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命理學 ― 마지막회 / 명리학과 한의학 꿰뚫은 大家 한동석의 大예언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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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상을 연구하는 데서도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는 것 같다.
강단동양학(講壇東洋學)과 강호동양학(江湖東洋學)이 그것이다.
강단동양학이란 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양사상을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논문 쓰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주로 이(理)나 기(氣)와 같은 개념 파악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형이상학적 사고의 트레이닝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만, 현실문제의 해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문을 중시하는 학교 강단에서만 통하는 동양학이다.
강단과 들어줄 학생이 있다면 모를까,
학생과 칠판 그리고 강단이 없어지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강단이라는 무대장치가 사라지면 마치 연못의 붕어가
연못 밖의 맨땅에 던져지는 꼴이 된다고나 할까.
반대로 강호동양학이란 강호의 좌충우돌하는 실전에서 요구되는 동양학을 가리킨다.
무대장치 없이도 그 맥을 이어가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해방 이후 강호동양학은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래서 제도권보다 재야의 기인, 달사들 사이에서 그 맥을 이어왔다.
강단파(講壇派)와 강호파(江湖派)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간단하다.
학교와 강단이라고 하는 직장을 떠나도
굶어 죽지 않으면 강호파에 속하고,
강단을 떠나 굶어죽는 차원이라면 강단파로 분류할 수 있다.
‘TV동양학’이라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도올 김용옥은 학교를 떠났어도 굶어 죽지 않았으니 강호파에 속한다고 보겠다.
필자는 아쉽게도 아직 강단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다면 강호동양학이란 무엇인가. 강호동양학을 구성하는 3대 과목은 사주·풍수·한의학이다.
이 3대 과목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인 ‘잡과’(雜科)에 속하는 과목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잡과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실용적인 과목들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사주·풍수·한의학은 천·지·인
삼재사상(三才思想)의 골격에 해당하기도 한다.
천문이란 바로 때(時)를 알기 위한 학문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면 하늘의 시간표를 알 수 있고,
하늘의 시간표를 알면 인간의 시간표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천문 연구의 목적이다.
시간표를 알면 언제 베팅할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즉, 타이밍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인생사의 중대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자기 인생이 지금 몇 시에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하여 한자문화권의 역대 천재들이 고안한 방법이 사주명리학이다.
사주명리학이란 천문(天文)을 인문(人文)으로 전환한 것이다.
하늘의 문학을 인간의 문학으로,
하늘의 비밀을 인간의 길흉화복으로 해석한 것이 이 분야다.
지리는 풍수다. 천문이 시간이라면 지리는 공간의 문제를 다룬다. 시간의 짝은 공간이다. 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령(地靈)의 문제다.
땅에는 신령스러운 영(靈)이 어려 있다고 믿는다.
현대인은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아주 어렵다.
어떻게 땅에 영이 존재한다는 말인가.
지령을 체험한 사람은 풍수를 이해하지만,
지령을 거부하면 풍수의 핵심에는 영영 접근하지 못한다.
지령이 있는 지점에서 살면 일단 건강해지고, 그 다음에는 영성(靈性)이 개발된다. 건강해지고 영성을 개발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명당이 아닌가.
지령이 어려 있는 땅에서 잠을 자면 특이한 꿈을 꾸는 수가 많다.
좌청룡 우백호가 아무리 좋아도 꿈이 없는 곳은 명당이 아닐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명당들은 특이한 꿈으로 나타났던 지점들이기도 하다.
남자보다 여자들이 민감하게 영지를 감지하는 경향이 있다.
강단파 쇠락, 강호파 득세 천문·지리 다음에는 인사(人事)다. 인사는 존재다. 시간과 공간이 있어도 존재가 없으면 소용없다.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한의학이다.
천문과 지리는 대학의 커리큘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한의학은 이와 달리 제도권 안으로 들어왔다.
1970년대 초반부터 경희대와 원광대에 한의학과가 개설되면서 한의학은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양의학으로부터
‘기껏 약초 뿌리나 만지작거리는’ 원시적 치료 행위로 멸시받다
비로소 인정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학문적 시민권을 딴 셈이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분야가 되었다.
서울대나 포항공대를 졸업하고도 다시 한의학과에 편입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인문·사회분야 박사학위 소지자도 있다.
그래서 편입시험이 다른 학과보다 유난히 치열하다.
학생들 나이도 지긋하다. 직장 다니다 또는 사업하다
한의과대학에 편입하는 사례가 많아서
가르치는 교수보다 나이가 더 많은 학생들도 있을 정도다.
이처럼 한의학과에 IQ와 능력을 갖춘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이유에는 시민권도 작용한다. 시민권이 있어야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한의원 개업하면 밥은 먹고산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한의학을 하면
심오한 동양철학을 공부한다는 기대감도 작용하는 것 같다.
직장생활도 해보고 사회에서 이것저것 경험하다 보니
별로 돈도 벌지 못하면서 고달프기만 한 반면,
평소에 관심 있던 공부도 하면서 동시에 생계수단도 되는 학문이
한의학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강호파의 대가들은 한의사 그룹에서 나올 공산이 높다. 기본 생계가 확보되고, 인체를 통해 실전체험을 쌓을 수 있는 데다
타고난 자질이 우수하니 이대로 가면 대가(大家)가 나올 수밖에 없다.
