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트라의 신비
프란츠 뀌몽 지음
이서하님 옮김
이 책은 프란츠 뀌몽(Franz Cumont)의 1903년 저작으로
토마스 J. 맥코맥이 영역한 것(Chcago: Open Court,
1903)을 J. B. 헤어(Hare)가 2003년 sacred-texts.com에
올린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공개된 것으로,
이 파일은 비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미트라교의 기원과 역사를 다루려고 하는 이 책은 이교신앙(異敎信仰)의 몰락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라도 이탈리아에서 동방종교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철학자들의 이론보다 훨씬 더 사람들을 사로잡는 요소인 그 교리로 인해
로마제국과 고대생활 전체가 의지했던
국가신앙이 어떻게 해체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해체한 체계를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파괴했는지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와 성장하고 있던 교회 사이의 싸움의 여러 국면을 추적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접근하고 싶은 이 거대한 주제는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결정적인 혁명의 한 시기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의 목적은 마즈다교(Mazdaeism)의 어떤 한 분파가 어떻게 그리고 왜 로마황제들의 치하에서
로마제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지 못했는지를 힘이 닿는 한 분명하게 보여 주려는 것이다.
희랍인들의 문명은 페르시아인들 속에서는 뿌리를 내린 일이 없었고,
로마인들은 파르티아인들을 성공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역사 전체를 지배하는 중요한 사실은,
이란인들의 세계와 희랍-라틴세계가 영원히 서로 동화되지 않고,
세습된 적대감 못지않게 깊고 본능적인 상호간의 반감에 의해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란인들의 천재성을 활짝 꽃피운 조로아스터교는 각기 다른 세 시기에 서방문명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먼저,파르시교(Parseeism: 조로아스터교-역주)는 유대교의 형성기에 매우 분명한 영향을 끼쳤고,
그 주요 교리 중 일부가 유대의 식민자들에 의해 지중해 유역 전체에 퍼졌고,
결국 정통 카톨릭에 영향을 끼쳤다.
로마인들이 소아시아를 점령했을 때 마즈다교가 유럽사상에 끼친 영향은 훨씬 더 직접적이다.
여기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바빌론에서 이주한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들이 드러나지 않고 살면서,
그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희랍사상가들의 가르침을 결합하여 이 야만인들의 종교들 속에 좀 복잡하긴
하지만 독창적인 종교를 조금씩 확립해 갔다.
우리 시대(서기[西紀]를 말함-역주)의 초기에 우리는 이 종교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급속하고도 동시에 다뉴브강과 라인강의 골짜기로,
심지어는 이탈리아 중심부로 전진하는 것을 본다.
서방국가들은 그들의 고대 민족신앙보다 마즈다교 신앙이 우월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대중은 이 이국(異國)의 신(神)의 제단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 정복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만났을 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제지를 당했다.
이 두 적(敵)은 경탄하며 서로를 알게 되었으나,
자기들을 서로 결합하고 있는 기원과 유사성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제의가 성스럽다는 것을 조롱하려고 했다고 서로의 신을 거짓된 신이라고 수없이 비난했다.
두 종교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으니,
그것은 사납고도 무자비한 결투였다.
이기는 자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결투의 변화무쌍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 준 이가 없으므로,
오르무즈드(Ormazd)와 삼위일체(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말함-역주) 사이에 선택해야 했던
대중의 영혼을 뒤흔든 이 잊어버린 드라마는 오직 우리의 상상력으로 그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만을 알 뿐이다.
미트라교는 분명히 패배했어야 하기 때문에 패배했다.
미트라교의 패배는 순전히 복음적 윤리가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었고,
사도들의 가르침이 신비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멸망한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성가신 유산이 방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제의와 신학이 너무나 아시아적인 색채가 강해서 라틴적인 사람들이 반감 없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같은 시기에 페르시아에서 동일한 두 맞수가 벌인 싸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전혀 이기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성공하지 못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역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몰락할 심각한 위험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패배했다고 해서 그 세력이 궁극적으로 다 뿌리 뽑힌 것은 아니었다.
미트라교는 자신처럼 유프라테스강변에서 나와 완전히 다른 전술로
다시 전투를 시작한 새로운 신앙(그리스도교-역주)을 받아들이도록 서방사람들을 준비시켰다.
마니교는 미트라교의 계승자요 후계자로 등장했다.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의 서방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공격보다 더 살벌한 것이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강력한 저항으로 격퇴당할 운명을 지닌 공격이었다.
나는 위에서 한 간략한 묘사가 미트라교의 역사가 지닌 엄청난 중요성을 알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고대 마즈다교라는 둥치에서 갈라져 나온 한 갈래로,
여러 면에서 이란인들의 고대신앙의 특징을 지녔으며,
따라서 우리는 비교를 통해, 그토록 많은 논쟁이 있던 「아베스타」(Avesta)의
개혁범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미트라교가 영감을 준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옥의 권능들과 세상의 종말에 관한 개념들과 같은 교회의 일부 교리에 정확한
형태를 부여하는 데는 최소한 미트라교가 기여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미트라교의 등장과 몰락을 보면,
우리는 위대한 두 종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할 수다.
미트라교가 한참 세력을 떨칠 때는 로마사회와 정부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무슬림이 침략하던 시기에도 유럽은 아시아화라는 점에서 서기 3세기보다 더 큰
위험에 빠져 있었을 것이며,
이 시기에 황제체제가 칼리프체제로 변형되려고 하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사람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이 호스로에스(Chosroes)의 궁정과 비슷하다는 것을 자주 강조해 왔다.
서방의 신격화된 군주들이 군주적 절대주의를 키우려고 하는 데 근거가 된 개념들을
퍼뜨린 것은 태양숭배신앙,
특히 마즈다교의 이론이었다.
이 페르시아 종교가 모든 계층의 대중에게 급속히 전파되자,
놀랍게도 그것은 황제들의 정치적 야망에 기여했다.
이란과 셈족의 개념들이 갑자기 범람하여 서방을 휩쓸면서,
희랍과 로마의 천재성이 애써 확립한 모든 것을 침수시키려고 위협했다.
홍수가 가라앉자 사람들의 마음에 동방신앙의 퇴적물을 깊이 남겼으며,
그것은 결코 지워진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다루려는 주제가 철저하고 깊이 연구할 만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해 충분한 말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여러 면에서 내가 처음에 하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가기는 했지만,
연구를 위해 수년 간 노력하고 여행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해 온 작업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한 편으로, 우리는 「아베스타」와 기타 파르시 경전들이 서방의 마즈다교도들의 개념을
어느 정도로 나타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이 책들은 조금씩 모은,
그림이 있는 수많은 기념물들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자료이다.
금석문들은 그 자체로 확실한 안내자이지만,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 빈약하다.
우리의 상황은 히브리어 성서와 로마와 고트족의 현관문에 조각되어 있는 파편 외에는
다른 아무 자료도 없이 중세교회사를 써야 할 때의 상황과 다소 비슷하다.
이런 이유로,
미트라교의 상징에 관한 우리의 설명은 자주 다소간의 가능성이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경우에 이 상형문자를 아주 정확하게 번역한 체 하지는 않는다.
내 견해는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미트라교의 토굴을 장식한 성스런 상징들의 의미를 분명히 했기를 바란다.
그 난해한 상징의 세부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자주 ‘무지한 자들의 방법’(ars nesciendi)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서는 내 방대한 작품인 「미트라의 신비에 관한 그림이 있는 기념물들과 문서들」
(Textes et monuments figurés relatifs aux mystères de Mithra (Brussels: H. Lamertin)
(이하에서는 이 책을 T. et M.으로 약칭함-역주)의 제1권 끝에 인쇄된 “결론”을 다시 싣는다.
거기서 그것들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 주(註)와 참고도서를 빼면,
그것들은 우리가 미트라교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요약하고 조정하는 데 국한되어 있다.
그것들은 실제로 이 주제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재구성하고 있는 체계의 다양한 모든 부분을 확실하게 하는 것은 지금까지는 불가능했다.
전승이 불확실하고 연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 설명의 근거가 되는 토대가 확실한 것인지 확인하고픈 사람들은
나의 방대한 책의 “서문”에 있는 비판적인 논의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그 책의 목적은 글로 쓰인 자료와, 특히 거기 묘사되어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념물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준비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나는 자주 세계 도처의 학식 있는 사람들을 맺어 주고 있는,
공통의 관심과 정서를 지닌 공동체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가끔 그들에게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헌신적인 친구들(지금 그 중 일부는 없다)은 호의를 가지고 종종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라고 재촉했고,
내가 감히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즉시로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내 방대한 책에서 그들 각각에게 감사를 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나를 도와 준 분들에게 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여기서 그들의 이름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나열하여 진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 준 노고를 기억하며,
이제는 내 작업의 마지막에 이르렀으므로,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이 작업을 완성하도록 나를 도와 준 모든 이들을 생각한다.
이 책의 초판은 1900년에 나왔고, 재판은 그 후 오래지 않아서 나왔다.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몇 개의 주(註)를 추가했으며, 최근의 논문을 몇 편 참고했고, 수많은 삽화를 추가했다.
가장 중요한 첨가는 미트라 조각에 대한 장(章)인데,
로마예술의 동방기원에 대한 광범한 연구를 살펴볼 때 그것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미트라의 신비를 아주 친절하게 검토하고 관대하게도 우리가 그 자료를 객관적이고도
완전하게 해석하여 이 사라진 신앙을 재구성했다고 인정해 준 많은 비평가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매우 애매한 문제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대담한 우리의 결론은 어떤 점에서는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개정판에서 이러한 의문을 중요한 것으로 다루었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우리 견해를 바꾸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비평가들의 논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토론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너무도 분량이 작은 이 책에서는 우리의 결론을 실증할 지면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정하는 바로는,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고 설명하고 수정하는 주(註)가 없이 책을 출판하는 것은 미묘한 문제이지만,
우리는 독자가 이 불가피한 생략을 너무 예민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1902년 5월 1일 겐트에서 프란츠 뀌몽 차 례 프랑스어판
서문.........................................................................................................3
제1장 미트라교의 기원.................................................................................10
제2장 미트라교가 로마제국에 전파되다.
............................................................28
제3장 미트라와 로마제국의 권력.....................................................................54
제4장 미트라교 신비의 교리...........................................................................64
제5장 미트라교의 제의,
성직자 계급과 신도들...............................................88
제6장 미트라교와 로마제국의 종교들..............................................................100
제7장 미트라교 예술...................................................................................118
색인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아퀼레이아에서 발견한 부조
제1장 미트라교의 기원
페르시아의 선조들이 아직 힌두인들의 선조들과 결합되어 있던 저 알 수 없는 시대에,
그들은 이미 미트라를 숭배하고 있었다.
