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치우천황 사료들

평창군 대하리 2007. 7. 30. 23:21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 >
영종 기사년에 우역(牛疫)의 <전염이 심하여> 전관목장(箭串牧場) 안에 단을 쌓고 선목에 제사지냈다.
마제단(祭壇)은 동북교(東北郊)에 있으며, 치우신(蚩尤神)을 향사하였는데,

강무(講武)하기 하루 전날에 제사를 지낸다.
신위(神位)에는 웅석(熊席)을 깔고, 활과 화살을 앞에 두고 활꽂이를 뒤에 세우고,

 큰 기(大旗) 두 개를 남문 밖에 세웠었다.  지금은 폐지하였다.

英 宗 己 巳 以 牛 疫 築 壇 於 箭 串 牧 場 內 祭 先 牧 祭 壇 在 東 北 郊 享 蚩 尤 神 講 武 前 一 日 祭 之 神 位 籍 以 熊 席 置 弓 矢 於 前 建 於 後 樹 大 旗 二 於 南 門 外 今 罷 .


<  청장관전서  제53권, 이목구심서 >
치우(蚩尤)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黃帝)를 치니, 황제가 응룡(應龍)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
치우가 풍백(風伯)·우사(雨師)에게 일러서 큰 비바람을 불러일으키니, 황제가 발(魃 가뭄의 신)이라고 하는 천녀(天女)를 내려보내어 비를 그치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으므로 그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一 曰 蚩 尤 作 兵 伐 黃 帝 .   黃 帝 乃 令 應 龍 攻 之 .   蚩 尤 謂 風 伯 雨 師 .   作 大 風 雨 .   黃 帝 乃 下 天 女 曰 魃 雨 止 .   遂 殺 蚩 尤 .   魃 不 得 復 上 .   所 居 不 雨 叔 均 言 之 帝 置 之 赤 水 之 北 .   叔 均 乃 爲 田 祖 然 則 叔 均 非 唐 虞 人 也 .


<  대동야승 제26권, 난중잡록·계사년 5월  >
① 북극(北極)에 치우기(雉羽箕)가 나타나다.
北 極 見 雉 羽 箕 .
< 제35권, 제조번방지 >
② 이보다 앞서 정축년(선조10, 1577)에 안주(安州)의 청천강(淸川江)과 정선(旌善) 대음강(大陰江)이

물이 끊어져 흐르지 못한 지 수개월이나 되었고, 치우기(蚩尤旗)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나타나 그 길이가 하늘에 뻗치어 서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걸치어 있었다.
기성과 미성의 위치는 북경 지방[燕都]과 우리나라 분야이고, 치우기는 전쟁이 일어날 형상이다.

先 是 .   丁 丑 之 歲 .   安 州 淸 川 江 旌 善 大 陰 江 .   斷 絶 不 流 者 數 月 .   蚩 尤 旗 出 於 箕 尾 之 間 .   其 長 天 .   自 西 南 向 東 .   箕 尾 乃 燕 都 .   及 我 國 分 野 蚩 尤 旗 兵 象 也 .


< 제47권, 웅천일록·기사년 11월 >
③ 정시(庭試)가 있었는데, 서제(書題)는 치우송(蚩尤頌)이었으며 방(榜)이 나오니,

이 상질(李尙質)이 문과의 장원이고, 오 희철(吳希哲)이 무과의 장원이었다.
정시(庭試)에 입정(入庭)한 유생의 수는 9백 20인이고 미시(未時)로 한정하여

시권(試券)을 거둔 수는 6백 64장이었다.

十 二 日 庭 試 .   書 題 蚩 尤 頌 .   榜 出 李 尙 質 爲 文 .   吳 希 哲 爲 武 .   庭 試 入 庭 儒 生 數 九 百 二 十 人 .   限 未 時 .   收 券 數 六 百 六 十 四 丈 .


<  동사강목 제2상(신미년 신라 벌휴왕 8년, 고구려 고국천왕 13년, 백제 초고왕 26년)  >


치우기(雉羽旗)가 각(角)·항(亢)의 사이에 나타났다.
雉 羽 箕 見 角 亢 .