강단파는 죽어라하고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더라도 교수 자리 하나 못 얻으면 고급 룸펜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단파는 쇠락하고 강호파는 득세할 전망이다. 그 강호파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유망주들이
한의사 그룹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한의사는 한 달에 15일 정도만 한의원에서 진료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전국의 산천을 방랑하면서 약초를 채집하고
기인들을 만나 도 닦는 데 투자하는 것을 보았다.
한의사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양의(洋醫)에 비해 한의(韓醫)가 갖는 이러한 시간적 여유는
동양사상을 깊이 탐구하는 데 가장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조건이다.
여기에 비하면 풍수는 영주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풍수는 복덕방 영감님들이나 관심을 갖는 미신,
잡술로 여겨지다 최창조 교수가 등장하면서 약간 시각교정이 되었다.
그래도 대학교수가 풍수를 연구하는 것을 보니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인식이 바뀌었다.
비록 한의학처럼 시민권은 못땄지만 영주권은 딴 셈이다.
가장 불쌍한 처지가 사주명리학이다. 아직도 미아리 골목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 불법체류자인 셈이다.
불법체류자는 국가로부터 사회복지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신세이니 항상 눈치를 보아야 한다.
언제 단속이 있는지 말이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쪽부터 수사의 칼날을 들이댄다.
범죄자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주, 불법체류자 신세 사주는 언제쫓겨날지 모르는 불법체류자의 신세이고, 한의학은 주류사회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시민권자라는 신분상의 차이는 있지만,
신분을 초월한 우정이 가능하다.
한의사 중에는 사주명리학에 능통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말이다.
능통하지는 못 하다고 하더라도 한의사들은 대체로 사주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한의학과 명리학이라고 하는 두 메커니즘은 상호 호환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명리학에 조예가 깊은 한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처방을 쓸 때도
그 사람의 사주팔자를 반드시 물어본다.
나이가 지긋하게 든 어떤 원로 한의사는 환자를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만 듣고도 증상이 어떻다는 것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경우를 보았다.
사주만 보아도 어떤 병이 들었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대병(大病)은 팔자에 타고나고,
소병(小病)은 관리소홀’이라는 명제다.
그 사람의 원초적 성격이나 기질은 타고난다.
편벽된 성격이나 기질이 오랜 시간 쌓이면 대병이 된다.
대병이란 고질병을 지칭한다.
이러한 고질병의 원인을 소급해 올라가면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에서 연유한 것이고,
그 기본적인 성격과 기질은 애초부터 타고나는 것이라서
사주팔자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고로 팔자를 보면 그 사람의 고질병을 예견할 수 있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모든 병이 다 팔자소관인 것은 아니어서
자잘한 병은 후천적인 건강관리 소홀로 걸린다.
건강하게 타고났더라도 후천적으로 무절제한 생활을 하면 병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병은 당사자가 주의하고 치료를 가하면 회복이 가능한 작은 병이다.
소병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대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환자를 보지 않고 사주팔자만 보고도 처방이 가능하다는 원리는 이래서 가능하다.
사주를 보고 병을 미리 아는 원리를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 인체의 중요한 장기는 오장(五臟)이다.
이 오장은 오행과 연결되어,
어떤 오행이 그 사람의 사주팔자에 지나치게 많거나 적으면
거기에 해당하는 장부에 이상이 생긴다고 본다.
예를 들어 팔자에 화(火)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으면
죽을 때 다른 이유보다 심장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고 본다.
목(木)이 과불급이면 간장에 이상이 생기고, 토(土)가 과불급이면 위장 계통에 이상이 발생하고,
금(金)이 과불급이면 폐장에 문제가 발생하고,
수(水)가 과불급이면 신장에 이상이 생긴다고 본다.
한발 더 나아가면 사주에서 화기는 많은 반면
이를 보충해 주는 목기가 부족하면 뇌에 이상이 생겨 죽을 수 있다.
뇌의 작용은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현상과 같은데, 이를 지원해 주는 목기가 부족하면 전기 공급이 중단되어
전구에 불이 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병화(丙火) 일주(日主)인 사람이 겨울에 태어난 데다
인수가 부족해 신약하면 시력이 약하거나 심장질환이 있을 수 있다.
병화는 심장이기도 하지만, 인체의 헤드라이트인 눈에 비유할 수도 있다.
즉, 시력에 이상이 올 수 있다.
사주책에 보면 임계(壬癸) 일주가 죽을 때에는 신장병·부종병으로 오래 앓다 간다고 되어 있다.
경신(庚辛) 일주는 혈압·급병·토혈로 간다.
사오미월(巳午未月)의 갑을(甲乙) 일주는 천식해수나 뇌일혈로 죽는다.
기경신(己庚辛) 일주가 신약하면 폐병·객혈로 세상을 뜨는 수가 있다.
일간이 경신(庚辛)일이고 가을이나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술이 몸에 받는다.
사주가 냉한 데다 알콜이 들어가면 몸을 덥히기 때문에 적당한 음주는 몸에 아주 좋다.