「베다」의 찬가에서는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고 「아베스타」의 찬가도 그러하며,
이 책들이 표현하고 있는 신학체계가 다르지만 베다의 미트라와 이란의 미트라는
많은 점에서 유사해서 그것이 공동의 기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두 종교는 모두 미트라에게서 빛의 신을 보았고,
하늘과 함께 그의 이름을 불렀는데,
그는 언젠가는 바루나(Varuna)라는 이름을,
다른 경우에는 아후라(Ahura)라는 이름을 지닌 적도 있다.
윤리적인 면에서,
그는 진리의 수호자이며 거짓과 오류의 적대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도의 성스런 시에서는 그에 대해 애매한 기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단편만이(그것도 부분적으로는 지워져 있지만) 특별히 그에게 바쳐져 있을 뿐이다.
그는 주로 부수적으로 언급되는데,
이것이 그의 고대의 영광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의 모습은 젠드어 문서(조로아스터교 경전-역주)에서처럼 산스크리트어 문서
(힌두교 경전-역주)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윤곽이 희미하다고 해서 그의 최초의 정체성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다.
최근의 이론에 의하면,
유럽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 신은 고대 아리안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아베스타」의 개념에 의하면 창조주를 에워싸고 있는 미트라-아후라와
암샤스판드(Amshaspand)들과 마찬가지로,
「베다」가 찬양하고 있는 미트라-바루나와 기타 다섯 명의 아디탸(Aditya)들은
이 이론에서는 단지 태양,달,행성들일 뿐인데,
인도-이란인들은 그들에 대한 숭배를 “별이 가득 찬 하늘에 대한 지식이
그들보다 뛰어난 이웃 민족”에게서 배웠다.
그들은 다름 아닌 바빌로니아의 아카디아인이나 셈족 거주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실제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선사시대에 일어났을 것이 분명하고,
우리는 이 원시시대의 애매함을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은 채,
이란부족들이 세상의 권력을 처음 장악했을 때부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까지 쉬지 않고
미트라를 숭배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베스타」에서 미트라는 천상의 빛의 수호신이다.
그는 해가 뜨기 전에 산들의 바위가 많은 꼭대기에 나타나며,
낮에는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고 넓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밤이 되면 여전히 반짝이는 밝음으로 지면을 비추어,
“언제나 깨어 있고,
언제나 살핀다.
”
그는 태양도 달도 별도 아니지만,
“백 개의 귀와 백 개의 눈”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살핀다.
미트라는 모든 것을 듣고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을 안다.
아무도 그를 속일 수 없다.
이러한 의미가 자연적으로 변화하여,
그는 윤리에서는 진리와 완전함의 신이 되었다.
그는 계약의 성취를 보증하는 엄숙한 맹세 때 부르는 신이었으며,
위증자는 처벌을 받았다.
어둠을 흩어버리는 빛은 지상에 행복과 생명을 회복하며,
빛과 함께 있는 열은 자연을 비옥하게 한다.
미트라는 “넓은 목초지의 주인”이며,
그 목초지들을 비옥하게 하는 분이다.
“그는 재산을 불게 하시며, 풍요를 주시며, 가축 떼를 주시며,
자손과 생명을 주신다.”
그는 하늘의 물들을 흩어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시며,
그를 예배하는 자들에게 육체의 건강과 부요함과 재능 있는 후손을 준다.
그는 물질의 축복뿐 아니라 영적인 유익도 베푸는 분이다.
그는 후손에게 양심의 평화와 지혜와 영예를 주고,
그를 숭배하는 모든 자들 가운데 조화가 실현되도록 하는 자애로운 수호신이다.
어둠의 거처에 거하는 악마(deva)들은 지상에 황폐함과 온갖 종류의 악과 불순함을 퍼뜨린다.
미트라는 그들의 음모에 대항하여 “잠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마즈다의 피조물을 보호하신다.
” 그는 악의 영들과 쉬지 않고 싸우며,
그들을 섬기는 사악한자들 또한 그의 분노의 끔찍한 징벌을 감지한다.
그는 자신의 천상의 요새에서 그의 적들을 살펴보며,
완전히 갑옷으로 무장하고 그들 위로 덮쳐내려 그들을 흩어버리고 죽인다.
그는 사악한 자들의 집을 파괴하여 황폐하게 하며,
그에게 적대하는 부족들과 민족들을 뿌리 뽑는다.
한 편, 그는 전투적인 원정(遠征)에서 신실한 자들의 강력한 동맹자이다.
그들의 적의 공격은 “과녁을 벗어나나니,
미트라가 몹시 화가 나서 그것들을 받기 때문이다.
” 그는 “선(善)에 합당한 가르침을 지니고 그를 예배하고 그에게 제주(祭酒)를 바치는”
자들에게 승리를 약속한다.
만군(萬軍)의 신인 그의 이러한 특성은 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미트라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는데,
물론 이것은 이란 부족이 아직 서로 전쟁을 하던 혼돈의 시절에 더 강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낮과 밤의 싸움에 대한 고대의 개념이 발전한 것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아리안족의 신에 대한 「아베스타」의 묘사는,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베다」의 묘사와 비슷한데,
단지 「베다」에서 좀 덜 두드러질 뿐이다.
따라서 이는 마즈다교가 미트라에 관한 최초의 주요한 내용을 바꾸지 않고 남겨 두었다는 말이 된다.
비록 「아베스타」의 찬가들이 아직도 고대의 참된 빛의 신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숭배를 받아들인 조로아스터교는 이상하게도 그의 중요성을 축소했다.
그를 「아베스타」의 하늘에 받아들이는 대가(代價)로,
그는 그 법에 따라야 했다.
신학에서는 천상의 위계의 정점에 아후라-마즈다를 두었고,
그 후로는 그의 맞수로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미트라는 최고신이 우주를 다스리는 것을 돕는 여섯 명의
암샤스판드(Amshaspand) 중 하나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는 다수의 고대 자연신들과 함께 마즈다가 창조한 하위의 수호신(yazata)들의 무리로 격하되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예배하던 신격화된 추상적 개념의 일부와 결합되었다.
전사들의 수호자로서 그는 그의 동료인 베레트라그나(Verethragna),
즉 승리를 위해 영접했고,
진리의 방어자로서 그는 경건한 스라오샤(Sraosha),
즉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과,
라쉬누(Rashnu),즉 정의와,아르쉬타트(Arshtât),즉 정직과 결합되었다.
번영의 수호신으로서,사람들은 아쉬-바뉴히(Ashi-Vauhi),
즉 부요(富饒)와 파렌디(Pâredî),즉 풍요와 함께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라오샤와 라쉬누와 함께,
그는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는 악마들에 대항하여 그 영혼을 보호하며,
영혼은 그들의 인도를 받아 낙원으로 높이 올라간다.
이 이란의 신앙은 미트라에 의한 구원사상을 낳았는데,
우리는 이것이 서방에서 발전했음을 본다.
동시에 그에 대한 예배는 마즈다 제의와 일치하는 엄격한 의식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에게는 “크고 작은 가축과 날아다니는 새로 희생제사를 바쳤다.
이 희생제사에서는 하오마(Haoma)즙(汁)을 먼저 헌주(獻酒)하거나 같이 바쳤으며,
제의에서 하는 기도를 암송했는데,
언제나 성스런 가지(baresman)를 한 다발 손에 들었다.
그러나 제단에 다가가기 전에 신자는 먼저 목욕과 태형(笞刑)을 반복하여 자신을 정화해야 했다.
이 엄격한 규정을 보면,
세례의식과,
입문식 전에 로마의 신참자들에게 부과된 육체적 시험을 연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신학체계 속에 받아들여졌으며,
그에게는 신들의 위계에서 편리한 지위가 부여되었다.
그는 비난할 수 없는 정통성을 지닌 동료들과 결합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다른 수호신들과 같은 지위에 두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인격은 그에게 부여된 엄격한 제약에 쉽게 굽히지 않았으며,
성스런 문서들에는 더욱 고대의 개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개념에 의하면,
그는 이란의 신들 가운데 훨씬 더 높은 지위를 점했다.
사람들은 그를 몇 번 아후라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신이 한 쌍을 이루는데,
하늘의 빛과 하늘 자체는 본성상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아후라가 만유를 창조하듯이 미트라를 창조했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를 자신만큼 위대하고 값진 존재로 만들었다고도 말해야 한다.
미트라는 진실로 한 명의 야자타(yazata: 신-역주)이지만,
그는 또한 야자타들 중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영광스런 야자타이다.
“아후라-마즈다께서는 이 모든 움직이는 세계를 유지하고 돌보기 위해 그를 세우셨다.
” 지고하신 존재가 악마들을 파괴하고 악의 영인 아흐리만(Ahriman)까지도 떨게 만든 것은
이 영원히 승리하는 전사(戰士)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이 구절을 플루타르크가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설명하는 유명한 구절과 비교해 보라.
오르무즈드는 “태양이 지구에서 먼 것처럼 태양보다 훨씬 위에 있는” 영원한 빛의 영역에 거한다.
아흐리만은 어둠의 영역을 지배하며 미트라는 그들 사이의 중간 지역을 점하고 있다.
「분다히쉬」(Bundahish)의 서두에서는,
공기(Vayu)가 오르무즈드와 아흐리만 사이에 있다는 것 외에는 아주 비슷한 이론을 설명한다.
다른 점은 하나의 용어뿐인데,
이란적 개념에 의하면,
공기는 빛과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그것은 빛을 지탱하고 있다고 본다.
결국,
최고의 신은 별들보다도 높은 최고천(最高天)에 정좌해 계시며,
거기에는 영원한 평온이 있다.
그 분의 아래에는 그의 사자(使者)이자 천군(天軍)의 우두머리인 활동적인 신이
어둠의 영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어둠의 영은 지옥의 내부에서 지표로 자신의 데바(deva: 악마-역주)들을 보낸다.
그것은 아케메네스 왕조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는
조로아스터교의 개념보다 훨씬 단순한 개념이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종교에서 미트라의 역할은 수많은 증거로 확인할 수 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비문들에서는 그만이 여신 아나히타(Anâhita)와 함께
아후라-마즈다와 나란히 거명되고 있다.
“위대한 왕들”은 분명히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를 자신들의 특별한 보호자로 여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 전투를 하기 전날 밤에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은 분명히 그를 군주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신으로 여겼다.
그들은 저 신비한 빛을 그들 위에 내려 보내는 이가 바로 그라고 생각했는데,
마즈다 신앙에 의하면 그 빛은 왕들의 권위를 신성하게 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성공을 보장한다.
귀족들은 군주의 모범을 따랐다.
신의 이름이 들어 있는 수많은 이름들에 미트라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 고대부터 그들의 가문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이 신에 대한 숭배가 일반적인 것이었다는 증거이다.
미트라는 공식적인 제의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다.
역(曆)에서는 일곱 번째 달[月]을 그에게 바쳤고,
또한 분명히 매월 16일도 그에게 바쳤다.
