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宋象賢)은 호가 천곡이요 정읍(고부) 출신이다.
선조 9년 과거에 급제한 후 호조·예조·공조의 정랑을 거쳐
선조 24년 동래부사에 부임했다.
왜란이 발발하여 왜병이 밀려오자 성(城)에 들어왔던
경상병사 이각은 도망쳐버리고 군졸들도 흩어져 어지러웠다.
이때 송상현은 대오를 정비,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결심하고 있을 때
양산군수 조영규가 달려와서 함께 성을 지켰다.
조영규(趙英圭)는 장성에서 출생하여 명종 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용천부사 등 7곳의 수령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청렴으로 유명하였다.
왜란이 일어나 부산이 함락되고 왜군이 밀려오자
가족을 아들에게 맡기고 동래성에 들어가 장렬하게 싸우다 성이 함락되면서 전사하였다.
현종 10년 송준길이 경연에서 그의 충절을 아뢰어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성의 모암서원에 배향되어 그의 높을 뜻을 기리고 있다.
고니시는 소오 요시토시에게 명하여 동래부사 송상현과 협상을 모색토록 했다.
소오 요시토시는 부하 100여 명을 시켜 목패에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적어 남문 성 앞에 세워놓게 했다.
송상현은 목패에 화답하는
송상현은 목패에 화답하는
"싸우다 죽긴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글을 목패에 써서 부하들에게 남문 밖으로 던지라고 명하였다.
그는 일본군에게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나타냈다.
송상현은 전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측근 종행인을 시켜 조복(朝服)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는 갑옷을 벗고 조복으로 갈아입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았다.
송상현은 호상에서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가지고 있던 부채에
송상현은 호상에서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가지고 있던 부채에
고향의 아버님에게 보내는 유시 한 수를 남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에는 달무리 에워싸고
大鎭不救 큰 진에서는 구원은 없사오니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니
父子恩輕 부자의 은혜 어찌 갚으오리까
일본 군사들 중에는 쓰시마 태수 소오 요시토시의 부하 다이라(平調益)도 끼여 있었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에는 달무리 에워싸고
大鎭不救 큰 진에서는 구원은 없사오니
君臣義重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니
父子恩輕 부자의 은혜 어찌 갚으오리까
일본 군사들 중에는 쓰시마 태수 소오 요시토시의 부하 다이라(平調益)도 끼여 있었다.
그는 일찍이 다이라 시게노부(平調信)를 따라 사신을 수행한 적이 있어,
송상현의 인품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송상현에게 피신을 권했다.
송상현은 호상에 앉아 일본군을 꾸짖었다.
송상현은 일본군의 칼에 의롭게 순결하였다.
뒤에 적장 소오 요시토시 등은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를 죽였다.
뒤에 적장 소오 요시토시 등은 탄복하여 송상현을 살해한 자를 죽였다.
왜군의 종군승으로 따라 왔던 덴게이(天荊)가 '서정일기'에
이 날의 동래성 참상을 '목을 벤 게 3천여, 포로가 5백여'라고 기록해 두었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에 감복한 소오 요시토시 등 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성 밖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에 감복한 소오 요시토시 등 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성 밖
북쪽에 안장하며 "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라는 묘표를 세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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