물론 사주에 따라 반드시 그 병에 걸린다고 100%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럴 확률이 높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처럼 인체의 병과 그 사람의 사주팔자가 무시할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한의학과 학생들은 방학이면
사주에 용하다는 재야의 선생을 모셔다 놓고 그룹스터디를 하기도 한다.
天-地-人 삼재의 기본은 음양오행 천-지-인 삼재에 모두 적용되는 공통분모를 좁혀 들어가면 음양오행이라는 거대담론 체계가 나타난다.
명리학과 한의학도 역시 마찬가지다.
양자가 일정부분에서 상호 호환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도 역시 음양오행이다.
하늘에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성이라는 별이 있듯
땅에도 역시 거기에 부합되는 형상이 있으며,
인체의 장부에도 음양오행이 적용된다.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여의주를 하나 가지면
사주·풍수·한의학을 하나로 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시스템적 사고’다. 이것을 건드리면 저것이 움직인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물코와 같이 촘촘하게 연결된다. 이것이 동양사상의 특징이다.
그래서 동양사상은 시간이 필요하고 연륜이 필요하고 흰머리가 나야 한다.
전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음양오행이라고 하는 시스템적 사고를 체득하는 데 가장 선결문제이면서도 어려운 부분이 기본 전제의 이해다.
기본 전제가 되는 개념에 대한 파악이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본 개념 파악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오행에 대한 개념 파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명리학이나 한의학이나 오행이라는 기본 틀에 얹혀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데,
이 오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중층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have’동사가 여러 가지 중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오행은 그 이상으로 포괄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특히나 해방 이후 세대는 한문보다 영어 공부에 더 치중한 세대이다.
영어는 상업적인 언어가 되어 놔서 뜻이 분명하다. 분명하지 않으면 계약에서 분쟁이 생긴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대로 한문은 매우 포괄적인 문자다.
이렇게도 해석하고 저렇게도 해석할 여지가 많은 언어다.
영어와 같은 분명한 언어에 익숙해진 해방 이후 세대가
매우 다의적인 한문의 세계에 들어가면 당황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오행과 같은 한자문화권의 핵심 개념에 들어가면 그 당혹감은 더 가중된다.
명리학과 한의학의 연결고리는 오행사상에 있고, 이 오행에 대한 이해를 확실히 한 인물이 한동석(韓東錫·1911~68)이다.
1911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출생한 한동석은
‘우주변화(宇宙變化)의 원리(原理)’(대원출판, 2001년)라고 하는
문제의 저서를 남겼는데,
66년에 초판이 발행된 이 책은 4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내려오고 있다.
한의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한의과대학 학생치고 이 책 안 본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판이 자자한 책이다.
그런가 하면 명리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려는 술사들 사이에서도
이 책은 반드시 한번 읽어볼 만한 책으로 회자되고 있다.
명리학에서도 지하실 깊은 바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행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데,
기존의 책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한 이야기만 반복해
오늘날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 수가 많다.
이 책 저 책 들여다보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후학들이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해야 하는데, 옛날 이론만 앵무새처럼 반복만 하고 있을 뿐이지,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해석을 못 해내기 때문이다.
법고(法古)는 하지만 창신(創新)을 못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한동석은 오행사상에 대한 창신을 해낸 인물이다.
오행의 원리를 스스로의 입에 넣고 하나씩 씹어 철저하게 맛본 다음 쓴 책이다.
근래에 한·중·일 3국 중 오행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맥락에서 이처럼 확실하게 해낸 인물은 없는 것 같다.
중국 수(隋)나라때 소길(蕭吉)이라는 인물이
‘오행대의’(五行大義)를 쓴 이래 오행에 대한 역작이
바로 한국의 한동석이 저술한 ‘우주변화의 원리’다. 한국에서 인물 나왔다.
이 책은 중국이나 일본의 연구자들도 공부해야 할 명저다.
‘우주변화의 원리’ 가운데 필자가 인상깊게 읽었던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목화토금수라는 것은 나무나 불과 같은 자연 형질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목화토금수의 실체에는 형(形)과 질(質)의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행의 법칙인 목화토금수는 단순히 물질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상(象)만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와 형이상을 종합한 형과 상을 모두 대표하며
또는 상징하는 부호인 것이다. 오행이란 이와 같이 형질을 모두 대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점(主點)은 상에 두고 있다.’(60쪽)
목화토금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종합 목화토금수에는 형이상의 의미와 형이하의 의미 둘이 있다고 지적한 부분도 중요하다. 두 면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현상보다 본체의 측면
즉 형이상의 측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한동석은 강조한다.
행(行)이란 것은 일진일퇴를 의미하는 것이니, 즉 ‘왕(往) + 래(來) = 행(行)’이라는 공식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의 일왕일래(一往一來) 하는 모습이
오행의 운동규범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따라서 오행운동은 분합운동이기 때문에
양(陽) 운동의 과정인 목화(木火)에서는 분산하고,
음(陰) 운동의 과정인 금수(金水)에서는 종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취산(聚散)의 의미가 행자(行字)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념을 설정함에 있어서 행자가 들어 있는 것은
모두 이같은 현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금전이 취산하는 곳을 은행(銀行)이라고 한 것이나,
화물이 취산하는 곳에는 양행(洋行)이라는 개념을 붙인 것 등은
실로 행자 자체가지닌 바의 개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60쪽)
오행을 이야기할 때, 도대체 ‘행’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는 쉽지 않다. 현대에는 잘 안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동석은 이를 왕래로 규정한다.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뜻으로 본다.
