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1~3부 차례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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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스트의 망령을 끌고 21세기로 갈 것인가 -
박정희 기념관을 건립한다고 한다. '박정희와의 화해'를 역설한 김대중 대통령이 그 사업의 명예회장을 맡았다고 한다. 이국 땅에서 유신독재 철폐를 위해 평생 동안 싸웠던 사람들이 그런 소식을 들을때 어떤 심정이 되는지는 아무도 상상치 못할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과거를 미화해 거기서 안식처를 찾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현상이다. 현재와 같은 IMF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총결집해서 "박" 정권이 이룩한 '한강의 기적'과 같은 '제2의 경제도약'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에 온 나라가 휩쓸릴 만도 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착오가 있다. 우리가 하루아침에 IMF를 맞은 근본 원인이 정치권력과 결탁한 재벌중심의 경제구조에 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 하면서도, 바로 그 재벌 경제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 박정희 정권이라는 점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하에서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은 잠 쫓는 알약을 먹어가며 미싱을 돌려야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죽어간 전태일의 외침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리며 죽어간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에게까지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노태우의 부정부패와 그들을 모방한 김현철의 작태에 진저리치면서 "박정희 시대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에는 그런 사건들이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잊고 잊는 것이다.
지난 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각 당 후보들이 앞다투어 박정희 신화를 제창하고 다닐 때 박정희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는 모 일간지에 박정희 회고담을 연재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정도도 아니고 바로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비서실장의 증언을 사실 확인도 없이 객관적 진실인 양 보도하는 언론사의 양식도 문제이려니와, '청렴결백했던 박 대통령 이야기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다는 많은 독자들의 때이른 건망증에도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렴씨의 말대로 대통령 박정희가 한여름에도 집무실에서 선풍기를 틀지 않았고, 파리채로 손수 파리를 잡았으며 구멍난 러닝 셔츠를 마다 않고 입었던 사람이라 치자. 과연 그것이 그의 진면목었는가. 그렇다면 그의 18년 통치는 간디사상과 같은 고귀한 정신철학에 입각한 철인정치 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 침실 변기에 벽돌을 집어넣어 한 방울의 물까지도 아끼려 했다는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비밀구좌를 만들어 거액의 외화를 예치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박정희 자신이 온갖 특혜를 퍼부어 육성한 재벌들에게서 뜯어 낸 돈은 대체 어디로 흘러갔는가. 아울러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된 안가에 뭇 여성들을 불러들여 방종한 생활을 일삼은 그의 행적과 '청와대 변기의 물 한 방울 아끼기'는 어떻게 비교,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의 18년 독제체지가 남긴 가장 큰 문제는 4.19 이후 한국민들이 씨 뿌리고 키워 가던 민주주의의 싹을 근원부터 잘라 버린 일이다. 그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이 나라에서는 오직 그의 말과 뜻만이 법이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학생들의 반유신 운동을 지원했다 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다 숨진 최종길 교수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그가 취조중 변소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주장했으나 시신을 끝내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만큼 최 교수에게 가해진 고문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거나 그의 죽음에 밝히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박' 정권은 또 64년 국가 전복을 음모했다 하여 41명의 지식인들을 구속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란 이름 하에 무리하게 기소하려다가 일선 담당 검사들의 사표파동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박' 정권은 이 사건 관련자들을 74년 다시 국가 전복 혐의로 잡아 넣었고, 불과 반년 후인 이듬해 4월 이들 중 8명을 전격 처형했다. 격화되고 있는 민중의 저항을 공포정치로 차단하려 한 것이었다.
75년 8월17일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가 나에게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박정희만은 안된다"고 역설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광복국 간부로 일제에 저항하던 장준하로서는 관동군 중위로 독립투사들을 잡으러 다니던 박정희가 해방 조국의 대통령으로 행세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민중의 저항을 누르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기야 박정희는 호남이라는 희생양을 동원했다. 국민 전체가 호남과 반호남으로 나뉘어 대립 갈등하게 만든 그의 분할 통치전략이 장기집권에는 주효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지역주의라는 민주주의 최대의 장벽을 이 땅에 뿌리박게 만들고 말았다.
이 같은 독재와 인권탄압에 대해 비판이 미국 조야에 빗발치자 박정희는 70년대 초부터 워싱턴 정가에 거액의 달러를 뿌리기 시작했다. 김동조 주미대사는 현직 대사의 신분임에도 의회를 돌면서 거액의 돈봉투로 미국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려다 말썽을 일으켰다. 박정희가 기용한 '대미 로비스트' 박동선 역시 로비를 한다며 의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뿌렸다가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한국으로 도망갔다. 김한조 사건 역시 미국 국회의원 매수작정의 일환이었다. 전 대한적십자사의 총재 강영훈 씨도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워싱턴에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어 미국 학계와 언론계에 친박정희 여론을 조성하려고 활동하다가 FBI로부터 강제 소환장을 받자 가족을 놔두고 혼자 손가방 하나만 들고 한국으로 도망갔다.
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국익보다는 박정희 개인 찬양과 정권 연장에 힘썼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국 정부로부터 60만 달러를 받아 자신이 챙기고는, 푼돈으로 미국 국회의원을 매수해 국회 의사록 한 귀퉁이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발언을 올리게 하고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 기록을 가져다가 박정희에게 보이고 대단한 공을 세운 양 과시한 자도 있었다.
내 인생을 바꾼 두 인물 박정희와 김대중
사실 박정희는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인물이다. 나는 6.25 전쟁 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61년부터 73년 미국에 정치망명 할 때까지 10여 년 간 워싱턴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지만 미국에 정착하려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이란 잠시 출장 나와 있는 곳에 불과할 뿐이었다. 비록 철권정치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곳이지만, 그럴수록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한국이라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가 완전히 통제도고 있었다. 나는 당시 MBC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뉴스 시간에 유엔총회 보도 말미에 슬쩍 붙여 이 사건을 언급했다. 본사로부터 바로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출국 전날 한밤중에 전화가 왔다. "김포에 내리자마자 중앙정보부로 연행될 것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한 동료가 나를 염려한 나머지 위험을 무릅쓰고 전화한 것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전화는 나로 하여금 서울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유신체제 하에서 단 한 사람의 기자라도 살아남아 박정희의 정체를 사실 그대로 보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미국에 정치망명했고, 미국 시민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순간까지 한국에 있던 나의 형제자매들이 중앙정보부의 갖은 협박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나는 나로 인해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그들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박정희라는 인물을 철천지 원수로 치부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나의 심리는 그처럼 단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아내 육영수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나에게 박정희는 자료속의 취재 대상이 아니라 만나서 악수하고 대화하고 밥 먹고 입씨를 했던 살아 숨쉬는 동시대인 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61년부터 72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그와 만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서울로 날아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무려 14간 동안 3선개헌에 대해 입씨름한 일도 있고, 육 여사의 초청으로 참석한 대통령 가족 식사 자리에도 '손잡고 일하자'고 권유하는 박정희 부부의 호의를 뿌리치기도 했다.
특히, 육영수 여사와의 만남은 '친교'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처음 육 여사가 나를 불렀을 때 나는 육 여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애정과 연민으로 발전했다. 그녀가 털어놓는 내면의 갈등과 고통의 소리를 통해 나는 인간 박정희와 그 시대의 본질에 더욱 세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박정희와 함께 나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은 또 한 사람의 인물이 김대중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와 맞서 싸우는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김대중은 한 개인이 아니었다.
70년대 내내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 재미 민주화 운동 세력들의 피켓에는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씌어 있었다. 이 짧은 문장이야말로 유신체제의 폭압성과 그것이 무너져야 할 당위성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에게 덮어씌워진 무고한 혐의들을 벗기고 그를 살려 내는 것은 필자의 70년대 최대 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김대중 부부와 나는 민주화 동지로서 깊은 우의를 맺었다.
마침내 김대중 씨는 지역연합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의 숙원이던 자리에 올랐다. 나는 지난 97년 대선 과정에서 김종필과 나란히 선 김대중 씨의 모습이 텔레비젼 화면에 비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결단코 DJP연합에 찬성할 수 없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복 형제들을 죽이는 반인륜적 방식을 통해 왕위에 오르긴 했어도 집권 기간 동안 세종시대라는 태평성대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 태종처럼, 김대중 씨가 이왕이면 재임중에 민족사에서 의미 있는 업적을 쌓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이 책에서 김대중 씨에 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것은 그가 아직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미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중심으로 박정희와 유신시대를 평가해 보는 작업은 일단 뒷날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새삼 30~40년 전의 취재수첩을 들춰가며 죽은 박정희와 씨름하게 된 것은 한국 땅에서 들려오는 '박정희 신드롬' 이라는 푸닥거리 때문이었다. 21세기를 앞두고 그리워할 것이 그리도 없어 파시스트의 망령을 불러 댄단 말인가.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 없이 화해란 빈말일 뿐이다.
박정희 권부의 언론통제로 빛을 보지 못했던 필자의 워싱턴 발 기사들을 이제 공개한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조그많고 까무잡잡한 사내가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나타나던 시절에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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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터졌을 때 나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생이었다. 막 들어간 대학을 석 달도 다니지 못한 채 학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 전쟁 중인 1951년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피난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으셨던 어머니가 나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일본에서 메이지대학 경제학부를 마친 후 와세다대학 국제법 대학원에 다니면서 당시 한국 최대의 여성지였던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1956년부터 일하기 시작했다.
1961년은 나에게는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우선 61년 1월 미국의 일간지 [존 크로니클]의 초청으로 두 달 간 미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존 크로니클]은 오랜 전통의 지방신문으로서 이승만에 대해 많이 보도했다. 그 때의 인연으로 나를 초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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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월 20일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나는 60년 11월 취임식 준비위원장인 험프리 상원의원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한국의 [여원]이라는 여성지의 도쿄지국장이다. [여원]은 미국의 [레이디스 홈 저널]과 같은 성격의 품위있는 여성 잡지다. 케네디 대통령의 역사적인 취임식 광경을 우리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고 싶다. 부디 나의 취재 신청을 허가해 주기 바란다."
편지를 보낸지 한 달 후 거짓말처럼 한 묶음의 초청장이 왔다. 취임식 및 그 부대 행사들에 대한 취재 초청장이었다. 일본 기자들도 "전에 없는 일"이라며 놀라워 했다. 내가 이 초청장을 받기까지 사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펄 벅 여사가 애를 많이 써 주었다. 펄 벅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1961년 1월 16일 내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연일 내리는 눈으로 워싱턴은 은세계로 변해 있었다. 이미 대통령 취임식 축하 전야제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워싱턴 시는 물론이고 주변의 버지니아, 메릴랜드주의 호텔들까지도 미국 내는 물론 외국에서 온 수백만의 축하객들로 초만원이었다. 취임식장은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었다. 취임식 후 백악관까지 축하 퍼레이드가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백악관 정문 앞에 마령된 퍼레이드 접견대와 나무 의자들도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1월 20일, 무릎까지 눈이 쌓이던 날 나는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앞 광장에서 거행된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그 유명한 연설을 경청할 수 있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묻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라."
좌석이 앞자리라서 젊은 케네디 대통령은 물론 그의 부인 재클린, 큰딸 캐롤라인의 모습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땅에 정착해 케네디, 존슨,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에 이르는 장장 8명의 미국 대통령들의 취임식을 지켜봤다. 케네디의 취임식은 그 가운데 그다지 요란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재클린 케네디는 취임식 두 달 전에 제왕절개 수술로 아들을 출산한 몸이었다. 그날따라 눈은 멈출 줄 모르고 케네디 대통령 부부는 오픈카로 백악관을 향해 퍼레이드를 펼쳤다. 연변의 시민들이 환호했다. 케네디 부부가 손을 흔들 때마다 군중들을 "와와" 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앞다투어 악수를 청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는 시종 미소를 지으며 '생큐'를 연발했다.
백악관 정문 앞에서는 전국 갖 주의 특생있는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이후 취임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공식행사가 모두 끝났을 때 눈은 10인치 이상이나 쌓여 있었다. 교통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참석자들은 자동차를 길가에 주차에 놓은 채 모두들 걸어서 각자의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그 때, 나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YMCA 호텔에 묵었는데, 거기에서 기억이 인상깊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 페서디나 민주당 선거사무소에서 케네디 선거운동을 했는데 당시의 고충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케네디 선거운동 하는 동안 공화당측으로부터 얼마나 압력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화당 대통령 전성시대 아니었습니까. 선거운동 하려고 책상을 가져다 놓으면 지방 주경찰이 와서 '여기에 놓지마라' , '저리로 옮기라'는 둥 또 '이것도 선거법 위반, 저것도 선거법 위반'하는 바람에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기막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을 알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피땀흘려 개척한 땅을 백인들에게 모조리 빼앗긴 것입니다. 그 문제로 소송중인데 케네디가 당선돼야만 그 소송이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케네디 당선을 위해 뛰었던 것입니다. 당신도 우리 인디언의 역사를 취재하러 한 번 캘리포니아에 와 주길 바랍니다."
그 할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필자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한 맺힌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중에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살펴보니 미국 정부의 내무성에 아메리칸 인디언 국이 있기는 한데 간부자리는 모두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예산도 인디언들을 위해 제대로 쓰이지 않고 있었다.
케네디 취임식 때 발생한 또 하나의 사건은 훗날 나의 남편이 된 최동현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과의 만남이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선 한국대사관으로 갔다. 당시 주미대사는 장리욱 씨였다. 나는 그가 서울법대 학장을 재직하던 시절 인사를 드린 일이 있었다. 장 대사는 나를 보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미스 문 참 대단하네. 케네디 취임식 초청장 가지고 워싱턴에 나타난 사람은 미스 문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최동현 특파원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봐요, 최 기자. 여기 미스 문은 한국의 애니 파일(미국 [UPI 통신]의 유명한 종군 여기자)이야. 미스 문, 우리 최 기자는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워싱턴 특파원입니다. 서로 인사하지."
최 특파원은 나의 안내역을 자청했다. 다음 날 그는 고물 폭스 바겐을 몰고 YMCA 호텔에 나타났다. 그 차를 타고 국회의사당까지 간것은 좋았는데 취임식 후 시내 미술관에서 열린 축하무도회에 갔다가 돌아노는 길에 그만 문제의 폭스바겐이 고장나 버렸다. 덕분에 나는 무도회 때 입었던 롱드레스 차림으로 신발을 벗어 들고 씨근덕거리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숙소까지 걸어와야 했다. 하긴 차가 고장나지 않은 사람들도 폭설로 차를 세워 두고 걸어가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워싱턴에서 도쿄로 돌아온 후 최 특파원으로부터 계속 편지가 날아왔다. 구혼의 편지였다. 인연이 되느라고 그랬는지 61년 4월 나는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등록도 했다. 백악관 출입기자증을 내주기 전에 미국 정보기관이 14세 이후 나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슴을 알게 되었다. 주함 미대사관의 조사관이 통역자를 데리고 나의 본적지인 경북 김천에까지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간 후 최 특파원과 나는 급속히 가까워져 우리 집안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5월 6일 주미 한국대사관저에서 장리욱 대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집안에서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은 그가 혈혈단신의 이북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우리가 결혼한 지 불과 열흘 만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 때문이다.
5.16 당시 워싱턴에 주재하던 한국 특파원은 [합동통신]의 이용후,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최동현, 그리고 [조선일보]의 필자 이 네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워싱턴에서 제일 먼저 안 않국 사람은 아마 남편 최동현이 아닐까 싶다.
남편은 "민족교육은 서울에서 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제시대에 서울에 와서 중앙고보에서 공부하던 중 해방을 맞았는데 3.8선과 곧이어 터진 6.25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이다.
이남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그는 미국에 오기 전 기자 생활을 해서 모은 얼마간의 돈을 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같은 평안도 출신의 하숙집 주인 차씨 아주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그런데 결혼도 하고 해서 돈이 필요해지자 남편은 한국시간으로 61년 5월 16일 꼭두새벽에 전화통을 붙들고 그 아주머니에게 맡긴 돈을 보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아까 총소리가 났는데 방송에서는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남편은 돈 보내라는 용건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황급히 전화를 끊더니 도널드 맥도널드 미 국무성 한국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데 아십니까? 모르겠다고요? 알겠습니다."
남편은 이번에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도 깜깜부지였다. 결국 서울에 연락해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와 남편은 주동자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계속 전화통에 매달렸다. 얼마 후 한 외신에서 "5.16의 주동자는 전직 공산주의자인 박정희, 김종필" 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남편은 깜짝 놀랐다. 그는 다른 이북 출신들처럼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다. 그런 그가 박정희, 김종필 등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 크게 우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무렵 남편은 5.16 주체들의 사상 문제 때문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5.16이 일어난 지 한 달쯤 돼서 나와 같은 대구 출신이자 일본 유학생 동료이기도 한 동양 통신사 외신부장 김규환이 워싱턴에 왔다. 현 한나라당 고문 김윤환의 친형이기도 한 김규환은 서울대 사범대를 다니다가 6.25동란으로 중퇴했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밀항해 한국의 조선대 졸업장을 가지고 청강생으로 동경대에 다녔다. 50년대 일본에 있던 한국 남자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그 같은 '밀항패'였다.
그 뒤, 김규환은 동향 출신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의 후원으로, 자유당 시절 김성곤이 삼킨 동양통신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동경대에 다녀 한국 최초로 신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성곡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 4대 민의원 당선하여 정치 참여 이후 6,7,8대 국회의원 역임)
그는 4.19 이후 귀국해 동양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61년 6월 IPI(국제언론인협회) 총회가 유럽에서 열렸는데, 김규환은 사장 김성곤을 수행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가 김성곤은 먼저 귀국하고 김규환은 미국에 들렀던 것이다.
당시 남편은 동양통신사로부터 받을 밀린 월급도 받아낼 겸 해서 김규환을 집으로 초대했다.
"미스터 김, 그런데 이번에는 용하게 미국 비자 받았네요?"
- "하여간 미국놈들 굉장합디다. 공항에 떨어지자마자 FBI가 졸졸 미행하는데 혼이 났습니다."
자기 회사 외신부장이긴 하지만 김규환을 개인덕으로 잘 모르는 남편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눈이 둥그래졌다.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나는 김규환의 애인이자 나의 친구인 ㅈ의 소식을 물었다.
"ㅈ은 지금 보스턴에 있어요?"
- "예."
"이번에 만납니까?"
- "못 만날 것 같습니다."
"이것 봐요. 미스터 김. 김성곤 씨가 지금 우리 남편 밀린 월급을 안 주고 있어요. 돌아가면 김성곤 씨에게 말해서 월급 좀 보내 주세요."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그가 돌아가고 난 후 남편이 물었다.
"여보, 아까 그게 무슨 소리요? FBI가 왜 그사람을 미행한다는 말이요?"
- "규환이가 옛날에 남로당 했거든요. 경북중학 시절 좌익 학생운동 리더였고 대구 10.1 사건 때도 가담했지요. 6.25 때는 인민군 군복까지 입고 행세했는 걸요."
"뭐요?"
-"규환이가 그것 때문에 경찰에 쫓겨 다닐 때 내 친구 ㅈ이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어요. 그러다 그 애가 먼저 미국으로 유학갔는데 '미국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대요. 규환이가 일본으로 밀항해 온 후 미국 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비자가 안 나와서 결국 못 갔어요. 그러다 4.19 나고 나서 김성곤씨 덕으로 한국에 돌아가 동양통신 일을 하게 된거죠. 자유당 때 주일 한국대표부의 유태하 참사관에게 이화고녀 나와 미국 유학 간 외동딸이 있었는데 유 참사관 부인이 규환이를 사윗감으로 탐냈거든요. 동경대에서 박사를 딴 수재라고요. 그래서 미국 보내서 사위 삼으려고 미국 대사관에 알아보는데 '이 사람은 과거 좌익 전력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 절대 비자 안 나온다' 고 하더래요. 그래서 규환이가 미국 오는 건 결국 포기 했다던데 이번에는 용케 비자를 받았네요."
"그런데 김성곤 씨가 어째서 그사람을 봐줬지요?"
-"김성곤씨도 빨갱이 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그사람은 일제 때는 남대구경찰서 순사로 칼을 차고 다니더니 해방 후에는 남로당 비밀당원으로 들어가 대구 10.1 사건 때 경북도 인민위원회 재정부장을 지냈고, 부인 김미희는 여성동맹 위원장을 했어요. 김성곤은 경북 지역의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인 박정희의 형 박상희, 황태성과도 친한 사이였어요. 6.25 때 그 사람이 인민군 장교 계급장을 달고 서울 거리를 활보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어요."
김성곤은 그런 좌익 경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6.25 때 이기붕이 대구로 피난 오자 그와 사귀어 자유당이 몰락할 때까지 재정부장을 지낸 수완 있는 인물이었다. 이기붕을 등에 업은 위세에다 한국 운크라(UNKRA -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단) 단장 콜트 장군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성 방직을 설립해서 기업가로 승승장구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이승만이 '내 아들' 이라면서 뒤를 봐주던 연합신문사 양우정 사장과도 대구 피난 시절 친교를 맺어 연합신문 이사직을 맡았다. 그런데 연합신문 도쿄 특파원이던 정국은이 간첩으로 몰린 이른바 '정국은 사건'으로 양우정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회사를 빼앗아 연합신문 사주로 취임했다. 그리고 이후 동양통신까지 인수했다.
자유당 재정부장에다 신문사, 통신사까지 소유하게 된 김성곤은 자식들을 모두 도쿄에 유학 시키면서 도쿄에 부지런히 왔다갔다 했다. 내가 김성곤을 처음 본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 때 [여원]사의 도쿄지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 김성곤도 4.19 이후 마침내 부정축재자로 걸려 들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법망을 무사히 빠져 나온다.
60년 12월 내가 미국 [존 크로니클] 신문사 초청으로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 나는 도쿄에 온 김성곤과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양통신과 미국 UP통신사의 계약 갱신을 위해 자기도 곧 미국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문 기자, 내 처가 막내를 임신해 지금 만삭이라 곧 출산하러 미국으로 떠날텐데 말이오. 미국에서 출산을 하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에게도 시민권을 준다는게 그게 사실인지 좀 알아봐 주시오."
-"글쎄, 잘은 모르지만 그럴리가 있습니까?"
"하여간 좀 부탁하오. 뉴욕에서 만납시다."
나는 내심 '이 사람은 그런 전력을 가지고도 정권이 부침할 때마다 교묘하게 살아남더니 이젠 미국 시민권까지 필요한 모양이구나' 싶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남편은 중얼거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어느 놈이 암까마귀고 어느 놈이 수까마귄지 알 수가 없구먼."
결국 남편은 특파원 임기 만료에 따라 귀국하려고 이삿짐까지 다 싸 놓았다가 회사로부터 밀린 월급 받는 것도 포기하고 미국에 정치망명 했다. 5.16 주동자들이 합헌 정권을 총칼로 뒤엎은 행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데다, 그들의 사상전력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로써 한국인 정치망명 1호를 기록했는데, 이 때 그의 신원보증인이 돼 준 이가 바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였다. 펄 벅 여사는 우리 부부를 친자식처럼 아껴주신 분이다.
내가 펄 벅 여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던 1960년이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단편소설 [빅 웨이브]를 미.일 합작으로 영화화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작은 도에이 영화사에서 맡고 있었다. 감독은 다니엘스키라는 헝가리 출신 감독이었다.
촬영은 주로 규슈의 경치 좋은 해변가에서 진행되었다. 펄 벅 여사는 통역 겸 수행비서를 필요로 했는데, 그에게 나를 추천한 이는 사와다 미키 여사였다. 그는 한.일 회담에서 일본측 수석대표를 맡았던 사와다 렌조 전 유엔대사의 부인이다.
미키여사는 미쓰비시 기업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 이와사키의 장녀였다. 그녀는 당시 흔치 않던 미국 유학생 출신이자 크리스천이기도 했다. 그녀의 딸인 사와다 에미는 나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미키 여사는 종전 이후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이소(일본의 유명한 별장지) 별장에 일본인과 미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위한 고아원을 차렸다. 그 같은 일을 하게 된 배경을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이 미쓰비시를 차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이소 별장도 차압당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니 돌려 달라는 운동을 하느라 내가 살고 있던 요코하마에서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까지 기차로 자주 왔다갔다했다. 한 번은 요코하마 역에서 내리려는데 내 머리 위 선반의 짐보따리 뒤에서 웬 아이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짐 사이에서 흑인 혼혈아가 하나 튀어 나왔다. 차장이 와서 '당신 애냐' 고 묻는데 고운 눈길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있던 술취한 남자는 아예 '흑인놈이나 붙어먹고 잘한다'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나 가련했다. 나는 '저건 내 짐도 아니고 내 아이도 아니지만 저 애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 후,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찾은 오이소 별장을 고아원으로 만들었다."
미키 여사의 소개로 펄 벅 여사를 처음 만나러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장소는 도쿄의 제국호텔이었다. 펄 벅 여사는 나에게 "지금은 바쁘니 내일 아침 8시에 만나서 아침 같이 먹으며 얘기하자"고 했다. 그녀는 나를 시험해 볼 요량인 것 같았다.
나는 오전 7시 55분에 펄 벅 여사 호텔 방문 앞에 가서 섰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2분 전에 벨을 눌렀다. "예에스" 하는 높은 톤의 소녀 같은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와요, 미스 문은 매우 정확하군요."
펄 벅 여사는 식사에다 커피가지 모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같이 먹으면서 그녀는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 하는 듯 했다. 자신의 스케쥴도 설명하고 영화에 출연할 일본 여성들의 영어 발음이 시원치 않다는 등 여러가지 얘기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그녀가 "규슈(九洲)의 영화 제작 현장에 함께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속으로 '드디어 합격인 모양이다' 싶었다.
내가 펄 벅 여사의 통역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은사인 숙명중고녀 문남식 교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그 분은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을 모아 하와이 교포 출신인 한동삼 선생에게 영어회화 개인교습을 받도록 했다. 숙명고녀에 진학한 후 한동삼 선생은 필자에게 "소질이 있다"면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여러모로 이끌어 주었다. 내가 일본에 유학와서 미국인들과 별다른 불편없이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그 덕분이었다.
내가 펄 벅 여사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그녀를 모시고 한국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을 쓰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식민지로, 전쟁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이승만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펄 벅 여사를 모시고 규슈에 다녀왓다. 그런데 영화제작 중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일본인 주연 여배우가 "감독인 다니엘스키가 나를 강간하려 했다"면서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 당사자인 다니엘스키는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여배우가 기자들을 만나 그렇게 떠들어 대니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여배우는 당시 그다지 유명한 배우는 아니었는데, 그 같은 스캔들로 화제의 초점이 되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빅 웨이브'였다. 극성스러운 기자들 때문에 펄 벅 여사는 호텔 밖에 나가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병중에 있던 남편 워시가 위독하다는 전갈까지 믹국에서 날아왔다. 여사가 급히 미국에 다녀와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하네다 공항까지 펄 벅 여사를 배웅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해 놓을테니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가깥분 간호 잘 하시고요."
-"그래주면 고맙겠어."
나는 펄 벅 여사의 영화 제작 일을 성심껏 도우면서 한국 방문 약속을 받아낸 바 있었다.
"저하고 하신 약속 잊지 않으셨죠? 한국 가시는 것 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많다는데?"
"오히려 일본에 공산당이 많지, 한국에는 없습니다."
펄 벅 여사가 떠난 후 나는 우선 다니엘스키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기자들 앞에서 사실을 밝히게 했다. 아울러 기자들에게 주연 여배우의 의도를 설명해서 그녀가 계속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검찰총장을 지낸 한 거물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의 메이지대학 동창생의 아버지였다. 대학시절 그의 집에 놀러가면 친딸처럼 친절하게 대해 주곤 했다. 그는 평소 술을 많이 마셨는데 매번 그 때문에 고생했다. 서울 집에서 간혹 인삼을 보내오면 나는 생강, 대추를 넣고 달여서 그에게 갖다 주곤 했다.
"조선 인삼 안 먹어 보셨지요? 술 깨는 데는 조선 인삼이 최곱니다. 냉장고에 넣어 두시고 꿀타서 마셔 보세요."
그는 내 말대로 했더니 정말 술 먹은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좋더라면서 "분짱(문양)이 내 딸이다"며 고마워 했다.
전직 검찰총장이 나서니까 일이 상당히 수월하게 풀렸다. 그는 일본 영화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오카와 히로시(도에이 영화사 사장)를 만나 "자기가 유명하게 되려고 이런 근거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은 미.일 관계에 좋지 않다. 그 여배우 좀 잘 타일러 달라"고 부탁했다.
오카와의 "알겠습니다" 하는 한마디로 상황은 끝나 버렸다.
2주일 후 펄 벅 여사가 돌아왔을 때 모든 문제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영화 제작도 순탄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다. 펄 벅 여사는 무척 고마워하며 나를 자신의 양딸로 삼겠다고 했다. 쥬리(Julie)라는 미국 이름도 그 때 그녀가 지어 준 것이었다.
"미국 이름이 꼭 필요한가요?"
-"미국에 와서 활동하게 되면 미국 이름이 필요해. 내가 지어주는 대로 하렴."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백악관 동료 기자들은 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가 지은 이름이니 아름다울 수 박에 없을 것이다. 한가지 문제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 동료 기자들이나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문'이라는 내 성을 들었다 하면 "무니(Mooni-통일교도)하고 관계 있는가?" 라고 묻는 바람에 일일히 해명하기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
4.19 이후인 1960년 10월 나는 마침내 펄 벅 여사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펄 벅 여사는 이화여대와 경기여고, 숙명여고에 들러 한국의 미래 여성 지도자들을 위해 감동적인 강연을 했다.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 [살아있는 갈대] (The Living Reed)를 출간했다.
필자가 61년 미국에 온 후에도 펄 벅과의 교류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벅스 카운티에 있는 350에이커 정도 되는 농장에서 살고 있었다. 서재가 널찍하고 마당에서 농구까지 할 수 있는 넉넉한 저택이었다. 그녀는 가정적으로는 불행한 편이었다. 첫 남편과는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사별했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장애인 아들이 있었는데 결국 죽고 말았다. 의사는 "부부간에 혈액형이 맞지 않아 장애아가 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한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최동현 특파원과 함께 펄 벅 여사를 찾아 갔을 때도 그녀는 조용히 "피 검사, 해봤니?" 하면서 걱정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은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5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필자의 아이들도 펄 벅 여사를 좋아해서 "그랜드 마더 가자"고 졸라대곤 했다. 한번은 펄 벅 여사가 나의 아이들을 위해 미국식 비프를 준비해 놓았는데 아이들이 "그랜드 마더, 밥 줘요" 하고 때를 썼다. 펄 벅은 물었다.
"밥? 그게 뭐야?"
나는 웃으며 가지고 간 쌀을 보여 주고 밥을 앉혔다. 그러나 펄 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앉혀 놓은 밥이 다 타 버려 결국 밥은 먹지 못했다.
백악관 앞 5.16 반대 시위자들 - 장리욱 신병현 최경록 강문봉 오세응
미국에 망명한 후 남편은 미국 영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한편으론 워싱턴에 있는 한국 학생, 지식인, 예비역 장성 등 5.16에 반대하는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 백악관 앞에서 반대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에 5.16을 인정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 위해서였다.
이 때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로는 5.16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리욱 박사,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 신병현, 국회 사무처장을 지낸 김문봉 박사, 최경록, 강문봉, 김응수 장군과 국회의원 양일동씨 등이 있다. 강영훈 씨는 5.16 직후에는 시골에 있어 시위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워싱턴으로 온 뒤부터는 이 모임에 항상 참여했다.
강영훈씨는 5.16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이었는데 쿠데타 세력이 요구한 육사생도들의 5.16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하는 등 5.16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와 처남 매부지간인 김응수 장군( 전 제 6군단장), 장면 정권 하에서 육군 참모 총장을 역임한 최경록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최 장군은 5.16 당시 대구 소재 2군사령부 사령관이었는데 자기 밑에서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하극상 사태를 당한 셈이었다. 최경록은 [조선일보]등에 "군은 절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글을 발표하는 등 끝내 5.16을 반대했다. 이들 세 사람은 5.16이 기정 사실화된 후 미국측의 배려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이들은 사실상 미국이 키운 사람들이었다.
