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스크랩] [집중연구]신.구약 조작사

평창군 대하리 2009. 11. 23. 20:19

기독경 조작사
(사도행전 속의 인물들을 실재인물로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함
 사도행전 자체가 조작된 로마의 창작물로 널리 알려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바이블(성경)이 절대적 진리로 받들며 숭상한다.
그러나 본인 deicide는 바이블을 부정하며 오히려 거짓이라 말한다.
이유는 아래에 기술한 장문처럼 역사적으로 이미 수많은 인간과 번역과정
그리고
인위적인 로마의 권력에 의해 조작된 역사들이 존제하는 현실속에서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을 정당화할만한 것이 되느냐 이것이다.

말씀을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계22:18)
말씀을 가감하지말라(신4:2)

분명하게 이리도 바이블에 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바이블의 역사는 조작위서와 인위적인 가필의 역사임을 증명하고 있다.

 



1.구약
70인역


70인역의 욥기는 히브리어 사본 보다 6분의 1정도 짧으며,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 사본보다 8분의 1정도 짧고 그 순서도 서로 다르게 되어있다.
내용 또한 많은 부분이 잘못 번역 되었는데,
70인역에 의하면 창조의 시점이 1195년이나 담겨져 있고 '무드셀라'가 '노아'의 홍수가 나고도
14년이나 계속 살아남은 것으로 계산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의 구약성경은 70인역이었다.

그들은 70인역 성경에서 기독교에 유리한 내용을 찾아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기독교적인 내용들을 덧붙이게 되었다.

카톨릭백과사전은 70인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70 인역을 채택하였다.
70 인역은 히브리 원본과 달랐다.
몇 권의 책과 구절들이 더 추가 되었을 뿐 아니라
.....(중략).......
부분적으로 번역의 실수가 있었고
....(중략).....
더구나 70 인들은 유대 랍비들이 쓰는 것과는 다른 히브리 경전을 토대로 번역하는 바람에...."

[카톨릭백과사전 vii, 316]


 

"70인역은 믿을 바가 못 되니 제 멋대로 번역되고 변조 되었으며
....(중략)....
따라서 교회에 의해서 거부 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iv, 625]


한편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구약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경전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AD 2세기경에 히브리 본문에 맞도록 새로운 헬라어 역본들이 등장하게 된다.
2세기 초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아퀼라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위조한 70인역의
구약의 메시야 관련 위조 부분
히브리 원전에 맞게 번역함으로 아퀼라역(a')이라는 헬라어 축어적 역본을 만들었고,
2세기 말엽 심마쿠스는 아퀼라의 축어역과 달리 히브리적 표현을 없애고 순수한 헬라어를 사용한 의역본을 내놓았다.


이 외에도 레오도티온역, 역자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 개의 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Origen Adamantius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을 위조했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AD 230~240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Origen)은 6500쪽이 넘도록 각 쪽에 여섯 란을 두고서
그 때 구할 수 있던 히브리 성경,
그것의 발음을 헬라어로 바꾸어 적은 것, 아퀼라 번역본, 심마쿠스 번역본, 70인역, 레오도티온 판
각각 적어 넣어 서로 비교하도록 하는 헥사플라(Hexapla)를 편찬했다.
오리겐은 히브리 원문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인들이 70인역을 위조 한다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의 논쟁을 적당히 무마시키기 위해서
이 6가지 본문을 비교하면서, 그 나름대로 다섯번째 란의 70인역을 새롭게 수정했다.

 

이 70인역이 나중에는 헥사플라와는 따로 떨어져서 그것만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을 70인역의 헥사플라 개정판(BHK의 GH)
또는
오리게네스 70인역(BHS의 GO)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도 70인역은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개정판 사본이 생겨났다.

70인역의 가장 중요한 사본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나이 사본을 들수 있다.

현재 여러가지 70인역 사본들을 비교하여 만들어 놓은 비평판 헬라어 성경으로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것은 괴팅겐의 70인역으로써 여러 사본을 비교하여 가장 원본에 가까와 보이는
본문을 재건한 것이로 1931년부터 나오고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번째는 1935년에 출간된 랄프스 70인역인데,

이것은 70인역 사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다.



2.신약
누더기가 된 바이블의 역사의 과정

1.교파간의 알력다툼의 흔적

신약은 A.D. 4C - 10C 사이에 쓰여진 복사물들로 편집되어 있을 뿐 그 원전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이러한 복사물들은 무려 1500여 종에 이르지만 내용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본 중에 가장 중요한것은 1844년에 시나이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시나이사본이라고 부르는 사본입니다.