예를 들어 ‘은행’이나 ‘양행’처럼 돈이나 화물이 모였다 흩어지거나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의미로 설명하는 것은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하던 설명이다.
‘화기’(火氣)라고 하는 것은 분산(分散)을 위주로 하는 기운이다. 모든 분산작용은 바로 화기의 성질을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우주의 모든 변화는 최초에는 목의 형태로써 출발하지만
그 목기가 다하려고 할 때에 싹은 가지를 발하게 되는 것인즉,
그 기운의 변환을 가리켜서 화기의 계승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작용을 화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변화작용의 제2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화기가 분열하면서 자라나는 작용은 그 기반을 목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목이 정상적인 발전을 하였을 때는 화기 또한 정상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지만,
만일 목의 발전이 비정상적일 경우에는 화도 역시 불균형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화기가 발전하는 경우 뿐만이 아니라 목화토금수의 어느 것이 발전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화라는 것은 이와 같이 그 상이나 본질이 목에서 분가(分家)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이것을 인생 일대에서 보면 청년기에 접어드는 때이다.
그러므로 진용(眞勇)은 허세로 변해가기 시작하고
의욕은 차츰 정욕(情慾)에서 색욕(色慾)으로 변해 가는 때인 것이다….
색욕이라는 것은 내용에 대한 욕심이 아니고 외세에 대한 욕심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목의 경우는
이면에 응결되었던 양기(陽氣)가 오로지 외면(外面)을 향해서 머리를 든 정도였지만,
화기의 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상당한 부분의 표면까지 분열하고 있으므로
그 힘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관찰하여 보면 이것은 꽃이 피고 가지가 벌어지는 때인즉,
이때는 만화방창(萬華方暢)한 아름다움은 위세를 최고도로 뽐내는 때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공허하기 시작하는 때인 것이다.
여름은 외형은 무성하지만 내면은 공허해지는 때이므로
생장의 역원(力源)은 끝나고 노쇠의 바탕이 시작되는 때이다.’(66~67쪽)
여기서 보면 화의 성질을 분산작용으로 규정한다. 그 분산작용이 인간의 욕망으로 나타나면 색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그 색욕이란 내용에 대한 욕심이 아니고
외세에 대한 욕심’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탁견이다.
색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바깥의 색깔이다.
색욕의 본질을 분석하면 바깥의 색깔에 대한 욕심이다.
이것을 바로 화기의 작용이라고 본 것이다.
화기는 마음껏 발산하는 힘이다.
역대 어떤 도사가 화기와 색욕을 이렇게 연결시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였단 말인가!
이와 같이 분명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근래에 없었다. 한동석 선생의 통찰력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아도 사주에 화가 많은 사람은 기분파가 많다.
배짱이 맞으면 시원시원하게 ‘오케이’ 하는 경향이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화기가 많은 팔자들은 그날 처음 만났어도
이야기가 통하면 곧바로 호텔로 직행하는 경우도 보았다.
支地에 불이 많은 사람들의 사주 남자 사주의 경우 지지(支地)에 불이 많은 사람은 결혼을 여러 번 하는 수가 있다. 소위 ‘처궁(妻宮)에 불지른 사주’라고 표현한다.
지지에 불이 많으면 이는 곧 배우자 자리(妻宮)에도 불이 많은 셈이고,
처궁에 불이 훨훨 타면 같이 사는 여자가 남자의 화기에 타버리는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통계적으로 이혼이나 사별이 많다.
배우자 복은 없지만 머리는 비상하다.
판단력이 신속 정확할 뿐더러 기발한 발상을 하기도 한다.
처궁에 불지른 사주는 불교의 고승들에 많다. 고승의 자격요건은 여자도 물론 없어야 하지만,
화두(話頭)를 돌파할 수 있는 집중력과 두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처궁이나 남편궁에 불지른 사주를 간혹 목격하면
필자가 하는 말은 “결혼 늦게 하시오”이다.
일찍 결혼하면 실패가 많으니 젊은 시절에 시행착오를 여러 번 겪은 다음에 결혼하면 실패가 적다.
충분히 수업료를 냈으니까.
알고 보니 한동석 선생 본인이 여기에 해당하는 사주였다.
그는 6·25 전후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통과하면서 결혼을 여러 번 하였다.
도인이 어떻게 결혼을 여러 번 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의 사주를 바라보면 이해가 간다.
생년월일은 1911년 6월8일(음) 인시(寅時)이니 이를 만세력에서 간지(干支)로 환산하면
신해(辛亥)년 갑오(甲午)월 갑술(甲戌)일 병인(丙寅)시가 된다.
지지에 인(寅)·오(午)·술(戌) 삼합으로 온통 화기가 충천한 사주다.
불이 훨훨 타고 있다. 어떤 여자든 들어와 살면 타버리는 사주다.
더구나 일주는 갑목이다. 이렇게 되면 ‘목화통명’(木火通明) 사주이기도 하다.