강문봉 장군은 자유당 시절 육군 정보국장과 작전 국장을 역임하고 5.16 무렵에는 중장으로 예편해 있었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미국에 유학와 있었다.
신병현씨는 민주당 정권 때 워싱턴 주미대사관 경제담당 참사관으로 나와 있었는데, 5.16 발발 이후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특히, 신병현 참사관의 부인까지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에 재학중이던 한국 유학생들도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당시 열심이던 학생으로는 오세응(현 한나라당 의원)과 한광년이 기억에 남는다. 그 때 오세응은 워싱턴 지역 한국 학생회장이자 워싱턴 지역 '한국인 택시운전사 1호' 였다. 한광년은 불행히도 청년 시절의 신념으로 초지일관 하지 못하고 70년대 들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 해임해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주미대사직에는 당시 하버드 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사실, 정일권과 강문봉은 군부의 권력 암투 속에 56년 1월 발생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정일권과 강문봉은 살아났는데, 그것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일권이 밴플리트에게 한국 처녀들을 계속 상납하는 등 채홍사 노릇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일권의 대미 인맥을 자신의 방패로 활용하려 했다.
정일권이 주미대사로 앉게 되자 백악관 앞 5.16 반대시위 참여자 중 여러 사람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우선 남편 최동현 부터가 정일권의 하버드 시절 그의 영어 가정교사를 했던 사람이었다. 영어 선생과 학생이 데모 대장과 진압대장으로 만난 셈이었다. 또 강문봉 장군은 정일권과 같은 함경도 출신으로 현역 시절부터 형님동생 해 온 사이였다. 그런 그가 백악관 앞에서 박정희 반대 시위를 하러 다니니 정일권이 닥달할 만도 했다. 그 때마다 강문봉은 "골프 치러 가려고 운동화 신고 나서는데 마침 최경록이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따라 갔어요" 하는 식의 변명으로 곤란한 자리를 모면하곤 했다.
나는 열심히 이 시위를 취재해 [조선일보]에 송고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일보]의 논조가 살아 있어서 백악관 시위 기사들이 간간히 실리곤 했다.
심지어 나는 펄 벅 여사에게 특별히 부탁해 케네디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까지 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박정희 군사 쿠데타 세력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는 두 통을 작성해 하나는 백악관에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조선일보사로 보냈다. "힘으로 독재하는 정권은 오래 못 간다. 국민이 깨야 한다"는 등의 원문이 그대로 [조선일보]에 실렸다. 조선일보사가 펄 벅 여사의 친필 편지를 잘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펄 벅 여사가 편지를 냈을 때 케네디는 캐나다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인들이 우리 두 사람을 얼마나 바보같이 봤을까 싶다.
케네디는 죽기 전 마지막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그 한마디에 흥분한 나는 "박정희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단정하는 기사를 송고했다. 케네디가 결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케네디의 이상, 정의감, 프론티어 정신. 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을 30대 초반의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5.16 당시 미국인들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매구르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5.16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마샬 그린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일이 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 갔어요. 모두 기회주의자요. 내가 쿠데타 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 대통령의 답변은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 올지 모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 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다름아닌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지만 계통은 정보라인 이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장면이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 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으로 하여금 미 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가도록 한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나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 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실은 미국측이 장면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징표로 해석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측근에 따르면, 위컴은 5.16 직후 그 살벌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연평도에서 주재하며 목회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 신부를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 군사 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 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미국인 신부는 여자 문제로 정보기관에 약점이 잡혀 있던 상태였다.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 프레이저 청문회장 방청석에 그 신부가 나타난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청문회를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74년 한국에서 목회중 인혁당 사형수 처형에 항의하다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교단의 신부)는 흥분해서 "당장 저 빤질빤질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 역시 머리까지 빨개졌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성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 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겉으로는 주한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내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 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지만 믿고 자기 진영의 규합을 이루지 못한 장면 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미 행정부가 상당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국무성은 부산 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다. 4.19 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은 오랜 숙원사업인 환율 현실화,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을 조속히 이루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할 수 잇는데까지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 이후 미 국부성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볼 때, 미국측은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 될 경우 성공한 군부 인사들과의 협력의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워싱턴에서 5.16 군정 승인 문제, 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무얼 버거), 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 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6 이후 이 사건을 미국민들에게 어떻게 홍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케네디 행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 행정부가 4.19 혁명을 지지했던 기억이 미국민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장 정권이 약하기 때문에 교체돼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구나 케네디를 지지해 준 스펠만 대주교 같은 인물은 장면 박사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납득 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 내의 사태 진전을 현지 보고 하는 방식으로 미국민들에게 5.16을 알렸다. 국무성 관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고, 케네디 자신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 11월 케네디 암살 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은 장례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가기 전까지 백악관 이스트룸에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시신이 떠나기 전날 밤 시신 앞에서 마지막으로 추도식을 가졌다. 냉정한 기자들도 하나 둘 끝내 울음을 떠뜨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기자 회견에 한없이 감동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난 케네디의 죽음을 한없이 애도했다.
나는 케네디 행저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을 역임했던 딘 러스크에게 "한국이 언제 통일 되겠는가?" 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당신이 살아서는 못 본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45년이 흘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 되지 않은리라는 보장이 없다.
러스크 국무장관과 얘기하던 중에 38선 문제가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38선은 내가 그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1944년 나는 미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의 대령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8월 10일 일본측이 자신들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미.영.소 3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한 날 밥 늦게 정책과에 긴급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일본군에게 제시할 항복 문서중 한반도와 극동지역에 대한 초안을 작성해서 30분 안에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정책과장은 본스틸 대령이었고 나와 매코맥 대령이 과장보였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소련이 수용할 수 있는 선을 그어 그 이남으로는 소련군의 진주를 저지하는 일이었습니다. 북위 40도로 분할하면 너무 북으로 치우쳐 소련측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고 38도선 정도라면 절반을 공평하게 분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38선이 이남에 수도 경성과 미군 포로수용소, 주요 항만시설등이 있다는 점이 우리에게 유리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38선을 그어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항복을 접수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초안을 30분 만에 작성해 전략 정책단에 보냈는데 소련놈들이 그걸 수용해서 뒷날의 38선이 된 것입니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한민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 육군 일개 대령들이 30분 만에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와 관련된 국무성 문서가 공개되어 이를 [동아일보]에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백악관 앞에서 같이 5.16 반대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의 그 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많다. 박정희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유해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를 지내던 신병현 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본격화한 회유공작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귀국해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최경록 장군도 "선배님, 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라는 박정희의 간청에 점차 흔들리더니 결국 귀국해 런던대사-교통부 장관등을 지냈다. 최 장군이 민주당 정권에서 육군 참모총장직에 있을 때 박정희가 관련된 영관급 쿠데타 음모가 적발 되었는데 최경록은 그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최경록이 5.16을 반대했지만 이같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 박정희는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들어가도 다른 백악관 시위 동지들은 만나 볼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최경록과는 가끔 만났다. 그는 자신의 적선동 옛날 한옥집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백악관 시위 동지'들 중 가장 부끄럽게 처신한 것은 강영훈이라 하겠다. 강영훈도 초기에는 깨끗하고 꿋꿋하게 생활했다. 강영훈의 부인은 미장원에서 일했는데 독한 파마액 때문에 손가락이 다 헐 지경이었다. 이같은 생활고 때문이었던지 결국 70년대 들어 강영훈은 중앙정보부의 돈으로 한국문제연구소라는 것을 설립해 미국 언론계, 학계등에 친박정희 세력을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백악관 앞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5.16을 반대한다고 떠들었던 몇몇 사람들의 행적도 기억해 둘 만하다. 장면 정권 하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지낸 이석기와 나중에 야댱 당수를 지낸 이철승이 그들이다. 이석기는 주미대사관 국정감사를 위해 워싱텅에 와 있다가 쿠데타가 일어 났다는 급보를 접하자 장리욱 대사 방에 달려와서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부치고 "대사님! 미군을 동원 시켜야 합니다" 하면서 열을 올렸다.
그런데 5.16이 기정 사실화 하고 CIA 부장 매쿤의 초청으로 중앙 정보부장 김종필이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의 일이다.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김동환의 집에서 김종필 환영 파티가 열렸다. 다른 특파원들과 함께 필자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뜻박에도 이석기와 이철승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석기에게 대뜸 물었다.
"이 의원, 와이셔츠 걷어부치고 미군 동원시키라고 하던 분이 여긴 웬일이세요? 번지수를 잘봇 알고 오신 것 아닙니까?"
이석기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을 늘어 놓았다.
"김부장하고 나는 한 고향 출신이라 옛날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우리 김부장의 춘부장도 제가 잘 알고 김부장 형님도 내가 은행에 취직시킨 처지라 먼 길 오셨는데 몰라라 할 수도 없고..."
그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부터 잘 아는 그 인연을 통해 권력의 신주체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뒷날 김종필이 정계에 진출할 때 이석기는 자기 지역구인 부여를 그에게 주고 자신은 서울로 옮겨갔다. 그 점에서는 이철승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열렬히 5.16을 반대한다던 그가 그 자리에는 왜 왔겠는가.
5.16 당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송요찬의 떳떳하지 못한 처신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직중 4.19가 발발하자 계엄 사령관에 취임했는데,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집요한 정군운동에 밀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루는 송요찬이 저녁 늦게 남편 최동현을 급히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는데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당신을 불렀어요?"
-"최기자는 장도영이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 무슨 닿는 선이 없는가 합디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기는? '그런선 없어요 하고 딸기만 한접시 먹고 왔지요."
5.16 후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명목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도영과 닿는 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박정희에게 다가갈 길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밀려나 미국에 와 있는 처지면서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쥐자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송요찬이었다.
제 2장 - 박정희가 추방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증언'
- " 박정희와 황태성 3번 만났다 " -
황태성 사건 추적하다 추방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5.16 직후 박정희는 미국 내에 남아있는 자신의 좌익 경력 근거를 없애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5.16 직후 박정희가 보낸 한 특별팀이 워싱턴에 왔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미국통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팀의 임무는 미국 국회 도서관 등지에 소장돼 있는 박정희의 과거 좌익 경력수록 자료들을 없애 버리는 것. 그러나 신문자료 같은 것은 빌린 다음 안 돌려 주면 된다지만 마이크로 필름으로 소장돼 있는 자료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팀은 도서관의 모든 신문 자료들이 마이크로 필름으로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가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다음날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로써 5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9월 23일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언급했다. "여순반란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다. 박정희 씨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라는 것이었다. 이 '박정희 사상 논쟁"은 이른바 '황태성 사건'이 폭로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대구 10.1 폭동 때 피살됨)의 절친한 친구로서 대구 10.1 폭동 때 경북도인민위원회 선전 부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다가 5.16이 발발하자 박정희와의 비밀 회담을 위해 61년 9월 남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한 후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 하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미국 정보 당국이 황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사건 발생 후 거의 2년이 돼 가는 63년 9월까지도 그것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 시켰다. 시중에는 62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황태성이 깊숙히 관여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63년 9월25일 야당측은 이 사건을 폭로 했다. 중앙 정보부는 이틀 뒤에 어쩔 수 없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그의 공화당 창당 관여설을 전면 부인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 때가 돼서야 비로소 황태성 사건에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63년 8월 강문봉 장군이 내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국 정보기관 G2의 비밀 정보원 출신이며 CIA 요원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지금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 장군은 과거 육군 정보국장 시절의 자기 동료들을 통해 그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주한 미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 창설을 주도한 후 주한 유엔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한국군의 대부'라 불리는 하우스먼 밑에 있던 사람인데 CIA 비노출 요원으로서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가장해 한국에서 일했다고 했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주한 미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 문정관이라면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 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곧 래리 베이커에게 연락을 취했다.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를 마나러 오라고 했다. 네브라스카까지 가기가 너무 멀어 인터뷰를 서면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63년 8월 27일 질문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인 9월 13일 나는 래리 베이커로부터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답변서를 받았다.
그는 답변서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은 물론 박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서재에서 36년 전 래리 베이커가 보내온 답변서를 찾아내 다시 읽어 보았다. 래리 베이커의 미국적 시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되었다.
나의 질문서와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Q) 질문서
1. 5.16 세력들이 공산권 제도를 모방해서 정부기구를 개조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불안해 하고 있다. 이같은 행태에 대해 논평해 달라.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3. 한국 중앙 정보부는 대공 정보 활동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4. 귀하는 군사 정권하에서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5. 귀하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잇는가. 또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A)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문명자 기자에게.
오레곤 주 변두리에 있는 나의 목장을 한 친구가 사겠다고 해서 그 목장의 장비목록을 정리하고 소 마리 수를 헤아리느라 두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는 우편을 포함해서 외부 접촉을 하기가 어려워 63년 8월 27일 귀하의 서신에 대한 회답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먼저 귀하의 질문에 대해 귀하가 원하는 만큼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나는 법치주의가 확립된 미국에 돌아와 있어 안전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폭로하면 정부가 법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는 한국에 남아있는 나의 한국 친구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내가 우려하는 점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1. 공산권 제도를 모방에서 정부기구를 개조한 박 정권의 행태에 대한 논평 및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그들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을 통제하는 현 정권의 구조는 전부 공산주의 행정구조에 따라 조직되었슴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행정기구의 개편 결과 61년 5월 이후 한국의 각 부처와 군에는 지휘계통과 관계없이 군사위원장(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할 자격을 가진 자가 한두 명씩 끼어 있습니다. 공산권 통제 기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중 명령계통은 사실상 정치위원 제도임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계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서 국립경찰 경감과 총경 자리에 위관급 장교들을 대거 부임 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관이 군사위원장에게 불리한 사항을 보고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실을 군사 위원장이나 그의 측근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근무하는 이상태 중령이 또 다른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63년 3월에서 4월까지 본인이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체포, 구속되어 있는 동안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후임인 김재춘 부장은 중앙정보부 숙정이란 명목으로 인사 개혁을 했습니다. 이 중령은 그 때 김재춘 부장이 데리고 온 다섯명의 상급자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조사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박정희 의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었으며 그 때 일어난 중앙 정보부의 대전환 속에서도 그런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논평하고 싶습니다. 5.16 이후 군사혁명위원회(이하 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결성 됐을 때 그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단일한 조직 같았으나 실제로는 여러 그룹을 대표한 것이었고, 중요한 결정을 할때는 토론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이 군사위원회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비밀계획에 따라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금년(63년) 2월, 박은 김윤근 소장과 동료들을 군사위원회에서 몰아냈습니다. 게다가 김종필이 갑자기 국외로 나가게 됨에 따라 군사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노골적인 1인 독재를 위장하는 도구가 돼 버렸습니다.
미국 대사 사무엘 D 버거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김종필이 군사위원회 내의 반대파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수많은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대규모의 증권파동을 대담하게 일으키고 박정희가 행한 화폐개혁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지자 버거 대사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폐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장기계획의 첫 조처임이 명백했습니다. 침략적인 공산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조처는 한국을 급속히 공산화 시키는 수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박정희와 김종필이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군사위원회로부터 축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 대사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 반대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득세한 후 한국에는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국민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맺으려고 2년 전에 북한에서 장관급 공산주의자가 남하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파업 담당자, 연락원, 정치 선동가 등등 여러가지 임무를 띤 북한 첩자가 한국에 침투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그같은 이북 첩자들은 대부분 이남에 사는 친척이나 친지와 먼저 접촉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국 국민들은 대부분 고민하다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그들을 고발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정전 이후 북한이 각료급 공산주의자를 남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61년 9월 얼마 전까지 이북에서 차관으로 일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사람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황태성입니다.
그가 온 다음 두 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습니다. 602호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 방 바로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24시간 감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본인은 이 세 번 모임에서 그들이 무엇을 논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박정희는 다른 '애국적인 한국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황을 투옥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 61년 10월 경찰에서 황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사실을 발표하기도 전에 중앙정보부가 황을 가로채 가지고 비밀리에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황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62년 5월 이남의 공산주의 죄수들은 모두 대구 형무소로 집결되었는데 이 중 황태성만은 62년 7월 말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현재 황은 서대문 형무소 귀빈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이상으로 귀하의 처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다고 봅니다.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 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 중앙정보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지향인사들과 친미 인사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오랫동안 산 미국인으로 CIA가 이 부패하고 악질적인 야수를 열렬히 지지하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CIA는 남베트남에서 부패한 고 딘 누 비밀경찰과 특별부대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특히 한국에서 CIA의 사업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예산만 가지고는 자금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금 출처를 마련하고 있는데 자유당 추종자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업쇼는 능률적 방식으로 자금을 염출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미국 대사와 전 미8군 사령관 메로이 장군의 협력을 얻어 미군 잉여 자재판매업을 독점하고 있고, 심지어 미군 쓰레기 처분까지 맡고 있습니다. 미군 택시 운영권도 아무런 경쟁입찰도 없이 따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버거 대사와 멜로이 장군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62년 6월 미국 대사가 현실에 눈을 뜰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을 통해서 새로운 자금 출처를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거나 한국에 투자할 일본인들로부터 자금을 짜내는 것입니다. 김종락은 새나라 자동차 공장과 의암 수력발전소 건설사업에서 자금을 염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 증권파동은 주로 한국 중앙정보부 자금 조달을 위해 생긴 사건임은 물론입니다. 이런 파문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현재도 증권시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와 간부들의 개인 치부를 위해 계속 자금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4. 귀하는 군사 정권에게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 되었다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 한국에서 내가 추방된 이유에는 의심스러운 측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추방은 나에게도 고역이었지만 가족에게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실상 망명객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여겨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봅니다.
체포 됐을 때 나는 한미간의 우호통상항해 조약에 보장된 바대로 공개재판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인 공개재판에서는 저명한 한국인들이 당한 것과 같은 부정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정권은 공개 재판을 하지 않고 나를 추방한 것입니다.
5. 귀하는 미국 정보 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가.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 나는 한국에서 미국 정보기관에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미국 정보기관은 한국정치에 개입하는 기관은 아니었습니다. 그 기관의 역할은 기술정보 부문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미국인이지만 조속한 시일 내에 자유로운 한국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특종성 기사가 보도되지 않았다. 실망이 컸지만 그 무렵 내가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군사정권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됐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문봉 장군이 다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자유당 때 육군 정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매우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건 재판장 최석 장군이 지금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일권과 백선엽, 이용문 장군등이 박정희를 구출 하느라 힘썼는데 결국 박정희는 3천여 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구제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나는 최석 장군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강문봉 장군의 말대로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곧 국회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들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찾아냈다. 자료 내용은 강문봉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었다.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나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보냈다. 필자는 그 기사의 첫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기사를 보낸 직후 국군의 날을 맞아 주미 대사관저에서 파티가 열렸다. 당시에는 정일권 후임으로 김정렬 대사가 와 있었다. 파티에 갔더니 홍성철 주미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가 2층으로 나를 불렀다. 그 곳에는 김정렬 대사는 물론 [한국일보]의 설국환, [동양통신]의 문도상 특파원과 강문봉 장군이 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다른 특파원들과 내가 보는 앞에서 강문봉을 다그쳐 그에게 '박정희 남로당 군책' 발언을 번복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내 기사를 오보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인민재판이었다. 나는 강문봉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 장군, 박정희가 여순 때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얘기, 분명히 나에게 했지요?"
-"네. 했습니다."
나는 다시 설국환에게 말했다.
"미스터 설도 분명히 들었을테니 똑바로 보도하세요."
김정렬 대사가 당황해서 말했다.
-"문 기자, 내가 보증하는데 박 장군은 그런 경력이 없어요. 내 말 믿어요."
"저는 그 말씀 못 믿겠습니다."
내가 [한국일보] 특파원 설국환에게 "똑바로 보도하라"고 다그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잘 내는 재주꾼이었다. [한국일보]가 주최한 '이 대통령배 연날리기 대회' , '씨름대회' 따위가 모두 그의 아이디어 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연좌제 때문에 미국에 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다가 해방 후 임화와 같이 월북한 사회주의자 설의식이 바로 그의 삼촌뻘이었다.
설국환은 그런 곡절 때문에 자유당 시절 출국을 못하고 있다가 허정 임시 정부 때 한국일보 사주 장기영의 후원으로 마침내 미국에 왓다. 그러나 한국일보사가 특파원 체재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생활이 어려웠다. 이 같은 형편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신원상의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는지 그는 5.16 후 서서히 박정희에게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국무성에 브리핑이 있는 날이면 곧장 한국 대사관으로 가서 무슨 큰 기밀 정보라도 주는듯이 생색을 내며 정일권 대사에게 브리핑 내용을 전하곤 했다.
나아가 설국환은 박정희를 위해 미 국무성의 도널드 맥도널드 한국 과장에게 로비를 한다고 다녔는데 그 덕분인지 귀국 후 67년부터 코리아나관광진흥(주) 사장, 코리아 그레이 하운드 사장, 대한 여행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정희 시절 모든 공무원들은 비행기표를 대한 여행사에서 사야 했다. 그는 유신 이후 다시 대미 로비를 한다고 나섰는데 그것이 얼마 만큼 통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 없다.
대사관에서 한바탕 한 후 집에 돌아왔는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본사에다 전보로 기사를 보냈다.
"나는 캥거루 코트(인민재판)에 올라 갔다."
몇 시간 후 AP 통신의 국무성 출입기자 스펜서 데이비스를 만났는데 그가 말했다.
"당신이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기사가 신문에 나오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데이비스를 다그쳤더니 그는 "국무성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외국 특파원들이 본사에 타전하는 기사들은 모두 국무성에 한 카피씩 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펜서 데이비스를 데리고 국무성의 마샬 그린 차관보 방으로 갔다. 마샬 그린은 5.16 당시 한국 대사 대리직에 있으면서 대통령 윤보선에게 "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자"고 설득했던 인물이다. 나를 보자 마샬 그린은 "그런 인민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미리 본 기사대로 나는 박정희 전력 기사 때문에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 당신들은 여순 반란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면 내 기사가 오보인지 아닌지 밝혀질 것이고, 내가 더 이상 캥거루 코트에 올라갈 일도 없을 것이다."
퇴근 후 남편에게 국무성 사건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오히려 되물었다.
- "텔렉스 회사에서 외국 특파원들 기사를 국무성으로 넘기는 걸 아직도 몰랐단 말이오? 당신 특파원 헛 했구먼."
"그러면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민주주의는 몽땅 거짓말인가요?"
-"이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를 너무나 모르고 좌충우돌 하는 게 문제야."
사실 그랬다. 당시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실리든 안 실리든 박정희 관련 기사를 계속 본사로 보냈다. 당시 박정희 의전실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가 나중에 미국에 왔는데 그로부터 " 당시 박의장이 '워싱턴 문기자가 또 뭐 또 보내온 것 없나' 하고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63년 10월 9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주일 앞둔 상황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의 의문점을 강력히 제기하고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선거 쟁점화 시켰다. 그러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10월 10일 안동행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황태성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는 "장도영계의 조웅과 모 외국기관에 근무하는 베이커가 황태성과 나에 대한 허위 사실을 조작해 유포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0월 11일 래리 베이커는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반박문의 내용은 래리 베이커가 필자에게 보내온 답변서와 상당부분 일치하므로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지난 10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 군사정권의 박정희 의장은 자신이 최고위급 북한 간첩과 직접 만난 사실이 최근에 폭로되자 이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장도영 장군과 내가 그것을 허위조작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박의 비난은 철두철미 조작된 것이다. 그가 북한 첩자와 비밀리에 접촉한 것이 알려지면 오는 10월 15일 대선에서 당락이 좌우될 것이므로 그는 계획적으로 국민을 속이려 한 것이다. 이 괴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의 내용은 62년에서 63년 사이 본인이 서울에 있을 때 지극히 믿을만 하고 신빙성 있는 소식통들에게 들은 것이다. 이들 소식통 중 일부는 군사 정권의 최고 지도층에 속한다. 또한 이 정보는 세 번이나 재검토. 재확인 된 것으로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다.
61년 9월1일 남하 직전까지 북한 정권의 무역성 부상(차관)으로 있던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다. 30년데에 황은 박의 형과 가까운 친구였다. 황은 조사를 받을 때 자기가 박상희의 친구라고 밝힘으로써 박정희와의 관계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박상희는 45년~48년 사이의 미군정 시기에 큰 소란(대구 폭동을 의미함-필자 주)이 있었을 때 주모자로 피살된 사람이다.
박정희는 61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서울에 있는 반도호텔에서 비밀리에 세 번이나 황을 만났다(중략)
지금으로부터 2주일 전 허정 민주당 대선 후보가 황태성 사건을 공개했다. 그러자 한국 중앙정보부는 황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대법원에 상고중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허정 후보가 이 사건을 공개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황태성을 체포한 사실을 발표 했다면 그것은 군사정권에게 굉장히 유리한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2년 동안 이 사건은 국민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본인은 박 의장의 궁극적 목적을 완전무결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46년에서 48년 사이의 공산당과의 연관, 황태성 사건을 다룬 방식, 그리고 공산당식 통제 방법을 쓰고 있는 것 등은 그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한국의 장래가 대단히 우려스럽다.
오레건 주에서 래리 베이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71년 나는 뜻밖에도 김형욱의 입에서 내가 보낸 래리 베이커 서면 인터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지 못하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다.
당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위협과 견제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는 멕시코를 방문하고 오다가 뉴욕에 들렀는데 역시 유엔 취재를 위해 뉴욕에 있던 나와 '우리하우스'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이웅희도 함께 있었다.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 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과 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은 여순 사건 때 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그러다가 김형욱은 갑자기 내가 옛날에 썼던 황태성 기사 얘기를 꺼냈다.
-"문 기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 말이요. 그거 보고 나는 사실 문 기자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여성인 줄 알았소."
"래리 베이커가 증언한 기사 말이죠? 그런데 황태성이를 진짜 죽이기는 죽였습니까?"
-"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에서는 계속 황태성이를 넘기라는데 박 의장은 계속 미루지, 참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래가지고는 선거 못 한다고 밀어 붙여서 CIA에다 넘겼지요. 사형 판결 뒤에도 박 의장이 굉장히 아쉬워 하면서 사형 집행 결재를 계속 지연시키는 거요. 결국 내가 다시 밀어붙여 받아냈지요. 그런데 문 기자가 보낸 기사 말이요. 그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왜 김부장한테 갔습니까?"
-"방일영씨가 그 기사 가지고 나한테 왔습디다. 받아서 읽어 보니 등에 식은땀이 나더구먼. 얼른 비서실장 불러 금고에 넣으라고 하고 '뭘 도와드릴까요' 했지요."
"그래서요?"
-"방일영 씨가 '융자 좀 해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결국 한 2~3억 해줬지 아마."
"뭐라구요?"
나는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박정희의 집권과 함께 한국 언론도 권력의 시녀꼴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래도 60년대 초반까지는 언론으로서 기백이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자사 기자의 기사를 중앙정보부장에게 갖다 바치고 돈을 얻어 쓴 언론사 사주가 있었다니, 나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 이놈들, 나 참을 수 없습니다. 김부장, 지금 하신 얘기 당장 폭로하겠습니다. 여기 이웅희 기자가 증인이에요."
김형욱은 몹시 당황해하며 신신당부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만 참아 주시오. 꼭 기회가 있을거요."
그의 기색으로 봐서는 내가 그의 얘기를 기사화할 경우 완전히 오리발을 내밀 것만 같았다. 다음 기회에 그의 말을 비밀리에 녹음하든지 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기사를 보류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김형욱은 그 때 이미 자신의 미국 도피를 염두에 두고 '나중 기회' 운운 했던 것 같았다.
방일영은 김형욱 하고만 거래했던 것이 아니었다. 69년 김형욱과 같은 시기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났던 이후락이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이것만은 꼭 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것이 바로 코리아나 호텔 건설 자금이었다고 한다.
김성곤의 소원, "미국 내에 남아 있는 나의 좌익 경력 기록을 없애라"
미국에 남아 잇는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던 제 3공화국의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바로 김성곤이다.
김성곤은 65년 한일 기본조약 조인에 따라 일본이 제공하게 된 무상원조 3억불과 유상 2억불, 차관 1억 불의 분배 과정에서 1억5천 만불을 넘겨 받아 쌍용양회를 설립했다.
한일회담은 한일 간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거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식민치 통치를 통해 한국민에게 끼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배상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일본과 한국을 한데 묶어 강력한 반공 동맹을 수립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 아래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한일회담의 의의를 청구권 문제에서 경제협력자금 구걸 외교로 전락시켜 버렸다. 한일 회담 협정문에서 무상원조 3억 불, 유상 2억 불, 차관 1억 불을 받는 대신 청구권을 포기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전쟁 징용자 등 모든 식민지 침략 피해자들이 정당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피맺힌 자금을 수완 좋게 분배받아 일약 제 3공화국 최대의 기업가로 발돋움한 사람이 바로 김성곤이었다. 그는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서 제 3공화국 금권 정치의 중심인물로 부상했다. 69년 그는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과 이른바 공화당 4인 체제를 이루어 삼선개헌안 통과의 돌격부대역을 맡았다.
김성곤은 자신의 좌익 전력 기록을 은폐하기 위해 역대 내무부 장관을 매수해 형님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곤 했다. 김형욱이 중앙접보부장일 때 김성곤은 김형욱에게 중정에 비치되어 있는 그의 신상카드를 말소해 달라고 청탁했다고 한다. 김형욱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김성곤은 본격적으로 김형욱 제거 작업에 앞장섰다고 전해진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한국 내에 있는 자기 경력 기록을 거의 다 없앤 후 김성곤의 소원은 "어떻게 하면 미국 관계기관에 남아 있는 경력 기록을 없앨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그는 나에게도 물은 일이 있다.
-"문 기자, 미국에 있는 내 경력 기록을 없앨 방법이 없을까?"
"힘들다고 봅니다. 그런 기록들이 국무성뿐 아니라 CIA, 군정보부등 여러 기관에 있을 텐데 그 자료를 어떻게 다 없애겠습니까? 5.16 직후에 박정희 의장도 특별 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내 국회 도서관 자료를 없애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지요.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는 것을 어떻게 없앱니까?"
-"없앨 수 없다? 영구히 남는다?" 그는 몹시 고민스러워 했다.
김성곤이 구워 삶았던 내무장관 중에 엄민영이란 이가 있다. 그 역시 경북 출신 좌익 경력자로 6.25 당시 월북했다. 그 후 처자를 이북에 놔두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가 미군 정보부대에 체포 되었고 전향해서 남쪽에서 새로 가정을 꾸몄다. 엄민영은 방첩부대 등을 거쳐 5.16 이후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도쿄에 주재하기도 했고 주일 대사와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부임해 신임장을 제정할 때 그의 경력 때문에 한.일 간에 마찰이 빚어진 일도 있었다.
통상 호적초본만 가지고 처리하던 일본측이 유독 엄민영에게는 호적 등본을 제출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엄민영이 주일대사로 재직하던 중 북에 남겨 둔 그의 아들이 연일 북한 방송에 출현해 아버지를 부르는 사태가 생겼다.
"아버지, 저 00 입니다. 민족의 통일을 앞당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루 속히 북으로 오십시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엄민영은 일본 게이오 병원에서 갑자기 숨을 거둔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장병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김성곤이 일본으로, 미국으로, 떠도는 낭인 신세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71년 10월 일어난 이른바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파동' 때문이었다.
야당이 국회에 상정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부결시키라는 박정희의 엄명에 맞서 그것을 가결 시켰다가 하루 아침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그 유명한 카이젤 수염까지 뜯기고 박정희에게 버림 받았던 것이다.
71년 국내에는 '실미도 특수군 난동사건' , '광주 대단지 폭동', '한진 빌딩 노동자 난입사건', '기동경찰 총기난사 사건', '무장공비 마을 점거'등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야당측은 이에 책임을 물어 오치성 장관 해임안을 제출했는데 당시 공화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성곤씨 등의 4인방은 이것을 기회로 오치성을 해임시켜 버리기로 작정했던 거이다.