그를 기리가 크테시아스를 믿는다면,
축일에는 왕이 미트라에 대한 경의로 풍부한 제주(祭酒)에 바지고 신성한 춤을 출 수 있었다.
분명히 이 축제는 엄숙한 희생제요 위엄 있는 의식이었다.
미트라카나(Mithrakana)는 서아시아 전체에서 유명했는데,
현대에는 이슬람 페르시아에서 겨울이 시작될 때 미트라간(Mithragân)이라는 형태로 봉헌하도록 되어 있다.
미트라의 명성은 에게해 연안까지 퍼졌다.
그는 고대 그리이스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일한 이란의 신이었으며,
이 사실만으로도 주변의 대제국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깊이 신봉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군주와,그 군주가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도록 돕는 모든 귀족계급이 신봉하는 종교가
제국의 몇몇 영지에 국한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오쿠스가 수사와 엑바타나와 페르세폴리스뿐 아니라
다른 여러 수도들인 바빌론,
다마스쿠스,사르디스 등에 여신 아나히타의 신상을 세우도록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바빌론에는 계절에 따른 수도 등 수도가 여럿 있었다-역주). 특히 바빌론은 군주들의
겨울 거주지로 마기(Magi)라고 하는 수많은 공식적 제사장 집단의 거처였는데,
그들은 토착 제사장들보다 더 권위 있는 지위에 있었다.
제국의 규정이 이 공식 제사장 집단에게 특권을 보장해 주었지만,
그들은 자기들 옆에서 번성하던 강력한 성직자계급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갈대아인들의 박식하고 세련된 신학은 그렇게 초기 마즈다 신앙에 겹쳐졌다.
초기 마즈다 신앙은 잘 정리된 일정한 교리체계라기보다 그냥 전승(傳承)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두 종교의 전설은 비슷하고 그 신들도 일치하며,
오래 지속된 과학적 관찰의 거대한 열매인 셈족의 성좌숭배는 이란인들의 자연신학과 혼합되었다.
아후라-마즈다는 하늘들을 지배한 벨(Bel)과 혼동되었고,
아나히타는 금성(金星)을 다스리는 이슈타르(Ishtar)와 비슷했으며,
미트라는 태양인 샤마쉬(Shamash: 바빌론어로 ‘태양’이라는 뜻-역주)가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미트라가 그랬듯이,
바빌론에서는 샤마쉬가 정의의 신이었다.
샤마쉬도 미트라처럼 동쪽에서 산들의 꼭대기에 나타나 빛나는 전차를 타고
하늘들을 가로질러 날마다 일정한 행로를 간다.
끝으로,샤마쉬도 미트라처럼 전사들의 팔에 승리를 가져다주며 왕들의 보호자이다.
페르시아인들의 신앙은 셈족의 이론에 의해 아주 심하게 변형되어서,
몇 세기 후에 로마에서는 종종 미트라의 원래의 고향이 유프라테스 강변이라고 했다.
프톨레마이우스에 의하면,
이 강력한 태양신은 인도에서 앗시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에서 숭배를 받았다.
그러나 바빌론은 마즈다교의 전파에서 겨우 일보를 내디딘 것이었을 뿐이다.
아주 일찍이 마즈다교 제사장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지나 소아시아의 심장부로 파고 들어갔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첫 번째 왕의 치하에서,
그들은 아르메니아와 캅파도키아의 대중 속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메니아에서는 토착종교가 점점 마즈다교에 압도당했고,
캅파도키아에서는 유명한 지리학자 스트라보의 시대까지도 여러 곳에서 그들의 제단에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마즈다교는 불을 숭배하기 때문에 제단에 불이 타오른다는 것은 그 종교가 살아 있다는 뜻임-역주).
그들은 아주 옛날에 먼 폰투스와 갈라티아와 프리기아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리디아에서도 안토니우스의 치세 기간에 그들의 후손들은 키루스가 지었다고 하는 성전에서
여전히 그들의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적어도 캅파도키아에 있던 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교가 승리한 후에도
살아남아서 서기 5세기까지도 존속하여,
그들의 예절,관습,예배법을 세대를 거듭하며 충실히 전했다.
언뜻 보면,
그토록 널리 퍼져 발상지인 나라에서 잘려나간 이 종교적 식민지들에게 다리우스
제국의 몰락이 필연적으로 치명적이었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으니,
마즈다교 제사장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인 디아도키(Diadochi)에게서 대왕과
그 총독들 치하에서 누렸던 것에 못지않은 강력한 보호를 받았다.
알렉산더제국이 분할된 후(기원전 323년),
후계자들은 폰투스,캅파도키아,아르메니아,콤마게네에 왕조를 세웠는데,
당시의 어용족보학자들은 그 왕조들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주장했다.
이 왕실들이 이란혈통에 속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의 가짜 후손들은 가짜 조상의 신들을 예배하는 의무를 져야 했다.
페르가몬과 안티오크의 희랍인 왕들과는 반대로,
그들은 종교와 정치에서 고대의 전통을 대표했다.
이 왕들과 그들의 측근인 고관들은 고대 아시아의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데
일종의 귀족적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역에 있는 다른 종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즈다교 신들의 신전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마제스(Oromazes,아후라-마즈다),
오마노스(Omanos,보후마노[Vohumano]),아르타그네스(Artagnes,
베레트라그나[Verethraghna]),아나이티스(Anaïtis,아나히타)와 여러 신들을 예배했다.
그러나 미트라는 그들이 특히 사랑하는 신이었다.
이 나라의 군주들은 그를 다소 개인적으로 숭배하기도 했는데,
이는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라고 하는 이름을 그들 가문 어디에서나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미트라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 다리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명히 그들에게도 군주에게 승리를 주는 신으로 남아 있었다.
그에 대한 신앙은 군주들의 합법적인 권리를 나타내고 지속적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이러한 존경은 전설적인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신앙이 왕좌를 지켜 주는 보루이며 성공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이 개념은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 1세인 에피파네스(기원전 69-34)가 타우루스 산맥의 한 지맥(支脈)에 세운
거대한 무덤에 새겨진 으리으리한 비석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유프라테스강의 골짜기가 멀리 보인다(그림1).
안티오쿠스 왕과 미트라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 1세가 기원전 69-31년에 타우루스 산맥의 지맥인
넴로드 다그에 세운 거대한 신전의 부조. T. et M.,p. 188)
그러나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 출신인 어머니와,
아마도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우스를 아버지로 해서 후손이 된 콤마네게의 이 왕은
자신의 이중적 기원에 대한 기억을 융합하여,
페르시아와 희랍의 신들과 제의를 융합했다.
이는 그의 왕조에서 안티오쿠스라는 이름과 미트리다테스라는 이름이 번갈아 나타는 데서도 볼 수 있다.
이웃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란의 군주들과 제사장들은 커가는 희랍문명의 세력에 점점 종속되어 갔다.
아케메네스 왕조 아래에서 폰투스 에우키누스와 타우루스 산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중앙권력의 관용으로 자기들의 지역종교와 관습과 언어를 따르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으로 야기된 큰 혼란 속에서 모든 정치적 종교적 장벽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질적인 종족들이 갑자기 서로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 서아시아는 로마제국에서 좀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혼합주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여기서는 동방의 모든 신학과 희랍의 모든 철학을 접한 결과 가장 놀라운 종합이 나타났으며,
서로 다른 신앙 사이에 경쟁이 심히 활발했다.
아르메니아에서 프리기아와 리디아로 간 마즈다교 제사장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당시 분명히
그들의 전통적인 거주지를 떠나 활발한 전도활동에 헌신했으며,
같은 시기의 유대인들처럼 자기들 주변에 수많은 개종자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후에 그리스도인 황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을 때,
그들은 이전의 배타적 입장으로 돌아가,
더욱 더 접근할 수 없는 엄격주의로 환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트라교는 마케도니아의 정복으로 야기된 도덕적 종교적 동요가 일어난 시기에 거의
결정적인 형태를 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미트라교는 로마제국 전역에 전파되었을 때 이미 완전히 확립되어 있었다.
그 교리와 제의적 전통은 그것이 전파되던 초기부터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즈다교가 이탈리아에서 다른 종교와 다른 특징을 갖게 된 시기와
그 나라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렉산드리아 시대에 동방을 요동케 한 종교운동에 대해 알지 못하고,
기원전 세 세기 동안 이란인들의 종파사(宗派史)에 대해 말해 주는 직접적인 자료가 전혀 없다는 것은
파르시교의 발전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 큰 장애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소아시아의 마즈다교를 변형시키기 위해 결합한 주요한 요소들을 해명하고,
다른 여러 지역에서 여러 가지 영향력이 어떻게 그 종교의 원래의 성격을 다양하게
바꾸었는지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아르메니아에서 마즈다교는 그 나라의 민족종교와 또 시리아에서 수입된 셈족의 요소와 결합했다.
미트라는 이 삼중의 영향에서 나온 혼합신학에서 주요한 신들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서방에서처럼 어떤 사람들은 미트라를 불의 수호신이라고 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태양과 동일시했으며,
그의 이름에 대하여 환상적인 전설이 생겨났다.
그는 아후라-마즈다와 그의 어머니의 근친상간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또 남녀동체(男女同體,a common mortal)에게서 나왔다고도 한다.
우리는 이 신화와 기타 특이한 신화에 머무는 것은 삼갈 것이다.
그 특징은 이 페르시아 신을 믿는 서방의 신자들이 받아들인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종교를 구성하고 있는 전혀 이질적인 교리들의 특별한 혼합은
부분적으로 기원이 같다는 것 말고는 미트라교와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 같다.
소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마즈다교가 겪은 변화가 아르메니아에서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토착종교들과 이란에 기원을 둔 종교(그 신자들은 그 기원을 기억하는 것을 기뻐했다)
사이의 대립이 끊임없이 감지되었다.
불의 숭배자들이 수호자들이었던 그 순수한 교리는 쉽게 퀴빌레(Cybele)의 연인(戀人)
(아티스[Attis]를 말함. 주16 참조-역주)을 기념하여 벌이는 주연(酒宴)과는 쉽게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이주한 마즈다교 제사장들이 토착부족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살았던 수 세기 동안,
두 종족의 개념은 어느 정도 혼합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폰투스에서 미트라는 반도 전체에서 숭배했던 달의 신 멘(Men)처럼 말을 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지역들에서, 미트라는 찢어진 넓은 바지(anaxyrides)를 입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를 보면 사지가 잘린 아티스(Attis)가 생각난다.
리디아에서는 미트라-아나히타는 사바치우스-아나이티스(Sabazius-Anaïtis)가 되었다.
다른 토착신들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야자타(yazata)와 동일시되었다.