목화로 되어 있으면 밝음에 통한다는 뜻이다.
사주팔자가 마른 통나무에 불 붙이는 형국이 되어놔서 명석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목화통명’ 사주를 보통 박사 사주라고도 하는데 머리 좋은 사주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사주는 무욕담박하고 여자가 타죽는 사주이니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더라면 이름 높은 고승이 되었을 팔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화기에 대한 기본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사주를 볼 때나 한의사가 환자를 볼 때도 참고되는 바가 많다.
화는 심장을 가리키므로 처궁에 불지른 사주의 소유자는
고혈압이나 심장질환을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나온다.
한동석 선생의 사상과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하던 중 논문이 하나 눈에 띄었다.
대전대 한의학과 대학원 석사논문인
‘한동석의 생애(生涯)에 관한 연구’(權景仁, 2001)이다.
한동석의 친척들과 제자 그리고 동료들을 인터뷰함으로써,
그의 출생에서부터 가정생활과 공부 과정,
환자들에 대한 임상 그리고 학술활동을 밝혀 놓았다.
한동석에 관한 학계 최초의 논문이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 한동석이 이승만 대통령 이후 한국의 정권교체에 대하여
밝혀 놓은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한동석은 앞일을 미리 내다보는 예언 능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의사이면서도 앞일을 귀신 같이 아는 도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언이 한국의 정권교체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 예언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하여 권경인 씨의 소개로
한동석의 사촌동생인 한봉흠(76) 박사를 서울 정릉의 자택에서 만났다.
한봉흠 교수가 본 한동석
한봉흠은 1960년대 초반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독문학 박사를 하였으며, 63년부터 93년까지 고려대 교수로 근무하다 정년퇴임하였다.
한씨들 집안 내력인지는 몰라도 이 양반도 역시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박사는 사촌 형님인 한동석과는 내면에 있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주고받은 친밀한 관계였으므로 반드시
인터뷰해볼 만한 인물로 여겨졌다.
―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 좀 해 주시죠. “내가 독일 유학을 갈 때가 1959년도인데 이승만 정권 때죠. 독일로 출발하기 전에 나에게 형님이 그랬어요.
‘이기붕 집안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이박사는 하야하고 마는데 난리 나서 갈팡질팡 할 것이다.
그 다음에 1년 정도 민주정부가 들어선다.
그 다음에는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 정세를 보니 형님 말한 것이 전부 맞는 거예요.
그때부터 저는 형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귀를 쫑긋하고 들었죠.
1963년도에 귀국해 보니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 있더군요.
박정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형님에게 물었더니, 육여사를 포함해서 부부간에 객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대통령이 어떻게 객사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으니
‘누군가가 장난하지 않겠니’ 하더군요. 총 맞아 죽을 수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나서 1968년도에 형님은 죽었죠.
이 말을 머릿속에 담은 나는 1970년대에
고려대 총장을 지내던 김상협 씨와 단둘이 만나 식사할 때마다
‘대통령은 총 맞아 죽는다’고 이야기하고는 했죠.
그때가 유신치하라서 살벌한 시기인데,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를 대낮에 떠들어대니
김상협 씨가 놀라서 ‘한교수 제발 대통령 총 맞아 죽는다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저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고는 했습니다.
저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두들겨 맞기도 해서 박정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틀림없이 총 맞아 죽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 그밖에 다른 예언은 없었읍니까. “박대통령이 죽고 난 후에 정치적 혼란기가 다시 한번 오게 되는데, 이때에도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정치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정부 상태를 거친다는 거였죠.
그 다음에 군사독재가 한번 더 온다는 겁니다.
군사독재 다음에는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인물이 정권을 잡은 다음 금기(金氣)를 지닌 사람들이
한 10년 정도 정권을 잡는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니 금기를 지닌 사람들이란 양김(兩金) 씨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금기 다음 정권은 목기(木氣)와 화기(火氣)를 지닌 사람이 연합한다고 했습니다.
목기와 화기를 가진 연합 팀이 정권을 잡았을 때 비로소 남북이 통일된다는 것이죠.”
― 목기와 화기의 연합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이죠? “저도 그것은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목은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게 어렴풋이 짐작되는데,
화기를 지닌 인물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 대선이 끝나고 나서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그때 총리가 과연 누가 될 것인지를 주의 깊게 관망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이 연합해야 피를 안 흘린다.
그리고 이 시기에 통일된다고 했습니다.
형님은 남북이 통일이 이루어질 때
남쪽이 80%, 북쪽이 20% 정도의 지분을 갖는 형태일 것이라고 했죠.
통일이 되려고 하면 남쪽에 약간 혼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 혼란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느 범주까지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전쟁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입니까.
“전쟁까지 갈 것라고는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 대신 각종 종교·사회 단체 여기 저기서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사회가 혼란스러운
과정은 겪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죠.”
― 목기와 화기를 지닌 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은 어떻게 보았습니까. “형님 지론에 의하면 대통령은 목·화 기운이 되는 것이 국가에 이롭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목·화는 밖으로 분출하는 형이어서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국운이 밖으로 팽창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금·수는 수렴형이어서 안으로 저장하고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므로 내무부 장관이나 중앙정보부장 같은 자리는
금·수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하고,
상공부나 생산하는 분야는 목·화를 많이 가진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금융분야는 토기(土氣)를 많이 가진 사람이 적당하다는 거죠.