그 이유는 오치성이 내무부 장관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찰 간부 2백 20명을 권고 해임 시키고 시장, 군수, 구청장, 도청의 국.과장 등 2백 4명을 인사이동 시켰는데 이는 4인 체제의 밑받탕을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오치성이 이 같은 과감한 조치를 취한 것은 사실 박정희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행정조직의 골격이고 선거시 집권자의 손발이 돼야 할 내무. 경찰, 관료가 공화당 4인방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꼴을 두고볼 박정희가 아니었다.
김성곤 등 4인방은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10월 2일 야당의 주장에 편승해 오치성 해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고, 대노한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들을 색출해 엄중 조치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 김성곤 길재호 등 주동자 전원은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그야말로 개처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의 권위에 도전했던 4인 체제는 이로서 끝장이 났다. 박정희는 그의 권력을 넘보는 2인다를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당에는 박정희 아닌 실세는 결코 등장하지 못했다. 완전한 박정희 친정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것은 유신체제의 전주곡이었다.
나는 김성곤이 중정에서 풀려나와 일본을 거쳐 미국에 왔을 때 그가 겪은 수모를 직접 들었다.
-"갑자기 정보부원들이 집에 들이닥치는데 하도 급해서 다락에 숨었지 그래도 꼼짝없이 끌려갔는데 그 대접이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놈들이 내 수염을 한 올씩 한 올씩 뽑는데 미치겠더구먼."
그 얘기를 할 때만은 평소 술도 잘하고 노래도 자 부르는 호방한 성격의 김성곤도 분노와 공포로 말할 수 없는 심정인 듯했다.
"그만하면 막강한 위치에 계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하극상을 했습니까?"
-"3선으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3선을 밀었던거요. 김형욱이가 남산에 앉아 도청하는 줄 다 알면서도 이만섭이하고 짜고 공화당 의원총회를 열어 '이후락.김형욱이 해임 안 시키면 우리는 3선 반대한다'고 강력하게 발언하게 해서 결국 그것을 관철시켰지. 그런데 막상 3선하고 나서 보니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더구먼. 박정희가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입법부는 제맘대로 못 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겠다 싶었지."
김성곤은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봐야 겠다'는 정치적 야망이 굉장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자기 장기인 자금 준비는 물론 사람준비도 상당하게 했다. 여야 할 것 없이 돈봉투로 정치권을 줄줄이 자기 사람으로 엮는 데 그치지 않고 '성곡재단'이라는 걸 만들어 언론계 사람들까지 포섭했으니 말이다. 오치성 사건이라는 것은 결국 그 같은 야심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는 72년 10월 유신 발표 당시 미국에 있었다. 하루는 김성곤으로부터 좀 보자고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로 갔더니 그가 성명서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성명을 하나 발표하려 하는데 이만하면 될까? 좀 봐 주시오."
읽어보니 영락없이 유신을 고무.찬양하는 글이었다.
"글쎄 이런 걸 왜 해야 되는지 저는 모르겠고, 그래서 성명서가 잘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르겠어요.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됩니까?"
-"허허, 유신으로 우리나라가 뒷걸음질할 것은 뻔한 일이지만 나야 한국에 벌여놓은 사업도 많고 한데 어쩌겠소. 한국에는 들어가 봐야 되겠고..."
김성곤은 그 성명으로 박정희가 자신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는 콧노래를 불러가며 자신이 동양통신 사주를 할 때 친하게 지낸 AP, UPI 관계자들에게 그 성명서를 보냈다. 그 덕분인지 그는 소원대로 귀국했다.
그러나 쌍용그룹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경제인으로서의 위상은 회복했으나 정치적으로는 끝내 재기하지 못한 채 폭음으로 건강을 해쳐 결국 75년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한 항명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내가 5.16 이후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이유는 배해무익한 사상논쟁을 재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51년 피난 수도 부산을 떠나 도쿄로 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조차 사상대립으로 인한 민족적 비극은 계속 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메이지 대학만 해도 학생회관에 민단 계통의 재일 한국학생동맹 사무실과 총련 계통의 유학생위원회 사무실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당시 학생동맹의 상임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가 문만 열고 나섰다 하면 복도에서 좌우투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신탁통치 문제, 6.25 책임 문제 등등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메이지대 유학생들은 좌.우로 갈려 일본 학생들이 보든 말든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곤 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좌익학생들은 동포이기 전에 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53년경 도쿄 신주쿠에서 우연히 제주도 출신의 한 법정대 유학생과 대화하게 됐다. 그의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제주 4.3 사건 때 우리 아버지, 형님이 모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었다. 그대로 있으면 나도 죽을 판이라서 일본으로 밀항해 왔다 이 곳에서 공부를 하려니 학비는 커녕 먹을 것도 없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총련을 알게 됐다. 거기서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관심없다.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이 진짜 같은 동포 아닌가."
개인적인 얘기를 구구하게 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실 비교적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다. 일본인들도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던 50년대에는 나는 별 걱정없이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니 배고픈 고학생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었다.
당시 민단측에서는 밀항자들은 물론 재일동포들에게도 장학금은 커녕 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반면 총련측은 동포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법정대 학생처럼 총련의 도움으로 공부한 사람들과 총련이니 민단이니, 빨갱이니 아니니 하고 싸워 봐야 무슨 민족적 이익이 있을 것인가.
더구나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오늘의 상황은 나로 하여금 새삼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박정희의 과거 전력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그의 독재체제를 떠받친 댓가로 온갖 영화를 누렸던 자들, 유신정권과 그 연장선인 5,6공에 유착해서 언론의 정도를 포기하고 사세를 키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온 [조선일보]를 위시한 후안무치한 언론들이 나에게 '친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친북인사'라고 물고 늘어지는 [조선일보]에게 나는 우선 묻고자 한다. 63년 필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는 왜 싣지 않았는가.
박정희는 총칼로 합헌 정부를 무너뜨린 후 민정 이양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엄청난 좌익전력을 철저히 숨기면서 오히려 정적과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처럼 거짓으로 쌓은 바벨탑 위에 군림한 박정희의 행태로 인해 그의 전력 문제는 박 정권 18년 내내 '확실한 유언비어'로 떠돌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를 혼란 시켰다.
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선거정국의 '단골메뉴'인 색깔론 시비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되고자 국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국민 앞에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서 지적돼야 할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연장인 5~6공 시대에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면서 그 밑에서 영화를 누렸던 자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망령을 미화하고 있는 자들은 색깔론 시비를 벌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63년과 64년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는 바람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낸 기사는 번번이 조선일보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지친 나는 아이들을 좀더 키워놓고 일을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64년 귀국해 [조선일보]측에 사의를 밝혔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일보측은 김형욱으로부터 문명자 특파원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다니 회사측에서는 내심 잘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쉬고 나서 다시 일하려던 나의 계획은 난관에 부닥쳤다.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 냈다는 얘기를 들은 [동아일보]의 천관우 편집국장이 대뜸 부르더니 무교동 해장국 집에서 선짓국 한 그릇을 사주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분과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열을 올리며 의기투합하다 보니 그분의 청을 거절 못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나는 결국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동아일보] 특파원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일본 육사 교장,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너 출세했구나"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정일권의 친일 전력에 대한 이야기 한토막을 덧붙인다. 지난 72년 나는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 두명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들을 만난 일이 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같이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어렵사리 만난 박정희의 두 동창생은 만군 시절의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 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 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정일권의 친일행적 역시 박정희에 견주어 만만치 않다. 나는 지난 80년 당시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배려로 중국을 방문했다. 내가 등소평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9년 최초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등소평은 백악관에서 취재에 열중하고 있는 기자단들 중에서 유일한 동양 여성인 나를 발견하고 중국계가 아닌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혹시 중국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일본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왔습니까?"
"지도상에서 당신 나라와 동쪽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왔습니다."
-"아 초센(조선)?"
"아니오 다이한민궈(대한민국) 입니다."
-"아, 다이한민궈."
그는 죽국인은 아니지만 동양계 여성이 백악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흐뭇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백악관에서 카터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등소평은 워싱턴에서 시애틀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 방문했는데 나는 그의 모든 일정을 수행했다. 등소평은 아침에 나를 보면 꼭 "식사 했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내 경험상 이 지구상에서 아침에 만나서 "밥 먹었어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밖에 없는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인사가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왕 선생에게 배웠던 중국어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 순회방문 일정이 끝난 후 나는 등소평에게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그는 이를 선뜻 받아 주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다 끝냈을 때 그는 "사정이 바뀌었다"면서 "인터뷰를 기사화 하는 것을 좀 미루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바로 취재수첩을 덮으며 아무런 이의없이 그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사정이 허락하는 날까지 오늘의 인터뷰는 기사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조속한 시일내에 우리 미국 기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부탁을 선선히 받아 들였고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80년 4월 나는 미국의 저명한 여기자 17명으로 구성된 취재단의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등소평 부수상의 배려로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연변 지방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그 때 나는 하얼빈에서 타냐 김이라는 조선족 교포 여성을 만났다. 타냐 김의 시아버지는 조선족이지만 중국에서 혁명열사로 대우받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일제 말기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도망 갔다가 해방 후 중국에 돌아 왔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정일권의 만주 광명중학교 후배라고 했다. 그래서 타냐 김은 일제시대 '헌병대장 정일권'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관동군 헌병대에 있었는데 때때로 말 타고 긴 칼을 차고 용정 쪽에 내려와서 '우리 조선사람들이 황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고 돌아가곤 했다. 철없는 젊은이 중에는 말 타고 칼 찬 정일권의 멋진 모습이 부러워서 관동군에 입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남편은 끝내 입대하지 않고 소련으로 도망갔다."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끝내 한 마디 참회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61년 11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했다. 일본측은 수상 관저에서 박의장을 위한 칵테일 파티를 열어 주면서 박정희의 일본 육사 시절 교장을 불러다 놓았다. 이 일본인 교장은 반말 비슷한 어조로 박정희에게 "너 성공했구나"라고 해 박정희가 숙소로 돌아와 몹시 투덜댔다고 한다.
이 얼마나 교활한 일본인들인가. 미래의 한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어차피 너는 우리가 키워 낸 용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앞으로 일본 대사만큼은 민족교육을 받은 새 세대가 부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었다.
2부 - 김대중 납치, 박정희와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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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의 첫 만남
박정희가 5.16 쿠데타 이후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것은 61년 11월 13일의 일이다. 이 방문을 성사 시키기 위해 박정희는 사활을 걸고 대미 로비를 벌였다. 이것은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전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던 민주당 전 총리 장면을 석방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20년 후인 80년 5.17 쿠데타(79년 12.12를 말함)로 집권한 전두환이 김대중을 석방하기로 약속하고 미국에 온 것도 그 전철을 되밟은 것이라 하겠다.
박정희가 도착한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영접사절로 나간 것은 부통령 존슨이었다. 존슨이 공항에 나가게 되기까지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박정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
박정희가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만난 후 주미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박정희와 악수를 나눴다. 나는 말했다.
"박의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둥그래졌다. 문명자 입에서 무슨 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했다.
"색안경을 쓰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서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박정희가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 제가 깜빡 했습니다. 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 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
박정희는 정일권 대사에게 물었다.
-"문 기자는 경상도 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대굽니다."
내가 박정희를 두 번째 만난 것은 63년 케네디가 암살된 후 박정희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장례식 참석차 미국에 왔을 때였다.
외국 원수로의 제일 먼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다. 그 무렵은 미.불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여서 공항에 나와 있던 기자들은 드골에게 미.불 관계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드골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무게가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에게 미.불 관계가 다 뭐냐? 노코멘트"
이것이 선례가 돼서 이후 속속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들은 애도의 표시로 아무도 코멘트 없이 조용히 미국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물론 교민들까지 공항에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자기 나라 국가원수를 열렬히 환영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이 추태를 보며 나는 박정희의 미국 도착 기사를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오늘 박정희 대통령 당선자가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다. 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이 곳 미국에 와서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하고 자신은 군의 본분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던 그였다. 그런데 그런 약속을 받은 케네디는 저격으로 서거했고, 그런 약속을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로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차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무릎까지 쌓인 눈 속에서 진행되었던 케네디의 취임식. 세계가 열광했던 그의 취임식에 참석해 나는 그의 말대로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찬란하게 꽃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몰랐던 나의 순진함 때문이었겠지만 당시 케네디의 죽음을 비통해 했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군홧발로 짓밟은 조그만 사나이를 지켜보는 심정이란 대체 어떠했을 것인가.
65년 5월 박정희가 존슨의 초청으로 세 번째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육영수 여사를 동반했다. 그 때 주미 대사관저에서 부페 형식으로 점심 식사가 있었다. 당시 존슨이 박정희에게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한일 회담은 이미 일단락된 상태이긴 했지만 한일협정 반대데모로 64년 6월3일 계엄령까지 선포된 상황이었던 만큼 굴욕 협상에 대한 국민적 반대 분위기는 여전했다. 게다가 의무부대나 태권도 교관 등 비전투부대라면 몰라도 남의 나라 전쟁에 피를 흘려야 하는 전투부대까지 파견하는 것에 대해 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상회담에서 오고간 얘기들은 비공개에 붙여졌다. 그래서 우리 기자들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박정희. 존슨 회담 내용 취재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그 때 육 여사의 통역관이자 비서인 나은실이란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육 여사님께서 문 기자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같이 가실까요?"
그것이 육 여사와 나의 첫 만남이엇다. 육 여사는 듣던대로 아주 조신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상냥하게 웃음 지으며 말했다.
-"말씀 듣던거와는 다르네요."
"어떻게 다릅니까?"
-"여성이 기자직에 있는데다 더구나 정치 기사를 쓰신다고 해서 저는 문명자 기자 하면 아주 험상 궂고 무서운 분이라고 상상했었어요."
쿠데타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자기 남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내 기사를 봤다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육여사가 또 물었다.
-"결혼 하셨어요?"
"네."
-"아이 그러세요? 저는 독신인줄 알았어요. 아이도 있으세요?"
"연년생으로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그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육 여사의 방을 나왔다. 그런데 나은실이 뒤쫓아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2백 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때 우리 특파원들의 체재비를 포함한 한 달 월급이 2백달러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나는 다시 육 여사에게 갔다.
"저 이 돈 못 받습니다."
-"이러시면 안되는데... 2백 불 밖에 안 되는 걸요. 아이들 선물이라도 사주라고요."
"안 되는 건 바로 접니다."
나는 육 여사에게 돈봉투를 돌려주고 방을 나왔다. 이 작은 사건이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육 여사에게 남긴 듯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실크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 했을 때 육 여사는 실크 한 감을 상자에 넣어 내게 보내왔다. "촌지를 안 받으시는 문 기자님의 원칙은 존경합니다만, 이것은 전세계에 한국 실크를 선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하는 말을 전해 왔기에 나도 감사하게 받았다. 실제로 나는 69년 닉슨. 박정희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후의 만찬장에 그 실크로 지은 옷을 입고 나갔다. 그걸 본 육여사는 크게 기뻐했다. 미국 장관 부인들도 내 옷이 좋아 보였던지 내가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실크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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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박정희가 뉴욕으로 떠난 후였다. 백악관 기자실에 있는데 존슨 행정부의 백악관 대변인 빌 모이아스가 "헤이 쥬리"하며 손짓을 했다. 따라가 보니 AP 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 로이터 통신의 해리 등 몇몇 기자들이 있었다. 빌 모이아스는 나를 포함한 기자들을 백악관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2층은 '리빙쿼터'라고 해서 대통령 일가의 살림집으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올라가 보니 시크릿 서비스(비밀경찰)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변인이 "나 빌 모이아스다"라고 해도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까다로운 확인을 거쳐 거실로 들어가니 존슨이 앉아 있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박정희와의 회담이 뜻대로 잘 돼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그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 문제에 대해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다.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가 먼저 물었다.
"월남에 한국군 전투부대가 가게 됩니까?"
존슨이 신이나서 답했다.
-"그렇소."
내가 물었다.
"간다면 병력 규모는? 그리고 한국군을 누가 지휘합니까?"
존슨이 답했다.
-"우리는 1개 사단을 원합니다. 한국군은 웨스트 모어렌드 장군(월남전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갈 것이오."
내가 다시 물었다.
"박 대통령이 사단 병력 파병에 동의 했습니까?"
-"그렇소."
"그러면 기사 내보내도 됩니까?"
빌모아스 대변인이 막아섰다.
-"피피(PP - 박정희의 약칭)가 아직 미국에 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이 건이 터지면 곤란합니다."
존슨이 모이아스에게 물었다.
-"그가 언제 떠나지요?"
빌이 답했다.
-"뉴욕에서 LA로 해서 하와이를 들러 가면 3일은 걸릴 겁니다."
존슨이 말했다.
-"쥬리, PP가 떠난 후에 내 이름 인용하지 말고 써주시오."
나는 물었다.
"백악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하면 되겠습니까?"
존슨이 대답했다.
-"아니, 백악관도 빼 줘요."
나는 다시 물었다.
"지극히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고 하면?"
존슨이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오"
박정희가 미국을 떠난 후 나는 존슨과의 대화 내용을 기사로 썼다. 대부분의 미국 기자들은 국방성에서 브리핑 받은대로 "한국의 의료부대, 태권도 교관, 공병대 등 비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파병될 것" 이라고 썼음은 물론이다. 백악관을 출입하는 미국 기자들의 코가 납작해진 사건이었다.
빌 모이아스가 특별히 나를 그 자리에 불러 준 것은 존슨의 지시때문 이었다. 존슨이 나를 배려해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61년 4월 한국 기자로서 백악관을 출입하게 되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 기자들에게 뒤지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 성실하게 교류하면서 인맥을 넓혔다.
처음 나에게 많은 미국 친구들을 소개해 준 사람은 오드리 코헨 뉴욕대 총장이었다.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을 수석졸업한 재원으로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던 50년대에 일본을 방문했는데 그 때 나는 그녀의 통역을 맡았다. 그 인연으로 그녀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해졌다. 내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미국 친구중 주요 정.관계 인사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케네디 행정부의 백악관 대변인 P.L 세런자는 그녀로부터 소개 받은 사람이다. 세런자는 내가 미국 민주당 내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 주었다.
내가 미국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미시가 출신의 매코믹 의원이었다. 61년 1월 케네디 취임식이 끝나고 열린 무도회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그는 나중에 하원의장을 거쳐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직을 역임한다.
미국인들과 교우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생일 파티에 초대될 정도가 아니면 친구라고 하기 힘들다. 매코믹 의원은 자기 집에 우리 가족들을 초대해 놓고는 자기가 만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먼저 한 숟가락 떠먹고 그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숟가락 씻지도 않고 그냥 주나" 하면 "씻어야 하나?" 하며 웃곤 했다.
미국인들은 이를 '바디 바디(body body)라고 하는데 친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서 나는 많은 국회의원들을 알게 되었다. 먼저 소탈하면서 리버럴해 좋은 할아버지 같은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험프리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 했을 때 험프리 부인이 우리나라 전통 자수를 수놓은 쿠션을 보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쿠션의 스펀지를 빼 버리고 그녀에게 선물했다. 내집에 있는 것보다 험프리 의원 집에 있는 편이 한국을 알리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 아닌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미네소타 출신의 돈 프레이저 의원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레이저 의원의 아버지는 미네소타 대학 법학과 학장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텍사스촌 출신이었는데 그 부인인 레이디 버드는 텍사스 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했고, 기자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오스틴 텍사스 방송국을 가지고 있는 등 경제적 기반이 상당한 여성 사업가였다. 그래서 그녀는 기자들을 항상 잘 이해해 주었다. 존슨 부인을 우리 집에 초대해 불고기를 대접한 일이 있는데 그가 벽에 걸려 있던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었다. 나는 말했다.
"이것은 코리아의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다. 서양화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우리 동양의 깊이가 있다. 당신이 그걸 아는 것 같아 기쁘다. 당신에게 선물하겠다."
한번은 레이디 버드가 백악관 2층 거실에 진열되어 있는 골동품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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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리, 이건 타이완의 장개석이 준 것인데 진짜일까요?"
"중국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처럼 만드는 게 특기예요. 중국놈들 주는 것 치고 진짜는 없어요."
존슨 부인은 나중에 "감정해 보니 정말 가짜라고 해요" 해서 함께 웃은 일도 있었다.
내가 존슨 부부를 좋아한 것은 단지 취재원으로서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존슨은 미국 국내적으로 본다면 나름대로 평가해 줄 만한 사람이었다. 케네디는 프론티어 정신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나 미완성의 상황에서 죽었고, 그가 못 다한 흑인들의 인권 문제등을 제도적으로 마무리한 사람이 바로 존슨이었다.
또한, 존슨 부인은 대통령 부인이 되면서 "일하는 퍼스트 레이디"가 되겠다고 역설한 대로 5년 백악관 생활 동안 '가난 퇴치운동'과 '도시미화 운동'을 열심히 전개했다.
워싱턴에는 '미국을 아름답게'라는 슬로건 아래 '도시 미화 위원회가 조직 됐고, 레이디 버드를 비롯한 미화위원들은 총 20만 마일에 걸쳐 미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직접 나무 심기도 하고 시민들이 이 운동에 참가하도록 격려 하기도 했다. 레이디 버드는 워싱턴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전 미국을 순회하면서 국립공원의 숲가꾸기는 물론 고속도로 주변에 심는 나무에서부터 가정집 울타리로 심는 수종에 이르기까지 나무와 숲을 가꾸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여행을 떠날 때면 존슨 부인은 나에게 함께 가기를 권하곤 했다. 미국 기자들 역시 힘 있을 때는 아부하고 권자를 떠나고 나면 냉정하게 돌아서는 속성은 마찬가지다. 예술가 같은 기질의 재클린 케네디와는 달리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에 상당한 규모의 기업을 끌어 온 기업가였던 그녀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별 이해관계 없는 외국인이면서 솔직한 충고를 잘 하는 내가 편했을지 모른다.
존슨이 월남 파병 문제를 발표하면서 빌 모이아스를 시켜 나를 부르게 한 것은 한국 신문에 이 사실을 발표해 파병을 기정사실화 할 상황적 필요도 작용 했겠지만 이 같은 인간적 신뢰의 영향도 컸던 것이라 생각한다.
66년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수행기자로 서울에 들어왔다. 나는 그 때 다시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있었다. 그 때 나는 돈암동 언니 집에 묵었는데 육영수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우리 사모님이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청와대로 좀 들어 오실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점심 먹다가 잠시 인사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육여사의 부름을 받아 청와대까지 찾아 들어가는 일은 영 내키지 않았다. 상대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독재자의 부인이고, 나는 태초부터 그 정권을 맹렬히 비판해 온 정치부 기자가 아닌가. 육 여사가 나를 부르는 데는 같은 여성인 그가 나서서 남편에 대한 비판을 완화해 보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나은실에게 대답했다.
"취재 일정이 너무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
사실 상당히 바쁘기도 했다. 그래도 나은실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모님께서 꼭 문 기자님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어 하시니 좀 들어오시지요."
그녀가 계속 강권하기에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내가 그 분 보좌관이오?"
안되겠다 싶었던지 나은실이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육 여사가 직접 전화기에 나왔다.
-"문 기자님, 좋아 하시는 조개 된장국 끓여 놓을테니 오세요. 우리 같이 점심 먹어요."
하는 수 없이 나는 취재 일정을 마친 날 청와대로 갔다. 가 보니 육여사의 접견실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이 방이 원래 이렇게 온통 핑크색입니까?"
-"아니에요. 미시즈 존슨이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번에 핑크룸으로 바꾸었어요."
대통령들이 정상회담을 갖는 동안 퍼스트 레이디끼리는 티모임을 갖는다. 그 때 이 방에서 차를 마실 존슨 대통령 부인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핑크색 벽지를 새로 발랐다는 얘기였다. '참 세심한 여성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 찔러 보았다.
"청와대에 오래 계실랍니까?"
육 여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게 어디 우리 집입니까?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만 거처하는 곳이지 이 곳은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닙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라고 느껴졌다. 육여사는 얘기 중에 존슨 대통령 부부의 숙소인 워커힐 호텔 에메럴드 하우스 앞에서 있었던 소동에 대해 묻기도 했다.
"김현철 주미대사 부인이 장총리(장기영)에게 여러 사람들 앞에서 '팬티를 벗으라'고 고함을 쳤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육여사는 어찌 그런 상스러운 언행을 했을까' 하는 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다.
"누가 그렇게 보고를 했습니까? 김 대사 부인이 언성을 좀 높이긴 했지만 팬티 벗으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렇게 들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의전상 주미대사가 따라다니며 영접을 해야 하는데 환영위원장을 맡은 장기영 부총리가 행사 때마다 매번 김현철 대사를 따돌리고 대통령을 따라나섰던 모양입니다. 그래가지고야 현지 대사가 면목이 서질 않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업무에 지장이 많지요. 김 대사는 원래 점잖은 분이라 그런 처사에도 묵묵히 말이 없는데 부인이 원래 괄괄한 분이거든요. 참다못한 미시즈 김이 에머럴드 하우스 앞에서 장기영 씨에게 '주미 대사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겁니까? 대사가 현지에 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엿을 먹이는 거요? 이런 식으로 하려면 부총리로서 차라리 웃통을 벗으세요!' 하고 소리친 겁니다."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장기영씨가 좀 심했어요. 장기영 씨가 하도 존슨 대통령 옆에 붙으니까 대통령 부인 비서실장 엘리자베스 카펜터가 존대도 안 하고 '헤이 유, 나가, 저쪽으로' 하고 소리친 일도 있어요. 그 여성은 존슨도 두 손 번쩍 들 정도로 괄괄한 사람입니다."
사실 장기영은 능히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 한국일보 사옥에 불이 났을 때 갑자기 소방수 손에서 소방호스를 뺏어 쥐고는 "야, 사진 찍어! 사진 기자 없어?" 하고 소리 쳤다는 인물이니 말이다.
육여사는 내가 일어서려고만 하면 버튼을 눌러 "차 좀 가져오세요" "수박 좀 가져 오세요" 해가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보니 이날 저녁 나는 박정희 가족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박정희 부부와 근혜, 지만이 참석했다. 둘째 딸 근영은 외부 손님이 오면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박정희는 식사하는 모습도 특징적이었다. 육여사는 현모양처답게 식사시간 내내 "여보, 이것 좀 드셔 보세요. 건강에 좋대요. 저것도 드셔 보세요. 맛이 괜찮아요" 하며 그저 남편을 챙기느라 자신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한 번은 청와대에서 식사하는데 스파게티가 나온 일이 있었다.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요리사들이 스파게티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데 뭣 때문에 이런 음식을 합니까?"
-"그 분이 워낙 고기를 잘 안 드셔서요. 미트 소스로 해서 섞어드리면 좀 드실까 해서 해 봤어요."
그러나 현모양처의 이같은 권유에도 박정희는 아무 소리 없이 큰 대접에다 밥과 반찬을 붓고 쓱쓱 비비더니 밥을 떠먹는데 그것도 숟가락을 이빨로 긁어서 먹는 것이었다. 아마 그가 어린애 였다면 "복없게도 먹는다"고 어른들에게 야단깨나 맞았을 것이다. 아들 지만은 저녁 식가사 그저 우유 한 잔으로 끝이었다.
안주인의 성품 때문인지 식탁은 진수성찬은 아니었으나 건강식이었다. 나는 식탁에서 듬뿍장을 발견하고 매우 반가웠다.
"어머, 딩기장이 있네요."
육여사가 내게 물었다.
-"딩기장이라니요?"
"햇보리로 만든 듬뿍장을 우리 고향에서는 딩기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박정희가 불쑥 말했다.
-"경상도 사람 아니면 그 맛을 모르지."
육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통하시네요."
밥을 먹으면서 나는 그들 부부에게 말했다.
"이 나라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촌지만 주면 없는 사실도 있는 사실로 만들어 조우찡(촌지를 받고 사실과 다르게 우호적으로 써 주는 기사)이나 써대니...
[경향신문]도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는게 좋겠어요."
사실 나는 그 때 [경향신문]이 박정희의 것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육여사가 말했다.
-"조우찡 기사도 경우에 따라서는 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경향신문]도 [서울신문] 같이 되면 저는 특파원 그만 둘랍니다."
그 때까지 식탁에 앉아 있던 근혜가 자기 어머니에게 물었다.
-"조우찡이 뭐예요, 엄마?"
나는 "근혜야. 너도 그정도는 알아둬야지" 하며 그애에게 조우찡과 촌지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육여사가 말했다.
-"근혜야, 이제 그만 올라가서 자거라."
근혜가 올라가고 난 후 박정희가 나에게 말했다.
-"문기자님 조국에 돌아와서 일하실 생각 없습니까? 여성 외무장관 한번 하시면 어떻습니까?"
"장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 시키시지요."
그러자, 박정희는 '주일 대사는 어떠냐, 유엔 대사는 어떠냐' 하더니 심지어 '경북 도지사 해볼 생각이 없는가' 하는 소리까지 했다.
나는 정색을 하고 취재수첩을 식탁위에 꺼내놓고 말했다.
"저는 평생 기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박정희는 신탄진 담배 한 가치를 뽑아 입에 물더니 불을 당겨 길게 한 모금 내뿜었다. 한 인간으로서 박정희에게는 분명 소박한 데가 있었다 그는 그 날 잠바 차림으로 나타났다. 대화 중에도 자기를 과시하며 으스대는 법이 없었고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을 들으면 면구스러워서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었다.
약간 어색해 하면서 씩 웃는 수줍은 웃음은 그의 최대 매력이라 할 것이다. 그처럼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순진한 미소를 띄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 날 식사 초대에서 박정희에게 '대통령 각하'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앗다. 박정희를 부를 때는 주로 '보이소' 또는 '으요, 으요' 했다. 그랬더니 박정희가 말했다.
-"거 수십년 만에 으요, 으요, 소리 듣네."
육여사가 남편에게 물었다.
-"으요, 으요가 뭐예요?"
-"경상도 사람 아니면 이해를 못해."
수줍읍을 타는 성격이면서도 대중 앞에 서면 박정희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내성적이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독종. 이것이 내가 관찰한 인간 박정희의 면모였다.
66년 존슨 방한 때 참으로 웃지 못할 소동이 하나 있었다. 당시 백악관 수행 기자 중에는 UPI 통신의 메리멈 스미스라는 기자가 있었다. 스미스는 달라스 텍사스에서 케네디가 암살 됐을 때 세계적인 특종기사를 날렸던 기자다.
당시, 대통령 차 바로 뒤에는 미국의 양대 통신사인 AP와 UPI의 차가 따라가고 있었다. AP 기자는 더글러스라는 영감이었다. 원래 AP와 UPI는 기사 쓰는 스타일이 다른다. AP가 사건의 배경에서부터 주변 스케치까지를 상세하게 미주알 고주알 늘어 놓으면서 점차 파고를 높여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적인 사실을 전하는 스타일이라면 UPI는 제목으로 뽑힐만한 핵심적인 사실부터 말해 놓고 이후 중요한 순서대로 뉴스를 전하는 스타일이다.
암살 현장 부근에는 공중전화가 단 한 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더글라스 영감이 먼저 수화기를 집어들고 미주알 고주알 기사를 부르기 시작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메리멍이 코카콜라 병으로 영감의 머리를 쾅 때렸다고 한다. 깜짝 놀란 더글라스 영감이 수화기를 놓치자 그 수화기를 낚아 챈 메리멈은 UPI에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됐다. 재클린 여사는 '안 돼' 라고 소리쳤다."
(President Kennedy shot, Jakey said 'Oh, no!')
이 때 'Oh, no!'는 미국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문장이다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재클린이 외치는 외마디 비명은 아무리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라도 타민족으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것이다. 이 문장이야 말로 메리멈 스미스 기자의 세계적이 특종이었다.
존슨 방문 때 대통령 일행과 수행 기자들은 워커힐 호텔에 묵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내 방에 매리멈 스미스가 전화를 걸어 외쳐대는 것이었다.
-"헤이 쥬리, 헬프 헬프, 네 도움이 필요해!"
"왜 그래? 어느 놈이 널 잡으로 왔니?"
-"아니, 여자가 들어와서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간다. 제발 도와줘!"
나는 매리멈의 방으로 갔다. 세상에 맙소사. 웬 콜걸이 메리멈의 방에 들어와 앉아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이 사람이 필요 없다는데 왜 안 나가고 괴롭혀요?"