<  성호사설  >
< (제1권 천지문) 재이(異) >
① “임금의 말 한 마디에 별이 3사(舍  : 30리가 1사가 됨)를 뒷걸음쳤다”는 따위의 얘기는

나는 믿을 수 없다.
꽁지별·패( ?)·치우(蚩尤) 따위가 여러 날 계속되어 모든 나라에서 다 볼 수 있는 것은

곧 시국 운명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하늘에 속한다.

君 一 言 星 退 三 舍 之 類 吾 未 之 信 也 .   又 如 彗 蚩 尤 之 類 彌 時 日 萬 國 之 所 同 望 者 乃 時 運 之 所 値 皆 屬 乎 天 者 也 .

< (제4권 만물문) 마조(馬祖) >
② 지금 사전(祀典)에 마조(馬祖)·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馬步)라는 명칭이 있다.
마조란 것은 천사(天駟) 방성(房星)의 귀신이며, 선목이란 말 기르는 법을 창조한 자이며,

마사란 것은 마구(馬廐) 귀신인데, 천구(天廐) 동쪽, 벽성(壁星) 북쪽에는 있는

천마(天馬)의 마구인 듯하니, 지금의 역정(驛亭)이 바로 이것이다.
『상위고』(象緯考)에는 방성(房星) 우참(右)도 천구라 하였으며, 마보란 것은 말을 해치는 귀신인데

이는 마역(馬疫)을 맡은 귀신인 듯하다.
사전(祀典)에는 또 영성(靈星)·마제(祭)·독제(纛祭)란 명칭도 있다.
영성이란 별은 천전(天田)으로 각성(角星) 왼쪽에 위치하여 천자(天子)의 기내(畿內)와 봉강(封彊)을

맡은 귀신이고, 마( )란 것은 치우(蚩尤)의 신인데 병기[干戈]를 처음으로 만들어낸 자이며, 독(纛)이란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서(字書)에,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인데, 군사가 출발하려면 이 기에 제사 지내며 검은 비단으로 만든다” 하였다.

今 祀 典 有 馬 祖 先 牧 馬 .   社 馬 步 馬 祖 天 駟 房 星 之 神 先 牧   制 牧 養 者 馬 社 廐 神 恐 是 天 廐 東 壁 之 北 天 馬 之 廐 今 之 驛 亭 也 .   象 緯 考 房 星 右 亦 曰 天 廐 馬 步 害 馬 神 恐 是 馬 之 神 祀 典 又 有 靈 星 祭 纛 祭 靈 星 天 田 在 角 星 之 左 主 天 子 畿 內 封 彊  蚩 尤 之 神 始 制 干 戈 者 纛 者 未 知 何 指 字 書 云 軍 中 大 旗 軍 發 則 祭 以 繒 爲 之 .

< (제9권 인사문) 관왕묘(關王廟) >
③ 왕 세정(王世貞)은 말하기를 “수(隋) 나라 개황(開皇) 중에는 7일 동안이나 신귀(神鬼)를 부려서

천사(泉寺)를 세우게 했고, 송 나라 정화(政和) 중에는 풍우(風雨)를 구사(驅使)하여

치우(蚩尤)를 베고 하중(河中)의 염정(鹽政)을 회복하게 했다”라 하였는데 이는 신앙의 도가

너무 지나쳐서 황탄부괴(荒誕浮怪)가 더욱 심하니 어찌 족히 따질 것이 있겠는가.

王 世 貞 云 隋 開 皇 中 役 神 鬼 七 日 建 泉 寺 宋 政 和 中 驅 風 雨 前 蚩 尤 復 河 中 鹽 政 此 信 之   :   過 荒 甚 何 足 與 議 .