금융은 양심적이고 공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토는 중립이어서 공정하죠. 이게 오행에 맞춘 인재 배치법이자 용병술이죠.
국가적인 차원의 인재 관리는 오행을 참고해야 한다는 게 형님 생각이었습니다.”
2002년 대선 예측, 木과 火의 연합 과연 40년전 한동석의 예언대로 목기와 화기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여 2002년 이후의 한국 정권을 운영하고, 이 시기에 진짜 통일이 될 것인가.
이는 지나 보아야 알 일이다. 예언이 100% 맞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예언을 밑그림에 깔고 앞으로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는 일도 흥미진진할것 같다.
한박사에 의하면 한동석은 6·25를 보는 안목도 특이하였다. 음양오행적인 시각에서 6·25의 발발을 해석하였다.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는 강은 한탄강인데,
한탄강 이북이 북한이고 이남이 남한이다.
오행으로 보면 이북지역은 북방수(北方水)에 해당하고, 이남지역은 남방화(南方火)에 해당한다.
이북은 물이고 이남은 불이다. 그런데 소련의 상징이 백곰이다.
백곰은 차가운 얼음물에서 사는 동물이니 소련 역시 물이다.
중국은 상징동물이 용이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어서 중국 역시 물로 본다.
이북도 물인데, 여기에 소련의 물과 중국의 물이 합해지니
홍수가 나서 남쪽으로 넘쳐 내려온 현상이 바로 6·25다.
대전은 들판이라서 그 홍수가 그냥 통과하고, 전주·광주도 역시 마찬가지로 통과하였다.
그러나 대구는 큰 언덕이어서 물이 내려가다 막혔다.
울산·마산은 모두 산이어서 물이 넘어가지 못했다.
부산은 불가마이니 물을 불로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가 6·25의 피해를 덜 본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밖의 예언을 간추려 보면 201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임신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니까 그 전에 될 수 있으면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딴따라’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 또한 그대로 되고 있다.
한동석은 1963년 1월부터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생일, 생시인 6월8일(음력) 인시(寅時)에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 생일, 생시를 넘긴다면 자신이 더 살 수 있을 것이나 아무래도 그것을 넘기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 본인의 이러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하여 계룡산으로 내려가 보기도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예견대로 6월8일 축시에 사망하였다.
2시간 정도만 견디면 인시를 넘길 수 있었으나
자신의 생시를 코앞에 두고 그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임종한 것이다.
가족문제도 그렇다. 생전에 본인이 죽고 난 뒤 온 식구가 거지가 되어 거리에 나앉을 것이라며 대성통곡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과연 본인의 임종후 가세가 기울어 인사동 집을 비롯한 가산을 팔고
가족이 흩어지는 시련을 겪었다(권경인. ‘한동석의 생애에 관한 연구’ 54쪽).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국토에도 변화가 생긴다고 보았다.
한반도 남쪽이 물에 잠기는 반면 서쪽 땅이 2배쯤 늘어난다고 예언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쪽지방이 물이 잠긴다는 말은 댐이 들어선다는 말이었고,
서쪽 땅이 2배 늘어난다는 이야기는
서해안에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는 것이 한박사의 술회다.
한동석은 이처럼 탁월한 한의학자이면서도 동시에 앞일을 내다보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떻게 되는가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한동석의 한의학에 대한 뿌리를 소급해 올라가면 놀랍게도
사상의학의 창시자인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1837~ ?)를 만난다.
한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동석의 외할머니가 원씨(元氏)였는데, 그 외할머니에게 오빠가 있었다. 이 오빠가 이제마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제마의 고향도 함경남도이고 한동석의 집안도 같은 함경남도였던 만큼 서로 왕래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연유로 한동석의 집안에서는 이제마에 관한 일화들이 구전되어 왔다.
그 구전을 보면 이제마는 시간이 나면 아무 풀이나 입으로 씹어 맛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약성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항상 우물우물 풀을 씹고 있다 보니 미각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혹시 독초를 씹었을 때는 며칠 동안 음식을 못 먹고 고생하다
회복되면 다시 새로운 풀을 씹어보곤 하였다는 이야기가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한동석과 이제마 이제마는 비방을 가지고 있었다. 제자였던 한동석 외할머니의 오빠가
“그 비방은 언제나 보여주실 겁니까”하고 물으면
“내가 죽을 무렵에 주겠다”고 답변하고는 하였다.
그 비방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의 오빠는 이제마 선생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잡아놓고 살았다.
임종이 가까이 오면 곧바로 이제마 선생에게 달려가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제마 임종후 도착해 비방을 입수할 수는 있었으나
거기에 씌여진 한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 한자들은 이제마가 새로 창안한 글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독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한가지 이야기가 묘에 관한 내용이다. 이제마는 생전에 자신의 묘자리를 미리 보아놓고,
자신이 죽으면 관을 깊이 파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고 한다.
9자(270㎝) 가량 깊이 파서 관을 묻으라는 당부였다.
왜 그렇게 깊이 묻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이제마는 “말 발굽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였다.