마치 이 미개한 나라들의 제사장들이 그들의 유명한 신들을 군주들과 귀족들이 예배하는
신들의 동료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파르시교에서 끌어내거나 그것에 부여한 신들을 정확하게 확정짓기에는
우리가 이 나라들의 종교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이 서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지만,
그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피상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서방에서 미트라 제의와 위대하신 어머니의 제의 사이에 곧 일어날
긴밀한 결합을 준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림 2. 폰투스의 도시 트라페제우스(트레비존드)의 제국주화
말등에 타고 있는 신을 표현했는데,
멘과 미트라를 모두 닮았으며,
폰투스에서는 두 신이 동일시되었음을 보여 준다.
a. 청동주화: (앞면)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흉상으로 군복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있다.
(뒷면) 멘과 미트라의 혼합으로 동양식 옷을 입고 프리기아 모자를 썼으며,
말을 타고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앞에는 불타는 제단이 있다.
양쪽에는 미트라의 특징인 횃불이 있는데,
하나는 위를 향해 들고 있고 하나는 반대로 되어 있다.
오른쪽에는 나무가 있는데,
그 가지가 말을 탄 사람 위로 뻗쳐 있다.
앞에는 갈가마귀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서기 218년).
b. 비슷한 동전.
c. (앞면) 알렉산더 세베루스. (뒷면) 말을 타고 오른쪽으로
나아가는 멘-미트라. 앞에 불이 타오르는 제단이 있고,
뒤에는 나무가 있는데 갈가마귀가 앉아 있다.
d. 비슷한 동전. 앞면에 고르디아누스 3세의 흉상이 있다(T. et M.,p. 190)
그림 3. 박트리아 동전
서기 80년에서 120년까지 카불과 인도북서쪽을 다스렸던 스키타이 왕
카네르케스와 호오에르케스의 주화에는 미트라의 형상이 페르시아,
그리이스,인도의 다른 신들의 형상과 함께 있다.
이 주화들이 서방에 나타났을 때 그 신비들과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미트라 형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로마세계의 영역 밖에서
발견한 유일한 것이어서 관심을 끌 만하다.
a. 앞면: 카네르케스 왕의 형상. (뒷면) 미트라의 형상.
b. 앞면에는 호오에르케스 왕의 흉상이 있고,
뒷면에는 여신인 미트라의 형상이 있다.
c. 호오에르케스 왕의 흉상.
뒷면에는 달의 신이자 태양신(미트라)이 있다.
d. 호오에르케스의 흉상. 뒷면에는 미트라만 있다.
f,
g. 비슷한 주화(T. et. M.,p. 186)
알렉산더의 원정(기원전 334-323)의 결과로,
희랍문명이 서아시아 전역으로 퍼졌을 때,
그것은 멀리 동쪽으로 박트리아까지 마즈다교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용어를 써도 된다면,
이란사상(Iranism)은 결코 헬레니즘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란의 고유사상은 정치적 독립뿐 아니라 도덕적 자율을 회복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쉽게 동화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페르시아의 전통은 동화에 강력히 저항했다는 것은 희랍과
오리엔트의 관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마즈다교 제사장들은 서방문화의 위대한 중심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으므로,
서방문화의 빛에 더욱 더 생생하게 비춤을 받았다.
그들은 정복자인 이방인들의 종교에 흡수되지 않고 자기들의 종교를 그것과 결합시켰다.
그들의 신앙을 희랍적 개념과 조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일체화를 이루는 고대의 방법에 의지했다.
그들은 마즈다교의 하늘에 올림푸스와 같은 거류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최고신인 아후라-마즈다는 제우스와 혼동되었고,
승리의 영웅 베레트라그나는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다.
황소를 제물로 받는 아나히타는 아르테미스 타우로폴로스(Artemis Tauropolos)가 되었고,
그러한 동일시는 그녀의 신전에 오레스테스(Orestes)의 설화를 연결하는 데로 나아갔다.
바빌론에서 이미 샤마쉬의 동료로 여겨진 미트라는 자연스레 헬리오스(Helios: 희랍어로 ‘태양’의 뜻이며,
희랍신화에서는 태양신이다-역주)와 결합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그의 페르시아 이름은 신비들(Mysteries)에서 예배한 다른 신들의 경우처럼 제의(祭儀)에서
번역어로 대치되지 않았다.
아무 관계도 없는 여러 호칭들 사이에 이렇게 그럴 듯하게 같은 의미를 정하는 것은
신화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방이 상상력을 통해 애매하게 인격화한 것에 이제는 정확한 형태를 부여했다는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희랍 예술가들은 희랍신들에게 그 형태를 입혔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형상들이 앗시리아 우상들을 모방한 것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기괴하고 조잡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즈다교의 영웅들에게 희랍적인 이상(理想)의 모든 매력을 부여하면서,
그들의 특성에 대한 개념이 필연적으로 변화되었으며,
그들의 이국적인 모습은 없어지고 서방인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바뀌었다.
로마세계에서 이 외국종교가 성공하기 위한 필수조건 중 하나는 기원전 2세기경 페르가몬의
어느 학파의 조각가가 애처로운 일단(一團)의 미트라 타우록토노스
(Mithra Tauroctonos: 희랍어로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라는 뜻-역주)를 만들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 후 거기 동굴신전(spelaea) 뒤편에 예배처소를 남겨 두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 되었다.
그림 4. 전형적인 미트라의 모습
(흰 대리석에 새겨진 유명한 보르게시 부조로 지금은 빠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으나
원래는 카피톨[로마에 있는 주피터의 신전-역주]의 미트라이움[mithraeum]에서 가져온 것이다)
미트라는 동굴에서 황소를 희생제물로 잡고 있다.
미트라의 부조의 특징이 여기 모두 나타나 있다.
즉,곧은 물건을 지닌 젊은이들,
거꾸로 된 횃불,뱀,개,갈가마귀,태양신 헬리오스,달의 여신 셀레네가 그것이다.
프리기아 모자로 인해 얼굴이 알렉산더와 닮았고,
황소를 바치는 고전적인 희랍의 니케(Nike: 희랍의 승리의 여신-역주) 집단의 주제를 모방했는데-이는
모두 디아도키 시대의 특징이다-이런 유형의 모든 작품의 원형은
페르가몬의 한 예술가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T. et M.,p. 194).
그림 5.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예술적인 유형
(부조. 전에는 도모 안드레아이 킨키나이[domo Andreae Cinguinae]에 있었으나,
지금은 성 뻬쩨르부르그에 있다.T. et. M.,p. 229)
그림 6.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예술적인 유형(2세기)(흰 대리석에 새긴 부조. 지금은 바티칸에 있다.
T. et M.,p. 210)
그림 7.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초기의 예술적 유형
(로마에 있던 흰 대리석의 부조. 지금은 보스톤의 파인아트 박물관[Museum of Fine Arts]에 있다)
그러나 이 조야한 신비들이 희랍의 학파에서 형성된 정신에게 끼칠 수도 있는 불쾌한 특징들을
완화시키기 위해 예술이 힘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철학도 자신의 가르침과 그들의 교리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도 아니면,
아시아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성스런 전통에서 그러한 철학적인 교파의 이론을 발견한 것처럼 하기도 했다.
이 학파들 중 스토아학파만큼 대중적 신앙과 그렇게 쉽게 연합한 학파는 없었으며,
스토아학파가 미트라교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심대했다.
디온 크리소스톰(Dion Chrisostom: 서기 40-112. 희랍의 수사학자[修辭學者]이자 철학자-역주)은
마즈다교 제사장들이 노래로 부른 고대 신화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스토아학파의 우주론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페르시아 개념들이 제논의 제자들의 범신론적 개념들에 의해 비슷한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사상가들은 동방사람들의 교리와 제의적 관습에서 고대 지혜의 희미한 반영을 찾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갔고,
이러한 경향은 마즈다교 성직자들의 주장과 관심과 너무도 조화를 이루어,
그들은 자기들이 지닌 모든 수단을 가지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철학적 사유가 마즈다교 제사장들의 신앙에 원래는 없던 내용을 부여하여
그 신앙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하더라도,
그 영향은 혁명적이라기보다 대체로 보수적인 것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유치한 전설을 상징적인 의미로 덮어씌우고,
분명히 불합리한 관습을 합리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신앙이 지속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 종교의 신학적 토대가 눈에 띌 정도로 변화되었다 하더라도,
그 제의의 틀은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며,
교리에서 일어난 변화는 제의로 인해 나타나는 위엄과 조화를 이루었다.
「벤디다드」(Vendidad: 조로아스터교 경전 중 하나-역주)에 세부규정이 있는
미신적인 형식주의는 분명히 사산조 시대 이전의 것이다.
캅파도키아의 마즈다교 제사장들이 스트라보(Strabo,기원전 63-서기 21,
지리학자)의 시대에 바친 희생제물을 보면 아베스타 제의의 모든 특징을 추측할 수 있다.
불의 제단 앞에서 노래로 하는 기도와 성스런 나뭇가지 다발(baresman),
우유와 기름과 꿀의 봉헌,
집전하는 제사장의 숨결이 성스런 불을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 등이 그것이었다.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기원전 69-34)의 비문에 나오는 규정들은 마즈다교가
고대 이란의 관습에 철저히 충실하려는 비슷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증거이다.
그 비문에서 왕은 페르시아인들과 희랍인들의 전통에 따라 자기 조상들의 신들을
언제나 예배했다는 것을 기뻐하고,
새로운 신전에 세운 제사장들이 페르시아인들의 승려복을 입을 것이며,
고대의 성스런 관습에 맞게 제의를 집전하리라는 바람을 표현한다.
매월 16일은 특별히 기념하는 날로,
왕의 생일일 뿐 아니라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미트라에게 특별히 바친 날이기도 하다.
여러 해 후에,
또 한 명의 콤마게네 사람인 사모사타의 루키아누스는 분명히 자기 나라에서 보았던 제의에서
영감을 받은 한 구절에서,
반복되는 정화의식과 지루한 찬가와 조로아스터의 분파들이 입는 메디아식의 긴 옷을 여
전히 조롱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그들이 희랍어조차 모르면서 모순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림 8. 안티오쿠스 왕과 아후라-마즈다
(타우루스 산맥의 한 지맥인 넴로오드 다그에 있는 콤마네게의 안티오쿠스 1세
[기원전 69-34]의 신전에 있는 부조. T. et M.,p. 188)
캅파도키아 마즈다교 제사장들은 보수적인 정신으로 인해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
내려온 낡은 관습에 매여 있었으며,
그 정신은 그리스도교가 승리한 후에도 세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성 바실(St. Basil)은 4세기까지도 마즈다교가 존속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이탈리아에서도 이란의 제의는 계속해서 마즈다교가 태고적부터 소아시아에서 지켜온
제의형식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
주요한 혁신은 제의언어로 페르시아어 대신 희랍어를 썼다는 것인데,
아마도 후에는 라틴어를 썼을 것이다.