④ 『송서』(宋書)에는, “이우 꼬리로 말[斗]처럼 크게 만든 기를, 왼쪽에서 달리는 말 멍에 위에 꽂는다” 했으니, 이른바 좌도(左纛)라는 것이다.
상고하건대, 도(纛)라는 기는 본래 군중(軍中)에서 쓰는 대조기(大早旗) 이름인데,

검은 비단으로 치우(蚩尤) 머리와 같이 만들어서 군사가 출발할 때에

도(纛)에 제사 지내는 것이고, 좌도는 본래 좌도(左)라는 것인데,

< (제21권, 경사문) 치우(蚩尤) >
⑤ 여형(呂刑)에 “옛날부터 교훈이 있는데 치우(蚩尤)가 최초로 난을 일으켰다” 하고, 이어서

 “삼묘(三苗)의 백성은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법을 마련하여 다섯 가지의 학형(虐刑)을

사용했다” 하였다.
그 주에는 {국어}(國語)의 “소호(少昊)가 쇠해질 무렵에 구려(九黎)가 혼란을 일으키자, 백성과 귀신이 서로 뒤섞여서 집집마다 무당이 생기게 되었는데, 나중에 와서

삼묘(三苗)가 다시 구려를 회복시켰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이 문맥(文脈)으로 본다면 이 구려는 바로 치우의 나라였던 것이다.
공안국(孔安國)도 “구려의 임금 이름은 치우이다. 이 치우는 큰 안개를 잘 일으켜서 군사를 혼미하게

만들므로 헌원(軒轅)이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정벌했는데, 치우는 남쪽 도둑이었다.
남쪽을 향해 정벌하게 되었던 까닭에 이 지남거 제도를 만들었다.
이는 주공(周公)이 월상(越裳)에 지남거를 하사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라고 하였으니,

구려가 바로 삼묘였다는 것을 더욱 증거할 만하다.
지남거란 것은 지금 패철(佩鐵) 한복판에 지남침(指南針)처럼 만들었던 것인 듯하다.
이 지남침을 수레 속에 붙여서 수레 멍에와 직각이 되도록 하여

가는 방향을 구별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呂 刑 云 若 古 有 訓 蚩 尤 惟 始 作 亂 繼 之 云 苗 民 不 用 靈 制 以 刑 .   惟 作 五 虐 之 刑 .   今 書 註 引 國 語 云 少 昊 之 衰 九 黎 亂 德 民 神 雜 家 爲 巫 史 其 後 三 苗 復 九 黎 之 德 云   :   觀 其 語 九 黎 是 蚩 尤 之 國 孔 安 國 亦 謂 九 黎 君 號 蚩 尤 是 也 .   蚩 尤 能 作 大 霧 軍 士 昏 迷 軒 轅 作 指 南 車 以 征 之 蚩 尤 南 寇 也 .   向 南 而 征 故 爲 此 制 也 .   與 周 公 賜 越 裳 以 指 南 車 同 意 其 爲 三 苗 尤 可 證 .   指 南 車 者 恐 如 今 之 木 套 中 南 鍼 而 巳 以 鍼 置 諸 車 中 使 鍼 與 轅 相 直 則 可 以 別 其 方 位 耳 .


< (제26권, 경사문) 치우(蚩尤) >
⑥ 관자(管子)는,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얻어 천도(天道)를 밝혔고,

태상(太常)을 얻어 지리(地利)를 살폈고, 청제(靑帝)를 얻어 동방(東方)을 분변했고,

축융(祝融)을 얻어 남방(南方)을 밝혔고, 대봉(大封)을 얻어 서방(西方)을 분변했고,

후토(后土)를 얻어 북방(北方)을 분변했다.
황제가 육상(六相)을 얻어서 천하가 화성(化成)했다” 하였다.
치우는 바로 황제의 신하로서 난리를 일으켜 베임을 당한 자이다.
그러나 관자의 설이 이와 같으니, 혹시 처음에는 재능으로 등용되었는데

그 일을 마무리짓지 못해서인가? 또 혹시 치우는 나라 이름인데

그 임금이 선악의 구별이 있었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管 子 曰 黃 帝 得 蚩 尤 明 乎 天 道 得 太 常 察 乎 地 利 得 靑 帝 辨 乎 東 方 得 祝 融 辨 乎 南 方 得 大 封 辨 乎 西 方 得 后 土 辨 乎 北 方 黃 帝 得 六 相 而 天 下 化 .   蚩 尤 乃 黃 帝 之 臣 而 作 亂 被 誅 者 然 管 子 之 說 如 此 其 或 始 以 才 能 見 用 而 其 事 不 終 者 耶 .   又 或 蚩 尤 是 國 名 而 其 君 有 善 惡 之 別 耶 未 可 知 矣 .