과연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할 때 바로 그 묘의 옆길로
소련군 탱크들이 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이를 목격한 후인들은 “이제마가 과연 명인은 명인”이라는 이야기들을 하고는 하였다. 해방 이후 함흥 일대에서 이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한동석은 이처럼 유년시절부터 이제마에 대한 전설을 들으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제마와 얽힌 또 하나의 인연은 전처의 죽음이다. 한동석은 20대 후반에 함흥에서 장사를 하면서 재혼을 하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부인이 폐병을 앓아 1942년에 사망하였다.
부인이 죽기 전 폐병 치료를 위해 이제마의 이전제자(二傳弟子) 중 하나라고 하는
김홍제라 한의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김홍제가 부인의 폐병을 치료해 주면서
“다음에 다시 재발하면 그때는 손을 쓰지 못한다”는 말을 하였다.
결국 처음에는 치료가 되었으나 나중에 부인의 폐병이
다시 재발하면서 사망하고 말았다.
한동석은 이 일을 겪으면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홍제 밑에서 한의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후일 한동석이 이제마의 저술인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의
주석서를 남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마와 한동석의 한의학적 연결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모두 이북 사람이라는 점이다.
앞장에서 ‘사주첩경’을 쓴 이석영 선생을 이야기할 때도 언급한 부분이지만, 이북 사람들은 이남 사람들에 비해 실용적인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 이후 이 방면의 대가들의 출신지를 보면 이북 출신이 아주 많다.
그 이면에는 이북 사람들이 받았던 지역 차별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 시대에 이북 사람들은 정부 고위직에
올라가기가 어려웠고 정치적으로 차별당했다.
이북 출신인 백범(白凡) 김 구(金 九) 선생이
‘삼남’(三南)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긴 기록에도
이러한 정황이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내가 상놈으로 해주 서촌(西村)에서 태어난 것을 늘 한탄했으나,
이곳에 와서 보니 양반의 낙원은 삼남(三南)이요,
상놈의 낙원은 서북(西北)이로다.
내가 해서(海西) 상놈이 된 것이 큰 행복이다.
만일 삼남의 상놈이 되었다면 얼마나 불행하였을까’라는 소회가 바로 그것이다.
계룡산파 인물과의 교류 이북 출신들은 과거공부를 해보았자 미관말직이나 전전할 뿐, 출세를 못하니 실생활에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풍수·사주·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방면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남에 비해 이북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를 지녔던 성싶다.
그러니 이제마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고,
한동석·이석영과 같은 한의학과 사주의 대가들이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이남보다 이북에서 훨씬 급속하게 퍼진
사회적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나라든 외래종교나 신흥종교는 소외 받는 지역에서 먼저 수용되게 마련이다.
한동석의 사상적 뿌리 가운데 또 하나는 계룡산파다. 그는 사색을 하고 도인을 만나고 싶을 때는 수시로 계룡산으로 내려가고는 하였다.
그에게 계룡산은 영감의 원천이자
정신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휴식처이자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우주변화의 원리’를 집필할 무렵에도
수시로 계룡산에 가서 동학사 근방에 한 두 달씩 여관을 잡아놓고
장기체류하고는 하였다.
그가 계룡산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장소는 계룡산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香積山房)이었다.
향적산방은 충남대 총장을 지낸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선생이
정역(正易)공부를 하기 위해
1950년대 후반에 지어놓은 토굴이자 일종의 아카데미였다.
향적산방 바로 옆에는 19세기 후반 김일부 선생이 공부하던 토굴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사가 배출된다는 국사봉 밑에 자리잡은 향적산방은
좌우로 청룡·백호가 바위 맥으로 내려와 야무지게 감싸고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은 두부처럼 평평한 토체(土體) 안산이다.
토체 안산에서 제왕 나온다는 것 아닌가. 여기는 당대 우리나라에서 주역이나 풍수 또는
사주를 연구하는 마니아들의 아지트였다.
자기가 공부한 바를 서로 주고받고 때로는 밤새워 논쟁하기도 하였고,
국사봉 정상에 올라가 국운 융창을 위해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김일부 선생 이후 근세 계룡산파를 형성하던
일급 멤버들이 득실거리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학비재한 필자를 정역의 광대한 세계로 이끌어준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선생도
이 시절 향적산방에 장기체류하면서 학산 선생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한동석도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계룡산파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골간을 이루는 내용이
지구의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음에 주목하는 정역사상(正易思想)이고,
정역에 대한이해와 수용은 향적산방을 출입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본업이 한의사인 그가 전공을 벗어나 정권교체가 어떤 방식으로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계룡산파의 영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를 종합하면 인체라는 미시세계와 정역이나 주역이 갖는
거시세계 양쪽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의와 주역을 연결해 주는 공통 고리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음양오행이지만,
이를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근취저신(近取諸身) 원취저물(遠取諸物)’ 사상이다.
가깝게는 자신의 몸에서 진리를 구하고, 멀게는 사물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사상이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주역의 사상이다.
따라서 거시적 우주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인체라는 소우주를 연구하면
굳이 멀리 우주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는 논리다.