-"이분들 즐겁게 해드리라고 돈을 벌써 받았거든요."
"뭐요? 누가 아가씨한테 그런 일을 시켰어요?"
알고보니 홍종철 공보부 장관의 짓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 방해 된다고 나가 달라니 가면 될 거 아니에요?"
-"복도에서 사람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금방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양말이라도 빨아드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복도를 내다 보니 과연 중앙정보부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슬렁 대고 있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다음 날 홍종철 공보부 장관을 찾아 바로 들이댔다.
"홍장관 , 왜 이리 나라 망신을 시켜요? 백악관 기자단에 여자를 붙여요?"
홍정철은 '김형욱 부장이 한 일' 이라며 쩔쩔맸다.
나는 말했다.
"이것봐요. 신문이나 주간지라면 또 몰라도 통신사 기자들이 밤에 여자하고 놀 새가 있는 줄 알아요? 밤에라도 대통령이 뭐 할지도 모르고 밤새 타이프 치느라 잠도 못 자는 사람들 한테 여자를 들여보내 어쩌겠다는 거요?"
홍장관은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기자에게 여자를 붙여 주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그것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니.
65년 박정희 . 존슨 회담 이후 한국 국회에서는 전투부대 월남파병 동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 됐다. 그 후 맹호부대, 청룡부대, 백마부대가 줄줄이 월남으로 떠나면서 박 정권은 그들이 벌어 들이는 외화로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미국은 미국대로 미군의 3분의1 수준의 급료로 월남전에 투입할 수 있는 용병인 한국군의 존재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월남 특수'는 우리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피묻은 돈이었다. 국내에 반대 여론이 없을 수 없었다. 이래저래 한미 간에는 월남 추가 파병 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었다.
67년경으로 기억된다. 나는 국무성 차관보 윌리엄 반디의 방에 갔다. 비서에게 물었다.
"있어?"
-"예"
나는 반디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가 보니 반디는 팔짱을 끼고 칵테일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있었고, 김현철 주미 대사는 그 발바닥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월남전에 부대를 더 파병할 용의가 있다."
-"그게 당신 개인 의견이냐, 정부 의견이냐?"
한마디로 주미대사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 대사가 만나봐야 차관보급이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는 청와대를 제집처럼 드나들지 않는가. 월리엄 반디는 나를 보더니 "아임 소리" 하면서 다리를 내렸다. 나는 화가 솟구쳤다.
"대사님은 구두 밑바닥을 쳐다보고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나서 반디에게 쏘아 붙였다.
"룩(Look)!"
원래는 '미스터 세크러터리' 해야 하지만 나는 구두 밑바닥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동양에서는 칵테일 테이블에다 다리 올리고 사람 만나는 법은 없어!"
대사관에 와서 김현철 대사는 '문기자가 그렇게 말해서 속이 시원했다' 고 했다. 그러나 내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김현철 대사는 내성적인 성격에다 무슨 말을 해놓고는 "이건 정말입니다" 하고 덧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종종 "그럼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까?" 하고 그를 놀리곤 했다.
그러나 반디가 주미 대사를 업신여기는 현장을 본 그 날 만큼은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대사님, 외교관이신데 담뱃진이 그렇게 이에 시커멓게 눌어 붙어서야 되겠습니까? 스케일링 좀 하세요."
김현철 대사의 답이 걸작이었다.
-"거 꼭 해야 됩니까? 시간이 없어서... 이건 정말입니다."
월남전이 한창 악화일로를 치닫던 68년 4월 1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박정희.존슨 회담이 개최 되었다. 그 당시 미국에선 월남 전쟁 반대의 소리가 날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을 때였다. 이 정상회담은 존슨의 요청으로 열렸다. 월남에 추가 병력을 파병해 달라는 것이 존슨의 의도인 것으로 전망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경향신문] 주미 특파원으로 존슨 대통령을 수행해 정상회담 전날인 4월 17일 하와이에 도착해 존슨 대통령의 일정을 취재한 다음 미국측 일행들과 함께 공항에 가서 박 대통령의 일행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청와대 출입기자 등 40여 명이 온다고 했다. 이 정보를 듣고 미국의 양대 전신회사 RCA와 ITT사 측에서는 제각기 한국 기자들이 자기네 시설을 사용하도록 손님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에 분주했다. 양사는 기자들이 묵을 호텔 프레스 룸에 텔렉스 시설과 수십대의 타이프 라이터를 마련해 놓고 한국 기자들을 위해 하와이 한인교포 여성이 내게 물었다.
-"한국 기자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저는 한국 기자들을 위해 ITT사에서 채용한 통역자 입니다. 이번에 한국 수행기자들이 40명이 넘는다지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제 임무는 한국 기자분들이 될 수 있으면 ITT 텔렉스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기자분들의 편의를 위해 리무진을 10대나 마련해 놓고 무료로 이용하시도록 준비해 놓았습니다."
나는 당시까지 미국에서 18년가 기자 생활을 했지만 전신 회사측에서 기자들을 이렇게 극진하게 대접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다.
"우리 교포시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워싱턴에서도 보면 RCA와 ITT 두 회사의 텔렉스가 항상 프레스 룸에 같이 설치되어 있는데 기자들은 언제나 기사를 빨리 송신해 주는 텔렉스를 사용합니다."
그 중년 여성의 우리말은 마치 이승만이 8.15 직후 환국했을 때의 발음을 연상하게 했다. 그래도 40대에 접어든 한국인 2세가 우리말을 잊지 않고 그만큼 한다는 것이 기특하다는 생각에 나는 한국 수행 기자들의 생리를 좀더 설명하면서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야기 하는 동안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모두들 공항 건물로 달려들어갔다. 그 중년 교포여성은 "하와이 기후는 이맘때면 청천벽력처럼 소나기가 확 퍼붓다가 곧 언제 비왔냐는 듯이 활짝 개인다"면서 '이런 일이 하루에 몇 번씩 있다' 고 했다. 곧 그녀가 말한대로 해가 나기 시작했다. 이 때 박정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환영 영접식이 간단히 끝난 다음 존슨 대통령은 회담장소 겸 숙소인 록펠러 일가의 별장으로 갔고, 박정희 일행은 카하라 힐튼 호텔로, 한국 기자들은 프레스 센터가 있는 '이리가이 호텔'에 가서 각각 짐을 풀었다. 존슨 수행원들과 미국측 기자들도 이 호텔에 묵었다. 박정희 일행이 묵은 카하라 힐튼은 와이키키 해변 중에서도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은 하와이 최고의 호텔이었다.
특히, 이 곳은 일류 불란서 요리사들을 두고 식도락을 즐기는 손님들을 즐겁게 했기 때문에 항상 세계 갑부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 룸에 들어가니 한국 수행기자들은 하나도 없고 미국 기자들은 '도착.전망' 기사 쓰기에 바빴다. 나 역시 기사를 쓰고 있는데 조선일보의 선우연 기자가 와서 말을 걸었다.
-"문 선배, 한국서 수행온 우리 기자들은 대표를 선정해서 그를 통해 일괄해서 보내기로 되었습니다만, 이것만은 내가 별도로 특종기사를 보내야 겠는데 영역하는 걸 좀 도와 주십시오."
"무슨 특종 기사인데요?"
그가 내미는 기사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현다.
-"하늘도 박대통령을 알아보는지 박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 하자마자 소나기가 멈추고 햇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요. 요즘 하와이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 한대요."
선우 기자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하와이 일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이 기사는 저 혼자 보내는 것이나 딴 기자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기사를 보낸 사람은 40여 명의 수행기자 가운데 선우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한국에 발송된 기사는 청와대 수행 기자단 중에서 당번을 맡은 기자가 국제 전화로 청와대 기자실에 대기중인 서울 당번에게 불러주면 그가 그것을 받아써서 각 사에 배부하고, 각 사에서는 그 기사를 각 사 스타일로 다시 써서 수행기자의 이름을 달아 싣는 식이었다.
박정희가 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각 신문사 기자들은 제각기 기사를 보냈었다. 이런 전례가 있었고, 또 세계 어느나라 언론이라도 기자라면 각자 자기가 취재한 기사를 보내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에 RCA와 ITT 두 회사에서는 그런 거창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6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두 전신회사는 내내 헛탕만 치고 말았다.
4월 18일 미국 대재벌의 하나인 로렌스 록펠러 씨의 하와이 별장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이 열렸다. 회담장 주변에는 존슨 대통령 경호원들과 1백여 명의 주정부 경찰관들이 동원되어 철저한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백악관측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별장 입구에 특별 전화를 가설했다.
회담이 한창 진행중일 때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 근무 중이던 한 KBS 아나운서가 이 전화에 대고 방송하는 보도 내용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4월 18일 오전 10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앞선 4월17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하와이에 도착 했을 때 30만 시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이거 봐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그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떡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기사 보낼 것이 뭐 있어야지요."
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KBS 중계 전파를 타고 한국 국내 청취자들에게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4월 18일 회담에서 존슨은 비공개리에 박정희에게 월남전에 추가 병력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리 기자들은 그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이 부분은 비공개로 처리 되었기 때문에 확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회담이 끝난 후 이 사실이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정보를 한국 언론에 흘린 주범은 미국 공화당측 인사로서 타이완의 로비스트인 엔나 셰놀트였다. 그녀는 당시 미국 내의 반전 무드에 편승해 존슨에게 타격을 주어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과 친한 정일권에게 존슨의 추가병력 요청 사실을 흘렸던 것이다.
그 날 저녁 필자가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 룸에 있는데 박정희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쪽지를 보내 왔다.
-"PP(박정희)가 꼭 만나고 싶어하니 오늘밤 8시까지 카하라 힐튼 호텔로 와 주시기 바람."
이참에 월남 추가 파병 여부를 확실히 캐야겠다 싶었다. 그 시간에 힐튼에 갔더니 박종규가 마중 나왔다.
-"아, 문 기자님, 이리 오십시오."
박종규는 나를 박정희에게 데리고 갔다. 나는 돌아나가는 박종규를 불러세웠다.
"이거 보세요. 기념이니 사진 하나 찍어 주세요."
박정희와 함께 찍은 그 사진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박박 찢어 버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문 기자는 존슨이 진짜 추가 병력을 원하고 있다고 봅니까. 우리가 병력을 보내 주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나는 답했다.
"존슨이 추가 병력 파견을 원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와 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전망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이야기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회담 마치시고 하와이 교포들을 만날 때 닥터 윌바 최를 꼭 만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이 곳 유지인데 4.19이후 승만 리가 하와이로 도망올 때 전용기를 보내 데리고 와서 끝까지 돌봐 준 사람입니다."
나는 특파원 생활 초기인 60년대 초반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교포 곽 노인으로부터 구한말 영국인 노예 상인들에 의해 하와이로 팔려왔던 교포들의 애환에 대해 들은 일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교포들을 사탕수수 농장에 팔았고, 그들은 한 달에 여자는 10달러, 남자는 15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일했다. 그러다 총각 귀신이 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제하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하와이에서 활동했을 때 사탕수수밭에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그를 지원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승만은 그들에게 공채를 팔기도 했다. 100달러 짜리와 10달러 짜리가 있었다. 곽노인은 나에게 문제의 공채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이 독립되면 이 국채를 금화로 바꾸어 준다. 이승만, 김규식" 이라고 한글과 영어, 한자로 씌어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승만 리가 이 공채를 바꾸어 줬나요?"
곽 노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람 봐서 바꾸어 주었어요. 이승만을 지지한 국민회 사람들에게는 하와이 총영사가 공채를 모두 달러로 바꿔 줬는데 나 같은 안창호 선생 계열 사람들은 달러는 커녕 FBI에다 공산당이라고 찌르는 바람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곽 노인은 금고를 열더니 100달러 짜리 공채들은 자손에게 줘야 한다며 10달러짜리 공채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존슨 부인, "전 세계 퍼스트 레이디 중 육 여사가 최고"
68년 말 존슨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퇴임을 며칠 앞두고 미시즈 존슨의 비서실장 엘리자베스 카펜터가 나를 불렀더.
-"미시즈 존슨이 이것을 쥬리에게 주라고 했어."
그것은 자개로 대통령 휘장을 꾸민 나전칠기 상자에 들어 있는 사진첩이었다. 67년 존슨 방한 때 육영수 여사는 미시즈 존슨이 청와대에서 찍은 사진들을 '사진첩'으로 꾸며 선물했던 모양이었다. 미시즈 존슨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그것을 나에게 선물하고 고향인 텍사스로 돌아갔다.
미시즈 존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육여사를 '가장 완벽한 퍼스트레이디'라고 극찬했다.
"나는 세계 각국을 방문해 각국 퍼스트 레이디들의 접대를 받아 봤지만 한국의 미시즈 박이 최고다. 그녀는 내가 폐경이 되자 않았다는 것까지 미리 알아보고 숙소인 워커힐 호텔 에메럴드 룸 내 방 서랍에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았다."
나중에 청와대에서 육여사를 만났을 때 나는 물었다.
"미시즈 존슨이 왔을 때 경도대까지 준비해 놓으셨다던데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어요? 미시즈 존슨은 나이도 많은데."
육여사는 말했다.
-"나이 50이 넘어도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미시즈 존슨이 그렇게 썼어요."
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3선 개헌과 장기 집권은 야당만 반대한 게 아니었다. 공화당 안에서도 박정희의 후계를 노리던 김종필계는 3선 개헌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박정희는 김종필 후계구도 준비를 위해 김종필 계가 결성한 '국민복지회'를 빌미로 삼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김종필계 엄단을 지시했다. 이로써 김종필계는 중정으로 연행돼 혹독한 대접을 받은 끝에 모두 공화당에서 제명 됐고, 김종필 자신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공화당 내의 반대파는 평정됐지만 6월 부터는 학생들의 3선 개헌반대 데모가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는 김형욱이 돌격대장이 되어 학생 데모를 물리력으로 진압하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등 3선 개헌안 날치기 통과를 준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이후락 비서실장이 주동이 되어 박정희. 닉슨 간의 한. 미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국민들의 3선 개헌 반대 여론을 '미국의 지지'를 빌어 무마하려는 의도였다.
69년 6월 김동조 주미대사는 한. 미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외교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측도 박정희의 의도를 이미 환히 알고 있었다. 한국 내에서 학생들이 치열하게 전개하는 3선개헌 반대 데모가 전 국민적 공감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박정희는 3선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임하겠다고 국회와 국민을 협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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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은 닉슨 행정부가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한다는 인상을 줄것이 틀림없었다. 닉슨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우방국이며 특히 월남 참전국인 한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표면적인 의제로 내세워 만나자는데 닉슨으로서는 그를 만나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닉슨은 자신의 선거 공약에 따라 아시아에서 미군을 철수 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밝히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닉슨 독트린'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2만 명의 미군이 철수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한.미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이 오판할 우려도 있었다. 닉슨으로서는 박정희를 설득해 자신의 공약대로 미군을 무리없이 철수해야 한다는 과제도 떠안고 있었다.
결국, 워싱턴 당국은 한.미 정상 회담을 열되 서울측이 요청한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 시스코에서 회담을 갖기로 결정했다. 서울측은 백악관에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데만 고무되어 준비에 바빴다. 회담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샌클라멘테 백악관'이라 불리는 닉슨의 저택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회담 장소는 샌클라멘테 백악관도 아닌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호텔이었다. 정상회담이 호텔에서 열린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미국측은 한.미 정상회담 장소를 '백악관' 이란 지명이 전혀 붙지 않은 일반 호텔로 격하시킴으로써 미국이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한.미 양국 국민에게 애써 남겨 놓으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측은 일단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언론을 이용해 미국이 3선개헌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식으로 전 국민에게 선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호텔 정상회담'을 이의없이 수용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69년 8월 21일~23일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렸다. 필자를 비롯한 워싱턴 주재 각사 특파원 5명은 회담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 서울서 수행한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합류해 취재하게 되었다.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에서도 "수십만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 보도는 KBS 기자에 의해 재연되었다. 회담 기간중 샌프란 시스코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건물 정문 입구에 하나, 거기서 좀 떨어진 한 호텔 국기 게양대에 하나 해서 총 두개였을 뿐이었다.
이 호텔에는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측에서 전세버스로 동원한 30여 명의 교포들이 묵고 있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앞 공원은 수백 명의 월남전 반대 데모 군중들의 고함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그들은 '미국 고용병의 왕초 박정희는 물러가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북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장면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한복을 입고 나와서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원 코리아 예스! 투 코리아 노!"
2백여 명의 재미 교포들은 박정희에게 "삼선 개헌을 반대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그 사실은 [뉴욕타임스]에 보도 되었다. 나는 정상회담 기사에 곁들여 이 사실도 스케치해 보냈지만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데모 대목은 실종되고 없었다.
한국 기자들이 기사를 보내는 방법은 하와이 박정희.존슨 회담때와 똑같았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 거의 전원이 따라왔는데도 기사를 보낸는 것은 당번 기자 한사람 뿐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있었던 만찬회장에서도 백악관 공보실측은 한국 기자들로 인해 한바탕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당초 백악관측에서 발표한 만찬회 참석 풀(Pool) 기자 명단에는 5명의 미국 기자와 1명의 한국기자(필자)만이 들어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청와대 기자단과 다른 주미 특파원들이 한숙 한국 공보관장에게 자신들도 만찬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한숙 관장은 백악관측에 간청해서 어렵게 5명의 한국 기자들의 좌석을 마련했다. 한숙 공보관장은 만찬에 참석하게 된 학국 기자들이 턱시도를 빌리는 것까지 주선해 주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만찬회장에 가 보니 한국 기자단 중에서 그자리에 나타난 것은 [신아일보] 기자 한 사람 뿐이었다. 신아일보 기자에게 "왜 혼자 왔는가"라고 물었더니 "내가 만찬회 담당 풀 기자로 선정되어 혼자 나왔다" 면서 "다른 기자들은 시내로 쇼핑 나갔다"고 했다. 추가 좌석을 마련하느라 골머리를 썩였던 백악관 공보실 관계자들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상에 맡긴다.
만찬회에서는 먼저 초청국측 대통령이 인사말과 토스트(축배의 말)를 한다. 그 후 초청된 나라 대통령이 답사를 겸한 인사말을 한다. 식사가 끝나면 다른 방으로 이동해 '애프터 디너 드링크' 혹은 커피잔을 들고 담소한다. 이야말로 기자들이 양측 대통령 부처 및 각료들과 어울려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특별 취재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 날 밤 만찬회에서는 육여사가 기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육여사는 패트리셔 닉슨 여사를 비롯해서 만찬회에 참석한 미국측 손님들 그리고 백악관 출입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했다. 육여사가 자신의 의상에 대해 설명한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장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바탕에다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옷을 지어 입고 왔습니다."
과연 육여사가 입은 한복은 연한 오렌지색 바탕에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것이었다. 닉슨 여사는 "당신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감탄했다. 다음 날 아침 필자는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는 것 같아 호텔 지하의 드럭스토어 (약과 화장품 등을 파는 상점)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팬티호스(여자용 스타킹)와 두바리 콜드 크림은 이제 없습니다.(노 모어 팬티호스, 노 모어 두바리 콜드 크림)"
"무슨 소리 하는거요? 팬티 호스는 뭐고, 콜드 크림은 또 뭐예요?"
-"당신은 한국서 온 손님 아닌가요? 어제 한국 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우리 상점에 있는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들을 모두 사 갔는데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와서 계속 달라고 해서요. 손님도 그걸 구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기자단이 와서 모두 쓸어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호텔 상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점까지 싹 쓸어 버렸다고 했다. 나중에 팬암 항공 직원에게 들으니 이후락 비서실장이 팬암 항공에 몇만 달러를 주고 빌린 박 대통령 전세기가 중량 초과로 예정보다 3시간이 지나도록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수행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젼.냉장고까지 사서 전세기에다 실었기 때문이었다.
이틀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 끝난 후, 박정희 일행은 미국 서부의 유명한 휴양지 요세미티(Yosemite) 국립 공원에서 2일간 휴식한다고 했다. 숙소는 요세미티 아와이 호텔이었다. 나와 동화통신 한창섭 특파원은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자동차를 빌려 타고 지도 한 장에 의지해 꼬불꼬불한 산길을 8시간 동안이나 번갈아 운전해서 요세미티란 곳으로 찾아갔다. 자동차 안에서 한창섭은 갑자기 말했다.
-"제가 이번에 보지 말아야 할 남의 비밀 수첩을 봤습니다."
남의 비밀 수첩이라는 바람에 궁금해진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수첩을 봤는데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우리 회사 기자가 책상 위에 놔 둔 수첩을 우연히 봤는데, 각처에서 받은 촌지 명단과 금액이 적혀 있지 뭡니까? 이번에 청와대 출입 기자들 엄청나게 받았더군요."
"어느 놈들이 그렇게 엄청나게 줬는데?"
-"김성곤 2천 불, 이후락 1천 불, 강상욱 대변인 5백 불, 공화당 모 국회의원 3백 불, 모 기업 사장 5백 불 이런 식으로 적혀 있는데 심지어 모 야당 의원 이름까지 있더란 말입니다. 모두 합쳐보니 8천 불에서 1만 불은 되겠던데요? 이번에 따라온 기자들이 모두 그럴테니 기사를 제대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1만 불이라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상점을 싹쓸이한 돈이 여기서 나왔구나 싶었다. 한국 언론계가 이렇게 썩고 있었다. 약삭빠른 야당 국회의원들이 박정희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신경을 쓴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이구나 싶기도 했다.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촌지 문제로 한창섭 기자와 열을 내서 떠들면서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나는 그만 경찰에 걸리고 말았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워싱턴에 돌아가 법정에 출두하기로 하고 그에게 아와이 호텔 위치를 자세히 물어 달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훨씬 넘었다.
가보니 한국서 수행한 수십 명의 기자중 서울신문 이양 기자 단 한사람만이 풀 기자로 선정되어 아와이 호텔에 와 있었다. 사실 풀 기자 한 명으로 충분했던 서울측의 심정도 모르고(?) 우리 두 사람이 들이 닥친 것이었다. 우선 숙소부터 문제였다. 아와이 호텔은 방이 너무나 부족해서 김용식 주유엔 대사나 백선엽 주캐나다 대사도 근방 야영장에 유숙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육여사의 비서인 나은실의 방 번호를 알아 가지고 문을 두들겼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반겨 주었다. 그 방은 나은실과 육여사의 미용사로 따라온 여성 두사람이 묵는 방이었는데, 침대 두 개를 붙여서 셋이 함께 자기로 했다. 한창섭은 이양 기자 방에 얹혀 자기로 해서 숙소 문제는 해결 되었다.
가지고 간 타이프 라이터와 손가방을 놓고 방을 나섰다. 정도순 LA 총영사 부인이 호텔 주방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해서 현지의 한국 요리사들을 동원해 박정희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준비한다고 야단 법석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때는 푹푹 찌는 삼복인데 호텔에 에어컨이 없어서 박정희는 펄펄 뛰고 이후락은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비행기 타고 다른 호텔로 옮겨 가자" 고 했던 모양인데,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다. 전세기라 해도 스케줄에 따른 이동 시간에만 제공되는 것이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행기는 다른 비행에 투입 됐다가 전세 승객이 움직일 때 돌아온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박정희로서는 타고 옮길 비행기가 없다니 더욱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궁금해서 호텔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런 일류 호텔에 왜 에어컨이 없습니까?"
-"우리 호텔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자연을 즐기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호텔은 일체의 인공적이 시설은 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한여름이라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합니다. 손님들은 낮에는 모두 등산이나 삼림욕을 즐기시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시기 때문에 에어컨의 필요성을 거의 못느끼십니다."
그러고보니 호텔 뒤쪽은 산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고, 손님들도 대부분 등산객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다치는 사람도 많은지 호텔 주위에는 접골원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박종규 경호실장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동조가 박종규에게 일부러 잃어주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 나은실이 와서 육여사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육여사 방에 갔더니 박정희도 앉아 있었다. 나는 두사람에게 인사하고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경찰에 걸려 늦었다"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말했다.
-"순사도 문 기자에게 걸렸으니 혼났겠구먼."
나는 세이트 프랜시스 호텔 드럭 스토아에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 동난 얘기를 하고 나서 따졌다.
"왜 출입기자들에게 돈을 줘서 나라 망신을 시키십니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박정희가 말했다.
-"문 기자, 내일 모레 전세기 타고 같이 서울 갑시다.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르는데 이번에 가서 좀 둘러 보시오."
뜻밖의 얘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저는 공짜는 싫습니다."
-"그러면 비행기 반값만 받을까?"
나는 내심 '비행기 같이 타고 가면서 특종 한 번 해보자' 싶어 동행하기로 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대해 무엇이라고든 얘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변인 좀 만나야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방을 노크했다. 그는 잠온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옆에 앉은 서울신문 이양 기자에게 기사를 불러주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니 급히 옷을 걸쳐입고 기사를 계속 부르는데 내용이 완전히 소설이었다.
-"휴식차 요세미티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휴식할 새도 없이 오늘 오후 한.미 고위경제각료회담을 가졌다. 미측에서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도 참석했다.."
어이가 없없다 나는 강 대변인에게 물었다.
"강 대변인, 지금 미국 경제 각료들이 회담하러 여기 와 있습니까?"
-"문 기자, 원래 이렇게 하는것 아뇨? 잘 아시면서.."
나는 당장 밖으로 나와 서울의 [경향신문] 편집국 정재호 정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요세미티에서 이양 기자가 풀로 보내는 기사에서 내 이름은 몽당 빼 주세요. 강 대변인인 있지도 않은 일을 이양에게 불러주고 있어요. 앞으로 여기서 날아가는 기사는 대부분 소설일 겁니다. 출발하는 날이 8월 25일 아침, 박정희는 인사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아침 먹을 시간도 없는 것 같았다.
전세기가 뜨는 미 공군 기지 캐슬 에어베스로 가기 위해 각료들과 수행기자들이 모두 버스 한 대에 탔다. 나는 기자들과 함께 앉았는데 앞쪽에 앉아 있던 김동조 주미대사가 내 옆에 와서 앉으며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나는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아니, 저 앞에 부인도 앉아 계신데 왜 이러세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내가 대통령 전세기에 함께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을 알고 대통령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좀 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참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대통령께서 만일 이 실장과 나의 관계에 대해 물으면 내가 절대로 이 실장 측근이 아니라는 것만 전달해 주시오."
내심 나는 '아니 이 사람이?' 싶었다. 김동조는 이후락의 꼬붕이 아닌 게 아닌 사람이었다. 이후락 맏아들의 결혼식을 자신의 대사관저에서 치러 주었고, 자신의 딸을 이후락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온갖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후락과 관계 없다고 말해 달라니, 이제 이후락의 권세가 끝난 모양이다 싶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목 달아납니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자기 부탁만 되풀이 했다. 그의 다급한 표정으로 봐서 아와이 호텔에서 같이 포커치던 박종규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후락의 실각은 나중에 사실로 나타났다. 3선개헌을 마친 후 김성곤을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의 압력으로 이후락과 김형욱은 각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는 말했다.
"나는 김대사께 들은 얘기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안되고..."
김동조는 원래 일제 때 일본 규슈제국 대학을 나와 내무성에서 일했다. 내무성의 주 임무라는 게 독립운동 사찰하는 일이다 보니 그는 해방 후 반민 특위에 걸려들었다. 그런 그가 별 탈 없이 출세길을 달린 것은 부인 송두만 덕분이었다. 송씨 집안은 경남 통영의 천석꾼 부자인데 이승만이 감옥에 있을 때 찾아다니며 차입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이승만이 송씨 집안에 은혜를 갚는다고 사위인 김동조를 밀어 주었던 것이다.
일본 총독부에서 이승만에게, 이승만에서 박정희에게, 거기서 다시 이후락에게 이어진 김동조의 줄서기는 이제 누구에게 이어질 것인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김동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약속을 지키마"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공군기지에 도착한 후 모두들 비행기에 올랐다. 전세기의 구조를 보니 조정석 바로 뒤가 대통령 부부의 침실이고 그 다음이 대통령 부부의 식당 겸 접견실 , 그 뒤에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방이 있고, 그 다음이 수행 각료들 좌석, 마지막으로 비행기 꼬리 부분에 수행 기자실이 있었다. 기자실에 앉아 있는데 나은실이 나를 찾으러 왔다.
-"각하께서 문 기자님은 접견실에 앉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래서 나는 박정희 부부와 몇 시간 동안 마주보고 앉아서 날아가게 되었다. 식탁에는 박정희 부부가 나란히 앉고 맞은편에 나와 나은실이 앉았다.
곧 식사가 나왔다. 포크와 나이프를 갖다 놓는데 보니 물론 도금한 것이겠지만, 온통 황금색으로 번쩍번쩍한데 대통령 휘장이 박혀 있었다. 내가 말했다.
"이거 하나 쌔빌까요(슬쩍 집어 넣는다는 뜻의 속어?) 이런 걸로 밥 먹기는 제 일생에 처음인데.."
육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세어 놓았을 거예요."
메뉴판을 갖다 놓는데 보니 대통령 휘장을 금색으로 박아 멋지게 만든 것이었다.
"그럼 여행 기념으로 이거 하나 주십시오."
박정희가 메뉴판에다 '문명자 여사를 위하여, 박정희' 라고 쓰더니 나에게 주었다. 박정희는 식사를 하며 일제 때 가 본 금강산 구룡폭포에 대한 기억등 여러가지 한가로운 얘기들을 했다. 대구 사범 시절얘기도 나왔다. 내가 물었다.
"그 때 수학 여행을 만주로 가셨지요?"
-"아, 그랬지요. 어떻게 압니까?"
"우리 친척 오빠가 대구 사범에 다녔는데 만주로 수학여행 갔다가 선물을 사다 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오빠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살이냐 하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동기 동창이었다. 박정희도 그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다.
여러가지 얘기중에 주미대사 김동조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 하고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육 여사는 한숨 섞인 소리로 "아휴"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 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 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 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됩니다. 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오. 이번에 가서 한국 실정을 잘 좀 둘러보시오."
"한국 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의 14시간 비행 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 번 불렀다. 박정희가 물었다.
-"이실장 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며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 가, 각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모두들 대, 대성공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 박정희는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군 철수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 뿐 아니라 닉슨은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기 위해 극히 말조심을 했다.
결국, 박정희가 얻어낸 것은 정상회담 공동 성명속의 "박 대통령의 영도하에 한국이 거둔 주목할 만한 발전" 이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그것은 어떤 공동성명에든 으레 끼어들어가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 합디까?" 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힐끗 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김포에 내리자마자 나는 불문곡직 KBS 스튜디오로 끌려갔다. 이번 정상회담에 관한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 하라는 것이었다. 가 보니 김성은 국방장관과 정재호 경향신문 정치 부장이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담당 PD가 달려와 말했다.
-"문 기자님께서는 주미 특파원으로서 정상회담 시작 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가 계셨으니까 대통령 각하 부처가 도착하기 전 교민들의 환영 분위기라든지 태극기 물결등의 광경을 이야기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싶었다. 프로그램의 의도가 빤히 보였다. 이번 미국 방문에서 교민들에게 열렬히 환영받고 미국 대통령 닉슨에게도 강력한 지지를 받은 대통령 박정희를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나는 짐짓 말했다.
"내가 가 보니까 샌프란 시스코에 태극기는 두 개 밖에 없었는데 물결은 무슨 물결입니까? 또, 대통령 숙소 앞 공원에서는 민주당 때 유엔대사를 지낸 임창영씨 등의 교포들의 꽹가리를 치면서 '박정희 물러가라' 하고 구호를 외치던데 그런 것도 합니까?"
PD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아이고 문 기자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지 마시고 대통령 부처를 맞이하는 우리 교민들의 열광적인 환영 분위기를 소개해 주십시오."
"아 글쎄, 열광적인 환영 같은 것은 없었어요.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거짓말은 못합니다. 나는 가겠습니다."
정재호가 옆에서 거들었다.
-"문 기자, 사람 죽일라 카나, 살릴라 카나, 거짓말 한 번 하면 어때?"
"당신이나 실컷 해. 나는 국민을 속일 수 없어. 태극기가 두 개밖에 없었는데 태극기의 물결이라니?"
