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안시성은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대성이며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안시성을 찾기 위해 신당서를 보면 대요수와 소요수, 그리고 또 압록강이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나가는 곳이 역시 안시성이다
<新唐書> 高麗...水有 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號鴨淥水...又西南 至安市
대요수는 대릉하와 합쳐서 바다로 나가므로 안시성의 위치는 지금의 랴오허강(遼河) 서안이 된다
안시성 주변지도
북진시는 발해 동평부 북주(北州)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9권>에 의하면
북진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는데, 달자(韃子; 몽고인)들이 무덤을 부수고
수 길이나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관틀[棺材]은 물에 잠겨 버리고
곽(槨)만이 드러나 있는데, 벽돌로 쌓아 내부[室]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 보니까 비석이 있는데 고려왕 무덤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북진시 서남에도 고구려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북진시 서쪽 의무려산
홍보사이트 중에서 영산풍경구(醫巫閭山靈山風景區) 안내를 보면
900년전 고구려성 유적지와 당대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요사지리지>에의하면 발해 북주 영봉현(靈峰縣)이 있었다가
요나라 때 영산현이 되었다. (http://www.lvshan.com/fengjing_info.asp?id=219)
북진시 북쪽 십리에는 고성산(古城山)이 있다고
명나라 때 지은 <요동지(遼東志)> 등에 전해 온다
고성산 안쪽의 양가점(楊家店)이 바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후예가 살아온 안시성이다
안시성 동남쪽으로 서대(誓臺)라는 곳이 있었다
당태종이 맹세하던 곳이라는데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은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안시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다
양만춘의 후예는 발해 때에 설치한 북주성의 주인이었던지
오늘날 북진성을 관통하는 물이름도 양랑하(楊朗河)라고 하였고
성내 서북산은 만취산이라고 하였다
요동성에서부터 당태종이 공격나갔다가 항복을 받고 돌아온 백암성은
산에 의지하고 물이 험한 곳인데
<요사지리지>에서 암주 설명은 발해 백암성을
요나라 태종이 뽑아다가 심양에 옮겼다고 하였고
따라서 현재의 요동에 있던 것이 아니다
요나라가 옮기기 이전의 백암성은 1117년 요나라 연왕순의
여진족 토벌군과 여진족 전투중에 그 기록이 출현하는데
휘주(徽州;부신시 서북 사가자 고성)에서 요나라군이 대패하고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한 팔영(八營) 중의 하나로 암주영이 있었다
1117年. 初, 怨軍有八營, 共二萬八千餘人, 自宜州募者謂之前宜營, 再募者謂後宜營, 前錦、
後錦者亦然, 有乾營、顯營, 又有乾顯大營、岩州營
해석하면 대릉하의 의주시 앞뒤로 2개, 소릉하의 금주시 앞뒤로 두개
안시성이 있던 북진시 앞뒤로 3개, 그리고 암주성이었다
즉 안시성의 방어 위치이면서, 또한 당태종의 요동성-백암성-요동성-안시성의 행로를 보면
요동성과 안시성의 협곡 길에서 살짝 비켜있다
'우리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순신 약무호남 시무국가 (0) | 2007.06.29 |
---|---|
고구려 주몽이 한고조 유방 건국 도왔다 (0) | 2007.06.28 |
북경에 있는 고구려성 고려영 (0) | 2007.06.25 |
바이칼에선 동명성왕을 고구려칸이라 부른다 (0) | 2007.06.10 |
한민족 기원지 바이칼호 주민들 (0) | 2007.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