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공자의 역사 왜곡

평창군 대하리 2007. 6. 30. 02:37

「맹자」<등문공하(騰文公下>편을 보면 공자가 이를 두려워 해 춘추를 지었다.....

 

공자는 춘추를 짓고 난신적자를 두려워 했다

(이 말의 내면적 의미는 동이족의 전통역사를 견강부회해

존주사대로 역사를 왜곡한 자신의 유가정신에 대항할 동이 제족을 난신적자로

표현하여 공자가 이를 무서워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맹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공자는 자신이 동이족의 혈통으로 동이족의 나라인 군자의 나라를 동경해

나 공구는 은나라 사람이다-이구야은인야(而丘也殷人也)

공자는 동이족인 9()에 가서 살고싶다-자욕거구이(子欲居九夷)라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륙에 밀어닥친 난동의 춘추시대 속에 휘말려

민족의 근본과 경사(經史)의 바탕자리를 잃어버려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한 서하(西夏)를 춘추사관으로

틀을 잡고 공고히 해주어 화하(華夏)의 주구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참고:임 혜상은 "금인(今人)이 고증하기를 은상(殷商)은 동이계에 속하며(今人考證 殷商屬夷系)

라 하여 은상이 동이계라 고증했으니 은의 후예인 공자는 동이계임에 틀림없다

 

사마천도 공자가 난동의 춘추시대를 두려워 해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맹자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며

 

아울러 공자가 「춘추(春秋)」를 짓기위해

일찍이 동주(東周)에 가서, 왕실 소장의 도서를 열람한 이후

역사기록으로 인해 춘추를 지었다

(因史記, 作 「春秋」", 덧보태 쓰는 것은 덧보태 쓰는 것이고,

깎는 것은 깎는 것이다.(筆則筆, 削則削),

자하(子夏)의 추종자들은 능히 한마디 기리는 말도 아니했다

(「사기」:<공자세가>,<12제후연표>,<태사공자서>)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역시 공자는 대국적으로

당시의 춘추시대라는 어지러운 세상을 맞이해

 

참모의 도를 자처해 열국의 제후들에게 기꺼이 고개를 숙여

대동의 뜻을 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고

동이족의 영적 문서를 노나라 위주의 사관으로 개칠해

존주 사대의 터전을 굳건히 세웠다는 점에서 동이족 역사의 첫 이단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나를 아는 자도 오직 「춘추(春秋)」요, 나를 죄줄 자도 

오직「춘추(春秋)」라고 고백한 대목에서도

이미 공자는 자신의 죄악을 알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하겠다.

 

자왈 술이부작 절비어아노팽(子曰 述而不作竊比於我老彭)  
자왈 묵이지지 학이불염 회인불권 하유어아재

(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논어 {述而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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