< (제30권, 시문문) 익주묘비(益州廟碑) >
⑦ 왕 자안(王子安)의 익주부자묘비(益州夫子廟碑)에, “동자가 무엇을 알리요만,

염량(炎凉)을 궤문에 굴했다.”[童子何知 屈炎凉於詭問] 하였는데,

이 말은 {열자}(列子)에서 나왔으니, 대개 무사(誣辭)이다.
성인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예전에 천송(天訟)이란 것을 지어서 판별해 밝힌 일이 있었다.
또 동자가 궤문한 것을 성인으로서 능히 대답을 못했다면, 부자(夫子)를 찬탄하는 의의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 글에 수록하여 성인의 강적(降迹)이라 이르겠느냐?
그 무식함이 이와 같은 것이 있다.
그 이른바, 제거(帝車)·화개(華盖)의 유도 역시 과연 인용한 근거가 확실하여 착오가 없는 것인가?
이는 장 열(張說)로도 해석하지 못한 것이요, 일행(一行)으로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므로

뒷사람이 버려 두고 생각을 다해 보지 않은 것이다.

상고하건대, {고금주}(古今註)에, “제거(帝車)는 지남차(指南車)를 말함인데,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정벌할 적에 만든 것이다” 하였으니, 지남(指南)이라 할진대

치우가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개 역시 황제의 소작인데, 탁록에서 정벌할 때 오색 구름이 항상 제(帝)의 머리 위에 머무르므로

이를 인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왕 발(王勃)의 뜻으로는, 무왕(武王)이 주(紂)를 쳐서 베고 천하를 차지하였으므로

이로써 비유한 것이다.
제거가 남으로 정벌할 적에 치우가 안개를 일으켜서 칠정(七政)이 회명(晦冥)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중규(中逵)란 것은 천복(天腹)의 적도(赤道)로서 일월(日月)·오성(五星)이 경유하는 곳이요,

“화개(華盖)가 서쪽으로 임했다”[華盖西臨]는 것은 무왕이 서도(石)에 정정(定鼎)한 것을 말함이다.  
또 그 덕택과 교화가 미친 것이 가장 동방에 드러났으며, 태갑(太甲)이란 것은 육갑(六甲)의 으뜸으로서 곧 복에 가까운 위치로 추(鄒)·노(魯)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니

상서를 이 곳에 비장하여 성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다.

王 子 安 益 州 夫 子 廟 碑 云 童 子 何 知 屈 炎 凉 於 詭 問 此 說 出 列 子 盖 誣 辭 也 .   聖 人 豈 有 不 知 之 理 余 昔 有 天 訟 判 以 明 之 此 童 子 之 詭 問 而 聖 人 不 能 對 則 何 與 於 贊 歎 夫 子 之 義 而 收 載 於 此 文 謂 之 聖 人 之 降 迹 也 .   其 無 識 有 如 此 者 其 所 謂 帝 車 華 盖 之 類 亦 果 引 據 丁 寧 而 無 差 謬 者 耶 .   此 張 說 之 所 不 解 而 一 行 之 所 不 能 言 也 .   故 後 人 置 而 不 致 思 也 .   按 古 今 註 指 南 車 黃 帝 征 蚩 尤 時 作 謂 指 南 則 蚩 尤 之 在 南 可 知 華 盖 亦 黃 帝 作   鹿 之 征 常 有 五 色 雲 氣 止 於 帝 上 因 而 作 也 .   勃 之 意 武 王 征 誅 而 有 天 下 故 以 此 爲 況 言 帝 車 南 征 時 則 蚩 尤 作 霧 七 政 晦 冥 中 逵 者 天 腹 赤 道 日 月 五 星 之 所 由 也 .   華 盖 西 臨 謂 武 王 定 鼎 於 西 都 也 .   又 其 德 敎 所 覃 最 著 於 東 方 太 甲 者 六 甲 之 首 卽 近 北 之 位 鄒 魯 是 也 .   藏 瑞 於 此 以 待 聖 人 之 出 也 .