‘우주변화의 원리’에는 ‘근취저신 원취저물’의 명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근취저신과 원취저물을 연결하는 고리가 음양오행인 셈이다.
이는 곧 ‘하늘의 이치는 땅에 나타난다.
고로 땅을 보면 하늘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동석은 동생인 한박사가 주역 공부의 비결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기(天氣)보는 방법을 배워라. 하늘을 쳐다보면 천기를 보는 거냐?
아니야. 땅을 봐라. 땅에 이렇게 보면 풀이 있고 돌멩이가 있고 이렇게 흔들리지?
지렁이·털벌레·딱정벌레 요거로 천기를 보는 거야.
딱정벌레가 많이 있는 거는 이 지상에 금기가 많이 왔다는 거야.
이제 발이 많은 돈지네가 많이 끓을 때가 있다면 화기가 왔다는 거야.
땅에 지렁이가 많으면 토기가 많다는 것이고. 이렇게 천기를 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이른 봄인데 금기가 왜 이렇게 많으냐”고 대답하였다.(권경인, 28쪽)
‘황제내경’一萬讀한 한동석 딱정벌레는 등껍질이 단단하니 금기로 본다. 지렁이는 땅속에 사니 토기로 본다.
이처럼 지상에 어떤 기운을 많이 받은 생물이 나타나면
그 해에 거기에 해당하는 하늘의 기운이 우세한 것으로 추론하였던 것이다.
천기를 보는 것은 일상사 사물에 대해 세심한 관찰을 요한다.
도사의 자질은 세심한 관찰력이 필수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관찰력 외에
한동석이 전념한 수도(修道)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이다.
방법은 독경(讀經)이었다.
그는 ‘황제내경’(黃帝內經) ‘운기편’(運氣篇)을
일만독(一萬讀) 가까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치 불교 수행자들이 ‘천수경’(千手經)을 수만독(數萬讀)하듯
그도 운기편을 1만번이나 외웠다.
이는 놀라운 집중력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로 소문나 있다. 1960년대 중반 그의 한의원이 있던 인사동 주변 골목에서는
길을 걸으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한동석을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이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앉으나 서나 중얼중얼 운기편을 외웠다.
처음에는 3,000독을 목표로 하였으나, 3,000독을 해도 신통찮다고 여기고 다시 6,000독 9,000독에 이르렀다고 한다.
9,000독에 가니 약간 보이더라고 술회하였다.
마지막 1만독을 채우면서 활연 관통했던 것 같다.
한동석이 필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의경전(所衣經典)은
황제내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책을 보면 이해가 되는데,
황제내경만큼은 쉽게 이해되지 않으니 무식하게 막고 품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사실 무식한 방법이 정공법이다.
무조건 외우는 방법이 막고 품는 방법이다. 변화구나 체인지업 말고 무조건 강속구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꿈에서도 경전을 외울 정도면 도통한다고 한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지사지 귀신통지’(思之思之 鬼神通之)라는 말이다.
‘밤낮으로 생각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활연(豁然)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몽중일여
(夢中一如:꿈에서도 낮에 생각한 마음과 같음)가 바로 이 경지다.
조선 후기의 유가의 도인이었던 이서구(李書九)가 ‘서경’(書經) 서문(序文)을 9,000독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라고 지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황진이 묘를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사람 없으니 이를 슬퍼 하노라”고
절창을 읊었던 임백호(林白湖)가 속리산 정상의 암자에서
‘중용’을 5,000독 하고 나서 한 경지 보았다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한동석이 보여주었던 파워의 진원지는
‘황제내경’ 1만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주 공부에서도 마찬가지 방법이 적용된다. 막고 품어야 한다. 명리학에 관계되는 고전들을 수백번씩 읽다 보면
영대(靈臺)가 열린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술회다.
필자가 명리학에 관한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모르는 대목이 나오면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등명(登明) 서정길(徐正吉·50) 씨다.
등명은 ‘궁통보감’(窮通寶鑑)에 조예가 깊다. 명리학의 고전을 보면 ‘연해자평’ ‘명리정종’ ‘적천수’ ‘궁통보감’ 등을 꼽는데,
이 가운데 ‘궁통보감’은 명리학의 가장 진화된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진화되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도 된다.
컴퓨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면 ‘연해자평’이 386이고,
‘명리정종’은 486, ‘적천수’가 586,
그리고 ‘궁통보감’은 686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궁통보감’의 특징은 사주의 격국을 기존의 이론에 비하여 몇 배로 세밀하게 나누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등명은 10여 년에 걸쳐 ‘궁통보감’을 달달 외우다시피 탐독하였다.
그동안 어느 정도 읽었느냐고 물어보니 지금까지 약 400독을 하였다고 한다.
가지고 다니는 책갈피를 보니 손때가 시커멓게 묻었다.
어떤 때는 꿈에서도 ‘궁통보감’의 내용들이
나타나는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는 고백이다.
100독을 넘어서자 그 어렵던 격국론이 대강 정리되었다고 한다. 그는 1,000독을 목표로 요즘도 시간만 나면 열심히 읽는다.
책장이 너덜너덜하게 될 때까지. 이것을 보면 사주 공부에도 왕도는 없다.
자나깨나 읽고 또 읽는 수밖에 없다. 도사 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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