를 심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요, 악한 나무를 심은 자 죄를 받아 업을 당하리라.' 『방등경』,『법구경』
|
기독교차용
|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태복음 7:15∼20』『마태복음 12:33∼35』『누가복음 6:43∼45』
|
비고 |
석가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정리하면 좋은 나무 좋은 열매로 귀결된다. |
(17)카아샤파와 요한 선지자
불교원전
|
부처 출현 전에 마하가섭(카이파샤)은 이미 많은 제자를 둔 큰 영향력을 갖은 선명지자로 등장한다. 부처가 나타나자 마하가섭은 "저분이 바로 부처시다. 나는 그의 길을 닦는 자일 뿐이었다. 보라 저분을 섬겨라."고 석가모니의 증인으로 등장한다.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새가 날아들어 축하했다고 한다. 『과거현재인과경』『우리말 팔만대장경』
|
기독교차용
|
신약경은 불경과 거의 흡사하다. 예수 이전에 요한이 이미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사람들 사이에 선지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예수가 나타나자 저가 우리가 기다리던 자(메시아)다. 나는 그의 미리 보냄받은 자이다. 세례를 주자 하늘에서 음성이 나고 비둘기가 임했다고 한다. 『마가복음 1:4∼10』『마태복음 3:11∼14』
|
비고 |
미리 준비된 선지자,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나는 성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는 선언, 장소와 이름만 다를 뿐 전개되는 이야기의 구성은 한치도 다를 바가 없다. 결코 이 부분의 일치점은 우연일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
(18)말법시대와 말세
불교원전
|
부처께서 입멸하고 2천년 후, 말법시대가 온다. 이 시대에는 계.정.학의 3학의 기본이 무너지고 미혹하는 자가 많으며 곳곳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견이 판치는 시대가 온다. 끝까지 믿고수행하는 자 구원을 얻는다. 『아함경』
|
기독교차용
|
미혹하는 자(거짓 선지자)가 일어나고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고 싸우는 시대가 온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자는 구원을 받는다. 『마가복음 13:4∼13』『마태복음 24:6∼22』
|
비고 |
이 부분은 아연실색할 만큼 동일하다. 불경과 마태복음의 이 부분을 적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사람들이 미혹하여 서로 미워하고 서로 잡아 죽이며, 둘째:기근과 재앙이,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며, 셋째: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형제가 형제를 잡아 죽이게 되고, 넷째: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활과 칼로 죽이려 싸우게 되고. 다섯째:불법이 횡행하게 되며, 여섯째:그러나 서로 죽이는 것을 싫어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깨달은 자들(불경)이나 신의 선택을 받은 자(신약)는 다시 구원을 받아 살 수가 있다
|
(19)거짓선지자의 출현
불교원전
|
처처 곳곳에서 거짓 부처가 나타날 것이다. 끝까지 제대로 견디는 자는 반드시 성불하게 될 것이다. 『율장律裝』 |
기독교차용
|
처처 곳곳에서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마가 13:21~23 마태: 24:3~14』 |
비고 |
어느 성인이나 이 정도 비슷한 말은 할 수 있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토씨까지 같은 이 부분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
(20)유아학살과 도피
불교원전
|
미륵(구세주)의 탄생을 두려워한 왕이 없애 버리고자 하였으나 도피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현우경賢愚經 波婆離品』 |
기독교차용
|
메시아(구세주)의 탄생을 두려워한 헤롯왕의 유아학살을 피해 예수 일가는 이집트로 피신했다. 『마태복음 2:12~21』
|
비고 |
이 부분은 불경과 그 대체가 같다.
마태경 2장의 내용을 보면 완전히 어린이용 동화책의 황당한 이야기 이하다. 꿈에 헤롯대왕이 아이를 죽이려 한다고 알려준다.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다시 꿈에 왕이 죽었으니 돌아오라고 한다.
유머러스 한 부분은 18절의 [라마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다.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진 것이다.]라는 아무 관련없는 엉뚱한 구약(렘 31:15-17) 인용이다.