<  {미수기언}, 기언원집 내편, 경설 형설(刑說) >
백성을 교화함에 있어서는, 예의로써 교육시키고 정법으로써 고르게 하며 형벌로써 하나같이 하는데, 형벌은 말단이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 형벌을 제정하지 않았었다면 난폭한 자를

금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黃帝)가 치우(蚩尤)를 이겼고, 전욱(頊)이 구려[九黎 , 9인의 여씨(黎氏)]를

정벌하였으며, 순(舜)이 사흉(四凶)을 유배(流配)시켰다.

禮 以 敎 之 政 以 齊 之 .   刑 以 一 之 .   刑 亦 末 也 .   雖 然 上 古 之 治 非 制 刑 無 以 止 亂 禁 暴 .   故 黃 帝 克 蚩 尤 .   頊 伐 九 黎 .   舜 流 四 凶 .


< 7. 제왕운기帝王韻紀 상권(김경수 역주, 도서출판 亦樂, 1999) >

   (황제에 대한 주석)창, 갑옷, 활, 살을 만들어 치우를 멸했다.
      黃帝是 …制戈矛鎧甲弓矢以滅蚩尤(408쪽)


< 8. 단기고사檀奇古史(제1편 전 단군조선, 제3세 부루) >
이(순임금 시대)보다 앞서, 치우(治尤)는 이마가 쇠처럼 강하고 능히 크게 안개도 일으켰다.
그 때에 자부선생 밑에서 함께 공부하던 중화의 황제가 공연히 염제의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하여, 황제와 탁록 들에서 싸웠는데, 후원병이 오지 않아 황제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 특명에 이르고, 상균과 더불어 단조를 도우니

정치의 문명 정도가 중화의 우조보다 훨씬 뛰어났다

 

출처 치우학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상질-위 사진

 

아래 웅천실록

 

 

 

 

<1629년 과거시험 서제(書題)가 “치우송(蚩尤頌)” 제47권, 웅천일록·기사년 11월>
정시(庭試)가 있었는데, 서제(書題)는 치우송(蚩尤頌)이었으며 방(榜)이 나오니,
이 상질(李尙質)이 문과의 장원이고, 오 희철(吳希哲)이 무과의 장원이었다.

정시(庭試)에 입정(入庭)한 유생의 수는 9백 20인이고
미시(未時)로 한정하여 시권(試券)을 거둔 수는 6백 64장이었다.

十二日庭試. 書題蚩尤頌. 榜出李尙質爲文.
십이일정시. 서제치우송. 방출이상질위문.
十二日庭試. 書題蚩尤頌. 榜出李尙質爲文.  
십이일정시. 서제치우송. 방출이상질위문.  
吳希哲爲武. 庭試入庭儒生數九百二十人.
오희철위무. 정시입정유생수구백이십인.
限未時. 收券數六百六十四丈.
한미시. 수권수육백육십사장.