내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니까 다급해진 PD가 사정을 했다.
-"시간도 없는데 가시면 어떡합니까. 정 그러시면 있는 그대로만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국민들에게 소개할 만한 광경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열광적인 환영' , '태극기의 물결' 등 입에 발린 거짓말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이 괘씸해 골탕을 먹인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닉슨이 박정희를 위해 마련한 환영 만찬에서 육여사가 입었던 한복에 대해 얘기했던 것 같다.
결국, 69년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하는 가운데 9월 14일 새벽 2시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 되었다.
당시 공화당 중진 의원이었던 김정렬 전 주미대사는 지난 70년 필자에게 이 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비록 내가 공화당에 몸담고 있지만 '세상에 이런 날도둑질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소. 그 때 야당 의원들은 의사당 안에서 곰탕 한 그릇씩을 시켜 먹고 아예 이부자리를 가지고 들어와 잠을 잔다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공화당 총무 단원들이 우리에게 귀띔하기를 모두 지정해 주는 호텔로 가라고 했어요. 밤이 깊었기에 잠이나 잘까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지시가 내리기를 한 사람씩 나와서 국회 앞 별관 쪽으로 가라는 거였어요. 야당 의원들에게 정보가 누설되면 안된다고. 그 때 이미 그 일대 전기를 끊어버려 우리는 모두 소경이 다 되었지요. 3인조에서 5인조로 나뉘어 별관 안으로 들어가라는데 젊은 의원이 선두에서 걸어가고 뒷사람은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따라가라는 것이었어요. 나도 앞사람 허리띠를 잡고 내 허리띠를 딴 사람이 잡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따라갔었소. 그 곳이 별관이더란 말입니다. 가 보니 촛불 몇 개 켜 놓고 개헌안을 통과시키는데 이효상 국회의장이 시간을 끈다고 장경순(당시 부의장)이가 의사봉을 확 뺏더니 '왜 이렇게 지체해요? 이건 이렇게 때리는 겁니다' 하면서 땅땅 때리는데, 개헌안 통과 시키는 데 1분이나 걸렸을까. 정말 기가 딱 찹디다. 대체 이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공화당에 몸담고 있는 내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이것 모두가 부정부패의 총수 이후락의 잔재주에다 김형욱 같은 안하무인격의 무식쟁이의 소산이란 말입니다. 한국은 무법천지로 변했어요. 나는 그 때 의원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했지요. 그런데 3선 개헌 후 박정희는 그렇게 과잉 충성하던 자들의 목을 쳐버리더군요. 나는 '이것은 잠시 동안의 속임수다. 이 자들은 가까운 장래에 다시 데뷔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후락이가 주일대사로 임명되어 지금 도쿄에 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내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김형욱이한테도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 하나는 안겨 줄 겁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정치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면서 "문 기자를 믿고 이야기 한 것이니 내가 죽고 나면 반드시 3선개헌의 진상을 역사에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차례 만나는 가운데 나는 육여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내게서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이 나라의 진짜 민심이 어떻다는 것을 대통령께 전달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주위에서 좋은 분이라고 추천 하는 분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곤 해요. 그런데 처음 만날 때는 바른 말 해 주시던 분들도 두 번째 만날 때부터 저 듣기 싫은 얘기는 안 하시려 해요. 제가 아무리 '왜 이러십니까? 저를 소경. 귀머거리로 만드시려고 그러십니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사실대로 좀 얘기해 주십시오'라고 아무리 간곡히 부탁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문 기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거예요"
만남이 거듭 되면서 육여사는 내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난봉꾼이었던 아버지로 인해 배다른 형제가 11명이나 되었다는 얘기, 박정희와 결혼하게 된 사연, 결혼에 반대했다고 남편이 장인을 쳐다보지도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 그리고 남편의 끝없는 외도로 인한 가정적 고민 등등.
한번은 육여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71년 대통령 선거 때였지요. 그이가 선거운동차 대전으로 내려가면서 저에게는 서울에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그 때 참 어려운 선거였어요. 국민들에게 '이게 마지막입니다' 하고 호소까지 했었잖아요. 청와대에 앉아 들으니 김대중 씨 부인 이희호 여사가 선거운동에 그렇게 열심이라고 해요. '저이가 그렇게 애쓰는데 나는 왜 내 남편을 못돕나' 싶어서 바로 대통령께서 묵고 계신 유성온천으로 내려갔지요. 도착해서 대통령 계신 방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웬 여자가 옆에 앉아 있다가 혼비백산을 해서 도망을 쳐요. 나도 깜짝 놀라 멈칫하는데 그이가 글쎄 '서울에 있으라면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하고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거예요."
육여사가 그 재떨이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가련한 여인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얼마나 다쳤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정희를 싸고도는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도덕적 타락상에 대해서도 잘 알 뿐 아니라 그 때문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청와대로 육여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려 할 때 여사가 내게 말했다.
-"2층 비서실장 방에 들러 이 실장에게 인사하시지요. 그이한테 잘 못보이면 안되잖아요."
"안 합니다. 언젠가는 이후락이 때문에 이 나라가 망할 겁니다."
육여사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나의 말을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박정희가 결국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해 3선에 성공했던 71년 나는 경향신문사를 사직하고 MBC 워싱턴 특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된 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워싱턴에 다니러 와 있던 최치환(전 경무대 비서)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는데 그가 뜻박의 얘기를 했다.
-"이번에 HR(이후락)이 나더러 [경향신문]사장으로 오라고 해서 한국에 나가게 됐습니다."
"어째서 이후락이가 [경향신문]사장을 임명합니까?"
-"모르셨소? [경향신문]은 실질적으로 PP(박정희)건데 지금은 이후락이가 대신 핸들하고 있는거요."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최치환은 자기 말대로 서울로 가 경향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71년 10월 나는 서울을 방문했는데, 이환의(당시 MBC 사장)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경향신문] 정치 부장을 지낸 사람이라 만났더니 "MBC 특파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신문기자지 방송기자가 아닌데 마이크 잡고 잘 할 수 있을까요?"
-"문 선배는 잘 해낼 겁니다."
"그나저나 MBC는 누구 겁니까? 그것도 정부 겁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 MBC는 주식이 모두 개인 주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어요."
그 말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경향신문]이 박정희 것이라는 통에 계속 [경향신문]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환의 사장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최치환 [경향신문] 사장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그 길로 [경향신문] 사장실로 갔다. 최사장은 자리에 없었다. 거기다 불문곡직 사직서를 내놓고 "점심 약속 지키지 못한다"라는 메모를 적어 놓고는 다시 MBC로 갔다. 거기서 나는 MBC 워싱턴 특파원 발령장을 받았다. 모두가 10월 7일 하루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환의 사장은 큰 실수를 한것이었다. 나를 특파원으로 쓰는 바람에 73년 11월 내가 망명하는 날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했지만 국내는 결코 평온치 않았다. 대학생들의 대규모 교련 반대 시위는 서울에 위수령까지 발동해야 할 정도로 거세게 전개됐다. 또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이 보여주듯 고도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노동자.빈민들의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을 빌미로 3선개헌의 돌격부대였던 김성곤 등 공화당 4인방을 쓸어 버리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더니 12월 6일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유신체제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전처 소생인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당시 공화당 국회의원)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는 황호을 주미대사관 공사를 통해 미국 국회의장을 위시하여 상.하 양원 의원들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었다.
한 의원이 칼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기 전날 그의 비서실장 에머진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라는 사람이 앨버트 의장 면담 신청을 해 와서 조사중입니다. 그가 진짜 박 대통령의 사위입니까?"
이런 경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그에게 "한병기는 박정희가 숨겨 놓은 딸의 남편" 이라고 구구히 설명해야 할 것인가.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인명 카드에는 결혼한 딸이 없는데 어떻게 된일입니까?"
입장이 곤란해진 나는 다음과 같이 둘러댔다.
"복잡한 사정이 좀 있는데, 어쨌든 박 대통령의 사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김동조 주미대사의 부인 송두만 씨에게 물어보세요."
잠시 후 송두만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앨버트 의장실에서 전화가 와서 한병기 대사 문제를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고 했다. 이 무슨 나라 망신인가. 당사자인 박재옥은 한번은 내게 "차라리 저는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한탄한 일도 있다.
박재옥은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과시한다든가 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고 진지한 여성이다. 대통령의 숨겨진 딸로서 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말 못할 고생도 많이 했던 인물이다.
이런 곡절을 거쳐 한병기 의원은 황호을 공사와 함께 앨버트 하원의장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그 자리에 나타나 "나는 박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의원의 친척" 이라면서 한 의원과 함께 들어 가겠다고 주장해 함께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에머진 여사는 "두 사람이 같은 미스터 한이라 친척이라고 하는데 진짜 친척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하여간 앨버트 하원의장 방에서 한 의원은 5분 정도 인사 겸 면담을 가지고 박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는데 앨버트 의장은 "만약 그런 심각한 사태가 사실이라면 내가 박 대통령 입장에 있었어도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가지고 한창섭 기자는 "미 하원의장 앨버트가 한병기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를 적극 지지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그 기사는 한창섭 기자 1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중앙지들 특히 주미 특파원이 있는 신문. 방송들은 모두 자사 특파원 이름으로 그 기사를 내보냈던 것이다. MBC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이름으로 "앨버트가 박정희의 비상사태를 지지했다"고 보도 했다. 나는 즉시 박근숙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보내지도 않은 엉터리 기사를 왜 내 이름으로 내보냅니까? 계속 그런 식으로 하실 거면 나는 언제든지 그만둘테니 다른 유능한 기자를 보내세요."
이 기사로 인해 앨버트 의장은 몹시 화가 났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에 그런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한 의례적인 발언이 '전폭적인 지지'로 둔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무성으로부터 발어 사실 여부를 문의받는 등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도대체 그 코리안 리포터는 어떤 사람이오?"
인사 방문 자리에서 사담으로, 그것도 단서를 붙여 한 발언을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말로 둔갑시켜 보도하는 자가 어떻게 기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느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김대중 의원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우리 특파원들을 그의 처남 이성호 씨 집에 초청받아 김대중 씨와 환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씨의 특별보좌관 이었던 유기홍 박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신문을 보니 앨버트 의장이 비상사태를 지지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자리에는 한창섭도 참석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미스터 한, 그런 허위날조 기사를 보내서 특파원들뿐 아니라 앨버트 의장까지 망신시키지 마시오. 그거 국민을 속이는 짓 아니오?"
"...."
"그리고 당신이 언제부터 한병기의 친척이야?"
-"같은 한가니까.."
"앨버트 의장실에서 그게 사실이냐고 조회해 왔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어? 제발 이런 일 좀 없었으면 좋겠어."
얼마 후 나는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사신을 한 통 받았다.
-"문 특파원, 수고 많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알려 드립니다. 동화통신 한창섭 기자가 중앙정보부의 김모 국장에게 '문명자가 김대중이라는 자 앞에서 나를 모욕했다 위험한 인물이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모 국장은 이환의 사장에게 문 특파원을 채용한 경위를 따지면서 '당장 목을 자르라'고 강력히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 기자는 또 한병기 의원에게도 편지를 썼는지, 며칠 전에 한 의원이 이환의 사장실에 찾아와서 '문명자 특파원을 당장 파면해라. 박 대통령도 지금 매우 화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태가 이처럼 복잡하니 약간의 거짓 보도가 있다 해도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 그 기자를 마구 쏴붙이는 발언은 삼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김대중 씨 같은 사람' 앞에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해가 바뀐 72년 봄, 대사관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이번에는 이환의 사장의 사신이 날아왔다. "문 선배, 제발 사람 좀 잘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다.
사실 한창섭 기자에게 내가 싫은 소리를 한 것은 앨버트 사건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기자가 미국에 초기에 나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즈음 통신사 간의 극심한 경쟁 때문인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앨버트 의장 발언 기사 같은 허위날조 기사를 쓰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71년 4월 박정희와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7대 대통령 선거 전날, 워싱턴발 한창섭 기자의 기사가 미 국무성을 놀라게 했다.
"폴 스카트란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쓴 보도에 의하면, 닉슨 행정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날 아침에 미 국무성에 들렀더니 국무성 관리들이 번갈아 나에게 찾아와서 물었다.
-"폴 스카트라는 미국기자를 아는가?"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기자인지 찾게 되면 좀 알려달라."
나는 폴 스카트가 누군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조그마한 지방지에 칼럼을 쓰고 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한창섭 기자 기사를 보고 전화드립니다. 당신은 어떤 정보에 의해서 닉슨 행정부가 박 대통령의 당선을 확신하고 있다는 칼럼을 쓰셨습니까?"
-"아, 사실은 내 기사는 아직 신문에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기자가 쓴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한국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일 뿐인데... 필요하다면 내 기사의 복사본을 당장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노인이 어떤 경위로 "박정희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박의 당선이 필요하다"는 한 무명 칼럼니스트의 생각을 닉슨 행정부의 생각으로 둔갑시켜 선거 바로 전날 한국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행위는 명백히 '선거 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창섭의 폴 스카트 인용 기사가 나간 며칠 후 최규하 외무장관이 워싱턴에 왔다. 그는 국무성 관리와 만난 후 특파원들을 앰프레스라는 중국집에 초대했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는 최규하 장관, 김동조 대사, 황호을 공사, 권오기 동아일보 특파원, 조세형 특파원 등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뒤늦게 한창섭 기자가 나타나 우리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우리 옆자리에는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 최응태, 신동원, 김동희 참사관 등과 다른 기자들이 앉았다.
나는 한창섭을 보자 다짜고짜 몰아 붙였다.
"미스터 한은 언제부터 공화당 대변인이 되었어요? 대통령 선거 전날 어떻게 그 따위 허위 기사를 보도할 수가 있어요?"
동석한 기자들 중 몇몇도 이구동성으로 한창섭에게 일침을 가했다. 그러나 한창섭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최규하 장관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 여사, 한 번쯤 봐주시지 그래요."
김동조 대사도 거들었다.
-"문 여사가 화가 나니 대단하네요? 자, 최 장관도 모셨으니 우리 밥이나 먹읍시다."
순간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이상호 중앙정보부 공사와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안색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도 질세라 쳐다보는데 이상호 공사 옆자이에 앉아 있던 김동희 참사관이 눈짓을 하면서 "참으세요" 했다.
그 후 한창섭 기자는 동화통신이 자진 폐간하자 김용식 외무장관의 주선으로 합동통신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76년 코리아 게이트가 한창일 때 한창섭은 박스 기사로 '문명자는 친북' 이라고 써 갈겼다. 나에게 공개망신을 당한 보복을 그렇게 한것이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한다.
제 3장 - 육영수와 함께 확인한 박정희의 평창동 주색잡기 안가
내성적인 독종, 인간 박정희
내가 육여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신 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72년 12월 27일 취임식을 가질 무렵이었다. 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선포하여 국회 해산, 정당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 시켰다. 그리고 11월 21일 '유신헌법' 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이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해 장충체육관에서 임기 6년의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 와 있었다. 바로 나흘 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개회식에서 박정희가 개회사를 읽던 중 대회장에 높이 솟아 있던 태극기 깃대가 부러져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태극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건이 있었다. 그 얼마 전에는 육여사가 다니던 절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절이 온통 불타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이 박정희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 아닐가 해서 유신정권은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 취임식장인 장충체육관에 도착한 후 이번에는 태극기를 어떻게 꽂아 놓았나 유심히 보았다. 아예 두 사람의 국군 병사가 손으로 태극기 깃대를 들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여사는 단상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가슴에 훈장을 줄줄이 달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 쪽으로 휘황한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전에 못 보던 모습이었다.
취임식이 끝난 후 나는 육여사에게 말했다.
"두 분은 드디어 덴노헤이까(천황폐하), 고구헤이까(황후폐하)가 되셨군요."
그것은 물론 죽을 때까지 계속 대통령을 하게 된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육여사는 나의 진의를 못 알아듣고 단지 휘황한 휘장을 두른 자기 부부의 모습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 후, 나는 서울 정동에 있는 MBC 사옥에 갔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는 층이 있었다. 나는 함께 탔던 한 기자에게 물었다.
"왜 그 층에선 안 섭니까?"
-"내려서 말씀 드리죠."
편집국이 있는 층에 내려서 그는 조용히 말했다.
-"거기는 5.16 장학재단 사무실이 있는 층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가 서지 않습니다."
"5.16 장학 재단이 왜 MBC 사옥에 들어와 있습니까?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왜 서지 않구요?"
-"사실 이 MBC는 박통 겁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은 박통 은퇴 후의 사무실로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요? 한 번 가 봅시다"
나는 그 기자와 함께 계단으로 해서 '5.16장학재단 사무실'로 갔다. 유리창으로 사무실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넓은 사무실에는 가구와 집기들이 규모있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경향신문]이 박정희 것이라는 바람에 MBC로 왔는데 MBC는 아예 박정희가 사무실까지 차려 놓은 사유물이었다니, 나는 또 한 번 속은 셈이었다.
그 즈음 나는 육여사에게 박정희가 이후락의 주선으로 주색잡기를 즐기는 안가를 제보한 일이 있다.
내가 그 안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신진자동차 사장 김창원의 부인 OOO씨(늘 미시즈 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그녀의 이름을 안타깝게도 기억하지 못한다) 덕분이었다. 60년대 말부터 신진은 이후락이 밀어주는 몇 개 기업 중의 하나로서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그 여세를 몰아 신진자동차는 69년 4월 [경향신문]의 경영권까지 장악했는데, 그때 나는 [경향신문]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원의 부인이 워싱턴에 오면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해서 나중에는 미국에 왔다 하면 우리 집에 와서 자곤 했다. 한 번은 그 녀를 워싱턴 한국대사관 파티에 데려갔는데, 그녀를 본 경제담당 이 아무 공사 부인이 나를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산 출신이었다.
한구석으로 나를 데려간 이 공사 부인이 나에게 물었다.
-"문 기자님. 저여자 어떻게 알아요?"
"왜요? 우리 회사 사장 부인인데."
-"이상하네,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술장사하던 여자가 틀림없는데요."
나는 그 날 저녁 김창원의 부인에게 '자갈치시장'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전혀 스스럼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맞아요. 그 때 나 술장사 했어요."
나는 이 시원시원한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해 주었다.
"전남편이 허구한날 야당으로 국회의원 출마해 낙선했거든요. 살길이 막막해 자갈치 시장에 나섰지요. 그런데 우리 김 사장이 그 때 부산에서 드럼통으로 시발차를 만들어 자동차 사업 한다고 다녔는데, 우리 집 단골이었어요. 사업하다 돈이 궁하면 나한테 빌려 가고 또 갚기도 잘 갚고, 그래서 친해졌는데 나중에는 어찌나 끈질기게 결혼하자고 하는지, 결국 내가 두 손 들고 전남편과 이혼하고 김 사장하고 재혼했어요."
듣고 보니 기가 막힌 로맨스였다. 그러나 그토록 열렬한 구혼 끝에 결혼했지만 결혼 후 김창원은 사업이 번창하면서 외도가 심해져 그녀의 속을 무척 썩이고 있었다. 김창원의 집은 세검정에 있었다. 72년 서울에 갔을 때 김창원 부인의 점심 초대로 나는 그 집에 갔다. 들어가 보니 집 규모가 더 어마어마했다. 정문 쪽에 사랑채 격인 영빈관 같은 건물이 있고 정원 건너 안쪽에 가족들이 거처하는 안채가 있었는데, 이 두 건물은 정원 밑의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지하통로로 왕래하므로 밖에서는 도무지 이 집 사람들의 동정을 알 수가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지하에는 골프 연습장까지 있었다. 당시 후암동에 있던 이후락의 집을 본따서 지은 집인 듯했다. 후암동 이후락의 집은 호화로움이야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집들을 계속 사들여 용산의 미8군 부대까지 지하통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김창원 부인은 점심 식사를 하며 여러가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후락이는 정말 나쁜 놈이에요."
"아니 이후락이가 봐줘서 신진이 그만큼 큰 것 아닙니까? 김 사장은 나이도 아래인 이후락이를 '형님' '형님' 하면서 깍듯이 모신다던데..."
김창원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저기 담장이 둘러쳐진 저 집이 뭐하는 집인 줄 아세요?"
"뭔데요?"
-"저 담벼락 안에 이후락이가 주말이면 기생. 탤런트들을 불러놓고 대통령을 모시고 노는 안가가 있답니다. 저 집은 대문부터 안방까지 자동장치로만 열리게 되어 있는데, 문 손잡이나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돼 있답니다. 이후락이가 자기가 봐주는 기업주들하고 노상 즐기는 데도 저기고..."
"저 집을 대체 언제 지었답니까?"
-"이후락이 비서실장 때 지었답니다."
"대체 어떤 여자들이 드나드는데요?"
-"죽은 정인숙이도 왔었고, 영화배우 Y도 드나들고 스튜디어스도 있고, 심지어 육여사 단골 미용사까지 불러다 즐긴답니다."
그녀는 그 얘기를 남편에게 들었다고 했다.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3만 불 짜리 파텍 손목시계까지 차고 있었지만 김창원 부인은 시름에 차 보였다. "이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하긴 남편이 이 나라 최고 권력자들과 어울려 외도를 하고 다니니 막을 방법도 없고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배다른 자식들도 만만찮게 그녀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뉴욕의 한국 음식점 우리하우스에서 나는 신진 김창원의 아들을 위시해 당시 잘 나가던 재벌 2세들이 모여 플로리다로 도박하러 가자며 떠드는 광경을 목격한 일도 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육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육여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청와대는 안 되니 다른 데로 나오시지요"
육여사는 나에게 어린이 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당시 어린이회관에는 육여사의 방이 있었다. 현관에서 육여사를 만나 방으로 따라 올라갔다.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서 우동을 배달시켜 먹으면서 김창원의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니 저하고 세검정에 가 보십시다."
그래서 나는 육여사와 같이 세검정으로 갔다. 문제의 안가가 있는 언덕배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육여사가 내리자 그 앞 구멍가게 주인여자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육여사가 내게 물었다.
-"그 집이 어디예요?"
"저 담벼락 보이시죠? 그 안이 안가랍니다. 이후락이가 온통 금으로 도배를 해놓고 재벌들하고 대통령 모시고 밤마다 여자들하고 노는데 랍니다."
그 때 그 담장을 바라보던 육여사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럴 수가' 하는 비애에 찬 표정이었다. 나도 못된 일을 많이 한 셈이다.
10.26 후 김재규가 사형당한 뒤에 김창원 부인이 미국 우리 집에 온 일이 있다. 그 때는 신진자동차가 깡그리 망한 뒤였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미국 메릴래드에 사는 교포 의사와 결혼 했는데 미국에 정착할 때까지 좀 돌봐 달라는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때 그녀는 진심으로 김재규의 죽음을 가슴아파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날씨가 이상했어요. 그 양반이 그렇게 죽으려고 그랬는지."
따지고 보면 박정희. 이후락으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린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가정을 파괴한 것도 그들이었으니, 그들을 그토록 싫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73년 1월 초 하와이에서는 한국인 이민 70주년 기념 행사가 있었다. MBC 본사에서는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행사를 취재하라고 했다. 육여사 대신 당시 대학생이던 딸 근혜가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하와이에 도착해서 보니 KBS측에서는 최 방송과장을 취재 단장으로 해서 카메라 스탭들이 대거 와 있었다. TBC에서도 도쿄 특파원이 카메라 스탭들을 데리고 먼저 도착해서 하와이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사진찍기에 바쁜 상황이었다.
나는 MBC의 계약사인 미국CBS 하와이 지국을 찾아가서 지국장과 만나 사전에 협조 요청 못한 것을 사과하고 카메라 스탭들을 보내 달라고 사정사정한 끝에, 다음날 새벽 6시 박근혜양 도착 시간 부터 카메라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겨우 받아냈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하와이 공항에 나가니 벌써 이규성 총영사 부처, 김진홍 외무부 영사국장, 그리고 하와이 교포 남녀 노인들과 교포 아가씨들 수십 명이 나와 태극기를 들고 근혜 양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라요시 하와이 부지사 부처의 얼굴도 보였다.
CBS 카메라 스텝들을 데리고 근혜 양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장면을 찍기 위해 도착 지점 가까이로 들어가려는데 공항 보안관이 사진을 못 찍게 되어 있다고 제지했다.
"그게 누구 지시입니까?"
-"한국 총영사관측의 요청입니다."
나는 다시 돌아나와 이규성 총영사에게 항의한 후 카메라맨들을 데리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마침내 새벽 6시경 태극 마크가 달린 보잉 707 KAL기가 하와이 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아직 어두컴컴해서 사진 찍기가 힘이 들었다. 비행기는 일등석 좌석 창문 쪽에만 전깃불이 환했다. 나는 '보안 문제도 있고 해서 대통령 딸 일행이 다 내릴때까지 일반 손님들 좌석에는 불도 켜 주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근혜 양이 내려온 후 미용사 한명과 경호원 몇 명이 뒤따르고, 제일 마지막에 조중훈 KAL 사장이 내리고는 상황 끝이었다. 불과 10여 명도 안되는 근혜 양 일행을 위해 비행기 한 대가 대절된 것이다. 국가 원수가 정상회담을 위해 국빈 방문을 한다면 몰라도 정말 너무하는구나 싶었다. 도착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한 이유를 그제서야 알 만 했다.
근혜 양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이규성 총영사 부처는 그녀의 양쪽에 딱 붙어 노인을 부축하듯 귀빈실로 데리고 갔다. 귀빈실에서 아라요시 하와이 부지사가 근혜 양의 목에 하와이 꽃으로 된 레이(목걸이)를 걸어 줄 때도 이들 부부가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CBS 카메라 기자는 "저 두 사람 때문에 사진을 못 찍겠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보다 못해 내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사진 기자가 사진을 못 찍겠다고 하니 두 분은 제발 근혜 옆에서 좀 떨어져 있으세요."
그리고 근혜 양에게 말했다.
"근혜야, 저쪽에 있는 분들은 새벽부터 나와 몇 시간 동안 너를 기다린 교포들이다. 가서 인사해라."
근혜 양은 한복 차림의 교포들에게 다가가서 일일이 깍듯이 인사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제서야 교포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근혜가 유숙할 호텔은 카하라 힐튼 호텔이었다. 그 날 오후 3시에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이 주선한 미국 신문.TV 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었다. CBS, NBC, ABC TV 카메라들이 동원되었다. 회견이 시작될 무렵 근혜를 따라온 청와대 의전실 비서가 갑자기 카메라맨들에게 자동 녹음을 하지 말라고 했다. 카메라맨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왜 녹음을 못 하게 하는가. 무성이라면 기자회견 하나마나다. 사전에 얘기라도 해 주었으면 TV 카메라는 동원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재현 공보관장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논리도 잘 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자 무거운 TV 카메라를 메고 와서 설치해 놓았던 카메라맨들은 화를 벌컥 내며 '갓 뎀' 하면서 카메라에 붙어 있던 마이크 선을 떼어 버리고 몇 사람은 방을 나가 버렸다.
갑작스럽게 녹음을 못 하게 한 이유를 나중에 듣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근혜의 영어 실력이 드러날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그 날 근혜는 기자회견에서 유창하지는 못 해도 재치있게 답변했다. 과잉 충성파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근혜가 기자회견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담소를 시작할 무렵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워싱턴과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했다가 하와이 이민 70주년 행사에 정부 대표로 참석하기로 되어 하와이에 왔는데 여장도 풀지 않고 바로 근혜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민 장관을 보자 앉아 있던 근혜가 일어서서 반가이 인사를 했다. 민 장관이 말했다.
-"근혜야, 고단하지?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 많이 했다."
근혜가 답했다.
-"아니예요. 장관님께서 더 피곤 하시겠어요."
민 장관은 "나중에 만나자"면서 방을 나갔다.
나는 도착 기사를 보내러 호텔로 돌아왔다. 국제전화로 기사를 불러 준 후 나는 MBC 보도국 기자에게 물었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는 민 장관이 참석했고 근혜는 육여사를 대신해서 여기 와 있는데, 근혜의 공식 호칭은 뭐라고 해야 하나요?"
보도국측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문 특파원, 별다른 정답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기사 보낼 때 근혜양의 호칭은 반드시 '대통령 영애 근혜 양'으로 해 주십시오."
"아니, 박근혜 양 하면 됐지, 한국에서 근혜가 대통령 딸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대통령 영애 근혜 양'은 너무 길어서 내가 말하다가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이문제로 나는 한동안 옥신각신 했다. 하와이 이민 70주년 취재는 짜증의 연속이었다. 기사를 보낸 후 근혜의 숙소인 카하라 힐튼 호텔로 갔다. 이재현 공보관장, 조성옥 문교부 기획실장, 강경구 주미대사관 장학관 등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재현은 나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말했다.
-"당신이 없는 동안 큰 일이 하나 생겼어."
"무슨 큰일인데?"
-"당신도 알다시피 민 장관이 아까 기자들 앞에서 근혜에게 해라를 했잖아. 그게 문제가 되었단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큰일이야? 어느 미친놈이 그걸 가지고 말썽을 부려?"
-"민장관은 그게 각하 귀에 들어갈까 봐 지금 고민중이란 말이야."
나는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조성옥 씨까지 "정말 큰일났다" 고 걱정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아니 그런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얼빠진 사람이 대체 누구요?"
모두들 선뜻 이름을 대려 하지 않았다. 나는 어림짐작으로 말했다.
"아, 근혜를 수행해 온 이 뭐라더라, 그 자가 범인이구나?"
그제서야 모두들 그렇다고 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당시 박근혜는 서강대 학생이었고 민관식은 문교부 장관이었으니,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학생에게 해라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문제 될 일이란 말인가.
나는 마시던 커피를 그냥 두고 근혜의 방으로 올라갔다. 근혜는 그 날 밤 열릴 리셉션에 간다고 한창 머리를 세팅하고 있었다. 근혜는 깜짝 놀라면서 가운 차림이라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다짜고짜 근혜에게 물었다.
"근혜야, 나도 너보고 존대말 할까? 존대말이 듣고 싶니?"
근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 기자님, 무슨 말씀이세요? 존대말이라니요?"
나는 밖에서 벌어진 일들이 과잉 충성분자들의 장난임을 직감했다. 나는 '반말'을 둘러싼 해프닝을 근혜에게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일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은 정말 문제다. 서울에 가면 네가 먼저 어머니 아버지께 있었던 사실 그대로 말씀드려라."
근혜는 울상이 되어 말하는 것이다.
-"문 기자님, 정말 왜들 이러지요? 주위 사람들이 너무들 해요. 제가 부모님께 그대로 말씀 올리겠어요."
그 날 저녁 리셉션에서 근혜는 나에게 말했다.
-"문 기자님, 제가 어머니께 전화해서 있는 그대로 말씀 드렸어요."
그 때만 해도 근혜는 순진한 대학생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후 그녀는 어머니가 하던 일을 도맡아 공식 석상에 나서서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총재 무슨 총재 해서 직함도 많아졌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녀는 오랜 칩거 생활을 청산하고 야당 부총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과거의 '순진한 대학생 박근혜' 가 그리워 진다. 장기 집권이 배출한 아첨꾼들은 20년 세월 동안 그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피격으로 사망한 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니다"라던 그 조신한 음성이 귀에 쟁쟁했다. 그녀의 사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육여사가 맞은 총탄의 방향이었다.
문세광이 쏜 총탄이 어째서 육여사의 머리 뒤에서 옆쪽으로 관통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조작극이라는 기사를 송고한 주한 일본 특파원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의문에도 한마디 답도 없이 박정희는 자기 아내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이용해 그가 처해 있던 절박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유신체제를 더욱 강화하려 획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가엾은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 한 번 경고하는 뜻에서 박정희에게 영문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애도 전보를 보냈다.
"육여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육여사에 대한 나의 애도를 받아 주십시오. 생전에 육여사가 나에게 이야기한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귀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입니다. 문."