 ↑시나이사본 디지털 본(Codex Sinaiticus)

이 시나이사본은 발견 당시 무려 16000여곳이나 수정되어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본시 초기의 기독교는 200년 동안은 구약성서 외에는 다른 성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차츰 기독교 내의 교파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되자 교파간의 다툼을 조정할 목적으로

성서가 쓰여지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신약성서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나이의 사본이 16000여곳이나 수정되어 있었음을 볼 때 신약성서가 완성될 때까지는
교파간의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으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와야 했는지 성서에 대하여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다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할 것입니다.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편성되었던 신약의 내용은 그래도 부족하여 A.D. 325,
1차 종교회의(니케아)에서는 318명의 주교들이
예수는 하나님이라는 교리를 채택하였습니다.

이 종교회의를 주최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대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트라(미트라의 탄신일은 12월 25일 이라고 함)를 신앙하던 자로서
자신의 아들(그리스프스)과 장인(미키시미안)을 살해하였고
그의 처(파우스트)를 끓는 열탕 속에 쳐 넣어 죽인 전력을 가진 광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종교회의는 하나님의 결정이다."고 세상에 선포한 공적이 있다하여
그는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서되기도 하였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두 종교파당의 권력싸움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황권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였다.
 

◎제2차 니케아 종교회의
이어 열린 2차 종교회의(콘스탄티노플 A.D. 381년)에서는

"신은 성부,성자,성신으로 존재한다."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제3차 니케아 종교회의

3차 종교회의(에페소스 A.D.431년)에서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할 것"을 결의 하였으며


◎제4차 니케아 종교회의
4차 종교회의(카르케톤 451년)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이라는데 대한 성경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구분할것"을 결정하였습니다.




<훼손 되었던 바이블 귀절>

복음서 지워진 곳
마태복음 17장 21절, 18장 7절, 23장,14절(3곳)
마가복음 9장 44절,46절, 11장 26절, 15장 28절(4곳)
누가복음 17장 36절(1곳)

 

이러한 노력의 일환에도 불구하고 성경상의 쟁점은 계속 남아있게 되어 사용상의 편의를 위하여

16C까지 완성되었던 장과 절중 8곳
(마태복음 3곳,마가복음 4곳,누가복음 1곳)
을 훼손시켜 버리고는 "없음" 또는 "X" 표로 표시하는

수난을 성서는 겪어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반 사정으로 미루어 성경은 진실(모순 자체)을 표현하려고 하였음에도 성경저자의

주관과 교파간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성경은 오도될수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성령은 뭐했나?)

 

그 일례로 제기될수 있는 문제가 바로 예수의 잃어버린 16년의 세월입니다.
바이블에 의하면 예수의 나이 13세때 이미 범상한 기질이 엿보였다고 했는데
그 후 16년의 세월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나이 30세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예수가 태어날때 별을 띄우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오는등

요란한데 비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오늘날 기독교는 바울교라 불려야 한다.


 ↑헬라철학에 매료된 바울은 유대교 본토 기독교와 다른 헬라철학적 기독교를 완성했다.

바우어(1792~1860)는 바울의 신학적인 핵심으로 반 유대교적인 교리로서의 의인론을 제시했다.
[F.C.Bauer / Vorlesung ber Neutestamentliche Theologie / 1864 P.128~230].

즉, 바우어에 따르면 초대교회사란 친 율법적인 성향의 유대인 중심에서 이에 반대하는 헬라지역의

유대인 내지 이방인 중심으로 축이 이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기독교란 디아스포라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배타적인 유대교를 버리고

헬레니즘의 문화를 받아들인 데서 생겨났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또, 오늘날의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배격하고는 있지만,
초대교회영지주의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기독교를 바울교(그리스철학교)라고 보는 시각도 제시된지 오래입니다.
기독교를 바울교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등장했는가?
오늘날에 정경으로 채택된 신약에는 바울서신이 주를 이루고 있고,
12제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증거입니다.

그리고 바울서신에는 바울이 유대적인 관습을 빌미로 베드로와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과 격렬히 싸웠고,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위선적인 자들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읍니다.

그러한 교권다툼의 흔적은 신약의 곳곳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치열한 교권 다툼 속에서 최후로 승리한 자는
바울이었읍니다.

그리고 바울이 기독교의 제1창립자 라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의 제2창립자로 정리내릴 수 있읍니다.

기독교는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으며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의 대부분의 교리가 성립 되 가기 시작한다.
성경적이지 않은 삼위일체의 교리, 기독교의 기념일, 십자가 숭배....등은 격렬한 논쟁 중에 종교회의에서

그 당시의 시대상황에 맞추어서 결정 내려졌읍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리는 수많은 오류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종교회의에서 끝나지 않았으며, 결국 동로마 교회로마카톨릭이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해 버린 뒤 결별하게 되는 역사속의 증거들은 무엇이라 말 할 수 있을 까요?