마태경을 쓴 유대인은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예수숭배집단을 몰아 세우며 죽이려는 급박한 상황에서 유대인들를 설득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어거지 인용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교도들의 살해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구실이 절실했던 것이다.
|
(21)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
불교원전
|
재물이나 착한 일을 베풀 때, 그 재물이나 도움을 받는 특정한 사람만을 위해서 하지 말라. 일체의 모든 중생이 다 구제받기를 원한다. 부처에게 보시하지 말고 중생에게 보시하면 그것이 곧 부처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 『제법집요경 보시품』『방등경』『잡보장경』
|
기독교차용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35∼46』
|
비고 |
마태경 25장에 [선지자를 잘 대접한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천당)를 상속받고(34) 막대접을 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이다.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라는 부분이 있다.
불경의 온화한 가르침과는 같은 내용을 놓고도 듣는 사람에게 극렬한 반감을 일으키고 읽는 자에게는 살기가 가득한 배타적 심성을 심어준다. 이런 살기등등한 배타심리는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경전 곳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잘 대덥한 자는 상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영원한 지옥불에 넣어 버린다고 한다. 아마 이런 극단적인 언행을 일삼는 이유는 유대황야의 척박한 기후나 풍토나 주위 국제 관계가 아우러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심판관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서 유입된 이유이기도 하다.
|
(22)'내가 법(길)이요'와 '내가 진리이다' 생명이다
불교원전
|
'나는 곧 법이요 길이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자다.' '나의 가르침대로 법을 등불 삼고 쉬지 말고 수행하라.' 『열반경』『아함경』
|
기독교차용
|
'나를 본 자가 곧 신를 본 자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다.' 『요한복음 14:5∼12』『누가복음 2:30∼32』
|
비고 |
'내가 곧 길이요 법이다.'라는 말에서 법(해탈의 길,진리,생명)의 인식은 당시 인도 북부의 철학과 사상계의 유행어였다.
또 신약경의 '내가 곧 진리다. 생명이다' 라는 말은 당시 희랍 철학이 압도하던 팍스로마나 지역의 화두였고 조로아스터교 범람하던 당대의 유행어였다. 너도 나도 '내가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쳐대고 다니는 철인이 수두룩 했는데 예수 숭배자들도 이렇게 주장하고 다닌 것으로 보면 된다.
요새 어느 사설 학원이나 우리 학원 강사의 강의가 최고라고 떠들어 대는 광고와 같다. |
(23)깨우침의 경지와 신의 나라
불교원전
|
'극락이 따로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다. 극락은 바로 네 마음 속에 있다' (心卽是佛) 『원각경 보안보살장』
|
기독교차용
|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7:20∼21』
|
비고 |
불교는 마음에 대해서 8만권으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마음에 관한한 기독경이 겨우 몇줄을 썼다고 한다면 불경은 8만경으로 풀었다고 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영지주의적으로 천당이란 것이 죽어서 어디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마음이 천당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실상 유대교적이 아니다.
유대교를 동양학적이거나 영지주의적으로 풀어서 구약의 모든 내용이 불교나 도교적 상징의미로 풀어 버린다면 그것은 망령이 난 것이라고 볼 일이다.
따라서 신약경의 바로 저 부분, 예수가 말했다는 '천국이 죽어서 가는 여기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너의 마음이 천국이면 그것이 천국이다'라는 색다른 삽입구는 분명 불교적 영향이 스며든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유대교의 전체 맥락에서 살펴보면 사실 충격적인 불경 삽입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
(24)진정한 보물
불교원전
|
'세속적인 재물은 참다운 보물이 아니다.' '마음 속에 지녀야 할 참다운 보물은 자비, 경건, 절제, 마음의 고요함(선정)이다'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고 도둑이 훔쳐갈 수 없는 보물을 가지고 떠나라' 『소송경(小誦經)』『잡아함경』
|
기독교차용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한다' 『마태복음 6:19∼20』『요한복음 17:14∼16』
|
비고 |
이 부분도 고래의 격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부분이다. 그러나 참다운 보물은 물질이 아니라 수행 또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쌓아두면 도둑이 훔쳐갈 수 없다는 논리는 앞서서 살펴본 여러 일치점과 종합적으로 통찰하여 우연한 고래이 격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
(25)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
불교원전
|
'진정 보시.수행코자 한다면 재물을 버리고 법을 따르라.' '재물에 집착하면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 '해탈과 재물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방등경』『법사경』
|
기독교차용
|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 '부자(재물에 집착하는 자)는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신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마가복음 10:21∼30』『누가복음 18:22∼30』
|
비고 |
이 가르침도 고래의 일반적 격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래의 일반적 격어이라면 [재물을 버리고 따르라 ▷재물에 집착하면 뜻을 이룰 수 없다. ▷재물과 뜻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라는 도식까지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텍스트가 있고 이를 자기식 문화에 맡게 변형해서 옮겨 놓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26)의식주를 걱정 말라
불교원전
|
'먹고, 입고, 잠자는 걱정을 하지 말라. 다섯 가지 욕심에서 벗어나야 해탈하리라.' 『슛타니파아타 여덟 편의 시(詩)』
|
기독교차용
|
'먹고, 입고, 마시는 걱정을 하지 말고 신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누가복음 12:22∼23』『마태복음 6:24∼33』
|
비고 |
의식주 걱정에 마음을 전부 빼앗기면 해탈이나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말이다.