나중에 들으니 김성진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은 내 전보에 대해 "첫 구절은 괜찮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라는 구절만 안 썼으면 괜찮았을 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에게 애도 전보가 왔다고만 하고 내용은 보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인숙은 70년 3월 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전에 미국에 와서 1년 정도 체류했다. 아들까지 낳은 정인숙이 도처를 다니며 계속 청와대를 들먹이는 등 말썽을 일으키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그들 모자를 미국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정인숙과 그의 세 살 난 아들 성일이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주미 한국 대사관의 중앙정보부 참사관 최홍태와 워싱턴 한인회장 노진환이었다. 노진환은 그 때 모텔 홀리데이 인의 식당 지배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자를 '안팎으로 돌본' 공로로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유신 이후 유정회의원 배지까지 달게 된다. 아마도 정인숙을 돌보면서 그녀에게 여러가지 얘기를 들어 알고 있는 노진환의 입을 막으려는 목적이 더 컸으리라.
정인숙 모자는 워싱턴 16가에 있는 우드너라는 아파트 같은 호텔에서 한 달 반 동안 살다가 뉴욕으로 갔다. 그 때 뉴욕에는 미국 남자와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모임인 '한미부인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정인숙의 화류계 친구들 중에서도 한미부인회 회원이 있어 정인숙도 이 모임에 두 번쯤 나왔다. 그 때 나는 정인숙을 본 기억이 있다. 예쁜 얼굴의 젊은 여인이 모자를 쓴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가 남자 같은 음색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을 '미시즈 박'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재일교포 사업가에요."
나는 그 때 남자아이가 누군가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로 정일권이었다.
정인숙이 귀국 후 70년 3월 17일 한강변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박정희와의 관련 여부로 전국이 떠들썩 했을 때, 나도 워싱턴에서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마침 워싱턴 한국대사관 입구에서 노진환과 마주쳤다.
"이것 봐, 미스터 노, 당신 여권 좀 봅시다."
내 말은 정인숙이 죽었을 때 노진환이 미국에 있었는지 한국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여권에 찍힌 출입국 도장을 좀 보자는 뜻이었다. 노진환은 황급히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펼쳐서 보여 주며 변명했다.
-"이것 보세요. 정인숙이가 죽었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어요. 나는 그 사건과 타이밍이 안 맞아요."
아마 다른 사람 같았으면 여권을 꺼내 보이는 짓 같은 것은 않았을 것이다. 노진환은 그처럼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성격이었다.
얼마 후 [워싱턴 포스트]의 셀리그 해리슨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정인숙 사건을 취재중이었다. 어차피 한국 신문에는 검열 때문에 기사가 실리지도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취재원을 밝히지 말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주었다. 셀리그 해리슨의 이 기사는 '한국의 크리스천 킬러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워싱턴포스트]1,2면에 대문짝하게 실렸다. '크리스천 킬러'란 영국의 한 미모의 고급 창녀가 남성 편력을 계속하다 살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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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3월 4일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 공수기동훈련) 취재차 귀국할 때 나는 이 신문을 가지고 서울에 갔다.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은 팀 스피리트의 전신이라고 할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이다.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은 탱크도 싣고 다니는 미 공군 수송기 C-150 편으로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 공군기지에 모였다. 한국 특파원들은 공짜 비행기 타고 서울 간다고 좋아서 보따리를 한 짐 씩 들고 왔다. 그런데 미군들이 우리 특파원들에게 한꺼번에 예방주사를 대여섯 대씩이나 놓는 바람에 모두들 녹다운 되고 말았다.
오산공항을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 했을 때 정일권의 비서인 김종하(전[신아일보]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총리께서 문 기자님이 오신 것을 신문에서 보시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정일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 주변 사람들은 잘 챙기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주미대사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워싱턴에서 돌아오면 마지막가지 보살펴서 출세길을 열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들을 속칭 '워싱턴 클럽'이라고 했다. 나야 워싱턴 클럽하고는 관계가 없었지만, 정일권은 61년 주미대사 시절 안면을 익혔다고 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종종 '워싱턴 클럽'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부르곤 했다. 한번은 워싱턴에서 오창회 목사가 왔다고 해서 정 총리 관저에서 열린 저녁 모임에 초대받아 갔더니 미국인 군사고문 하우스먼, 미국인 해군 제독 한 사람, 전 미8군 사령과 밴플리트 등이 와 있었다.
정일권이 이처럼 자기 인맥을 관리한 저변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대통령 자리에 대한 야망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가 사석에서 "한 사람의 졸병이 권력을 잡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같다.
이처럼 한국에 오면 정일권으로부터 종종 초대를 받았었지만, 71년 당시만큼은 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정인숙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의 취재원이 나인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정일권을 만나서 진상을 추궁해 볼 생각으로 약속 장소로 갔다.
잠시 후 정일권이 측근 한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그런데 정일권의 태도가 걸작이었다.
-"문 기자, 나는 정인숙과 딱 한 번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리가 없소. 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
아마 요즘 정치인들 같았으면 사실이야 어떻든 "나는 정인숙과 관계 없다"고 딱 잡아뗏을 것이다. "딱 한 번밖에 안 잤다"고 변명하는 정일권의 태도를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처구니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 군대 시절 "야" 하고 부르던 박정희에게 "각하" "각하" 하면서 끝까지 미움을 사지 않고 그 그늘 밑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유들유들한 성격 덕분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의 [워싱턴 포스트]를 들고 그 길로 정일권의 부인을 만나러 갔다. 그녀와 나는 정일권이 주미대사를 지내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여성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조선 여인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정일권의 부인을 꼽을 것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정일권의 바람기는 잠잠할 날이 없었지만, 그의 부인은 그것을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탓으로 돌리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야 편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심한 위장병으로 고생했는데 항상 근심에 차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들고 간 [워싱턴 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이 사건 아세요?"
정 총리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햇다.
"내가 이 집에 시집와서 아들을 못 낳은 죄로 우리 집주인이 어디서든지 아들을 낳아오면 받아 들이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우리주인에게 신문에 난 그 아이가 당신 혈육이라면 호적에 올리자고 했는데 우리집 주인이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 장기영 씨 하고도 의논했어요. 장기영 씨가 '그 분이 공직자라 곤란해서 그렇다면 일단 내 호적에 넣어 주겠다'고 까지 했는데 본인이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70년 후반 정일권의 이 현숙한 부인은 세상을 뜨고 만다. 얼마 후 정일권이 재혼을 했는데 새로 장가든 부인과의 사이에 3남내를 두었다. "불임수술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았는가" 하고 따져보고 싶었는데 정일권 스스로 제 발이 저렸는지 "불임수술을 풀었다" 고 변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지난 90년 학국을 방문했다. 그는 정일권에게 자기를 아들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일권은 비서를 시켜 4천만원을 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정성일은 결국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까지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걸려 94년 타계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5공 시절 서울 하이야트 호텔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그는 "전두환 만큼은 나쁜 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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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71년 이희호 . 패트리셔 닉슨 백아관 회동 비화
김대중과의 첫 만남
내가 김대중 씨를 처음 만난 것은 66년 김대중 의원이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김대중 씨에 대한 필자의 감정은 이중적이었다. 애초에 나는 박정희 독재에 강단 있게 맞서 온 젋고 유능한 야당 의원에 대해 기대가 컸다. 그런데 그를 포함한 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인가' 하는 회의감 마저 들었었다.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 문제부터 물어봤다.
"김 의원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이 있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김대중 의원은 뜻밖에도 선선히 답변했다.
"예, 사실입니다. 그 자금은 관례화되어 있는 것이고 야당측이 분배받을 권리가 있는 성격의 자금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받았습니다."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김대중과의 첫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또 있었다.
그가 데리고 온 엄영달이란 인물 때문이었다.
엄영달은 4.19 당시 일본 도쿄의 주일 한국대표부 2등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국에서 전해진 4.19혁명의 열기 속에 도쿄에서도 학생, 주재원 교포 할 것 없이 군중들이 한국대표부로 쳐들어 갔다. 당시 와세다대학원에 다니면서 [여원]의 도쿄 지국장을 맡고 있던 나도 그 속에 끼여 있었다. 우리는 일제히 "유태하(주일 대표부 공사)나와라" 하고 소리쳤다. 유태하 공사는 철저한 이승만 충성파로 알려져 평판이 대단히 나빴다.
그 때 엄영달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 유태하 어디 갔지?"
그러자 엄영달의 대답이 기막혔다.
"아, 그 XX?"
어제까지 직속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에게 대뜸 육두문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에게 쏘았다.
"우리는 유태하에게 욕설을 할 수 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어. 의리도 없는 놈!"
엄영달을 만난 것은 그 때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스터 엄은 어떻게 해서 김 후보를 따라왔어요?"
-"김대중 후보가 통역을 필요로 하시기에..."
당시 외교관직을 퇴직한 엄영달은 국회의원 공천을 기대하고 김대중 의원을 돕고 있는 눈치였다. 그런 사람을 동반하고 나타났으니 김대중 의원에 대한 인상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김대중 의원과 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가 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후 71년 1월 말 7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그 대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박정희의 3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날 밤 유기홍 박사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는 아메리칸 대학 정치학 박사로, 남편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김대중 후보의 특별보좌관을 맡게 되었다면서 김 후보를 도와 달라고 누누히 부탁했다. 유쾌하지 않았던 첫 만남 때문에 내 대답은 삐닥하게 나갔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또 나는 학국 신문의 특파원 자격인데 특정 정치인을 어떻게 돕습니까?"
유기흥 박사는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다 돌아갔다. 그런데 별 말이 없던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나라가 민주화되고 통일되려면 남쪽에서 먼저 통일이 돼야 해요. 지금 박정희가 전라도를 차별하는 바람에 영호남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 않소. 김대중 씨가 마침 전라도 사람이고 그 때문에 박정희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으니 그를 도웁시다.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남에서 대통령을 한번 해야만 동서 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고, 그게 우리의 꿈을 이루는 길이오."
남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지난 유감을 털버리고 김대중 의원을 돕기로 했다.
1971년 1월 말, 한국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달 여 앞두고 있었다. 전국민적 반발에도 아랑곳 않고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박정희가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한 선거였다. 박정희의 5.16쿠데타 이후로 미국에서 조국민주화운동을 벌여왔던 워싱턴의 우리 동지들은 71년 대선에서 어떻게든 야당 후보를 당선시켜야만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막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데 뜻을 모으고 있었다. 선거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후보 부부를 미국 정.관계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미 행정부와 의회의 유력 인사들이 김대중 후보를 비롯한 한국의 야당 인사들을 만나주지 말도록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미 국무성에 집요하게 압력을 넣고 있었다.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 또한 김대중 후보의 워싱턴 정계 접근을 막기 위해 부지런히 로비를 펴고 있었다.
사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월남파병 등 한국 정부와 연관되어 있는 현안문제로 인해 한국 정부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71년 1월 28일 쉐라톤 파크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던 '콩그레셔널 디너'를 주목했다. 그 행사는 해마다 언론계가 주최측이 되어 대통령을 위시한 행정부 고위인사들, 상하 양원 지도자들과 중진급 의원들, 각국 외교사절 등을 초대해 신년하례식을 여는 자리였다. 1천여 명이 참석하는 이 행사는 단순한 신년파티가 아니었다. 초선의원들은 이 자리에서 연설함으로써 미국 언론계 주요 저널리스트들로부터 첫 평가를 받으며, 행정부와 의회 지도자들도 이 행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선거전에서 상당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 국회의원들은 콩그레셔널 디너에 초청받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다.
콩그레셔널 디너의 주최권은 전통적으로 미국 여기자협회( national women's press club)가 가지고 있다. 이 단체는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부터 역대 대통령 부인들이 명예회원으로 참여해 온 유서깊은 조직이다. 이 여기자협회는 뒤에 미국기자협회(anational press club)와 통합했다.
당시 나는 미국 여기자협회 부회장으로서 콩크레셔널 디너를 준비하는 위치이긴 했지만 갑자기 김대중 후보 일행을 위한 초청장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개최 두 달 전에 이미 참석자 명단을 확정해 그들이 앉을 테이블 위치까지 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 후보 일행의 좌석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 부부의 자리는 닉슨 부부가 앉는 헤드테이블 바로 앞이어야 했다. 나는 텍사스의 보수 유력지 [텍사스 신문] 워싱턴 특파원 사라 메크렌든이 배정받은 좌석들이 바로 그 위치임을 알아냈다. 그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면서 기자회견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질문만 던짐으로써 역대 대통령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국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했기 대문에 좋은 자리들을 배정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간곡하게 부탁했다.
"사라,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면 영구집권을 꾀할거야 야당이 당선돼야 한국이 민주화 될 수 있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사라는 기꺼이 자신이 초청한 인사를 변두리 쪽으로 보내고 자기 테이블에 김대중 씨 부부를 앉혀 주었다. 나는 중간쪽에 배정받은 내 좌석을 정일형 의원에게 양보하고 뒤로 가서 앉기로 했다.
콩그레셔널 디너는 '블랙 타이 디너'였다. 즉 남자는 턱시도, 여자는 롱드레스로 최고의 정장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이희호 여사는 한복을 입으면 되지만 김대중 씨에게 턱시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1월 28일 아침 나는 김대중 씨 부부를 예복 대여점으로 데려가 턱시도를 빌려 입힌 후 쉐라톤 파크 호텔로 향했다.
행사 시작 전에 행정부와 의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참석자들로 붐비는 홀을 피해 특별히 마련된 VIP룸에서 칵테일을 들며 자기네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다짜고짜로 김대중 씨 부부를 VIP룸으로 데려갔다. 그 곳에서는 마침 포드 부통령 부부, 험프리 상원의원 부부, 로널드 지그러 백악관 대변이 부부 등 려러 인사들이 환담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김대중 후보를 소개하고 한국의 민주회북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부탁했다. 그들은 기꺼이 김대중 후보를 격려하고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VIP들과 두루 인사를 마치고 홀로 나오는데 김동조 주미대사와 마주쳤다. 김대중 후보 부부를 보더니 김동조 대사는 호되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김대중 후보가 미국 정계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는 것을 막는 총책임자가 바로 자신인데 김 후보가 콩그레셔널 디너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VIP룸에까지 들락거리는 것을 목격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김대중 후보가 국무성을 방문해 로저스 국무장관과 면담하도록 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짝 긴장해 김대중 후보의 활동을 주목하고 있던 김동조 대사측의 방해로 결국 불발로 끝났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다른 차원의 작전이 필요했다. 목표는 백악관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힘들겠지만 이희호 여사의 방문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닉슨 대통령 부인 패트리셔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했다.
"미시즈 닉슨,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야당 대통령 후보를 만나 주십시오. 그녀는 미국의 스칼렛 칼리지를 졸업했고 오랫동안 YMCA 총무로 일한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패트리셔 닉슨과 내가 친분을 갖게 된 것은 67년 마이애미 컨벤션홀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취재 때부터였다. 당시 닉슨은 데이비드 록펠러와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이고 있었다. UPI 통신의 여기자 헬렌 토마스와 나는 패트리셔 닉슨, 해피 록펠러(록페러 부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해피 록펠러는 마치 왕비 같은 자세로 테이블에 도도하게 앉아 있는 반면, 패트리셔와 두 딸 트리셔, 줄리는 계속 대회장을 돌며 음료수를 나르고 한 사람의 손이라도 더 잡기 위해 열심이었다.
나는 페트리셔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한국하고 인연이 있지요?"
-"예에스, 헬렌 김(김활란)의 초청으로 이화여대를 방문했던 일이 있어요."
그녀는 반색을 하며 이화여대 방문 당시의 좋은 기억들을 열심히 얘기했다. 패트리셔는 그늘진 듯한 표정과 바싹 마른 체구로 인해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을 풍겼지만 직접 이야기해 보니 매우 차분하고 인간미가 있는 여성이었다. 12세 이후로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손 좀 봅시다. 우리 동양에서는 손금으로 사람의 운명을 점칩니다."
그리고 그녀의 생년일시를 물어 사주를 짚어보니 태어난 해와 날, 시에 천권(天權)이 셋이나 들어 있었다. 나는 해피 록펠러가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페트리셔에게 말했다.
"미시즈 닉슨, 당신 손금과 사주를 보니 당신이 차기 퍼스트 레이디가 될것으로 믿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헬렌 토마스의 눈이 둥그래졌다. 패트리셔는 손을 꼭 잡으며 고마워했다. 패트리셔가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전당대회장은 "우이 원트 로키!( We want Rocky : 우리는 록페러를 원한다. 록키는 록펠러의 애칭) "록키! 록키! 록키!"를 외치는 연호 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모두가 록펠러의 승리를 점쳤다. 사실 나는 해피 록펠러가 하도 귀족같이 도도하게 굴어서 비위가 상했던 참이라 손금을 빌어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결국 닉슨은 메릴랜드 주지사 애그뉴를 러닝 메이트로 받아들여 록페러를 제치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패트리셔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를 찾아와 "고맙다"면서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말했다.
"그게 당신의 운명입니다."
-"그래도 해피 록펠러 앞에서 그녀의 기를 죽여 준 것이 고마웠어요."
닉슨이 당선된 후 패트리셔 닉슨이 대통령 특사로서 중남미 등을 다닐 때 나는 수행기자로 여러 차례 동행했다. 그 때마다 패트리셔는 내가 자기 손금 봐 준 얘기를 미국 기자들에게 하는 바람에 미국 기자들은 틈만 나면 손금 좀 봐 달라고 했다. 보통 미국 사람들은 아무리 일관계로 친하게 지내도 자기 생년월일도 잘 안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다. 나는 손금 봐 주는 비지니스로 미국 기자들과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며 인간적으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를 만나 달라는 나의 부탁을 패트리셔는 선선히 들어 주었다. 그렇게 된 데는 나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패트리셔 자신이 정의감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퍼스트 레이디 시절 내내 자기 시간의 대부분을 흑인 빈민가의 아이들을 돌보고 노인들에게 양로원을 지어 주는 '헤드 스타트' 계획에 바쳤던 사람이다.
패트리셔의 동의를 받아낸 뒤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미시즈 김대중' 이라는 이름으로 백악관에 들어올 경우 한국 대사관의 로비를 받은 국무성측 인사들에 의해 출입이 차단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미시즈 이희호'라는 이름으로 '쥬리 문 기자의 손님'으로 해서 백악관 기자실까지 내가 데려가면 패트리셔의 비서실장이 이희호 여사를 맞이하기로 계획을 정했다.
드디어 디데이닌 71년 2월 3일. 내 손을 잡고 백악관 정문에서 기자실까지 걸어가는 이희호 여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마다 총을 든 경찰이 지키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백악관 경호팀은 다람쥐 소리 정도만 나도 발사할 태세였다.
드디어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손을 맞잡았다. 패트리셔 닉슨은 이희호 여사의 손을 감싸쥐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후에 패트리셔는 나에게 "쉬이 이즈 원더풀" (She is wonderful)이라고 했다.
사실 닉슨도 내심으로는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 세 번이나 나와 장기집권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3선 개헌을 눈앞에 두고 열렸던 69년 8월의 한미 정상회담을 워싱턴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그것도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연 것이다. 정상회담을 호텔에서 연 것은 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월남파병 등 미국의 국익이 걸린 문제가 있어 한미 정상회담을 열긴 했지만 박정희가 이를 3선개헌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닉슨측이 그만큼 신경을 쓴 것이었다.
나는 김대중 후보 일행이 워싱턴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이희호. 패트리셔 회동 사진을 전달하며 "닉슨측 입장도 있으니 공개하지 말고 반독재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데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진이 며칠 후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당황한 민주공화당측은 주한 미 대사관에 격렬히 항의했다. 주한 미대사관측은 미 국무성에 이희호 여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었는지를 문의했다. 당시 국무성 한국과장은 도널드 레이너드. 그는 백악관의 방문객 명부를 확인하고 주한 미 대사관에 통보했다.
"미시즈 김대중은 백악관을 방문한 사실이 없다."
민주공화당측은 쾌재를 부르며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비난했다. 백남억 의장은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진은 두 사람의 사진을 각각 뜯어붙인 가짜 사진"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패트리셔 닉슨이 두손으로 이희호 여사의 오른손을 감싸쥐고 있는 모습을 대체 어떻게 뜯어 붙인단 말인가.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과장은 퇴임할 때 이 일을 회상하면서 "쥬리 문이라는 여성을 막지 못한 것이 재직 중 단 하나의 실수"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71년 3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 이라는 한미 공수기동훈련이 한국에서 실시 되었다. 워싱턴 특파원들은 이 군사훈련 취재차 미군 수송기 편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가면 이희호 여사 백악관 방문 건으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레야드 국방장관의 대변인 제리 프리러하임이 "군 수송기로 장관도 같이 간다"며 권하는 바람에 당시 이슈로 떠오르던 대한 군사원조 문데에 대해 레야드 장관과 회견할 욕심에 따라 나섰다. 예상대로 수송기 안에서 레야드 장관과 회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한 후 레야드 인터뷰 기사 송고차 [경향신문] 기자를 불렀다. 그런데 뜻밖에 경향신문사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는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이 만나는 사진이 게재된 [동아일보]를 펼쳐 놓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물었다.
-"문 기자님, 이 사실에 대해 아십니까?"
"아니오 미국 대사관에 물어 봤어요?"
-"미 국무성에서는 이런 사실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사실이 없다면 없는 거겠지요."
중앙정보부 요원은 '틀림없이 문명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심증을 가지고 나를 떠보기 위해 온 듯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모르겠다고 하니까 의아해 하면서 돌아갔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비서 나은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마가렛트예요."
나은실은 플로리다에 유학했었는데 미국 이름이 마가렛트였다.
"잘 있어?"
-"우리 사모님께서 문 기자님을 꼭 점심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은실은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육여사를 바꾸었다.
-"문 기자님,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 얼굴 좀 보고 싶어요. 문 기자님 좋아하는 조개된장국 아욱 넣고 끓여 놓을 테니 점심 잡수러 오세요."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정신이 없습니다. 취재중에는 나가기 힘드니 미국 사람들 가고 나서 찾아 뵙지요."
나는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이 끝나고 나서 출국하기 전날 청와대로 갔다. 나은실이 나와 맞으며 부탁했다.
-"쥬리, 우리 사모님께 세상 돌아가는 얘기, 쥬리가 아는 것 전부 좀 말씀 드려 줘."
"네가 하지 그래?"
-"나는 그런 용기도 없고.."
"알았어."
육여사는 약속대로 아욱된장국을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성품처럼 맛깔스러운 점심 식사였다. 나는 지은 죄(?)가 있는지라 되도록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는데 그 때마다 육 여사는 여러가지 음식을 내오게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대만에서 가져왔다는 수박까지 잘 먹고 난 후 드디어 육 여사가 은근히 물어왔다.
-"이희호 여사가 닉슨 부인하고 만난게 사실인가요?"
"나는 모르지요. 그거야 이희호 씨에게 물어보세요."
-"김동조 대사가 '이 일은 문명자 기자가 주선한 걸로 안다'고 보고해 왔어요."
"그런 보고라면 나도 합니다."
나는 화제를 짐짓 딴 데로 돌리느라 정인숙 얘기를 꺼냈다.
"제가 미국에서 죽은 정인숙을 만나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세요?"
"한미부인회라고 미국 남자들하고 결혼한 한국 여성들 모임에 초청돼서 왔더군요. 모자를 푹 눌러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왔길래 아이 아버지는 뭐 하냐고 물었더니 재일동포 사업가라고 합디다."
-"네에, 그래요."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는 그 아이 아버지가 정일권 총리라고 나왔던데요?"
얘기중에 육여사는 못내 다시 궁금한지 또다시 닉슨 부인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문 기자님, 이희호 여사와 닉슨 부인이 만난 게 진짜 사실인가요?"
"글쎄 저야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이번에 워싱턴에 돌아가면 그런 일이 있었나 없었나 알아봐서 다음에 오면 알려 드릴께요."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귀국했을 때 육여사는 나를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물론 이희호.닉슨 부인 회동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였다. 나는 말했다.
"제가 가서 알아봤더니 만났다고 합니다."
-"국무성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합성사진 아니예요?"
"우리나라에서도 외무부에서 영부인께 '이런 일 있었습니까. 저런 일 있었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나요? 로저스 국무장관도 못합니다."
-"김동조 대사 말대로 문 기자님께서 혹시 주선하신 것 아닙니까?"
"아아니요."
나는 딱 잡아뗐다. 육여사는 "그래요?" 하면서 말을 마쳤는데 의구심이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육여사가 죽고 난 후 69년 박정희.닉슨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 요세미트에서 육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육여사님, 생전에 내가 거짓말한 것, 진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편히 잠드세요."
그리하여 이희호 여사와 패트리셔 닉슨의 면담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었는가 하는 문제의 진상은 그 부부와 나만이 아는 일로 땅에 묻혔다.
71년 김대중 후보는 사실상 승리했지만 박정희의 부정선거로 낙선했고, 그 후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73년의 납치사건, 80년의 사형선고, 82년의 미국망명등 가파른 세월 동안 이희호 여사와 나는 '김대중 구출'을 위해 꾸준히 협력했다. 그것은 김대중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98년 12월 20일 김대중 후보가 마침내 대통령 당선자가 된 다음날 나는 일산의 김대중 씨 자택을 방문해 그들 부부를 만났다. 남편보다 더 고생했고, 죽음을 앞둔 남편 앞에서도 결코 평정을 잃지 않으며 남편을 격려해 마침내 온 국민의 염원인 정권교체를 이루게 한 여성, 바싹 말랐으나 강인한 그 여성을 부둥켜 안으며 나는 감격의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 2장 김대중 납치 보도, 주미 중앙정보부 이상호 공사와의 악연
"김대중 취재가자" 하니 "나도 살아야겠다"던 주미 특파원
71년 4월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1백만표도 안되는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게 패했다. 사실상 김대중의 승리였다. 이로써 그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김대중이 박정희의 최대 정적이었슴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71년 5월 25일 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산-광주간 고속도로(바로잡음: 광주-목포간 국도)에서 김대중의 차가 트럭과 충돌한 교통 사고는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교통사고를 위장한 김대중 살해 기도였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김대중은 일본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유신이 선포되던 72년 10월 17일 마침 그는 치료차 일본에 가 있었다. 다음 날 그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실상 정치 망명을 선언한다.
11월 13일 김대중 씨는 도쿄를 떠나 미국으로 왔다.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이고 박 정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일본보다 미국이 적격이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다른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공항에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살아야겠다"던 한 특파원의 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대중 씨 곁에서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이런 현실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는지. 어쨌든 그 때 공항에 나간 것은 나와 동아일보의 권오기, KBS의 박성범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MBC 박근숙 보도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특파원, 거기 김대중 씨가 있죠?"
"네 어제 왔어요."
-"김대중 씨하고 점심 같이 먹었어요?"
"김대중 씨가 저녁에 왔는데 무슨 점심을 같이 먹어요?"
-"여기서 그렇게 보고가 됐는데..."
"누가 말도 안 되는 보고를 했군요."
-"앞으로 김대중이나 김형욱 같은 사람들은 좀 만나지 말도록 하세요."
"아니 기자더라 이 사람 만나지 마라, 저 사람 만나지 마라 하면 취재를 어떻게 합니까?"
다음 날 MBC 이환의 사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다짜고짜로 "문 선배, 나 좀 살려 줘" 했다.
"왜 그래요?"
-"중정(중앙정보부) 때문에 살 수가 있어야지."
"난 언제든지 특파원 안 해도 되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
이환의 사장은 나를 MBC에 끌어다 놓은 후 "왜 문명자를 자르지 않는가"라는 중앙정보부의 등쌀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그 후 김대중 씨는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교포들을 상대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는 한편 국내외 민주화 운동가들을 규합해 유신반대 투쟁조직을 꾸리는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국 땅에서 벌이는 이같은 활동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순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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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5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인터내셔널 홀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 한국영사관 부영사가 15~16명의 폭력배를 데리고 2층 방청석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날계란과 토마토 케첩 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FBI가 출동해 그들을 연행함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73년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약칭 한민통) 미국 본부가 결성 되었다. 당시 분위기는 반유신운동 상황을 골백번 취재해서 기사를 보낸들 단 한줄도 보도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봐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이 같은 행사들을 충실히 취재했다.
이 날 행사에는 민주당 정권 때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돈 선생과, 역시 민주당 정권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임창영 박사 등 5.16 이후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벌여 온 민주 인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한민통 결성식에서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놓고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미국 내에는 이른바 '선 통일 후 민주화'를 주장하는 일단의 통일운동 그룹이 존재했다. 그런데 한민통 의장 김대중은 결성식에서 "박 정권이 통일을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짓밟고 있는데 우리가 통일을 앞세운다면 그의 책략에 걸려드는 것"이라면서 '선 민주후 통일'의 방향을 명백히 제창했다. 또 일부에서는 '망명 정부'를 수립하자는 급진론도 제기 됐는데, 김대중은 역시 이에 명백히 반대했다. 박정권에는 반대하나 엄연히 대한민국이 존재하는데 그에 반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민통 결성식을 시작하기 전 돌연 임창영 박사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좌중에 나누어 주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이북 정부의 초청으로 곧 평양을 방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 국무성이 아직 허가를 안 내주고 검토중에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개인 자격의 방북이라지만, 그가 한민통의 일원이므로 김대중을 비롯한 반유신운동 전체가 북한의 사주를 받는 집단인 양 조작할 수 있는 빌미를 중앙정보부에 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나는 임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이 북한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갈라진 우리 국토가 통일되고 민족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이북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서방세계로도 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북은 서방외교 문제에서는 초년병입니다. 나는 유엔 대사를 지냈으므로통일을 위해서 이북에 서방외교를 강화할 것을 조언하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자 합니다."
김대중 의장의 의외의 사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도 민단 내의 민주화운동 세력만을 규합했을 뿐 재일총련 쪽과는 철저하리만큼 손을 끊고 활동해 온 사람이었다. 그 모두가 사상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옭아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박정권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그런 판에 한민통의 주요 참여 인사인 임 박사가 방북길에 오른다고 했으니 그가 얼마나 놀랐을 것인가.
김대중 씨는 "중앙정보부가 박사님의 방북을 민주화운동을 음해하는 데 악용할 것이니 방문을 중단해 달라"고 누누이 부탁했다.
임창영 박사는 "외세 지배하의 한반도에서 통일 없이는 민주화도 없다"는 소신을 가진 통일 운동가였다.
김대중 의장의 부탁 때문이었는지 혹은 미 국무성의 불허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방북을 3년간 연기했다. 임 박사는 평생을 통일운동가로서 활동하다 96년 별세했다.
임창영 박사는 김대중 씨가 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되었을 때 우연히 도쿄를 방문하고 있었다. 김대중 씨 납치 사건에 접한 그는 바로 그 사실을 미 국무성의 도널드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알려 미국측이 한국 중앙정보부에 압력을 넣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김대중 씨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감사의 인사도 받지 못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북한을 드나드는 통일운동가 임창영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전에 임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불만도 표한 일이 없다. 김대중이 그와 같이 처신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 민족의 또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7월 7일 한민통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난 뒤 김대중 씨는 8월 15일을 기해 일본 본부 결성을 위해 도쿄로 갈 계획이었다. 도쿄로 출발하기 직전 그는 우리 부부에게 항공우편 봉투에 든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다.
-"이런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본 도쿄 신주쿠의 소인이 찍힌 그 편지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김 선생, 김 선생을 납치해서 암살하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절대 조심하셔야 합니다."
편지에는 김대중 납치 계획에 대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이 정도록 구체적으로 쓴 것을 보니 이것은 틀림없이 중앙정보부 내의 양심세력이 보낸 것 같습니다.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대중 씨가 말했다.
-"미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를 계속 미행했습니다."