사도행전 6장에 따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다툼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
(생활비지원)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사도행전 6장 1절]

 

별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이 구절은 초대교회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전해주고 있읍니다.
초대 교회 내에 두 그룹 즉,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예루살렘의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한 가지 색깔을 지닌 동질집단(a homogeneous community)이 아니라
적어도 그 안에 어떤 점에서든 서로 선명히 구별되는 두 계열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질집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위에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을 말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성향을 보면 전체적으로는 율법의 세세하고 문자적인 규정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디아스포라 유대인 출신인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수를 대략 400~600만 명으로, 그리고 유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를 대략 100~200만 명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의 3명 중 2명은 외국에서 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즉 유대 본토 출신인 히브리 유대인과 헬라 출신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읍니다.
헬라 출신 유대인들 중 특별히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빠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집사가 선출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이 하나같이 헬라 이름이고 특별히 그들 중의 하나인 니골라는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출신이라고 하는 것을 봐서
7집사는 단순히 헬라 출신 유대인들의 구제 문제를 해결하는 일 만을 담당한 자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읍니다.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의 실질적인 힘은 사도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본토 출신

히브리파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나 여겨지며,
헬라 출신 과부들 만이 구제에서 빠지게 되는 것도 그 중 하나의 증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가 구제에서 제외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7집사를 세우고 나서

12사도들은 더욱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념했다고 하는 것을 봐도
히브리파들이 명실 상부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또한 헬라 출신 유대인들은 본토 출신 유대인들과는 달리 종래의 유대교적인 전통이나

율법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이였고 자유로웠읍니다.
즉 할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 믿음을 통한 구원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자유사상 때문에 그들은 즉시 유대인들로부터
배교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엇읍니다.

이에 비해 본토 출신 유대인들은 유대교라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출신

유대인들처럼 그런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지 않았읍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비해 여성인권에 대해 다소 나은 편이었읍니다.
그런데 어느덧 여성들이 자유롭게 수건을 벗고 지도력을 발휘하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서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벗는 자유로운 행위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건을) 써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합니다.

이는 유대 사회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의 문제를 벗어보려는 의도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유재인 /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 이해 / 서울신학대학원, 1994].

예찬식의 음식문제 역시 "서로 다투니 집에서 먹고 오라"고 원천봉쇄하고 나선다.
바울이 이토록 세세한 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예언하는 자나 방언하는 자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퇴색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바르게 조절해 줄 것을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the new thompson annotated-chain reference bible]

 

초기에는 히브리파가 초대교회의 지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기독교가 유대교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헬라 전 지역으로 점차 퍼져 나가는 후기에는
헬라파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주역으로 등장게 됩니다.

그의 동료인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전도를 하며,
특히 사도행전 21장 8절 이하에서 그를 전도자(Evangelist)라고 칭하는 것들로 미루어 봐서,
그리고 11장 19절 이하에서 이들이 후일 이방인 전도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점들을 비추어 볼 때
7집사들은 거의 사도들과 동등한 역할을 했고 비중이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즉 사도가 유대 본토 출신들의 지도자였다면 7집사는 헬라 출신 유대인들의 종교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읍니다.

사도행전 5~6장에 보면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

(The Jewish-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

초창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히브리파 기독교인이 지도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그런데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주의 형제'라고 불리는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이후에는 바울서신이나 그 밖의 교회전승이 이 야고보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읍니다.

 

이 사실로 부터 우리는 AD 30년부터 50년 사이의 어느 때엔가 예루살렘교회 안에 지도권의 변화가 있었고
그 결과로 베드로 같은 사도들은 시리아나 소아시아 등지로 흩어지고,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는 주의 동생 야고보가 단일 지도체제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역사을 제공하는 셈입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갈림길에 서게 되고,
스데반은 유대교를 벗어난 보편적인 헬라사상을 유대인들에게 설포하다 돌에 맞아 죽었읍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의 죽음 이후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어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고 흩어져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한 것은 헬라파 기독인이었습니다.
히브리파 기독교인은 박해를 받지 않고 유대땅에 남아서,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율법인 할례를 받아 그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같은 일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사도행전 15장 1~2절]


 ↑하 이집트 Khonspekhrod 사원의 할례 부조(B.C.4000)
   할례제도는 히브리 부족이나 민족이 생겨나기 수천년 전부터 행해졌다.
 


 ↑Saqqara 사원의 이집트 할례 부조(B.C.2300)
    히브리 족속은 이집트의 할례제도를 그대로 배워 적용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도들이 안티오키아로 와서

이방인들도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시비를 걸고 있고,
이 문제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디옥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주재 하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 회의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 15장 5절]

 

그러나 결국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읍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헬라파 기독교공동체의 신학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수용문제는 이 회의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할례의 문제 때문에 베드로파바울파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2장이 증거해줍니다.