|
(27)석가모니, 예수의 변모
불교원전
|
'부처의 온 몸의 피부가 밝게 빛나고 옷이 하얗게 변모되었다.' (장아함경 16)
|
기독교차용
|
'저희 앞에서 변형되어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심히 희어졌다.' (마가복음 9:2~13, 마태복음 17:1~13, 누가복음 9:27~36)
|
비고 |
석가모니나 예수가 변모되었다는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부처는 '얼굴과 피부가 밝게 광채가 나고 옷이 눈부시게 희여졌다'고 했는데 정리하면 얼굴과 온 몸이 피부, 그리고 입고 있던 옷까지 하얗게 빛났다고 했다.
마태경에 보면 '기도하러 제자 베드로, 요한,야고보 3사람만 데리고 산에 갔는데 그들 앞에서 변형되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마가경에서는 '옷만 광채가 나며 드라이 크리닝한 흰옷보다 희어졌다.'
요한경에서는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라고 짧막하게 언급한다.
관련 주제 앞뒤에 용모에 대한 다른 언급은 없다가 갑자기 앞뒤의 더 이상의 용모에 대한 말이 없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구름속에서 대화했다는 아주 저급한 신화적 몽상설이 이어져 있다. 이부분은 구약의 모세와 예수를 연결하고 싶은 저자의 충동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당시 그만큼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르지 않다는 강변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몸이 변형된 부처와 예수를 묘사하는 세부서술이 너무도 같다는 점이다. 피부와 얼굴이 하얗게, 옷이 하얗게 이 두가지인데 하얗다는 강조점 마저 유사하다.
이 정도에 이르르면 기독교의 불교 원전 차용설이 대단히 설득력을 얻게 된다.
|
(28)영원히 함께 하리라
불교원전
|
'부처는 생사에서 벗어난 분이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헤아릴 수도 없는 아득한 미래까지도 그 수명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항상 머무르며 항상 존재하고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깨우쳐 주고 고해에서 건져내 주고 있으며 영원히 살아 있으며 중생들의 끼우침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잠시 이 세상에 오셨을 뿐이다. 부처는 무량수(無量壽),즉 영원하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
기독교차용
|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누가 24:13~53, 마가 16:1~20, 마태 28:5~20)
|
비고 |
이 부분도 눈여겨 봐야한다.
의례히 성자를 신격화 하면서 영원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이다. 대부분은 후세의 그의 추종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영구히 후세에 남기거나 자신들의 종단을 후세에 물려주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서 숭앙자의 영원성 논리를 첨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영원성에 대한 논리가 동일하기는 힘든 일이다. 부처나 예수의 영원성의 논리는 영원히 함께 숭배자들과 함께 있다는 논리다. 부처는 영원히 숭앙자들과 함께 하며 깨우쳐 주고 예수도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면서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논리다.
두 논리는 완전히 같은 것이다. |
(29)하늘에서 내려온 두 성자
불교원전
|
'하늘나라 도솔천에서 머물다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신령하게 세상에 내려왔다.' [불경 『자타카(본생경)멀지 않은 인연 이야기』『불소행찬 탄생품』]
|
기독교차용
|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신의 아들로 하늘에 있다가 신령으로 잉태되어 처녀몸을 빌어 땅으로 내려왔다.' 『신약 공관』 |
비고 |
종교적 성자 뿐 아니라 전근대 왕들도 하나같이 이런 신화적인 정통성을 조작해서 백성에게 믿도록 유도했다. 매우 자연스런 풍습과도 같은 것이다.