7월 10일 김대중 씨는 일본으로 출발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김대중 씨가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당한 73년 8월 8일 나는 멕시코의 해변도시 아카풀코에 있었다. 아카풀코는 멕시코가 자랑하는 세계적이 휴양지다. 당시 나의 딸 줄리아는 열한 살, 아들 리처드는 열 살이었다. 정신 없는 특파원 생활로 아이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여름 휴가라는 것을 가 본 적이 없었다. 한 해도 여름 휴가 안 가고 배기지 못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로서는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 외무장관은 유엔 외교차 남미를 돌곤 했다. 그 해에 김용식 외무장관은 멕시코를 방문했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외무장관 수행 취재 때 아이들을 맡겨 놓고 취재를 마친 후 그들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에 들러 여름 휴가를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취재를 마치고 이창희 대사 부부와 함께 아카풀코 해변의 한 호텔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새벽, 들떠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려던 참이었다. 워싱턴의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남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여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하시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김대중 씨가 도쿄에서 없어졌소. 틀림없이 중앙정보부의 짓이오. 김대중 씨는 평소에 수첩에다 중요한 사항들을 깨알같이 메모해서 다니는 사람인데 그 수첩도 지금 중앙정보부 수중에 들어가 있을 것이오. 그러니 한민통 미국 본부 결성에서 당신이 한 역할도 이미 다 파악 되었을 것이요. 당신 신변에도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는 아무 얘기 하지 말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당장 미국으로 돌아오시오. 아무리 친구라 하지만 그들 부부는 국가 공무원 아니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그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오."
"알았어요."
충격 때문에 나는 잠시 휘청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설마 했는데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대낮에 야당 지도자를 납치해 가다니. 이게 내 조국이 하는 짓인가.
발리 해변으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끄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정말 급한 일이 생겼어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해. 미안하다."
울상을 지으며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창희 대사 부부에게 갔다.
"대사님. 본사에서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 오라는 연락이 왔네요. 무슨 비상사태가 터졌나 봐요."
그런데 이창희 대사는 이미 소식을 들은 듯 했다.
-"소식 들으셨군요. 빨리 가 보십시오."
급히 짐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휴가철 세계적인 휴양지에 미국행 비행기 표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급한 김에 공항 카운터 직원을 붙들고 사정했다.
"여보세요. 나는 MBC 특파원인데 본사에 급한 일이 있어 빨리 워싱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상용으로 남겨 놓은 표 좀 풀어주세요."
그러자 공항 카운터에 앉은 여성의 표정이 달라졌다.
-"NBC 리포터라구요?"
그러더니 그녀는 없다던 표를 선선히 끊어 주었다. MBC를 미국 NBC로 잘못 들었던 것이다. 내가 거짓말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못들은 것을 어찌하랴. 어쨌든 그녀 덕분에 바로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돌아오니 남편은 사색이 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놓고 바로 국무성으로 나갔다. 기자실에 가서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에게 물었다. 그는 과거에 도쿄 지국장을 지냈기 때문에 한국 문제를 많이 다룬 기자다.
"국무성 기자회견 때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 질문했나?"
-"중동 문제 때문에 유태계 기자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질문을 퍼붓는 통에 물어 볼 시간이 없었다."
"다른 코리안 기자들은 질문 안하던가?"
-"아니, 그런 질문 없었다."
나는 분통이 터졌다. 당시 워싱턴에는 10명이나 되는 한국 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가 없었다니.
이 날 12시 정례 기자회견 때 바로 국무성 대변인에게 질문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납치해 가서 현재까지도 그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대변인은 바로 답했다.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실종된 것은 사실인데 우리는 현재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중이다."
나중에 들으니 국무성에서는 기자회견 때 쥬리 문이나 스펜서 데이비스가 반드시 질문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답을 준비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한 시간쯤 지난 후 주미 한국대사관 이상옥 정무참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 기자님, 오늘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하신 질문 내용은 무엇이며 대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내가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다"고 질문했다는 얘기를 벌써 전해 듣고 그가 전화로 문의해 온 것이다. 나는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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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기자회견에서 질문한 내용까지 대사관에서 조사합니까? 정 알고 싶으시면 국무성에 오늘 기자회견 질의 응답에 관한 풀 텍스트 나와 있을테니 그것을 베끼세요."
-"복사는 안 됩니까?"
"네 안돼요."
전화를 끊고 났더니 연신 전화벨이 울려댔다. 일본 각 신문사와 통신사 기자들의 질문 전화였다. 71년 김대중 씨가 워싱턴에 왔을 때 내가 그를 도왔던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그의 행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해 암살하려는 것이 분명한데 어디로 끌고 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날 이후 날마다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문했다. 미국의 정부기관은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에 대해서 반드시 답변을 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답변하기 어려운 내용이면 사후에 서면으로라도 답변해야 한다. 그 때문에 기자회견에서 문제화하면 관계부처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같은 질문을 계속한 이유는 한국 언론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고 있는 판에 납치 사건 발생국이 일본 언론들이라도 사건을 이슈화해 주기를 기대해서였다. 다행히도 일본 언론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들은 백주 대낮에 일본 주권을 침해하면서 김대중을 납치해 간 한국 정부의 처사에 대해 규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나 경찰도 사건에 대해 '자작극'이니 '북괴의 음모'니 하는 말을 다시 하지 못하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나오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 민단 간부이면서 민주화운동가인 배동호 씨, 김재화 씨 등이 주동이 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려는 '김대중 구출운동'을 집요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구출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씨가 없는 가운데서도 한민통 일본 본부 창립식을 예정대로 치러 그 단체의 명의로 운동을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보고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결성식이 73년 8월 13일 일본 각지에서 1백여 명의 대표들이 도쿄에 모여들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민통 일본 본부가 결성됭 8월 13일, 김대중 씨 가 돌연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기보다는 납치범들이 그를 동교동에다 데려다 놓고 연금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 중에서도 어김없이 광복절이 돌아왔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광복절 기념 파티가 열렸다. 나는 당시 워싱턴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언니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다. 김동조 대사 부인 송두만 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언니가 옆에 와서 쿡쿡 찔렀다.
"왜 그래? 언니"
-"얘 아까부터 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너를 째려보고 있어."
힐끗 돌아보니 주미 한국 대사관 중앙정보부 공사 이상호(가명 양두원)였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째려보면 어때?"
-"얘, 무서운 얼굴이다."
그가 나를 째려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가 국무성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김대중 씨를 납치했는데'라고 발언한 데다가 이상호 공사의 부하 몇 명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쿄로 갔다는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상호의 무서운 얼굴과 함게 나의 수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 선배, 김포에 도착하면 이후락이가 바로 잡아넣는답니다."
김대중 씨가 자택으로 돌아온 후 중앙정보부는 워싱턴의 교포 사회에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자작극"이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납치 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리 보내 봐야 말짱 헛일이었다. "문 특파원, 그 기사는 보도 관제가 되니 그 건은 보내지 마시오"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는 '뉴스 시간에 한번 때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73년 10월 뉴욕에서 유엔총회가 열렸다.
총회 기간에 유엔플라자 호텔에서 한미 양국 장관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있었다. 한국측에서는 남덕우 씨를 비솟해 몇몇 장관들이 참석했고, 그 날의 연설자는 주한 미대사를 역임한 포토 국무차관이었다. 그 날 아침 국무성으로부터 연설문을 미리 입수해 읽어보니 '김대중 납치사건'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한일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고마운 포터!
회의 시간에 맞춰 유엔 플라자 호텔로 갔다.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는 유엔 본부입니다. 오늘 회의에서 포터 국무차관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경의를 표하면서.. 한편 포터 차관은 한일 양국간의 불행한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워싱턴에서 문명자였습니다."
처음부터 김대중 사건 관련 멘트가 나가면 보도국에서 잘라 버릴것 같아 '경제성장 찬양' 발언을 먼저 보도하고 끝에다가 김대중 사건 관련 내용을 슬쩍 연결 시켰다. 짐작한대로 이 녹음은 MBC 뉴스 시간에 삭제없이 보도 되었다.
나는 계획을 성공리에 마쳤다고 흐뭇해 하면서 유엔 취재를 계속 했다. 73년은 북한이 최초로 유엔대표부를 개설한 해다. 당시 사상 처음으로 북한측 유엔대표단이 유엔에 도착해 있었다. 유엔총회 제 1정치 위원회에는 한국 문제가 상정되었다. 총회에서는 북한측이 낸 '공산측 결의안'과 미국 등이 낸 '서방측 결의안'을 놓고 일대 설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 관련 기사 녹음을 마친 후 서울 보도국 기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금 야단 났어요. 문 특파원이 보낸 어제 기사 때문에 연일 중역회의가 열리고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에서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단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보도하는 필자의 육성이 나가기 시작하자 중앙정보부가 전파 방해를 해서 한때 방송이 지지직 거렸으며 당시 뉴스를 담당했던 기자와 기사들이 중정에 끌려가 호되게 당했다는 것이다. 내가 유엔 기사를 보낸 후 통화한 보도국 기자는 전화 도청이 두려워서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얼마 후 본사로부터 귀국하라는 지시가 왔다. 나는 기자로서 본분에 하등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기사를 보내 봐야 한 줄 보도되지 않는 특파원 생활에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남편도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 동료들과 미국 동료들이 마련해 준 송별회도 많이 얻어먹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교육감으로 새로 부임한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 줄리아와 리처드는 늘 바쁜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한국말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편입신청서도 보냈다.
그러던 73년 11월 7일 새벽 3시경 난데없이 도쿄에서 콜렉트 콜 (수신자 요금부담 전화)이 걸려왔다. MBC의 가까운 후배 기자였다.
-"문 선배, 나요. 지금 미국 출장 가다가 도쿄에서 거는 겁니다. 귀국준비 중이시라면서요. 문 선배가 김포에 들어오기만 하면 바로 잡아넣는다고 이후락이가 벼르고 있답니다. 들어오지 마십시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이후락의 교활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놈이 나를 잡아넣는단 말인가.
그 날 밤 내내 생각했다. 서울로 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인가. 당시 나는 영주권도 없었다. 특파원 신분으로 체류비자를 1년 단위로 연장하고 있었다. 영주권을 받기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국적을 바꾸는 것은 성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한국인으로 살 생각이었다. 백악관 기자실에서 밤낮으로 뛰었던 것도 한국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조국이 나를 잡아 넣겠다는 것이다. 분했다. 한밤중에 앨범을 뒤졌다. 하와이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 때 박정희와 같이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 자 때문에 내가 성을 갈게 생겼다. 도무지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나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나는 기자다. 나는 사실을 보도해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역사의 진실을 알게 하는 본분을 가진 사람이다. 유신체제 이후 한국의 언론인들은 모두 재갈이 물리거나 권력의 시녀가 되어 버렸다. 박 정권은 김대중 납치사건 보도를 문제삼아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까지 폐쇄해 버렸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 우리 국민의 알권리를 지켜주고 한국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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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다음날 11월 8일 국무성에서 나는 정치 망명을 선언했다. UPI 통신, [뉴욕타임스] , 아틀란타[콘스티튜션] 등 미국 신문과 일본의 [아사히], [요미우리] 등이 '한국의 MBC 워싱턴 특파원, 미국에 정치 망명'이란 기사를 타전했다.
그 후, 나는 미국인 동료 세 사람과 함께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UA Asian News Service)라는 통신사를 설립했다. 망명 후 필자가 쓴 첫 기사가 [나는 KCIA를 고발한다] ([주간 요미우리] 73년 12월 1일자) 였다. 사건조사 전문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전해들은 청와대 이야기 한토막을 옮겨 본다. 비서실장이 "각하, 문명자 기자가 미국에 정치 망명을 선언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자 신탄진 담배에 막 불을 당기려던 박정희의 손이 달달 떨렸다고 한다. 잠시 후 박정희가 입을 뗐다.
"이후락이 불러"
이후락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그를 몹시 질책했다고 한다.
"문 기자는 청와대에 와서도 담배에다 침 발라 빨부리에 꽂아 피우면서 영어 일본말 뒤섞어서 자기 할말 다 하고 가는 사람이다.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이 지경이 됐나?"
망명을 선언한 후 나는 무국적자가 되었다. 한국 국적을 가질 수도 없었고,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기도 싫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의 어려운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도와 주었다. 특히 닉슨 대통령 부부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고생해 본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으리 심정을 아는 법이다. 패트리셔 닉슨은 켄터키의 가난한 광부의 맏딸로 태어나 술고래 아버지 대신 13세 때부터 가족을 부양했던 여성이다. 그녀는 겉보기에는 바싹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겼지만 실제 인품은 정반대다. 내가 본 어떤 미국 대통령 부인보다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74년 초인 것으로 기억된다. 함병춘 주미대사가 새로 부임해 와 백악관에서 신임장 제정이 있었다. 원래 신임장 제정은 각 나라 대사를 몇 명 모아서 같이 하게 마련이다. 함 대사의 차례가 되어 비서 실장이 말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다음 순서는 한국입니다"
그러자 닉슨이 갑자기 두리번거리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쥬리 문이 어디 있지?"
패트리셔 닉슨도 덩달아 찾았다.
"쥬리 문? 어디 있어요?"
필자는 그 때 현장에 없었다. 신임장을 제정하고 대사관에 돌아온 함병춘 대사가 물었다.
-"쥬리 문이 누구요?"
동아일보 이웅희 기자가 답했다.
"쥬리 문이 문명자씨 아닙니까?"
그러자 함 대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쿠, 나 대사 하기 글러먹었구나."
닉슨이 한국대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자리에서 망명 기자 쥬리 문을 찾았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후에도 여러 번 닉슨 부부는 나를 한국 정부로부터 방어해 주었다.
이 기회에 바로잡을 일이 한 가지 있다. 닉슨의 큰 딸 트리셔가 결혼할 때 나는 한국의 언니로부터 선물받은 병풍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한국의 아름다운 실크 스크린'이라며 뉴욕의 자기집 식당에 그 병풍을 쳐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쥬리 문으로부터' 라는 글귀를 붙여 놓았다. 그런데 말이 잘못 전달되었던지 한 미국 신문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트리셔 닉슨의 집에 있는 동양의 아름다운 실크 스크린은 코리언 리포터 쥬리 문이 몇 년에 걸쳐 수를 놓아 선물한 것이다."
덕분에 자수 바늘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내가 병풍을 수놓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74년 8월 9일 마침내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사실 민주당 선거본부의 문서를 도둑질한 워터게이트 사건은 과잉충성파들이 저지른 악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런 짓까지 하지 않더라도 닉슨은 무난히 재선되었을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고 닉슨이 궁지에 몰리게 되자 나는 미국인들의 또 하나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CBS의 빌 헬드만 기자는 닉슨 부부와 특별히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사람이다. 그는 닉슨 부부의 중매로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였다. 그랬던 헬드만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안면을 싹 바꿨다. 기자회견장에서 정색을 하고 "미스터 프레지던트?" 하면서 공세적인 질문을 퍼부어 닉슨을 괴롭혔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헬드만에게 말했다.
"헤이 빌, 너는 한국말로 하자면 의리란 게 없어."
-"의리가 뭐냐?"
그러자 나는 말이 막혔다. '의리'란 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사전을 뒤졌다. 역시 사전에도 없었다. 나는 그에게 설명하기 위해 여러가지 표현을 동원했다. '신의' '의무' '배신하지 않는 것' 등등 그러나 부족했다. 미국인의 사전에 '의리'란 없었다.
73년 11월 8일 정치 망명을 선언한 후 내가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것은 74년 11월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있었던 포드 대통령 방한 때였다. 당시 포드는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 순방 일정 속에 한국을 넎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뜨거운 찬반 양론이 벌어졌다. 대공산권 반공 교두보로서 박정희 정권이 필요하면서도 그 같은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것처럼 비치기는 싫은 게 미국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결국, 포드 행정부는 "북한이 오판하는 일이 없도록 일본 방문 후에 한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미국은 박 정권의 독재정치와 인권침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한국 방문 사유를 발표했다. 망명 후 나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 소속 백악관 출입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포드의 방한이 확정된 후 나는 이 기회에 서울에 갈 것을 결심하고 백악관 기자단에 포드 수행을 신청했다. 정치 망명 당시 "박정희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던 내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동료 미국 기자들은 무모한 행동이라며 극구 만류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악관측은 나의 수행신청을 이의없이 환영해 주었으나 FBI는 크게 우려했다.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수사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쥬리, 당신은 박정희 정부의 지명수배 1호(Wanted No. 1)야, 극히 조심해야 돼."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아이들을 떼어놓을 때였다. 줄리아와 리처드는 내가 서울에 간다는 사실을 알자 울며 매달렸다.
-"마미, 마미, 박정희가 마미를 죽일 거야. 가지 마! 가지 마!"
나는 우리말도 못하는 어린 것들이 영어로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 엄마를 죽이려는 악당들이 우글거리는 곳일 뿐인가. 나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말꼬리를 돌렸다.
"헤이 줄리아, 리처드, 엄마가 한국 가서 고무신 사다 줄게."
-"노오우!"
아이들은 여전히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도 역시 아이들이라 고무신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한 표정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데 한민통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이건팔 씨가 찾아왔다.
"문 여사님, 진짜로 가실랍니까? 일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실라구요?"
나는 다짜고짜 말했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요. 기도나 해주세요."
나의 한국행은 첫 번째 관문인 일본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11월 18일 월요일 아침 워싱턴 출발이 예정돼 있었는데 11월 15일 금요일 오후까지 일본 외무성이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박정권이 일본 외무성의 부패한 관리들에게 압력을 넣어 벌인 짓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본 입국이 안 되면 한국 입국은 자연히 좌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안면이 있던 일본 기무라 외상에게 전화를 걸어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는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기무라 외상은 물론 그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그의 지시로 토요일인 16일 오전 일본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날 오후 백악관 담당자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쥬리, 이번에는 한국에서 말썽이야."
나는 한국대사관의 유종화 영사과장에게 전화를 해 따졌다.
"일본 비자도 나왔는데 한국 비자를 안 내주는 이유가 뭐요?"
옥신각신 끝에 그는 "30분만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30분 후에 전화해서 "대사관으로 오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으로서는 일본행만 막으면 내가 한국에 못 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본 쪽에서 뚫리고 보니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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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대사관에 미 국무성이 발행한 나의 무국적 망명객 여권을 내밀었다. 유 과장은 거기에다 1개월 여행비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는 말했다.
"무국적 망명객의 여권에 비자 도장 찍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길 빕니다."
11월 22일 포드 일행과 함께 드디어 서울로 향했다. 김포 상공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김포 상공에서 고국 산천을 내려다 본 것이 이미 수십 차례였지만 망명객이 되어 무국적 여권을 들고 조국을 찾은 감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 기자단에서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쥬리, 김포에 도착하면 옆에 있는 백악관 기자들이나 경호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도록 한국 사람에게 항상 영어로 말하도록 하시오."
백악관 공보실 담당자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30분마다 한 번씩 나에게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됐는지 그는 조선호텔에 도착하자 마자 30분마다 "쥬리 문, 쥬리 문, 공보실로 연락하시오" 하고 방송을 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공군 1번기)에 앞서 기자들의 전세기가 1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기자석으로 걸어가는데 인상이 험악한 젊은 남자가 다가오더니 자신은 공항장이라면서 말을 걸었다. 분위기로 봐서 중앙정보부원 같았다.
-"1개월 비자를 발급 받으셨던데 서울에 잔류하실 계획입니까. 아니면 포드 대통령과 함께 떠나실 계획입니까?"
아예 묵살하려다가 "내가 온 목적을 잘 아실텐데?" 하고 말해 주고는 휙 돌아서서 취재를 시작했다. 사진을 찍고 취재수첩을 기록하는 동안에도 문제의 '공항장'과 몇몇 남자들이 내 주위를 따라다녔다. 나는 취재하는 척하면서 한국 기자석으로 들어갔다. 한국 기자들이 곧 알아보며 인사를 청해 왔다.
-"00 신문사 000기잡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문 선배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용기 백뱁니다."
처음 보는 젊은 후배기자들은 눈을 부라리는 중정요원들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숙소인 조선호텔에 가보니 백악관 선발대가 잡아놓은 내 방이 하필이면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문명자 씨죠?"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착한 것을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성가신 전화는 계속 걸려 왔다. 보다못한 UPI 통신의 백악관 출입기자 헬렌 토마스가 "내 방으로 가자" 고 하기에 짐을 옮겨놓고 프레스센터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역대 주미 특파원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이들은 백악관 수행기자단들을 옥류장 기생파티에 끌고 가려고 꼬이고 있는 중이었다. 역대 주미 특파원들이 중앙정보부의 뚜쟁이로 동원된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낯뜨거운 노릇이었다. 다행히 수행기자단 중 한 명도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그 날 오후 6시 30분 부터 중앙청에서 스테이트 디너 파티가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을 이용해 김대중 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래서 백악관 여비서 두 명을 데리고 반도조선 아케이드에 자수정 쇼핑을 나갔다가 조선호텔 미용실로 들어갔다. 중정요원들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김대중 씨 집에 전화를 걸었다. 거친 음성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김대중 씨 집에는 2명의 정보부원이 상주하면서 전화를 받는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김대중 의원 계십니까?"
-"안 계십니다."
"이희호 여사는 계십니까?"
-"외국 손님이 있어 바쁩니다."
"좀 바꿔 주십시오."
-"누굽니까?"
"워싱턴의 문이라면 압니다."
그러자 없다던 김대중 씨가 직접 나왔다.
-"왠일이요? 어디서 거는 거요?"
"서울입니다. 포드 대통령 수행차 왔는데 조선호텔에 있습니다. 찾아 뵈려는데 몇 시가 좋을까요?"
-"6시부터 기다리겠습니다."
말하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 끊으셨어요?"
-"아니, 이러는 게 보통 있는 일이라구."
"그럼 상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 듣지요."
나는 [LA타임스] 동경지국장인 샘 제임슨 기자와 함께 김대중씨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이전에 김대중 씨 집을 수차례 방문해 인터뷰를 했던지라 지리에 밝았다. 그와 나는 중정요원들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추운 날씨임에도 외투를 걸치지 않고 호텔 아케이드에 쇼핑하러 가는 척하며 지하도로 내려와 덕수궁 앞으로 가서 얼른 택시를 잡아탔다. 동교동 김대중 씨 집 골목 입구에 내린 후 나는 샘 제임슨과 부부처럼 보이도록 팔짱을 끼고 걸어갔다. 김대중 씨 집 앞에 있는 약국 옆에 검은 세단이 서 있고 그 안에 두사람이 앉아 있었다. 제임슨 기자는 "한 달 전에 왔을 때도 저들이 있었다"면서 "한국 사람이 김씨 집에 들어갔다 나오면 저 차로 실어갔다"고 말해 주었다.
김대중 씨 집 10미터 앞까지 걸어갔을 때 경찰이 개미떼처럼 담장에 붙어 있슴을 알 수 있었다. 제임슨이 말했다.
-"쥬리, 전에 왔을 때하고 상황이 다르다. 꼭 영어만 해라."
그 때 갑자기 깡패같이 보이는 가죽잠바 차림의 7명의 젊은 남자들이 전봇대 뒤에서 튀어나와 우리를 막아섰다. 그 중 한 면이 나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꽉 잡았다. 그를 뿌리치며 나도 모르게 우리말로 소리쳤다.
"이거 놔!"
나는 사실 가죽잠바 요원들을 실제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온몸이 떨렸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데 격분한 제임슨 기자가 그들을 밀쳐 내며 소리쳤다.
-"너희들 뭐야? 비켜! 우리는 가야 한다."
상관인 듯한 사내가 소리쳤다.
"야! 세 명이서 반짝 들고 가!"
그 말에 나는 머리끝까지 피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 켜들고 소리쳤다.
"뭐, 반짝 들고 가? 이놈들아? 어디 들어 봐? 들어 봐?"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휘둘러 젊은 남자들의 배를 차례로 호되게 때렸다.
상관인 듯한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자동차에 집어 넣어!"
"실어!"
그 말에 나머지 젊은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들을 밀쳐 내며 악을 썼다.
"찔러! 이 새끼들아! 내 조국에서 피 흘리고 죽는 게 소원이야! 찔러 이 새끼야!"
샘 제임슨이 놀라서 소리쳤다.
-"헤이 쥬리, 레츠 고우 홈!"
숙소인 조선호텔로 돌아가자는 얘긴데 급하니까 집에 가자고 소리쳤던 것이다. 나는 그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젊은 남자들과 밀고 당기며 결사적으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김대중 씨 집 대문이 열리며 이희호 여사가 나왔다. 그 순간 너무나 격해서 달려가 이희호 여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50세쯤 돼 보이는 사내가 나타나 3분만 얘기하자고 했다. 이희호 여사가 말했다.
"왜들 이러십니까? 주인께서 기다리시니 손님을 모시고 들어가야겠소."
-"안됩니다."
"지금 당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국가의 장래를 얼마나 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멀리 미국에서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권리를 무슨 근거로 박탈하겠다는 겁니까?"
-"상부의 지시입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또다시 40여 분간 육박전에 말싸움을 벌였지만 검은 잠바들이 결사적으로 막는 바람에 우리는 김대중 씨 집 안으로 한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다. 김대중 씨 역시 집 안에서 두 명의 정보부원에게 제지당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희호 여사에게 말했다.
"이 여사님,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가겠습니다."
이희호 여사도 곧 눈물이 쏟아질 듯한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오셨다가 들어가시지도 못하고... 안에서 기다리시는데..."
이 여사를 뒤로 하고 돌아서는 우리의 뒤통수에다 대고 검은 잠바들이 내뱉었다.
-"굉장히 힘도 쎄구먼."
23일 새벽, 포드 일행은 출발을 서둘렀다. 나 역시 조선호텔에서 기자 전용 버스로 공항으로 떠났다. 연도에는 도착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투도 입지 않은 어린 중학생들이 떨면서 환송 나와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젊은 사람 하나가 내게 다가와 둘둘 만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저는 조선일보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 신문만 문 기자님이 오셨다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보십시오."
다시 다른 한국신문들은 보도 통제로 내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을 일절 보도하지 못했는데 오직 [조선일보]만이 포드 방한 기사 속에 슬쩍 "이번 외신기자 중 전 문화방송국 주미 특파원이었던 문명자 씨가 끼어 있어 눈길을 끌었는데 그는 유에스 아시안 뉴스 특파원 직함으로 한국에 온 것"이라고 썼다.
내가 미국 기자단 자리에 서 있는데 하비브 국무차관보와 함께 있다가 나를 발견한 정일권 국회의장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는 61년 주미대사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다.
-"하우 아 유, 쥬리 문! 오랜만이오."
그는 내 뺨에다 청하지도 않은 입맞춤을 한 후 말했다.
-"왜 온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았소, 알았으면 특별초청장을 냈을텐데..., 어제 저녁이라도 같이 하려고 김종하 비서실장([신아일보] 기자출신)을 보냈더니 아무리 찾아도 안 계시더라고 하더구먼."
나는 쏘아 붙였다.
"김대중 씨 집에 갔었지요."
-"아 그래요."
그런 경우 결코 "거긴 왜 갔어요?" 하고 따져 묻지 않는 것이 정일권이란 인물의 특성이다.
"거기서 당신네 깡패놈들에게 기막힌 해러스먼트(귀찮게 달라붙기)를 당했구요."
-"테러블! 그럴 리가 있나. 그러지 말고 문 기자, 귀국해서 함께 일합시다."
국회의원 및 각료들의 자리인 맞은편 붉은 카펫 위에 서 있던 최경록 교통부 장관이 손을 휘저으며 다가오려고 했다. 그는 5.16 직후 워싱턴 동지들과 함께 백악관 앞에서 매일 반대 시위를 벌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귀국해 박정희 밑에서 장관으로 지내고 있었다. 나는 소리쳤다.
"내 주변에 오지 마세요. 출세에 지장 있으니까."
그 때 박준규 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노진환 유정회 의원과 함께 헤헤 웃으며 다가왔다. 그와 나는 같은 대구 출신으로 서로 말을 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유(you)는 무국적이라면서?"
"너희들 때문에 그렇다."
-"이것 봐. 그만큼 하고 싶은 얘기 다 하고 쓰고 싶은 글 다 썼으면서도 아직도 분이 안 풀렸어? 이제 그만 돌아와서 손잡고 일하자."
그 때 노진환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하려 했다. 나는 들고 있던 둘둘 만 [조선일보]로 그의 배를 마구 찌르면서 소리쳤다.
"나가!"
그리고 박준규에게 빈정거렸다.
"그래 저 노진환이는 워싱턴 교민회장 하면서 정인숙이를 안팎으로 돌봐준 공로로 유정회 배지 하나 얻은 모양인데, 그래 당신은 공화당 정책위 의장이라면서 저런 협잡군 배지 하나 못 떼나? 그러면서 나더러 손잡고 일하자고?"
그러던 차에 박정희가 나타났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 때 나는 안경 위에 선글라스가 붙어 있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평소에는 선글라스 알을 위로 올리고 있다가 햇볓이 강해지면 내려닫아서 쓰도록 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이 즐겨 쓴다고 해서 '플브라이트 안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는 인사를 건네는 박정희를 빤히 쳐다보며 그 때까지 올리고 있던 선글라스를 탁 내리고 아무 대답 없이 휙 돌아서 버렸다. 박정희는 아마 속으로 '저런 지독한 년'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한데 그것은 나도 어찌지 못하는 내 기질이다.
키신저 국무장관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후일담 하나. 76년 나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수행기자단이 비공식 회견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당시는 록히드 스캔들에 돌연 휘말린 일본 다나카 수상의 운명에 외신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기자들은 키신저를 물고 늘어졌다.
"다나카는 오래 갈 것 같은가?"
키신저는 아주 오만한 자세로 답했다.
-"다나카 정도야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순간 나는 무척 당황했다. 키신저의 말은 계속됐다.
-"그는 매우 건방지다. 미국을 뒤따라오면서 일.중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미국을 앞질러 일.중 관계를 개선했다."
73년 미국은 미.중 관계를 정상화 했지만 대만과의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중국에 대한 지뢰대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나 미.중 관계 정상화 작업을 예의 주시하던 일본은 황소 머리 위에 올라탄 쥐가 천리길을 다 가자마자 목표점에 먼저 뛰어내린다는 식으로 대만과 단교하면서 일.중 관계를 정상화해 버렸다. 다나카가 건방지다는 키신저의 말은 바로 그 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키신저에게 물었다.
"헨리, 록히드 스캔들도 당신이 벌인 것 아니야?"
나는 아직도 그 때 그의 답변하던 표정과 억양을 잊을 수가 없다.
-"오브 코오스(그거야 물론이지)."
일본 국회가 떠나갈 듯 시끄러웠던 록히드 사건 정보는 먼저 미국 의회에서 터져 나왔다. 록히드 사로부터 다나카가 받은 돈은 불과 3백만 불(?) 평소 일본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규모로 보면 그리 대단한 액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수뢰가 사실로 확인되고 언론과 국회가 들고 나서면 문제가 된다. 키신저는 다나카 문제에 대해 마치 재벌그룹의 오너 회장이 월급쟁이 사장 하나 잘랐다는 투로 말했다. 결국 그 후 다나카는 사임했고 후쿠다 내각이 출범했다.
나는 1992년 일본 정가에서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사태를 목격했다 90년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이 사회당 다나베 의원과 함께 조.일 수교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그 때 다나베 의원은 먼저 귀국하고 가네마루만 하루 더 머물며 묘향산에서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그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나는 그와 장어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조.일 수교 문제는 잘 되어 갈 것 같습니까?"
-"그 문제는 정치생명을 걸고 내가 해결할 것입니다. 나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김 주석을 만나 보니 인상이 어떻습디까?"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김 주석에게 당시 간첩선으로 나포돼 북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후지산마루 호 선장과 선원들의 송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들 선원 가족들의 정상에 대해서도 많이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김 주석이 말했습니다. '가네마루 선생, 걱정마시오. 법도 인간이 만든 겁니다.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여 고려하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북조선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후지산마루 선장과 선원들이 일본으로 귀환 조치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조.일 수교 문제를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가네마루 신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것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쇼크사였다. 가네마루의 정치자금 문제를 집요하게 걸고 넘어진 세력, 나아가 그 집에 있던 금괴 문제까지 적나라하게 들고 나와 가네마루를 쇼크사하게 만든 배후 세력은 누구인가. 나는 그 때 20년 전 록히드 스캔들로 다나카를 실각시켰던 키신저 국무장관의 얼굴이 떠올랐다.