바울의 편지중 하나인 갈라디아서 2장에는 바울이 바나바와 그리스인 디도와 예루살렘으로 왔다.
거기서 바울은 할례를 강요 받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7절에는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바울 자신은 할례 받지 않은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직을 임명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즉,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다른 사도직을 부여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라디아서 2장 12~16절에서

또 다시 이방인들의 할례문제가 제기되자 바울은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갈라디아서 2:12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와 더불어 다수의 이방인들을 포함한

안디옥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습관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아마도 예배 중에 나누는 주의 만찬이었던 것 같읍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이들"(갈 2:12)이 그 곳에 나타나자 베드로가
그 할례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탁교제로부터 물러나 자리를 피했다
고 합니다.

이것을 안디옥 사건이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예루살렘 종교회의 이후로 추측된다.
제임스 던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는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현안으로 되어 있으나,
적어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디옥 사건에는 이 문제가 이미 타결된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James D. G. Dunn /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 JSNT 18(1983), P.57.]

 

어쨌든 베드로도 여기서 유대 특수주의에 굴복하여 식탁으로부터 물러났으며,
바나바도 여기 동조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3절)


13절에 바울은 바나바와 그들을 가르켜 위선적인 사람들(개역한글판에는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결국 바울은 이러한 바나바와 심한 다툼 끝에 갈라서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 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35~41절]

 


James D. G. Dunn


제임스 던
(James D. G. Dunn)에 의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베드로와

그리고 오랜 동역자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며,
그 이후로 바울은 더 이상 안디옥교회의 지원을 받는 파송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자기 먹을 것을 손수 벌어 가면서 일하는 독자적인 선교사가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이 사건 이후 그는 기존의 선교지였던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떠나서

유대 특수주의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중해의 서쪽, 즉 마케도니아그리스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

시리아, 길리기아, 더르베, 루스드라, 프리지아, 갈라디아, 드로아

거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고,
갈라디아교회는 아마도 이 때 바울이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두 도시에 교회를 세웁니다.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내려가 고린도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는 바울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 바울공동체는 헬라사상적인 영향아래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반 정도 머무르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처음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바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바울공동체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있읍니다.

 

이 바울공동체는 유대 특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유대땅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게 되고,
AD 50년대 초반에 바울공동체가 겪은 갈라디아 사건고린도 사건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대립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외부로부터 초대교회 안에 존재하는 유대주의자들(Judaisers)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고 있는 바울의 신학에 반대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요했다는 점입니다.


3.결론
바울 공동체 지도자들의 두얼굴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도들간의 분쟁은 보편적인 구원론과, 유대적인 구원론의 교리논쟁이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읍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할례라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내세웠을 뿐이고,
실상은 두 세력간에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분쟁에 지나지 않읍니다.
즉, 할례를 제외하고는 헬라화된 유대인들에도 율법은 철폐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교파가 로마에 널리 전파된 후에도,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할례를 제외한

대부분이 유대적인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대표적인 예가 피에 대한 율법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피가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다.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위기 17장 10~11절]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찌니라.
...(중략)....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중략)....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레위기 17장 13~ 14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세기 9장 4~5절]

 

이러한 율법이 그대로 신약에도 등장한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입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5장 29절]

 

여기서 목매어 죽인 것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말합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구약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했읍니다.
로마 시대에 박물학자인 플리니우스와 2세기의 의사인 아레타이우스

사람의 피가 간질 치료약이었다고 말했다.

         플리니우스               아레타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
는,
"원형 경기장의 놀이판에서 사악한 범죄자들의 생피를 게걸스럽게 취하여
....(중략)....
자기들의 간질을 고치려고 가져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오"
라고 말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기독교인들을 대조하여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동물의 피조차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중략)....
기독교인들을 시험할 때에 그대들은 피가 가득 들어 있는 소시지를 그들에게 제공한다.
물론 그대들은
(그것이) 기독교인들에게 금지된 것임을 알고 있다."
(이것이 훗날 간혹 지금도 '로마에 의해 탄압받으며 순교당했다'라며 역으로 거꾸로 이용하기도 하는 것이
 목사들의 거짓된 설교 방식중 하나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테르툴리아누스

여기서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실 분 들이 많이 계실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어째서 할례는 거부하면서,
나머지 구약의 율법은 준수하려고 했는가?
다른 율법은 모두 지키면서, 할례 때문에 사도들간에 격렬한 다툼이 일어나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교리논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헬라파 기독교인들과,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주도권을 가지고

교권다툼을 한 것이라 추측되는 것입니다.


맺으며...

그렇지 않다면 할례는 거부하면서, 이방인들은 지키기 어려운 편협한 유대인의 다른 율법들을 지키는

모순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를 이룬 두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일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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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개종
글쓴이 : sutan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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