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국 환웅천황은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 神誌文字)을 창제하였다.
BCE 39-38세기경에 창제된 이 녹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BCE 3000년경),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script, BCE 3000년경)보다
몇 세기 앞서는 세계최초의 문자다.
환단고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린 녹도문
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들이
발굴되고 있는데 이것을 집중 연구한 중국학자 낙빈기(駱賓基)는
자신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상고금문이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실을
밝혀내고 그 문자들을 만들어 사용한 주체가 한족(漢族)이
아니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상고금문은 은(殷)나라의 갑골문(甲骨文),
주(周)나라의 대전(大篆),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거쳐
한조(漢朝) 때 한자(漢子)로 완성되었다.
배달국에서는 숫자로서 산목(算木)이 통용되었고 14세 자오지 환웅천황 때는 화서(花書: 佃目)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바로 아래 그림).
자오지 환웅천황의 동방통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이전부터 개량돼오던
신지문자(녹도문)가 중원에도 전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창힐문자(倉頡文字: 鳥跡書)다.
현재 창힐의 고향 백수현 사관촌(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와 창힐문자다.
창힐 유적지에 있는 문자 비석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단군 가륵 2년(BCE 2181)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字)를
창제했다는 기록과 함께 글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있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 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각국 고대 문자 아래 사진
한글처럼 고도의 체계를 가진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물에 의해서 발명된 사례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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