92년 당시 미국의 목표는 북핵 동결이었다. 이를 위해 이미 몇 년 전에 찍어 두었던 인공위성 사진을 가지고 북한을 위협하고 한.미.일 공조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가네마루의 조.일 수교 추진활동이 이 같은 스케줄에 걸림돌이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제 4장 박정희의 김대중 납치 무마 공작비 3억엔 추적기
조중훈, 다나카에 3억 엔 제공해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나는 다짐했다. 기자생명을 걸고 이 사건의 진상만큼은 우리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피해자인 김대중 씨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민족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정희 정권을 민족 앞에 심판해야 한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기 나라 야당 대통령 후보를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땅에서 대낮에 납치해다가 바다에 수장하려는 정부가 일본인들의 눈에 대체 어떻게 비쳤을 것인가. 게다가 67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유럽에 있는 한국 지식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다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 이것이 중세의 해적떼들의 소행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황민사상에 물든 일인들이 '조센징은 어쩔 수 없어'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박 정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사건 발생 후 일본 정부의 태도가 상당히 야릇했다. 처음에는 '김대중측의 자작극', '북괴의 공작' 등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 행위를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는 언론의 거센 비판에 부닥치자 일본 정부는 "진상을 조사한다" , "주범을 잡는다"하며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정부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돈으로 다나카의 입을 막았다"는 루머가 분분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73년 10월 대한항공 서울-뉴욕 간 항로 개설 교섭차 뉴욕에 온 조중훈 사장이 한 미국 주재 한국관리에게 떠벌린 무용담이 몇 다리 건너 필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PP(박정희)의 부탁으로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을 만나 김대중 사건을 해결했다."
여기서 오사노란 일본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 겐지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전일본항공(ANA)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조중훈은 자신이 사건을 그렇게 무마했으므로 PP의 앞날이 승승장구할 것이며 그런 공을 세운 자신의 앞날은 또 얼마나 양양할 것인가 하고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또 다른 한국의 재계인사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업인들 간에도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한 조중훈의 행적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정보였으나 철저한 확인이 필요했다. 상대는 일본 수상과 대한항공 사주가 아닌가. 법정에서까지 완벽하게 상대를 이길 수 있을 증거 확보가 필요했다.
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에게 45도 각도로 머리를 숙였다. 김대중 사건을 둘러싼 한일 간의 마찰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마무리했다고 해서 역사조차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에 대한 본격적이 추적에 들어갔다. 우선 사건 발생 후 조중훈 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다. 그 결과 조중훈 씨는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8월 16일부터 9월 21일 사이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오간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일본에서 조중훈 씨의 행적이었다. 그는 어디서 누구를 만난 것인가.
나는 조중훈이 떠벌린 말 중에 등장한 오사노 겐지의 인적사항을 조사했다. 조중훈과 오사노는 의형제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 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중훈이 다나카 수상에게 접근하려 할 때 오사노가 중개역할을 맡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73년 8월 16일 도쿄에 온 조중훈씨의 행적을 탐문한 끝에 그가 도쿄 아카사카 거리로 직행했음을 알아냈다.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아카사카 거리에는 요정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일본 정.재계 요인들은 각기 자신의 단골집들을 가지고 있다. 오사노 겐지의 단골집은 '가와사키' 그런데 이런 요정의 마담들은 기자들이 찾아와서 단골 손님에 대해 물어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심지어 은퇴한 후에 죽을 때까지도 손님들의 비밀을 보장하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목격자에게서 8월 16일 조중훈씨와 오사노가 가와사키에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는 가와사키의 마담에게 물었다.
"오사노 사장이 작년(73년) 8월경에 여기 오셨었지요?"
그녀는 정계 거물들을 상대하는 아카사카의 마담답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능숙하게 잡아뗐다.
"48년(서기 1973년) 장부는 창고 깊숙이 박혀 있어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러니 작년 8~9월 경에 누가 왔다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사노 상은 종전 직후 한 번 왔다 갔을 뿐,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데요."
종전 직후에 한 번 왔다 갔다니! 해도 너무한 여성이었다. 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일본 기자들을 통해 가와사키의 한 종업원 여성과 사귀었다. 그녀와 인간적으로 친해진 후 그녀를 통해 오사노와 조중훈이 73년 8월 16일 가와사키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액수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거액의 뭉칫돈이 조중훈으로부터 다나카에게로 흘러갔음이 분명했고 나는 그 흐름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생리로 볼 때 그 돈이 현금일 것만은 분명했다. 거대한 현금 뭉치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곳, 즉 한국과 거래관계에 있는 모든 회사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필자에게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조사를 시킬 만한 돈도 없었다. 이 때 나의 취재를 도와 준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타 진실을 한번 캐보자고 나선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근 4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나는 비로서 검은 뭉칫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 곳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이었다. 돈의 흐름을 감추기 위해 외환은행에서 돈을 빼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단 때문에 조사를 제일 뒤로 미루었던 곳이 바로 정답이었다. 뭉칫돈의 총액은 무려 3억 엔! 이 돈은 도쿄 지점에서 최고액권 지폐로 인출됐는데 예상과는 달리 한꺼번에 3억 엔이 아니라 1억 엔씩 세 번에 걸쳐 인출됐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인출일은 8월 16일. 이 날은 김대중 사건 이후 조중훈이 오사노와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두 번째 인출은 이후부터 9월 중순 사이의 어떤 시점이었고, 세 번째 인출은 9월 21일이었다.
뭉칫돈의 인출 시점은 조중훈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과도 일치했다. 조씨는 8월 16일에 일본에 와서 오사노를 만난 후 8월 18일 서울로 돌아갔고, 그 후 8월 18일부터 9월 21일 까지 각각 1억 엔씩을 오사노 혹은 다나카 수상에게 건넸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음 문제는 장소였다. 조중훈과 다나카는 어디에서 만난것일까. 조중훈이 미국에서 떠벌렸다는 얘기중에 그 해답이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였다. 필자는 다시 하코네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하코네는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다. 나는 하코네에 오사노 겐지 소유의 별장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일본 재계의 유력자인 오사노 겐지는 하코네에 자신의 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 코라 호텔이었다. 나는 다시 오사노가 하코네 코라에 온 날짜를 탐문했다. 그 결과 73년 9월 21일 조중훈과 오사노, 그리고 다나카 수상까지 모두가 하코네 코라 호텔에 숙박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사노가 조중훈과 다나카 수상을 대면시킨 장소는 바로 하코네 코라였던 것이다.
76년 초 나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인사로부터 박정희와 조중훈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73년 8월 15일 박정희는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는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당선될 것으로 보고 그 쪽을 적극 지원했는데 뜻밖에 다나카가 당선되는 바람에 다나카측에는 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조중훈을 불러 "조 사장이 그쪽에 인맥이 있으니 나를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 조중훈에게 김대중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중훈은 다음 날 부리나케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돈 1억 엔을 건넸다. 그리고 8월 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 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렇게 3억 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그의 말대로 승승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거듭되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조중훈씨 부자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오늘의 현실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걸 가리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하는 것인가.
하여간 이것이 바로 김종필이 다나카에게 머리를 숙이고 김대중 사건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기 전까지 물밑에서 오고갔던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의 진상이다.
발표해도 될 만큼 물증과 증인들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77년 초 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기사는 당시 발행부수가 1맥만 부에 달하던 일본 최고의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에 실렸다.
[다나카, 오사노 겐지, 조중훈의 하코네 회담에 의혹 있다] (77년 3월 11일자)와
[김대중 사건 무마 공작자금 3억과 밀약 내용을 폭로한다] (3월 18일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가 실린 [주간 포스트]는 5백만 부가 팔렸는데 한국 내에서도 비밀리에 돌려 읽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기사를 쓰고 나니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선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3억 엔' 기사는 내 이름으로 나간 기사이지만 결코 내 개인의 기사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수많은 협력자들의 열성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선 취재비용부터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대중 사건이라는 거대 사건과 씨름하는 동안 취재비용은 우리 집을 저당잡혀 대출받은 은행빚으로 충당되었다. 내가 미국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는 통신사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의 계약사로부터 통신료가 들어오면 은행빚을 갚고 그 후 다시 은행 대출을 받아 취재비로 사용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런 속에서 남편 최동현의 고생은 극심했다.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그는 미국 망명 후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하다가 브로커 라이센스를 따서 그 당시 워싱턴에서 한국식으로 말하면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복덕방도 잘 되질 않았다. 남편이 집을 사겠다는 교포를 데리고 이곳 저곳 열심히 집을 보여주고 난 후 막상 계약단계가 되면 어디서 들었는지 고객의 입에서 "부인이 문명자 기자시라면서요?" 하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민올 때 소양교육을 통해 미국에 가면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는 반한인사 제 1호가 문명자라는 것을 귀가 닳도록 들은 사람들이 바로 그 문명자 기자의 남편을 중개인으로 해서 집을 사려 하니 겁이 덜컥 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남편은 한국 교포 상대 영업은 포기하고 주로 베트남이나 필리핀 사람을 상대로 부동산 중개소 일을 하게 되었다.
3억 엔 기사가 나가자 마자 일본 정계가 시끄러워졌다. 다나카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나는 답했다.
"좋소, 법정에서 만납시다."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소속의 안타구 의원은 하토야마 외상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필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측은 나에게 일본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답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무마비 3억 엔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이 모두 알고 있는데 사건을 취재한 기자가 일본 국회에까지 진상을 증언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내 기사가 나간 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당시 미국무성 한국 과정이었던 도널드 레이너드 씨는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의 3억 엔 수수설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의 정보보고에 의해 우리(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나의 기사를 확인해 주었다.
사실 국무성 한국 과장은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 도쿄의 주일 미 대사관 등 각지의 대사관에서 일일보고로 올리는 한국관계 정보를 총괄해서 받아보는 자리다. 더구나 당시는 미 CIA가 청와대를 도청해서 말썽이 된 시점이었으니 그가 공개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일본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원들은 연일 일본 외상에게 미국측에 사태의 진상을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미 국무성이 다급해 졌다. 번스 미 국무장관은 주일 미국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미국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기타 일본 내에서의 한국의 부정한 활동에 대해 일본 국회의원들과 의견 교환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본 외무성에 분명히 밝힐 것. 레이너드 전 한국 과장의 언급은 개인 자격의 논평으로 국무성은 일체 논평하지 않겠음."
그러나 뒤에 일본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이 미국을 방문해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진상을 확인 했을 때 그는 다시금 분명히 한일 간의 3억엔 수수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미 76년 3월 25일 미 하원 국제 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개최한 비밀청문회에서 '3억 엔 문제'를 증언 했다고 한다. 결국 이 기사를 쓴 후 나는 박정희, 조중훈, 오사노, 다나카 등 그 누구로부터도 고소당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국무성 한국 과장에서 물러난 후 다른 자리로 가지 못하고 관직에서 영구히 은퇴했다. 이 같은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양심을 걸고 부정을 폭로했던 레이너드와 같은 미국인이 있었슴을 한국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기를 열망했는데 아쉽게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93년 초 세상을 떠났다.
금발 가발 쓰고 LA에 숨어든 김대중 납치 행동대원 김기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그것을 주도했던 중앙정보부 행동대원들 중 일부가 미국에 숨어 들어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내가 사건 당시 주일대사관 공사로서 납치 사건에 가담했던 김기완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접한 것은 김형욱으로부터였다.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71년 그가 국회의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런데 73년 김형욱은 박정희의 눈밖에 난 후 보복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왔다. 뜻밖에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마치 자신이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민주투사라도 되는 양 흰소리를 쳤다. 하지만 공작정치의 장본인답게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물론 전화번호조차 알려 주지 않았다. 단지 자신이 필요할 때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사건전모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라고 예의 큰소리를 쳤다. 나는 물었다.
"김부장이 미국에 앉아 어떻게 그렇게 진상을 잘 아세요?"
-"이번에 활동한 김기완(가명 김재군)이가 미국에 와 있거든. 걔를 주일 공사로 내보낸 게 바로 나요. 김기완이는 사건 후에 LA에 와 있는데 걔한테 사건 내막을 완벽하게 들었지."
귀가 번쩍 뜨였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다시 물었다.
"김대중이 납치 잘 했다고 한밑천 챙겨서 미국 보내 준 모양이구먼? 그 친구 비벌리힐스 저택에서 사는 것 아니요?"
-"그렇지 않소 논공행상이 제대로 안 돼서 상당히 궁한 처지요. 그 놈들(이후락 중앙정보부를 지칭함) 하는 일이 그렇지."
"천상 김 부장이 김기완이를 먹여 살려야겠구먼?"
-"내가 다 방법을 일러 주었지. 사건 내막을 폭로하겠다고 쎄게 나가라고 했소."
나중에 조사해 보니 김기완이 중앙정보부를 협박해 뜯어낸 돈이 2백만 달러가 넘었다.
나는 LA 근방에 살고 있는 게 분명한 김기완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여러 갈래로 수소문해 봤지만 그를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철저히 신분을 위장하고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국이란 숨기로 작정하면 깜쪽같이 숨어 버릴 수도 있는 광대한 곳이다.
나는 LA의 등기소부터 탐문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가 미국땅에 와서 숨어 살기로 했다면 분명히 집을 샀을 것이고, 그 기록은 등기소에 남아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교토통신 워싱턴 히스키 상과 함께 LA로 날아갔다. 등기소가 업무를 시작한 시간부터 그와 나는 등기소 기록실에서 부동산 소유주들의 이름을 뒤지기 시작했다. 점심도 거른 채, 나중에는 아예 구두도 벗어 던지고 등기소 기록실의 붉은 카펫 위를 맨발로 걸으면서 등기 기록부를 뒤졌으나 김기완 소유의 부동산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름을 미국식으로 바꿀 수도 있기 때문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부동산도 모두 뒤졌으나 김기완이 미국에 온 시점에 구입된 부동산은 없었다. 실패였다.
피곤과 허기, 그리고 실망 속에서 우리 두사람은 별수없이 LA비행장으로 갔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김기완' '김기완'을 되뇌었다.
'오늘은 그냥 가지만 나는 반드시 그자를 찾아 내고야 말 것이다.'
자동차가 공항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전담하던 아나운서 임아무의 누나가 김기완의 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소리쳤다.
"히스키 상, 돌아갑시다. 김가를 찾아서는 안돼요!"
미국에서는 보통 집을 부부 공동의 명의로 구입한다. 김기완이 어떤 술수로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하더라도 부인의 성과 이름까지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히스키 상과 나는 부리나케 등기소로 돌아가 기록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집중적으로 임씨를 찾았다. 한 시간여 기록 카드를 뒤적였을 때 드디어 김기완과 부인 임아무개가 공동으로 산 집이 나타났다. 김형욱의 말대로 LA 근방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그 곳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김기완의 집은 미국 중산층 이상이 사는 저택이었다. 대문에는 '맹견주의'라고 써붙여 놓았다. 근처 부동산 사무소를 찾아가 김기완이 산 집에 대해 문의했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 집은 일본인 사업가에게 팔렸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기완의 집 근방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도무지 사람이 나오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는 주변을 살폈다. 집 뒤쪽으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김기완의 집은 풀장까지 딸린 저택이었다. '한국민의 세금이 이런 곳에 쓰이고 있구나' 생각하니 욕이 절로 나왔다. 히스키 상과 나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랑머리라니?
나는 노랑머리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이기는 하지만 그는 서양인이 아니었다.
"히스키상, 저건 가발이에요!"
-"맞습니다. 동양 남자입니다."
노랑머리 가발을 쓴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나는 그 이전에 김기완이 운전면허 응시 때 제출한 서류에 붙은 사진을 확인한 바 있었다. 노랑머리의 얼굴은 사진 속에서 본 바로 그 얼굴이었다.
"김기완이에요, 히스키 상"
-"맞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행동대원, 전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김기완이 LA근처 저택에 숨어 살고 있다는 이 기사는 미국과 일본 언론은 물론 워싱턴에서 발행되는 교포신문 [한국신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한국신보] 발행인 홍성원 씨를 잊을수가 없다. 그는 원래 [대한일보] 기자로 일했는데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박정희가 [대한일보]를 폐간시키자 미국으로 와서 유신철폐와 조국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국신보]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70년대 유신철폐운동 내내 나의 언론 동지였다.
유신체제하에서 국내 언론이 모두 침묵했던 반면 이렇듯 [한국신보]만이 유신 주체들의 온갖 부정과 비리들을 가감없이 보도해 나가자 한국 내의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비밀리에 [한국신보]에 기사를 제보해 오곤 했다.
80년 광주 학살을 직접 목격한 기자가 인편으로 보내 온 기사 [찢어진 기폭]을 연재했던 것도 바로 [한국신보] 였다. 한국신보의 이 기사는 교포사회에는 물론이고 한국 내로 다시 유입돼 광주학살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들었다. [찢어진 기폭]이 연재되는 동안 [한국신보]가 발행될 무렵이면 워싱턴 한국대사관의 안기부 요원 공 씨가 신문사 앞에 와서 항상 기다리고 서 있을 정도였다.
내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가담했던 범인들 중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기사화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주일대사관 유충국 2등서기관이었다. 나는 그를 LA에서 이틀째 걸쳐 만났다. 그는 다음과 같이 납치에 가담했던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김대중 씨를 납치해 자동차에 밀어넣고 나는 그 옆에 앉았습니다. 나는 이북 출신으로 이남에 와서 살길이 막연해 군대에 들어갔는데 어쩌다가 해외에 나와 생사람을 납치하는 역할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 일에 가담은 했지만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납치된 김대중 씨가 너무 놀라 쇼크라도 받을까 싶어서 그의 다리에다 계속 '안심'이라고 썼습니다. 그가 그것을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여간 인도 장소에서 다른 동료들에게 그를 넘겨준 뒤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갔는데 마침 아들놈이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자 아들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떤 놈들이 경시청도 모르게 김대중 씨를 납치해 갔대요.' 나모 모르게 가슴이 철렁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애원했다.
"문 기자님, 지금은 제 아들이 아직 어립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면 반드시 제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빌겠습니다. 제발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나는 집에 돌아와서 하룻밤 내내 생각하다가 유충국에 관한 기사는 쓰지 않기로 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어린 아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그후 98년 [동아일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고백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1970년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망명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 자신부터가 그 중 한사람이었다.
나는 73년 11월 8일 정치 망명을 선언한 후 76년 말까지 무국적 상태의 난민으로 지냈다. 61년 미국에 특파원으로 부임한 후 나는 영주권을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미국에서 일할 때도 반드시 한국인으로서 입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악관 기자회견에 임할 때도 항상 나의 머리를 가장 강박했던 생각은 '결코 미국 기자들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곳곳에서 인종차별과 부딪치게 된다. 백인 이외의 인종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속어까지 있을 정도다 코리언은 '국(Guk)', 중국인은 '칭키(Chinky)', 일본인은 '잽스(Japs)'다. 한번은 택시를 탔더니 백인 운전사가 물었다.
-"너 잽스냐?"
나는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러자 운전사놈이 혼자서 중얼중얼 "칭쿤가 보다"하는 것이었다. 목적지에 다 왔을 때 나는 물었다.
"얼마야?"
-"3불25센트."
택시를 타면 요금의 1할 정도를 팁으로 더 주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3불 25센트를 내밀었다. 화가 난 운전수는 문을 쾅 닫고 가버렸다. 나는 뒤통수에다 대고 말해 주었다.
"인종차별한 댓가야"
망명 이후 나의 신변안전을 담당하던 FBI측은 76년 말 국적 문제 때문에 다시 한번 나를 물고늘어졌다.
-"쥬리, 당신이 무국적인 한 우리가 더 이상 당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부디 시민권을 받기 바란다."
그 문제로 줄곧 고민하던 나는 77년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시민권을 신청했다.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법정에서 "미국 시민으로서 헌법을 준수하며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겠다"고 선서해야 한다.
나는 마침내 알레산드리아 연방 법정 강당에서 열린, 만국 이종들로 붐비는 선서식에 참여했다. 판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문제의 선서를 마쳤을 때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을 본 판사가 물었다.
"당신, 그렇게 기쁘냐?"
사실 시민권을 얻고 난 후 기뻐서 우는 사람도 많이 있으니 판사가 그렇게 물은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기쁨의 눈물이겠는가.
그 무렵 미국에서 각자 자국의 독재자들에 항거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는 각국의 망명자들과 나는 동병상련이자, 동지애가 넘치는 친교를 맺었다.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인 멜리나 메르쿠리, 필린핀의 니노이 아키노와 그의 아내 코리 아키노,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 팔레비의 학정에 항거하는 이란 망명자들...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 멜리나 메르쿠리는 67년 조국 그리스에서 발생한 군부쿠데타에 저항하다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국외로 추방됐다. 그 후 그녀는 유럽을 거쳐 뉴욕으로 와서 한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냥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곡 부르고 나면 그리스식 발음의 서툰 영어로 다음과 같이 일장연설을 하곤 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우리 그리스가 독재정권에게 유린되고 있습니다. 인류사의 고귀한 유산이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되찾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도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그 악명을 국제적으로 떨쳤지만 그리스 정보부의 악명도 그에 못지 않았다. 메르쿠리는 그리스 정보요원들의 끊임없는 테러 위협에도 불구하고 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자기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공개투쟁을 그치지 않았던 용기있는 여성이었다.
그 무렵 주미 칠레 대사가 워싱턴에서 자동차 폭파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아옌데 대통령의 측근이었는데 칠레의 반아옌데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FBI는 바짝 긴장해 워싱턴에 있는 제 3세계 망명자들의 신변 안전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나를 맡았던 FBI 요원은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쥬리, 주차해 두었던 자동차에 타기 전에 먼저 엔진부터 살피시오. 엔진에 설탕을 넣어 두면 달리다가 반드시 사고가 나기 때문에 테러범들이 그런 수법을 많이 씁니다. 엔진을 살핀 뒤에 이상이 없으면 뒤 트렁크를 열고 이물질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나서 시동을 거시오. 워싱턴 주차장에는 코리안들이 많이 일하고 있으니까 주차할 때도 조심해야 할 겁니다. 안전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택시입니다."
그래서 나는 백악관으로 국무성으로 취재하러 다닐 때면 늘 택시를 타고 다녔다. 지금도 내가 미국정부에 감사하는 일은 FBI가 나의 두 어린 아들딸을 보호해 준 일이다. 두 아이의 스쿨버스가 집 앞에 오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복 차림의 FBI 남녀 요원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버스에 태웠다. 귀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스쿨버스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미리 대기했다가 아이들이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가곤 했다.
이처럼 미국땅에서 자기 조국의 비밀경찰에 쫓기며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던 제 3세계 망명자들은 서로 용기를 북동우고 힘을 합치기 위해 망명자들이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 때 함께 모였던 사람들 중 필리핀의 니노이 아키노 의원과 코리 아키노 그리고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가 있다.
아키노 일가는 보스턴에서 활동했다. 니노이 부부가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나는 워싱턴 반마르크스 운동의 선봉장인 라우렐로부터 그를 소개 받았다. 니노이는 후덕하게 생긴 인상에 유순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항상 차분한 논리로 미국인들에게 마르코스 정권의 문제점들을 조리있게 설명하던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유순하던 그도 마르코스 정권을 비호하는 미국의 우익 인사들과 논쟁이 붙으면 흥분을 참지 못해 '붓다기나마'라는 타갈로그어 쌍소리가 튀어나오곤 했다.
나는 니노이에게 물었다.
"니노이, '붓다기나마'가 무슨 뜻입니까?"
니노이는 씩 웃으면서 답했다.
-"레이디에게는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호기심 많은 나는 그 후 기어이 그 뜻을 알아냈는데 영어로 하면 '뻐킹 가이' 정도 되는 욕이었다. 이 지면에 옮겨놓을 만한 말은 못 된다.
아키노와 김대중은 곧잘 비교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아키노는 결국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는 했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김대중 씨 만큼 고생한 인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코리 아키노 또한 필리핀 최대 지주의 딸로서 학생 시절 뉴욕에서 유학할 때는 필리핀에서 가정부까지 데려와서 생활했을 정도로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코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온실 속의 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영정 앞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원래 차분한 성격 탓인지 민족성의 차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코리는 한국 여성들처럼 통고하며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다수 일본 여성들도 출산할 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문화연구가들이 연구해 볼 만한 문제다.
그리고 다소 이해하기 힘든 얘기자만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는 니노이 아키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멜다가 미국을 방문할때면 여러모로 니노이를 도와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니노이 아키노의 최후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와 슬픔을 금할 수 없다. 83년 8월에 마침내 니노이가 귀국을 결행했을 때 나는 그 비행기에 함께 탑승해 그의 귀국일정을 동행취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중국의 이선념 주석과의 회견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필리핀에 같이 가지 못했다. 그러나 니노이의 신변 안전을 위해 다니아나 상원의원(하버드대 출신 변호사)등 미국측에서도 여러 사람이 동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코스 정권의 악랄함은 우리의 상식을 여지 없이 짓밟았다.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한 후 니노이가 트랩을 내려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수발의 총탄이 날아왔고, 그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니노이와 동행해 역사의 증인이 된 사람들 중에는 와카바야시라는 일본인 반마르코스 운동가도 있었다. 그는 85년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귀국할 때도 도쿄에서 그 비행기에 올라 일행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김포에 도착한 후 공항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도쿄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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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2월 필리핀 시민혁명으로 마침내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니노이 아키노를 대신해 코리 아키노가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리핀 시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던 나는 코리 아키노와 함께 제 1착으로 마르코스 부부가 탈출 직전까지 살았던 필리핀의 대통령 관저 말라카낭 궁에 들어갔다.
관저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값나가는 물건들을 급히 챙겨 탈출하느라고 그랬는지 호화로운 말라카낭 궁 안 여기저기에 급히 뜯어낸 포장지, 상자 등등의 쓰레기들이 산더미 같이 널려 있었다.
한 방에는 알맹이를 미처 꺼내지 못한 보석상자들도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또 이멜다의 욕실 옆 화장대에는 온갖 종류의 향수들이 진열돼 있었는데 세계 최고급 향수 중 하나인 짐바투 향수가 축구공만한 용기에 세통이나 담겨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은 아예 향수 진열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듯한 '향수방' 이었다.
이멜다의 코트들이 진열돼 있는 방에서는 놀라다 못해 욕설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밍크코트 중에서도 최고급품에 '세이블' 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72년 닉슨의 소련 방문을 수행했을 때 세이블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보통의 밍크코트보다 대단히 가벼워 입어도 전혀 중량감이 느껴지지 않고 미관상으로도 뛰어난 세이블은 보통 밍크코트 가격의 열 배가 넘는다. 이멜다의 코트방에는 세이블이 무려 세 벌이나 걸려 있었다. 이 더운 나라에서 세이블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미친 X"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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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카낭 궁에서 이멜다는 여왕처럼 생활했음이 분명했다. 침대위 천장에는 나비 날개 같은 흰 천들이 침대 옆으로 흘러내리도록 꾸며저 있었다. 환상적인 모기장을 쳐 놓은 셈이었다. 또한 놀랍게도 말라카낭 궁의 한 방에는 순금으로 만든 음반이 쌓여 있었다. 이멜다가 자신이 부른 노래를 순금 음반으로 만들어 내키는 대로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했다는 얘기였다.
말라카낭 궁 안에는 아예 성당까지 있었다. 그 곳에서는 순금으로 된 십자가가 번쩍이고 있었다. 이멜다는 필리핀의 추기경 카디날신을 그 곳으로 불러 미사를 집전하게 했다고 한다. 그 곳에 과연 천주님이 임했을지는 의문이다.
그 후 나는 코리 아키노의 농장에 초대받아 갔다.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까무러칠 뻔했다. 자동차로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코리의 농장. 코리 아키노 집안은 그 곳에서 명실상부한 왕족이었고, 그 집안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중세의 농노나 다를 바 없었다. 그 곳에는 16홀의 골프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니노이 아키노 역시 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코리에 비하면구멍 가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니노이는 처가의 막강한 재력에 힘입어 정치적으로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마르코스와 이멜다가 필리핀 민중의 생존권을 탄압한 독재자라면 시민혁명을 통해 집권하는 아키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여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검고 주름진 얼굴에 바짝 마른 팔다리, 신발조차 없는 아키노 농장 노동자들에게 코리 아키노 집안은 필리핀 민중의 고혈을 빠는 또 하나의 적이었다. 아키노 집안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발이 땅에 닿을 사이도 없는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아키노 농장 방문을 마치고 마닐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닐라 만 근방에 위치한 빈민굴 스모키 마운틴으로 취재를 갔다. 미국 NBC, 일본의 후지 TV와 함께였다. 말라카낭 궁, 코리 아키노의 저택이 천국이라면 그 곳은 바로 지옥이었다. 취재 전에 안내원은 장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가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 더운 날시에 거리는 장화가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었다. 변소가 따로 없어 길거리가 바로 용변장소였다. 진흙과 오물, 쓰레기로 뒤범벅이 된 진창은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진동하는 악취에 구토가 치밀었다. 이를 참느라 혈압이 치솟아 아무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장화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그 곳을 사람들은 맨발로 오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진흙탕 속에 뒤섞여 있는 소뼈다귀 같은 것을 주워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다. 소뼈다귀가 왜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그것을 물에 씻어 되판다고 했다. 걸레조각 같은 것을 걸친 지친 표정의 사람들이 곧 쓰러질 것 같은 판자 움막 속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한 움막에서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푸실푸실한 안남미 밥과 시퍼런 망고를 새우젖 같은 것에 찍어먹고 있었다. 나도 한 번 먹어 봤는데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가 않았다. 그나마 그들은 그것조차 없어서 못 먹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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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연기가 난다고 해서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그 곳에는 세계 각국의 빈민굴에 빠짐없이 모습을 보이게 마련인 미국인 신부조차 없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흔치 않은 일본인 신부 한 사람이 그 곳에서 같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만나보지는 못했다.
이처럼 가난에 찌든 필리핀의 딸들을 일본 야쿠자들이 일본땅에 데려가 매춘부로 팔아먹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에도 세계 각국의 여러 빈민굴을 취재했지만 아직도 그 이상의 참상은 보지 못했다.
필리핀을 떠나기 전 나는 니노이의 동생 부츠 아키노에게 말했다.
"부츠, 필리핀 시민 혁명을 승리로 이끈 민중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토지개혁을 해야 합니다. 당신 집안이 코리의 농장과 같은 광활한 토지를 그대로 손아귀에 쥐고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토지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못사는 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츠 아키노는 민주적 사고, 지도력, 도덕성, 반마르코스 투쟁경력 등 어느 모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필리핀의 대통령감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사실, 니노이 아키노를 대신해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어야 할 인물은 부츠 아키노였다. 그러나 코리가 대통령직에 올랐고 그 이후 필리핀의 정정은 다시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3천 켤레의 구두를 남기고 도망갔던 이멜다가 당당하게 필리핀으로 돌아왔고, 코리의 딸과 이멜다의 아들이 결혼하는 일이 생겨 두 집안은 사돈이 되었다. 이멜다는 정치적으로도 재기해 필리핀의 국회의원으로 의사당을 누볐다. 아키노 집안의 필리핀 핀주화 운동은 결국 마르코스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한 권력 주쟁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러나 시종일관 민주화의 길을 곧게 걸어간 망명자들도 있다. 그리스의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경우, 74년 그리스에 민주정권이 들어선 후 귀국해 사회당의 재건에 힘써 문화과학부 장관직에 올랐고, 94년 운명할 때까지 민주화의 한 길을 걸었다. 나는 내셔널 프레스 클럽(미국 기자협회) 이사직에 있을 때 메르쿠리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팔레비 정권에 저항하는 이란 망명자들도 이스라엘의 비밀경찰 사바크만큼이나 악독한 이란 비밀경찰들의 탄압을 받으면서 눈물겹게 투쟁했다. 그들은 모두 인텔리 출신들로서 반정부 출판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워싱턴의 이란 대사관 파티에 초청되기만 하면 팔레비 왕정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웬만하면 참석하곤 했다. 여간 해서 먹기 힘든 캐비어알(상어알)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캐비어알 로비'라고나 할까.
그러나 세월이 바뀌어 팔레비 왕조가 곧 넘어갈 지경이 되자 캐비어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란 대사관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모두 발길을 끊었다. 나는 필레비 왕조를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간 이란 대사와의 우정을 하루 아침에 져버릴 수 없어 초청에 응하곤 했다. 그 때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 미국인들의 자리를 보며 '동.서양인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후 이란의 인텔리 망명자들은 모두 귀국해 이란 혁명정권에 일조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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