이 개혁은 경전이 있었음을 전제로 하며,
알렉산더 시대 이후에,
원래 구전으로 전해오던 기도와 기도서,
성가를 영원히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문서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불가피하게 적응했다고 해서,
그로 인해 미트라교가 본질적으로 페르시아적인 의식을 끝까지 보존하는 일이 방해받지는 않았다.
작가들이 이 종교에 적용해 온 “신비들”이라는 희랍어 용어로 인해 그릇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
미트라교의 신자들은 그들의 비밀조직을 만들 때 희랍종교를 모방하지 않았다.
그 조직의 비밀한 교리는 연속적인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 입문식을 한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페르시아에서도 제사장들은 배타적인 계급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종속적인 몇몇 계층으로 세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들 중 언어와 풍습이 다른,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승한 신앙을 이교도들에게 더 열심히 숨겼다.
그들의 비밀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높은 의식을 심어 주었고,
그들 주위의 무지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명성을 보장해 주었다.
마즈다교 제사장 계급은 처음에는 페르시아에서처럼 소아시아에서도 한 부족의 세습적인 특성이었을 것이다.
그들 내부에서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 후 그 성직자들은 적절한 입문식을 한 후 이방인들에게 그 비밀한 교리를 전수하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며,
그 후 이 개종자들을 그 종교의 다른 모든 의식에서도 점점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란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다른 나라에 흩어짐-역주)는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런 면에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와 비교할 수 있다.
관습은 여러 새 신자 계층마다 곧 달라졌으며,
마침내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위계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성스런 신앙과 실천에 관해 완전히 아는 것은 언제나 특권을 부여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이 비밀한 지식이 더욱 더 숨겨짐에 따라 그 들의 수는 매우 줄어들었다.
로마의 미트라교 예배에 특징을 부여한 원래의 제의는 분명히 아시아에 기원을 둔 것이다.
어떤 의식에서 쓰는 동물가면은 아주 널리 퍼진 선사시대의 관습이 남은 것으로,
이 관습은 오늘날도 여전히 남아 있다.
신에게 봉헌하는 산의 동굴의 제의는 분명히 아직 신전을 세우지 않았을 때의 유산이다.
입문자들에게 부과하는 잔인한 시험은 마(Mâ)와 퀴벨레의 종들이 저지른 피투성이의
수족절단을 생각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미트라가 영웅으로 나오는 전설은 유목시대가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다.
원시적이고 미숙한 문명의 이 고대전승들은 치밀한 신학과 높은 윤리체계와 나란히 신비들 속에 존재한다.
미트라교의 구성요소를 지질층의 횡단면처럼 분석해 보면,
이 복합적인 덩어리에 퇴적물이 규칙적인 질서를 이루며 층(層)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교의 밑바닥층은 최초로 생긴 아래층으로,
고대이란의 신앙인데,
이 종교는 여기에 기원이 있다.
이 마즈다교의 기층(基層) 위에는,
바빌론에서 셈족의 교리라는 두꺼운 퇴적물이 쌓였고,
그 후 거기에 소아시아의 토착신앙이 자신들의 퇴적물을 더했다.
끝으로,
희랍사상이라는 무성한 초목이 이 비옥한 땅에서 솟아났으며,
부분적으로는 그 종교의 원래의 특성을 보이지 않게 했다.
수많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용해되어 있는 복합적인 종교는 알렉산더 시대에 아르메니아와
캅파도키아와 폰투스에서 꽃핀 복합적인 문명에 걸맞는 표현이다.
만일 미트리다테스 에우파토르(Mithridates Eupator)가 그의 야심찬 꿈을 실현했다면,
이 헬라화한 파르시교는 분명히 거대한 아시아 제국의 국가종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명으로 가는 길은 이 로마의 강력한 적이 패배한(기원전 66) 후 변했다.
폰투스 육군과 함대의 잔존물인,
전쟁으로 도망친 자들과 동방의 모든 지역에서 몰려들어온 자들이 킬리키아 산맥의
안전한 거처에서 권력에 오른 약탈자들의 나라에 이란의 신비를 퍼뜨렸다.
미트라는 이 나라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타르수스는 제국이 몰락하기까지 계속 그를 숭배했다(그림 9). 이 모험가들의 공화국은
그 호전적인 종교의 지지를 받아 감히 거대한 로마와 바다의 지배권을 다투었다.
분명히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저 불굴의 신(미트라-역주)의 종교가
승리하도록 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여겼다.
그 신이 보호한다는 생각에 고무되어,
이 뻔뻔한 해양민족은 희랍과 이탈리아의 가장 숭배받는 신전들을 대담하게 약탈했으며,
라틴세계에는 처음으로 야만족 신의 이름이 울려 퍼졌으니,
라틴세계는 곧 그를 숭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림 9.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나온 미트라 청동메달
앞면: 고르디아누스 3세. 군복을 입고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다.
뒷면: 미트라. 빛나는 왕관을 쓰고,
휘날리는 망토,
즉 흉갑으로 덮인 튜닉(tunic)과 바지를 입고,
왼손으로는 무릎 꿇린 황소의 코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 동물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쳐들고 있다(T. et. M.,p. 190).
제2장 로마제국에 미트라교가 퍼지다
일반적으로 미트라교는 희랍세계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희랍의 고대작가들은 미트라에 대해 그가 단지 페르시아 왕들이 섬기던 외국신이라고 말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에도 미트라는 소아시아의 고원에서 이오니아 해안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에게해에 접한 모든 나라들에서는 피라이우스(Piraeus,
아테네의 항구-역주)에 있는 단 하나의 옛 비석만이 미트라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어서,
기원전 2세기에 델로스에서 섬기던 수많은 외국의 신들 가운데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 봐야 소용이 없다.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페니키아와 이집트 해안의 몇몇 항구,
즉 아라두스,시돈,알렉산드리아 근처에 미트라 신전(mitraeum)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고립된 기념물들은 그 나라 내부에 미트라의 신비의 흔적이 없다는 것을
더욱 강력히 말해 줄 뿐이다.
최근에 멤피스에서 미트라 신전을 하나 발견한 것은 그러한 규칙을 확인해 주는 예외처럼 보인다.
마즈다교의 신은 아마도 로마시대까지는 고대도시에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집트나 앗시리아의 어떤 비문에서도 미트라가 소개된 적이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셀류코스 왕조의 수도에서도 미트라를 위한 제단이 세워졌음을 보여 주는 자료는 전혀 없다.
이 반(半) 동방적인 제국들에서 토착 성직자 계급의 강력한 조직과,
민족적 우상들에 대한 대중들의 열렬한 숭배는 침략자(미트라-역주)의 진행을 저지하고
그의 영향을 무력하게 만든 것 같다.
한 가지 특징적인 내용을 통해,
이란의 야자타가 희랍이나 희랍화한 나라들에서 많은 개종자를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희랍어 이름을 보면 신의 이름을 지닌 상당히 많은 이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프리기아와 이집트의 신들이 누렸던 명성을 보여 준다.
이 이름들에는 메노필리(Menophili),
메트로도티(Metrodoti),
이시도리(Isidori),
세라피온스(Serapions)와 짝을 이루는 신을 나타내는 미트리온(Mithrion),
미트로클레스(Mithrocles),
미트로도루스(Mithrodorus),
미트로필루스(Mithrophilus) 등의 이름이 없다.
미트라의 모든 파생어들은 희랍인들이 아닌 민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희랍의도시들은 트라키아의 벤디스(Bendis),
아시아의 퀴벨레(Cybele),
알렉산드리아인들의 세라피스(Serapis),
그리고 시리아의 바알스(Baals)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나라는 자신의 고대의 적들의 수호신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미트라가 서방에 늦게 도착한 이유는 그가 고대문명의 위대한 중심지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기원전 204년에 로마에서는 페시누스의 위대하신 어머니(Magna Mater)께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
이시스와 세라피스는 기원전 1세기에 거기 나타났으며,
이보다 오래 전에 이탈리아에서는 그들의 숭배자가 매우 많았다.
카르타고인들의 아스타르테(Astarte)는 카르타고 전쟁 말기부터 수도에 신전이 있었다.
캅파도키아의 벨로나(Bellona)는 술라(Sulla)의 시대부터 신전이 있었고,
히에라폴리스의 시리아 여신(Dea Syria)은 페르시아의 신비가 거기에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제국의 초기부터 신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신들은 겨우 한 민족이나 한 도시의 신들이었고,
반면에 미트라의 영역은 인더스 강에서 흑해(Pontus Euxinus)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영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도 여전히 로마제국의 변경을 거의 완전히 넘어선 곳이었다.
오랫동안 희랍문명에 저항해 왔던 소아시아의 중심고원은 로마문명에는 더 적대적인 곳으로 남아 있었다.
초원지대와 삼림지대와 목초지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가파른 내리막길이 가로지르고 있고,
독일보다 날씨가 더 혹심해서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토착왕조는 가신상태(家臣狀態)로 추락했지만,
초기의 로마황제들 치하에서는 오랫동안 그들의 특징이었던 고립에 힘입어
여전히 자신의 영역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킬리키아는 기원전 102년에 로마의 영지로 만든 곳이지만,
당시에는 해안의 몇 곳만이 점령당했고,
2세기 후까지 그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캅파도키아는 티베리우스의 치세 때까지 로마에 합병되지 않았고,
폰투스의 서부지역은 네로 때까지 그러했으며,
콤마네게와 소(小) 아르메니아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까지 결정적으로 병합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이 먼 나라들과 동방 사이에는 정기적이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행정의 긴박함,행정장관과 세무관의 감소,보병과 기병의 징집,
끝으로 유프라테스강의 변경을 따라 세 개의 군단을 상설로 설치한 것 등으로 인해 그 때까지 세상에
닫혀 있던 이 산악지역들과 유럽의 영지들 사이에 사람과 산물과 사상의 교류가 지속되었다.
그 때 트라야누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대규모 원정군이 와서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하고,오스르호에네와 멀리 니네베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이 이란을 지중해 지역과 묶는 커다란 연결고리가 되었다.
로마황제들의 이 성공적인 합병이 미트라교가 라틴세계에 전파된 첫 번째 원인이었다.
미트라교는 플라비우스 황제 치하에서 거기에 퍼져 안토니우스와 세베루스 치하에서 발전했다.
이는 그와 함께 있었던 또 하나의 종교,
즉 유피테르 돌리케누스(Jupiter Dolichenus)가 콤마네게에서 그러했던 것과 같았다.
이 종교는 동시에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미트라는 이탈리아에 훨씬 일찍 알려졌다.
이 설명에 의하면,
로마인들은 폼페이에게 점령당한 킬리키아 해적들에 의해 미트라교에 입문했다고 한다.
플루타르크의 증언은 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티베르강 건너편에 설립된 최초의 유대인 공동체가 포로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이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기원전 63년) 데려온 자들이라는 것을 안다.
