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예컨대 한서(漢書)고제기에 치진중(治秦中)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치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한(漢) 고조가 진중(秦中)에 수도를 정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백제소치도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
(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한국사학계는 그동안 이 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점이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 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만주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흠정만주원류고 3권은 사서(史書)에
백제는 무예를 숭상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宋),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이는 백제의 땅이 넓고 백성도 많았다는 증거다
흠정만주원류고의 이 기록은
남제서(南齊書)백제전에 나타난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建武) 2년에 백제의 모대왕(牟大王)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건무는 남제 명제(明帝)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천자(天子)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었다
제후와 왕공을 분봉(分封)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백제가 중건후왕(衆建侯王)
즉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원문링크 신동아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3/200409230500060/200409230500060_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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