사실 왕이나 성자가 그냥 부모의 섹스를 통해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한다면 백성들에게 절대 복종과 존경은 커녕 조롱거리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세계 역사에서 공통적인 감천생자(感天生子)설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속아줄 만한 가벼운 구라는 뒤로하고 인류를 제도.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왔다는 논리는 대단히 박애적인 사상이 필요로 한다.
잉태에서 활동과 죽음까지 여러 코드를 비교해 보면 이 부분도 기독교 불경 원전 차용설의 일부가 될 것이다.
|
(30)죄짓기보다는 육신을 절단하라
불교원전
|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타는 불을 껴안는 게 나으며, 살이 찢기고 살가죽이 벗겨지고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꺾어지고, 이글이글 불에 단 쇳덩이를 삼키고, 불에 단 철침상에 눕는 편이 낫다.' 『아함경』
|
기독교차용
|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 죄짓게 하거든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거든 발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거든 눈을 빼버리라' 『마가복음 9:42∼47』
|
비고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 하면 함무라비 법이 연상된다.
고대 어느 부족국가에게나 이런 신체 응징은 당연한 법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 세 종교의 경전에는 위와 같이 이런 신체 부응 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불경은 '죄 짓기 보다는 ...하는 것이 낫다'고 비유적으로 경계하는 측면이 강한 반면, 신약경은 고대 중동의 풍토 그대로 눈에는 눈, 손에는 손으로 응징하는 체계가 반영된 것이다.
|
(31)쭉정이와 가라지
불교원전
|
'가르침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 짚이나 쭉정이가 되지 말고 알곡이 되라' 『아함경』
|
기독교차용
|
'잘 믿지 못하면 쭉정이와 가라지가 돼 불에 태움을 당하리라' 『마태복음 3:11∼12』『마태복음 13:24∼30』
|
비고 |
짚과 쭉정이, 쭉정이와 가라지... 사실상은 일반적 격언에서 벗어나 비유라는 기계속의 정밀한 부속까지 일차하는 경우라고 볼 것이다. |
(32)두벌 옷 입지 말고, 금,은,동 받지말라
불교원전
|
'두 벌 옷이나 밥그릇마저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 '법을 전파하고 나서 금이나 은이나 돈을 받지 말라.' '한 번 먹고 자기로 한 집에서 한 번 이상 더 묵지 말라.' '부부의 눈치가 다른 줄 알면서 억지로 앉아 있지 말라.' 『율장(프리아티모옥샤)』
|
기독교차용
|
'두 벌 옷을 입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동을 받지 말라.' 『마태복음 10:7∼15』『마가복음 6:7∼13』『누가복음 9:1∼6』
|
비고 |
법을 전하되, 부처의 가르침은 '짐 많이 갖지 말고 무소유 정신으로 걸식해라. 절대 민폐를 끼치지 말라. 눈치가 보이면 절대 앉아 있지 말라.'이다.
신약경에도 마태. 마가. 누가에 공관구가 나란히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태, 마가, 누가경의 기록이 똑같은 내용을 세부에서는 엉터리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마태경 10:10절에는 '지팡이는 가지지 말라' 했는데, 마가 6:8에는 '꼭 지팡이만은 지녀라'고 되어 있다.
마태경과 누가경은 마가복음 택스트를 옆에 두고 참고하거나 베낀 편지다. 그런데 이런데서 착오가 생긴 것은 아마도 저자간의 여행도구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이 달랐거나 기록의 오류가 분명하다.
그런데 기독교의 유대인적 저열함이 그대로 베어나오는 결정적인 취약구가 있다. 마태경 10:14에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라는 구절이다. '전도를 받지 않는 집은 욕을 하고 침뱉고 신발을 털면서 지옥 저주로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 다음 15절에 그 구절이 있다.
15절에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물론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 격렬한 저주를 약속하는 종교임을 가만하면 될 것이다.