이 특별한 사건으로 인해,
공화정 말기쯤에는 로마 수도의 혼합된 대중 가운데 페르시아의 신을 믿는
소수의 신실한 자들이 실제로 나타났다.
그러나 외국의 제의를 행하는 다수의 예배자들과 뒤섞여,
미트라를 믿는 소수집단은 주목을 끌지 못했다.
야자타는 그를 섬기는 아이사인들과 마찬가지로 불신의 대상이었다.
이 작은 분파가 엄청난 로마인구에 끼친 영향은 현대 유럽에 불교단체들이 끼치는
영향처럼 실제로 극히 미미했다.
1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트라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사후 약 80년 후에 스타티우스(Statius)가 「테바이드」(Thebaid) 제1편을 썼을 때,
그는 이미 황소를 죽이는 영웅에 관한 전형적인 설명을 보았고,
그의 시대(서기 46-125년)에 마즈다교가 이미 서방에서 일정한 명성을 누린 것은
플루타르크의 증언으로 인한 것 같다.
이러한 결론은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미트라에 관한 가장 오래된 비문은 플라비우스라는 해방노예의 비문(서기 69-96년)으로,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오래지 않아,
트라야누스 황제의 근위병 사령관인 T. 클라비우스 리비아누스의 노예가 미트라에게
여러 개의 대리석을 바쳤다(서기 102년)(그림 10). 불굴의 신은 또한 비슷한
시기에 에뀌인들의 나라 안에 있던 네르사이(Nersae) 지역,
즉 이탈리아의 중심부로 뚫고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산산조각이 난” 미트라신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서기 172년의 한 문서를 발견했다.
로마제국의 북방에 침략자들이 나타난 것은 거의 같은 시기였다.
분명한 것은,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치세 초기에 제15군단이 미트라제의를 다뉴브강
유역의 카르눈툼으로 가져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148년경에 독일에서 로마군대가 미트라제의를 실행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토니우스 치세에,특히 콤모두스의 치세 초기부터,
미트라제의에 대한 증거가 모든 나라에 넘쳐나고 있다.
2세기 말에,그 제의는 오스치아에서 적어도 네 개의 신전에서 행해졌다.
우리는 이 아시아적 종교(미트라교-역주)가 정착한 모든 도시들을 나열하거나,
각각의 경우에 왜 미트라교가 전해졌는지를 서술할 생각은 없다.
비문과 조각된 기념물은,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각 지역의 미트라교의 역사를 기껏해야 아주 불완전하게 밝혀 줄 수 있을 뿐이다.
미트라교가 전파된 길을 한 걸음씩 따라가서,
도시에서 도시로,
영지에서 영지로 나아간 여정을 추구하여,
여러 교회가 동시에 끼친 영향을 구별하면서 개종작업의 광경을 그려낼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그 새로운 신앙이 어떤 나라에 전해졌으며,
그것을 옹호한 전사들이 일반적으로 누구였는지,
대강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뿐이다.
그것을 전파한 주요한 주체는 분명히 군대였다.
미트라교는 주로 병사들의 종교였으며,
입문자의 등급 중에 ‘병사들’(milites)이라는 이름이 붙은 등급도 있었던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황제들 아래에서 군단이 주둔군 영지에서 숙영했다는 점을 고찰할 때,
군대의 영향은 설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하드리아누스 황제(서기 117-138년) 때부터,
그들은 주둔한 영지에서 각자 신병을 모집했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규칙에는 수많은 예외가 있다.
그림 10.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2세기의 대리석 조각. 대영박물관)
이 조각의 두드러진 특징은 황소의 상처에서 피가 아니라 밀 이삭 세 개가 나온다는 것이다.
미트라교 이론에 의하면,
밀과 포도나무는 척수(脊髓)와 희생동물의 피에서 솟아나왔다
(“제4장 미트라교의 신비에 관한 교리”를 볼 것). T. et M.,p. 228.
그러므로 예를 들면,
아시아인들은 달마티아와 모에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유능한 군대에 오랫동안 기여를 했다.
더욱이 몇 년간 고향에서 복무한 후 백부장(百夫長)으로 승진한 병사는 대개 외국진지로 옮겼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임무의 여러 단계를 거친 후,
종종 새로운 주둔지로 배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어떤 한 군단의 백부장집단 전체는 “제국의 일종의 소우주”를 이루었다.
장교들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근원이었으니,
그들은 자기의 지위로 인해,
사병들에게 엄청난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우리의 시야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는 이렇게 개인적인 전파 외에도,
단 하나의 분대,
때로는 전체 연대가 일시적으로,
또는 항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새나 진영으로 이동함으로써 모든 종족과 신앙을 이동하게 했다.
끝으로,
로마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단병들과 함께,
대규모는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수의 외국인 ‘보조부대’(auxilia)가 있었으니,
그들은 그들의 동료들처럼 자기 고국을 위해 봉사하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실로 지역의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
이 외국인 군대를 그들의 고국에서 가능한 멀리 보내는 것이 제국정책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플라비우스 왕조 치하에서,
토착부대(alae) 또는 보병대는 단지 라인강과 다뉴브강의 변방을 지키는
보조부대의 최소한의 부분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먼 지역에 보낸 국민군대를 대신하기 위해 외국에서 소집한 신병 가운데는 수많은
아시아인들이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동방의 영역까지만 파송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미트라교가 깊이 뿌리 내린 콤마네게보다 더 많은 로마군 병사를 제공한 나라는
동방에서 어느 나라도 없을 것이다.
기마병과 군단병 외에도,
이 나라에서는 아마도 로마제국과 연합했던 시기에,
적어도 6개의 연합군(auxilia) 보병대(cohort: 군단을 10등분한 부대로
300명에서 600명으로 이루어짐-역주)를 모집했다.
온갖 계층의 시리아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캅파도키아,폰투스,킬리키아의 토착민 병사들의 수도 매우 많았다.
로마황제들은 저 민첩한 파르티아 기병대대를 로마군의 병적(兵籍)에 올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파르티아 기병대대의 호전적인 특성에 익숙해지는 일이 너무 많았다.
로마군 병사는 대체로 신앙심이 깊고,
심지어 미신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많은 위험에 처하면서 끊임없이 하늘의 보호를 추구하게 되었으니,
신에게 바치는 셀 수 없이 많은 비문들이 그들의 신앙이 생생했고 다양했음을 증언한다.
특히 20년 이상 완전히 낯선 나라들에서 살아 간 동방사람들은 그들의
민족신들에 대한 기억을 경건하게 간직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에게 예배하기 위해 모이곤 했다.
그들은 위대하신 주님(Baal)에게 은총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그의 분노를 두려워하기를 배웠다.
그들은 또한 예배를 통해 재결합할 기회와 북방의 음울한 날씨 아래에서
자신들의 먼 고국을 기억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애는 배타적이지 않았으며,
출신에 상관없이 동료병사들을 기꺼이 자신들의 제의에 오게 했다.
그들의 갈망은 공식적인 군단이 충족시킬 수 없었고,
그들은 전투할 때 외국 신에게서 좀 더 효과적인 도움을 얻거나,
죽을 때 내생에서 좀 더 행복한 운명을 맞기를 원했다.
후에 이 새 신자들은 군복무상 긴급한 일이나 전쟁의 필요 때문에 다른 연대로 전출을 가서는,
자신이 개종자였지만 이제는 개종시키는 자가 되어,
자기들 주변에 새 신자들의 새로운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미트라의 신비는 처음에 반(半)야만인인 캅파도키아나 콤마네게 출신 병사들에 의해
유럽으로 전해져서,고대세계의 가장 먼 영역에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흑해연안에서 스코틀랜드 산악지대와 대(大) 사하라 사막의 변경에 이르기까지,
미트라교 유적은 로마변경 어디에서나 풍부하게 볼 수 있다.
최근까지 발굴이 안 된 하(下) 모에시아에서는 이미 수많은 유물이 나왔다.
동방의 분견대가 이 지역에서 토착민 신병들에게 부족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러한 상황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토미항(港)은 말할 것도 없고,
아담-클리시(Adam-Klissi)가 유물들을 발견해서 최근에 유명해진 트로파이움 트라이아니에서뿐 아니라
트로에스미스,두로스토룸,오에스쿠스에서도 로마군단의 병사들은 저 페르시아 종교의식을 행했다.
그 나라 안에서는 이 종교가 몬타나와 니코폴리스로 파고 들어갔으며,
분명한 것은 이 종교가 이 북부 도시들로부터 발칸국가들을 지나 트라케 북부지역으로,
특히 세르디카(소피아) 북부로 퍼져 헤브루스의 골짜기에 있는 필립포폴리스 주변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미트라교는 다뉴브강을 따라 올라가 상(上) 모에시아의 수도인 비미나키움에서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우리는 미트라교가 이 나라에서 어디까지 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직 발굴이 다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거센 강물을 순시한 소형함대는 외국인 병사들로 충당되었으며,
외국인이 지휘관인 경우도 있었다.
그 함대는 이르는 항구마다 이 아시아 종교를 전파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미트라교가 다키아에 소개된 상황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다.
서기 107년,트라야누스 황제가 이 이민족 왕국을 로마제국에 병합했을 때,
그 나라는 6년간의 끈질긴 전쟁으로 기력이 다해 사막과 다름이 없었다.
황제는 그 나라에 다시 주민이 살게 하려고 로마의 모든 영역에서
(ex toto orbe Romano) 수많은 식민자들을 그리로 이주시켰다.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가 말하듯이,
이 나라 인구는 2세기에 오늘날보다 훨씬 더 혼합적이었는데,
거기서는 지금도 유럽의 모든 종족이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있다.
고대 다키아인들 중 남은 자들 외에도,
여기에는 일뤼리아인과 판노니아인,
갈라티아인,카리아인,아시아인,에뎃사와 팔뮈라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기타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계속 자기 조국의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종교들 중 어떤 것도 미트라교의 신비보다 더 번성한 것은 없었으니,
우리는 이 지역에서 로마의 지배가 지속된 150년 동안 이 종교가 이룬 엄청난 발전에 놀라게 된다.
미트라교는 그 영지의 수도인 사르미제게투사와 로마군의 진영 근처에 생겨난 도시들,
즉 포타잇사와 특히 아풀룸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점령한 영역 전체에서 꽃피었다.
내가 아는 한,다키아에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스자모스 우즈바르에서부터 북부변경과,
저 멀리 왈라키아의 로물라까지 이르는 지역에서는 미트라교 사원의 파괴를 면한 수많은
비문과 조각과 제단이 남아 있다.
