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이 비는 조선 현종2년(1661)에 삼척부사 허목(허미수) 세운 것이다.
허목선생은 효종의 초상에 대한 모후의 복상기간이 논의되자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을 반대하여
남인 선두에서 삼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당시 삼척은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때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을 지어
정라진 앞의 만리도에 척주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했다
비문에 의하면 본래 미수 선생이 비석을 세운 곳은 정라진의 만리도
(萬里島, 지금의 큰 방파제 끝부분)였다.
그런데 48년 뒤인 1708년 누군가에 의해 비문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한다.
한편 김구용이 지은 『척주지』(1848년)에 의하면
1708년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당시 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을 찾다가
허미수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을 구하여 모사개각을 했으며,
1709년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串島) 동쪽 산록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년 12월 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죽관도(현재의 육향산) 산정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허목 선생은 또한 앞으로 지금 같은 작은 해일은 내 비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큰 해일이 오면 내 비석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그때는 이곳을 떠나라.
그 해일이 오기 전에는 두타산에 큰 불이 날 것이다[강원도 산불].
그리고 해일이 몰려오면 솥을 들고 두타산 정상으로 피해야 살 것이다.
그런데 해일이 몰려오는 개벽의 현상을 어린이 동자들도 안다하여
삼척동자도 안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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