고대의 중동 사회의 극렬한 이원론적 양상을 가만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나 현대 다원주의, 인권존앙의 시대에 이런 성격의 종교는 인류가 감내하기 힘들다.
|
(33)악은 마음에서 나와 몸을 망친다
불교원전
|
'악(惡)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다시 사람의 몸을 망친다' '악한 마음은 살인,음란,도둑질,탐욕,속임수,성냄...등이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법구경』
|
기독교차용
|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가복음 7:20∼23』
|
비고 |
'더러운 것은 밖의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악한 생각이다.'라는 가르침에서 일치한다.
|
(34)행하라, 아니면 떠나라
불교원전
|
'제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고 외워도 실천하지 않으면 성인의 문에 들어갈 수 없다' 『법구경』
|
기독교차용
|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간다.' 『마태복음 7:21∼27』
|
비고 |
똑 같이 실천행을 강조하고 있다. |
(35)원수도 사랑하라
불교원전
|
'부모를 죽인 원수도 갚지 말라.' '마주 때리거나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라' '부모와 원수를 대할 때에도 평등하고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라' 『열반경 범행품』『아함경』
|
기독교차용
|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35』『마태복음 5:38∼46』
|
비고 |
원수를 사랑하라는 직접 언급은 신약경에서 한번씩 산상수훈에서 나온다. 불경은 원수에 대한 용서와 자비에 대해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있다.
|
(36)살인마와 길 잃은 양
불교원전
|
'99명을 살해한 아힝사카가 바른 마음을 일이켜 구원받았다.' 『아함경』
|
기독교차용
|
'목양치기 주인은 99마리의 양은 두고 길잃은 한 마리의 양 한 마리를 구한다.' 『누가복음 15:3∼10』『마태복음 18:12∼16』
|
비고 |
99명을 살해한 자, 99마리의 양으로 비유의 틀은 비슷하다. |
(37)경전비방과 성령모독
불교원전
|
'경전을 비방하거나 가르침에 의혹을 품고 믿는 자를 미워하고 천대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한 겁 동안을 부처님을 항상 훼방하고 꾸짖더라도 그 죄는 오히려 가벼우려니와 어떤 사람이 한마디 나쁜 말로써 집에 있는 이나 집을 떠난 이가 법화경을 읽고 외우는 것을 비방하고 방해한다면 그 죄는 매우 무겁다." 『법화경 비유품』『법화경 법사품』
|
기독교차용
|
'예수의 설교를 제대로 믿고 따르지 않은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으며 지옥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는 곧 신의 용서를 못받고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예수가 전도를 위해 파송한 제자들을 박대한 자들도 폐망하게 되리라.'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2:4∼10』『마태복음 23:23∼29』
|
비고 |
정리하면 '가르침이나 경전,, 화신(성령)을 비방하지 말라'는 경고로 같다. |
(38)신앙과 씨뿌림의 비유
불교원전
|
'부처는 밭 갈고 씨 뿌리는 농부와 같다.' '가르침을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돌과 나무가 무성한 황무지에 뿌려진 씨앗과 같다.' '씨를 뿌려서 얻는 수확은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이니 곧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슛타니파아타』『아함경』『미린다 왕문경 6장』
|
기독교차용
|
'인자는 씨뿌리는 자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가시떨기 밭에 뿌려진 씨앗' 처럼 가르침을 소화하는 이는 각기 다르다.' '씨뿌림의 비유는 추수 때인 종말의 때에 천사들의 구원을 얻게 하는 데 있다. ' 『마가복음 3:2∼9』『마가복음 3:14∼20』『마태복음 13:31∼32』『마태복음 13:36∼40』
|
비고 |
가르침을 받아 깨닫는자의 수준을 고시하고 있는데 비유의 세부까지 완벽히 일치하고 있다. |
(39)이 세상의 빛
불교원전
|
'부처는 빛이요, 횃불이요, 광명이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밝게 비추도록 등경 위에 둔다.' 『슛타니파아타』『법화경 안락행품』『법화경 서품』
|
기독교차용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 『누가복음 2:30∼32』『누가복음 11:33∼36』『마태복음 5:14∼16』 『요한복음 1:4∼11』『요한복음 8:12』
|
비고 |
속칭 등불의 비유라는 것인데, 불교와 기독교의 비유가 유사하다는 여러 항목 중 유명한 부분이다. |
(40)비판하지 말라
불교원전
|
'남의 잘못을 보기는 쉽지만 자기의 잘못은 보기 어렵다.' '남의 잘못은 등겨나 쭉정이처럼 까불어 날리지만 자기 잘못은 교활한 도박꾼이 제게 불리한 주사위 눈을 숨기듯 한다.' '남 듣기 싫은 성낸 말 하지 말라. 남도 그렇게 네게 답할 것이다.' 『사십이장경』『법구경』
|
기독교차용
|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7:1∼5』
|
비고 |
위 가르침은 두가지 핵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남의 잘못은 잘 보이고 자신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하는 법이다. 둘째는 비판하면 남도 너를 비판한다. 이 두가지인데 순서와 논리가 같다. |