이 잔해들은 특히 그 나라의 중심부에 풍부한데,
로마문명을 주변국의 산악지대에 전파한 주요 도로인 마로스 골짜기의 길에 이어지는
커다란 둑길을 따라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아풀룸의 유일한 식민지에는 페르시아 신의 신전이 분명히 네 개 있었고,
최근에 발굴한 사르미제게투사의 동굴에는 아직도 약 50개의 부조와 신자들이
신심으로 신에게 바친 제사용 탁자들의 파편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 이란종교는 다뉴브강을 따라 로마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요새화된 도시들,
즉 쿠숨,인테르키사,아퀸쿰,브리게티오,카르눈툼,빈도보나,
그리고 심지어는 내지의 작은 마을들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미트라교는 이 이중의 영지의 주요한 두 곳,
즉 아퀸쿰과 카르눈툼에서 특히 세력이 있었다.
또 이 도시들에서는 미트라교의 위대함의 원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처음 말한 도시에서는 3세기에 그 전역에 흩어져 있던 적어도 다섯 개의 신전에서
미트라교 제의를 행했는데,
이 도시는 제2지원군단(legio II adjutrix)의 본부였다.
이 군대는 서기 70년에 라베나에 주둔한 함대의 수병들로 만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규군으로 편입된 자유민들 중에는 아시아인이 상당수 있었으며,
미트라교는 처음부터 이 비정규군단에 수많은 신봉자들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서기 12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하(下) 판노이아에 그 군단을 세웠을 때,
그들은 분명히 이 지역에 저 동방종교를 가져왔으며,
그 군단은 해체될 때까지 미트라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이 비슷한 제2지원군단은 트라야누스 황제 때 브리게토로 군진(軍陣)을 옮겼을 때,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 곳에 미트라교의 기름진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우리는 이 페르시아의 신이 카르눈툼에 도착한 방법을 훨씬 더 정확하게 단정할 수 있다.
서기 71년이나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저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지난 8년 또는 9년 동안 동방에서
전쟁을 하고 있던 아폴리나르의 제15군단(legio XV Apollinaris)에게 점령하게 했다.
이 군단은 파르티아군에 대항해 코르불로가 이끌고 있던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서기 63년에
유프라테스강변으로 보내져서,
서기 67년에서 70년까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가했고,
이어 티투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이 정예군단은 이 처절한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분명히 아시아에서 징집한 신병들로 벌충했다.
이 신병들은 아마도 대부분 캅파도키아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옛 군단과 함께 다뉴브강으로 이동한 후,
거기서 그 때까지 알프스 북부지역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란의 신에게 처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카르눈툼에서는 아폴로나리 군단의 한 병사가 미트라에게 바친 비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병사는 바르바루스(Barbarus: ‘야만인’,
즉 로마인이 아니라는 뜻-역주)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불굴의 태양’(Sol Invictus)의 이 최초의 예배자는 강둑에서 그에게 반원형의 작은 동굴을 바쳤는데,
그것은 3세기에 한 로마기사가 폐허상태에서 원상으로 복구해야 했다.
그것이 아주 오래된 것임은 그 세부적인 내용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동방에 도달한 후 약 40년이 지나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시 15군단을 유프라테스강변으로 옮겼을 때,
그 페르시아 종교는 이미 상(上) 판노이아의 수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시아로 돌아간 군단을 대신한 제14군단 게미나 마르티아(Gemina Martia)뿐 아니라 제16군단과
제13군단(이들의 일부 파견대는 제14군단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도
미트라제의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 부대에 입문자들을 갖게 되었다.
처음의 신전은 곧 부족하게 되어 두 번째 신전을 세웠는데,
즉시 그 옆에 콤마네게의 유피테르 돌리케누스의 신전이 세워졌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도시가 군영(軍營)을 따라 발전하고,개종이 계속 증가하자,
아마도 2세기 초쯤에 세 번째 미트라 신전이 세워진 것 같은데,
그 규모는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비슷한 건축물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와 연관된 군주들은 카르눈툼에서 회의를 열 때 그것을 확장했다.
이 군주들은 그렇게 이 거룩한 도시에서 미트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증거했으며,
아마도 그 도시는 북방에 있는 모든 도시 중에서 이 마즈다교 분파의
가장 오래된 성전들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이 전쟁지역은 또한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외국종교는 거기서부터 주변국의 작은 마을들에게 빛을 발했다.
분명히 2세기 중엽부터 미트라교 예배를 행한 스틱스-네우시에들은 이 강력한 도시의 유일한 종속촌락이었다.
그러나 남쪽으로 더 가면,
스카르반티아의 신전이 카르눈툼의 식민지의 십부장(十夫長: decurio coloniae Carnunti,
열 명을 한 단위로 한 병사집단의 대장-역주)에 의해 부요해졌다.
동쪽으로는 아이퀴녹티움의 영역에 어머니의 돌들(Petrae Genetrici)에 봉헌의 비문이 있으며,
더 나아가면 빈도보나(비엔나)에 제10군단 병사들이 역시 분명히 이웃의 군영에게서
미트라의 신비를 행하기를 배웠다.
아프리카에서도 위대한 판노이아시(市)가 미트라교의 발전에 끼친 영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비엔나에서 7-8리그(1리그는 약 3마일-역주)쯤 가서 노리쿰의 변경을 지나면,
콤마게나이(Commagenae)라는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그 마을의 이름은 분명히 콤마게네인들의 기병대대(ala Commagenorum)가 거기
주둔했다는 사실로 인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황소를 죽이는 신이 여기서 발견되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지에서는 라에티아에서처럼 군대가 저 아시아의 종교를 전파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노리쿰 제1군단의 감독(speculator legionis I Noricorum)의 구식비문은
한 병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 나라들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트라교의 제의에 관한 기념물은 로마군이 집중되어 있던 다뉴브강 상류의 골짜기에는
아주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그 기념물들은 알프스의 다른 비탈에 이르기까지 수가 많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말한 이 종교의 비문을 보면,
그것이 군대에서 나온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 11. 태양신
(노리쿰에 있는 비루눔의 대부조. T. et M.,p. 336)
반면에,
미트라교가 두 개의 독일(상[上]독일과 하[下]독일을 말함-역주)에서 놀라울 정도로
확장된 것은 계속 위협받던 그 지역을 방어한 강력한 군단 덕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서기 148년에 한 백부장이 ‘불굴의 태양 미트라’에게 바친 비문을 본다.
그런데 2세기 중엽에 이 신은 로마연대들 내에 이미 상당한 개종자를 얻었을 것이다.
모든 연대가 이 전염병(미트라교-역주)에 감염되었던 것 같다.
제8군단 아우구스타,
제12군단 프리니게니아,
제30군단 울피아,
시민지원자들 중 선발한 부대뿐 아니라 보병대와 보조기병대대가 모두 그랬다.
이 외국종교의 전파가 그토록 일반적이었으므로,
그것이 정확히 어느 방면으로부터 이 나라에 들어갔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마도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오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미트라교는 직접 동방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다뉴브강변의 주둔군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이다.
만일 미트라교가 들어온 상황을 절대적으로 정하고 싶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상당히 진실이며 당연하다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즉,
서기 70년에 모에시아에서 상(上) 독일로 이동한 제8군단이 거기서 처음으로 이 종교행사를 거행했으며,
그것이 곧 이 나라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 중 독일은 미트라교 신전 또는 미트라 숭배처소가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이다.
독일은 우리에게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완전한 그림이 있는 부조들을 제공해 주었다.
또 이교의 어떤 신도 이 나라에서 미트라만큼 다수의 열광적인 신자를 얻지 못했다.
라인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으면서 로마제국의 군사적 경계를 이루고 있던 길쭉한 땅인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 이 말은 ‘지대가 부과된 땅‘이라는 뜻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의미는 알려지지 않았음-역주)에서는 마인강과 요새화된 성벽 사이에 있던
로마군의 전진기지와 더불어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프랑크
그림 12. 오스터부르켄의 미트라교 부조
(1861년 헤쎄의 오덴발트에 있는 로마요새의 유허에서 발견. T. et M.,도판 6)
푸르트 북쪽,고대의 키비타스 타우넨시움(civitas Taunensium: 타우넨시움국[國]이라는 뜻-역주)인
헷데른하임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세 개의 중요한 신전이 연이어 발굴되었고(그림 13,14),
헤쎄의 프리트베르크에 세 개가 더 있었
헷던하임에서 발견한 미트라교 신전의 평면도
A. 주랑(柱廊)이 있는 프로나오스(Pronaos)
B. 층계입구
C. 성구실(聖俱室: apparatorium ?)
D. 전실(前室)
E. 측면을 따라 늘어선 긴 의자
F. 예배자들을 위한 공간 G. 성화들이 있는 후진(後陣) (T. et M.,p. 370)
그림 14 독일의 헷던하임에서 발굴한 거대한 미트라 부조의 뒷면
이고,주변 나라에서 세 개가 더 발굴되었다.
다른 쪽에서,라인강의 흐름을 따라서,
즉 바젤 부근의 아우크스스(라우리카)에서 슈트라스부르크,
마이엔케,노이비이트,본,꼴로뉴,도르마겐을 거쳐 칸텐(베테라)에 이르기까지,
유물이 계속 발굴되었다.
그것은 이 새로운 신앙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우비아(Ubia)족과 바타비아(Batavia)족이라는
야만족의 심장부에까지 전파된 과정을 분명히 보여 준다.
라인강 유역의 변경을 따라 모여 있던 군대에 미트라교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이 종교가
고올의 내부로 확산되었다는 것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제8군단의 한 병사는 독일에서 지중해로 가는 군사도로에 있는 제네바에서
‘불굴의 신’(Deo Invicto)에게 제단을 바쳤으며,
현대 스위스와 프랑스의 쥐라에서도 이 동방종교의 다른 흔적을 발견했다.
보스게스산에서 길 입구에 있는 사렌부르(사라비 다라)는 슈트라스부르크가
모젤강과 센느강 유역을 연결하고 있었고 지금도 연결하고 있는데,
여기서 최근에 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이 하나 발견되었다.
또 하나의 동굴에 있는 부조는 살아 있는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데,
그것은 메츠와 마이엔스 사이에 있는 슈바르츠에르덴에 있었다.
로마군 사령관들의 정규 거주지였던 트레베스라는 거대한 도시에 비문과 조각상의 잔해 몇 개만이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이 도시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그로 인해
이 이교의 유적들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끝으로,
꼴로뉴와 바바이(바가쿰)을 잇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 모이제강 골짜기에서
미트라교 제의의 흥미로운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그림 15. 독일 하이델베르크 근처인 노이엔하임의 부조
초기의 광신자들의 손에 손상되는 것을 면한 이 유물은 1838년에 하이델베르크 근처의 하일리겐베르크산의
남쪽 비탈에 있는 마을인 노이엔하임 근처의 동굴에서 농장 건물의 기초를 닦던 일꾼이 발견했다.