平蚩尤頌(평치우송)
庭試魁(정시괴)          
家州集卷之四(가주집권지사)
李尙質 號 家州(이상질 호 가주) 인조7년(1629) 문과장원시

天錫聖德  하늘이 성덕을 내리니
經緯廣密  천하 다스릴 기량이 넓고 치밀했다
照臨萬國  온 나라를 자세히 살펴서
文敎旣迪  문화교육을 펼치고
武極其力  무력에도 힘을 다하여
治化四達  교화가 사방에 미쳤으니
撫綏八極  온 누리를 더욱 어루만져서
宇內淸謐  세상이 평온했으므로
遠近虔慄  모든 백성이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如天之育  하늘이 만물을 기르듯
如地之博  대지가 만물을 포용하듯
大苞品物  크게 모든 것을 포섭한
神機斡軋  그는 신묘함이 탁월하여
屈伸把握  잘 잘못을 파악하므로
岡不統率  통솔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惟彼鐵額  오직 철면피한 치우만이
敢肆凶虐  감히 흉악을 부리고
亂我王法  우리 왕법을 혼란시켰다
噓而霧作  입으로 안개를 일으키고
動而狶突  움직이면 저돌적이었다
梟鷔桀慝  사납고 음흉한 날짐승같이
裒凶鞠毒  가슴속에 독기만 길러서
怒飛饑嚙  성나면 날으고 배고프면 약한 자를 씹으므로
以速天殛  스스로 죽음을 자초 하였도다
翹羽傲雪  날개를 펴면 차가운 눈 속을 날으고
奮鷇抗嶽  힘을 내면 높은 산악을 비상하며
呌呶勝踔  소리치며 오르고 내릴때
民受其螫  국민들은 그 독침을 받았고
國被其轢  오나라가 그에게 짓밟혀서
九野梗塞  세상이 숨이 막혔을때
天命聖哲  하늘은 성인에게 명령하여
制以兵革  무기로써 제압하고
乃剪其惡  그의 악행을 잘라 버렸다.
帝怒斯爀  황제는 이때 심히 노했으니
何敢越厥  어찌 감히 그 위엄에서 벗어나
可以薄伐  토벌을 받지 않았으리오
風后陪幄  이 때 풍후가 보좌했고
力牧獻策  역목이 계책을 올리니
師出以律  군법에 따라 병력을 동원할 때
智創車轍  지혜로 지남거를 만들어
載南載北  동서남북으로 오갈 때
所向無敵  가는 곳마다 대적이 없었다
如風發發  바람이 세차게 부는 듯
如火爀爀  불이 활활타듯
應皷如殲  북소리 따라 섬멸하기를
斬豕以鉞  돼지를 도끼로 잡듯하고
取蛇千穴  구멍에 숨은 뱀을 잡듯하고
群穢殄滅  지자분한 것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朱旂所拂  붉은 색 깃발 펄럭이는 곳
踣於霹靂  벽력 같은 소리에 쓰러지고
威靈燿燿  번쩍이는 위력속에
橫馳旁擊  이리 달아나면 저리로 쳐서
是震是拔  이들은 항복하고 제거되었다
大鞣涿鹿  탁록에서 접견할 때에
風雲改色  산천의 빛깔도 변하였고
彗孛掃落  혜패도 말끔이 떨어져
天地肅廓  온 세상이 깨끗해졌고
兵不再血  전쟁으로 두 번 피를 흘리지 않았다
擧不浹日  거사한지 열흘이 안되어
卽就夷削  어지러운 세상을 평정하였도다
贙猛旣戮  사나운 짐승들을 소탕하였도다
濡以鴻澤  백성들을 크나큰 사랑으로 어루만지니
品彙蘇悦  모두들 새 삶에 기뻐하였도다
曾是慘黷  지난날의 참옥한 상황이
化爲霽豁  변하여 삶의 길이 활짝 열리고
晞以日月  맑은 해와 달빛아래
弓弭失箙  활끈 풀어 전통에 화살을 넣고
載橐其甲  갑옷을 전대에 담으며
干戈永戢  방패와 창을 영구히 걷우고
武功旣訖  전쟁을 끝낸 뒤에
俾惠六合  백성들을 사랑하니
罔有臲卼  고통받는 이가 없었다
樂民樂業  즐거운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하여
乃耕乃鑿  밭갈고 우물을 파 먹고 마시니
並受其福  모두가 그 복을 받아
嘉保同則  황제의 덕을 기리면서
以舞以躍  춤을 추고 기뻐하며
無不自得  만족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何功之烈  그 빛나는 공적과
何德之犖  그 아름다운 덕망은
巍蕩輝焯  위대하기가 태양 같고
湛恩洋溢  깊은 은혜는 세상에 넘쳤도다
聖化旁魄  널리 펼쳐진 성인의 교화는
超軼古昔  어느 세대에도 없었던 일로서
天下奉法  세상이 받들어 본받았고
百神受職  신이 여러 가지로 도와서
鳳巢其閣  봉황이 대궐에 둥지를 틀었도다
天以管覿  좁은 소견으로 하늘을 엿보고
海以蠡測  쪽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니
曷能備述  어떻게 모두를 서술하리오만
維德維績  그 덕망과 공적을
願刻金石  금석에 새겨서
以垂千億  길이길이 남기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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