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四海)에 대한 원래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정방곤(鄭方坤)이 쓴 <경패(經稗)>의 권3에 <사해회동 四海會同>편이 있다.
여기에 사해(四海)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아. 석지(爾雅 釋地)>에 이르기를
“구이(九夷) 팔적(八狄) 칠융(七戎) 륙만(六蠻)을 일컬어서 사해(四海)라 한다.
(爾雅釋地云 九夷 八狄 七戎 六蠻 謂之四海)”라고 되어 있으며
곽박(郭璞)의 주에
“구이는 동쪽에 있으며 팔적은 북쪽에 칠융은 서쪽에 륙만은 남쪽에 있다.
(郭璞曰九夷吊 八狄在北 七戎在西 六蠻在南)”라고 되어 있다.
사해(四海)라는 것은 모두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하는 말이지
물(바다)을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皆以地言 不以水言 爾雅四海 繫釋地 不繫釋水)
이아(爾雅)에서 이야기하는 사해(四海)도
땅(지역)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물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皆以地言 不以水言 爾雅四海 繫釋地 不繫釋水)
우공(禹貢)의 구주(九州)지역의 밖이 즉 사해(四海)인데
이는 바닷물로서 멀고 가까운 것의 경계를 삼은 것이 아니다.
(禹貢九州之外 即是四海 不以海水之逺近為限)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원래 차이나에는 4개의 바다가 없으며
차이나 영토 바깥이 사해 지역이다.
따라서 사해의 원래의 개념은 바다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고대 차이나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 해답은 <맹자집주대전 孟子集註大全> 을 비롯한 맹자를 주해한 책 속에 있다.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의 전성기에도 그 지경(地境)이 1000리를 넘지 못했다.
(夏后殷周之盛地未有過千里者也)
제(齊)나라도 땅이 있으나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 사방에까지 이르렀다.
(而齊有其地矣鷄鳴狗吠相聞而達乎四境)
중략
3대(하, 은, 주)의 전성기에도 왕이 통치하는 땅이 1000리를 넘지 않았으며
(三代盛時王畿不過千里)
제(齊)나라도 땅은 있으나 문왕(文王)의 100리 땅만도 못했다.
(今齊己有之異於文王之百里)
또한 닭과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렸다.
(又鷄犬之聲相聞 - 孟子集註大全3 公孫丑章句上)
위의 내용을 보면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강역은
1000리를 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며
주나라의 제후국인 제나라는 100리도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니
중국이라는 것은 허상이고
조그마한 나라일 뿐인 차이나(支那)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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