(41)신통술과 기적
불교원전
|
'독룡(毒龍)을 잡아 밥그릇 속에 담았다.' '허공 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용왕의 세계에 갔다.' '많은 병자를 고쳤다.' '전염병을 물리쳤다.' '홍수를 물리쳤다.' '물위를 걸었다.' '하늘 세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했다.' '부처의 제자들도 하늘 나라 향적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했다.' '하늘나라 음식을 얻어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했다.' '하늘나라의 왕 제석천왕(창조신)으로 하여금 하늘밥, 하늘옷을 내리게도 했다.' '부처나 그의 제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지옥중생을 구제했다.' '부처와 그 제자들은 형용할 수 없이 먼 거리도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 했다.' '여러 신통자재술을 부렸다.' 『본생경』,『불전』 |
기독교차용
|
'물을 포도주로 둔갑시켰다.' '장님을 눈뜨게 했다.' '죽은 자를 살렸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 '귀신을 쫓아냈다.' '떡 일곱 개와 생선 두 마리로 4천명을 배불리 먹였다.' '제자들도 '병자를 고치면서' 복음을 펴고 다녔다.' 『4복음서-공관』 |
비고 |
기독경 속의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이집트. 그리스,고대 중동의 여러 신들의 기적 이야기 거의 그대로이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은 디오니소스...등의 흔한 이야기였고, 물위를 걷는 이야기도 포세이돈 등 여러 신들의 신화에 단골 메뉴였다.
불경에는 특이한 기적이 많은데 이 불교의 기적 이야기는 중동. 지중해 신화와 다른 것들이 많다. 바로 이 불경 속의 특이한 기적 이야기가 기독경에 거의 그대로 들어가 있다.
예를 들면 특이한 점으로 떡과 물고기를 뻥튀기해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는 기적 이야기는 불경에 그대로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 기독경의 기적 이야기는 고대 여러 신화나 불경의 영향을 거의 그대로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
(42)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
불교원전
|
'괴로움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은 병든 환자다.' '병든 자에게만 의사와 약이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와 약이 필요치 않다.' 『방등경』『유마경』『미린다 왕문경』
|
기독교차용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누가복음 5:30∼32』『마가복음 2:16∼17』
|
비고 |
'병든 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라는 말은 불경에 아주 자주 나온다. 병든 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은 평범한 말이긴 하다. 그 표현을 잘 살펴보면 내용을 전달하는 단어의 나열이 대단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
(43)서로 돕고 존중하라
불교원전
|
'머리라고 해서 귀중하고 꼬리라고 해서 하찮은 것이 아니며,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자기만 제일이라고 주장하고 우기다가는 뱀의 몸통은 물론 머리와 꼬리 전체가 다 죽는다.' 『백유경(百喩經)』
|
기독교차용
|
'만일 한 지체(肢體)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는다' 『고린도전서 12:14∼31』
|
비고 |
부처의 가르침은 바울 시대에 널리 그리스에 의해 일반화된 불교적 지혜가 자연스럽게 녹아 들었다고 볼 수 있다. |
(44)부활
불교원전
|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경우는 이러하다.' '향품을 준비해 무덤에 가면 죽은 자가 일어난다.' ....등 나아가세나 존자: '향이나 화환이나 의복 중 한 가지를 탑, 묘에 바치면 죽은 자를 묻은 탑이나 묘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미린다 왕문경』『불전』
|
기독교차용
|
'막달라 마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아 갔다. 무덤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가복음 16:1∼6』『누가복음 24:1∼6』『마태복음 28:1∼4』『요한복음 20:1∼14』
|
비고 |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불경에는 부활의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있다. 마가, 누가, 마태, 요한경에 기록된 부활의 공통 부분을 정리하면 불경의 경우의 수와 그대로 일치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품을 들고 가는 순서서 부터 같다. |
(45)12제자의 파송
불교원전
|
석가는 12제자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파견했다.
|
기독교차용
|
예수는 12제자를 이스라엘 전역에 파견했다.
|
비고 |
12제자는 고대의 거의 모든 신들의 공통 숫자였다. 디오니소스, 오시리스,조로아스트...등 모두 12제자를 두었고 파송했다. 제자와 12라는 숫자는 필수적인 필요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