이것은 미트라의 생애에서 12개의 주요 장면을 일련의 부조로 분명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장면은 미트라가 바위에서 태어남(왼쪽 가장자리 꼭대기),
미트라가 황소를 잡아 동굴로 데려감(오른쪽 가장자리),
미트라가 아후라-마즈다에게로 올라감(꼭대기 가장자리) 등을 보여 준다.
왼쪽 꼭대기에서 두 번째 장면 역시 흥미로운데,
이는 크로노스(제르반,
Zervan: 조로아스터교의 시간의 신. 주르반[Zurvan]이라고도 하며,
제르반교는 후에 별도의 종교가 되었다-역주) 세상의 지배권을 제우스
(아후라-마즈다)에게 넘겨주는 것을 나태낸다.
이 길은 바베이에서 볼로뉴(게소리아쿰)로 통하는데,
볼로뉴는 영국함대(classis Britannica)의 해군기지였다.
두 명의 횃불을 들고 있는 자들(dadophors)의 상(像)이 여기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분명히 끌로 쪼아 만든 것으로,
분명히 그 함대의 외국인 수병이나 장교가 미트라에게 바친 것이다.
이 중요한 해군기지의 목적은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섬,
특히 이 시기에 수많은 상인들이 찾았던 런던과 매일 연락하는 것이었다.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영국의 이 병참부에 미트라교 신전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이란종교가 영국에서만큼 요새화된 지역에 완전히 국한되어 있었던 곳은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그 영지의 군본부가 있던 요크(에부라쿰) 밖에서는,
미트라교가 오직 그 나라 서부인 카에를레온(이스카)과 체스터(데바)에만 퍼졌는데,
이들 지역에는 실루르족(Silures)과 오르도비스족(Ordovices)이라는 고올부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 군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끝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성벽을 따라 있는 이 나라의 북부 교외에도 미트라교가 퍼져 있었는데,
이 성벽은 픽트족(Picts)과 칼레도니아족(Caledonians)의 침략에서 로마제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성벽을 따라 있는 모든 기지들에는 미트라 신전이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는 그 지역의 지휘관(praefectus)이 자기 부하들에게 예배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저 아시아의 신이 이 북부지역의 군대의 뒤를 이어 침투했다는 것이지만,
미트라가 이 곳에 도달한 시기나 미트라를 이 곳으로 데려온 군대가 어느 부대였는지를
정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서 2세기 중엽부터 미트라를 섬겼으며,
독일이 먼 동방과 “영국 내의 모든 지역”(Et penitus toto divisos orbe Britannos)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했다고 믿는 데는 이유가 있다.
로마세계의 다른 극단에서도 미트라교 제의는 역시 병사들이 신봉했다.
그들은 람바이세에 주둔한 제3군단과 아우라시안 산맥의 협곡을 지키거나
사하라 사막의 변경에 산재해 있는 주둔지에도 자신들의 성직자들을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미트라교는 지중해 남부에서는 북부의 나라들에서처럼 그렇게 알려져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여기서는 미트라교의 전파가 특별한 성격을 띠었다.
그 유적들은 거의 다 후기의 것이지만,
일반병사들보다는 장교들이나 적어도 백부장들로 인해 생긴 것인데,
이들 중 다수는 외국출신이었고,
일반병사들은 대부분 모집된 나라에서 그 나라의 방어책임을 맡고 있었다.
누미디아의 군단병들은 계속 그들의 토착신에게 충실했는데,
그 신들은 원래 카르타고의 신들이거나 베르베르(북아프리카 산지의 종족-역주)족의 신들이었다.
그 병사들은 오직 드물게만 직업 때문에 접하게 된 동료들의 신앙을 채택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페르시아인의 종교는 대부분 군복무로 인해 외국에서
이 나라들로 오게 된 자들만이 신봉했다.
그리고 그 신자들의 무리는 대부분,
아시아인들이 아니면 적어도 다뉴브강 유역의 영지에서 모집한 신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미트라교 유적이 가장 빈약한 서방의 나라인 스페인에서는,
그런 유적과 주둔군의 관련성이 상당히 분명하다.
이 광대한 반도 전역에는 인구가 많은 도시가 아주 많이 모여 있는데,
도시인구가 몰려 있는 가장 큰 중심지에서조차 미트라교 유적은 거의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루시따니아와 따라꼬넨시스의 수도인 에레미따와 따라꼬에서는 비문의
아주 희미한 흔적조차도 좀체로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스뚜리아스와 갈라이시아의 황량한 골짜기들에서는 이 이란의 신에 대한 조직화된 예배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곧 로마군단이 아주 오랫동안 점령하지 못했던 이 나라에 장기간
주둔했다는 사실과 연관될 것이다.
아마도 입문자들의 비밀집회에는 스페인 보병의 정예병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그들은 라인강과 다뉴브강 유역에서 보조군으로 근무한 후에 마즈다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군대는 이와 같이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온 시민들과 이민자들을 같은 신자집단에 통합하고,
그 때 그 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장교들과 백부장들과 심지어는 전체 부대를
한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끊임없이 교체하여,
결국 로마세계의 가장 먼 변경에까지 지속적인 교류망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군대조직이 동방종교들을 전파하는 데 기여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군복무기간이 끝난 후에 퇴역한 곳에서 자기들이 군기(軍旗) 아래에서
익숙해진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들은 곧 새로운 환경에서 수많은 모방자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자주 자기들이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부대 주변,
군영 주변에서 점점 종군상인들의 가게를 대신하게 된 작은 도시들에 정착했다.
또 그들은 때로는 자기들이 근무한 나라의 좀 커다란 도시에 집을 마련하려고 했는데,
이는 군대의 옛 친구들과 거기서 말년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리용에는 늘 성벽 안에 독일군의 이러한 퇴역군단병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런던에 남아 있는 유일한 미트라교 비문은 영국군의 한 퇴역병사가 쓴 것이었다.
또 황제가 퇴역군인들을 식민지를 세울 지역으로 보내는 것이 관습이었다.
아퀴타니아의 엘루사는 아마도 셉티무스 세베루스(서기 193-211년)가 이 지역에 보낸 라인강
유역의 퇴역군인들로 인해 저 아시아 종교를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군당국이 로마제국의 변경으로 이동시킨 신병들은 자기 고국에 대한 향수를 가슴에 품었고,
계속해서 고국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년이나 25년간 싸움과 전투를 한 후 그들이 자기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기 도시나 부족의 신들보다 외국의 신을 더 좋아했으며,
그 신에 대한 신비한 예배는 먼 땅에서 군대의 어떤 동료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군대가 주둔하지 않은 영지들의 도시와 시골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는 끊임없이 아시아를 점령하여 수많은 셈족 영지를 복속시켰다.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전 로마세계에 평화가 보장되고 상업의 안전이 지속적으로 보증된 후,
이 새로운 주체들은 다른 종족의 특별한 소질에 의해 이익을 보면서 점차로 레반트 지역
(지중해 동부와 그 섬들과 연안의 여러 나라-역주)의 교통을 모두 손에 넣었을 것이다.
전에 페니키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이 그랬듯이,
이제는 시리아인들이 지중해의 모든 해안을 그들의 이주민들로 채웠다.
희랍시대에 그들은 희랍의 상업적 중심지,
특히 델로스에 정착했다.
이 상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제 로마 근처로 모여,
뽀쭈올리와 오스띠아에 정착했다.
그들은 동방의 모든 해안도시에서 사업을 한 것 같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라벤나,
아뀔레이아,떼르게스떼와 달마티아의 살로나이,
그리고 멀리는 스페인의 말라가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상업활동을 위해 이 먼 나라들의 내지로,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는 모든 곳으로 갔다.
다뉴브강 골짜기에서 그들은 멀리 다키아의 사르미제게투사와 아풀룸으로,
또 멀리 판노이아의 시루미움으로 파고들었다.
고올에는 이 동방사람들이 특히 밀집해 있었다.
그들은 지롱드강을 따라 보르도에 이르고,
론강을 거슬러 멀리 리용에 이르렀다.
그들은 론강의 양안(兩岸)을 점령한 후,
그 영지의 내지로 모여들었으며,
북부의 대도시 트레베스는 그들을 끌어 모았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로마세계를 가득 채웠다.
야만족들의 후기 침입도 그들의 모험심을 꺾지는 못했다.
메로빙거 왕조 아래에서 그들은 여전히 오를레앙에서 자기들의 셈어 방언을 사용했다.
그들의 이주는 사라센인들이 지중해 항해선박들을 쳐부쉈을 때에야 제지당했다.
시리아인들은 모든 시기에 그들의 열정이 두드러졌다.
어떤 민족도,
심지어 이집트인들조차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해서 자기들의 우상들을 그토록 대단히 끈질기게 방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식민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의 첫 관심은 자신들의 민족종교를 조직하는 것이었으며,
모국은 이 신앙의 의무를 행하도록 그들에게 자주 풍부한 지원금을 주었다.
이런 방식으로,
헬리오폴리스와 다마스쿠스와 팔미라의 신들은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들어갔다.
‘시리아인’이라는 말은 대중적으로 쓰일 때 대단히 애매한 의미가 있었다.
이 말은 ‘앗시리아인’의 준말이었는데,
자주 그것과 혼동되어 일반적으로 멀리 동쪽에서 고대에 니네베(성경의 ‘니느웨’,
현재 이라크의 ‘모술’지역-역주) 왕들에게 종속된 모든 셈족을 지칭했으며,
심지어 유프라테스강 너머에 있던 종족까지도 여기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유프라테스강 골짜기에 정착해 있던 미트라교 신자들도 포함하며,
로마가 이 지역으로 점령지를 확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라틴도시들에 사는 “시리아인”
가운데 저 페르시아의 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방에서 상업적 거점을 발견한 상인들 대다수는 셈족의 바알신들(Baals)을 섬기는 자들이었으며,
미트라를 섬기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생활조건이 더 낮은 아시아인들이었다.
이 신이 제국의 서쪽에 지니고 있던 최초의 신전들은 주로 노예들이 찾았으이 분명하다.
노예상인들(mangones: 라틴어로 ‘상인들’-역주)은 인간상품을 주로 동방의 영지들에서 구입했다.
그들은 캅파도키아와 폰투스의 대토지 소유자들에게서 노예무리를 사서 소아시아 오지에서 로마로 데려갔다.
고대의 한 작가가 쓰고 있듯이,
그렇게 수입된 사람들은 즉시로 저 거대한 도시에서 별도의 도시와 구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인구가 없는 이탈리아에서는 소비가 증가하여 공급이 충분치 못했다.
전쟁 또한 인간가축들을 만들어 내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티투스가 유대전쟁(서기 70년) 한 번에 9만 명의 유대인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파르티아인들과 벌인 끊임없는 전쟁과,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의 정복으로 서방시장에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포로들을 생각하면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좀 큰 승리를 한 후 한꺼번에 잡혀왔든,
아니면 단지 전문적인 인간상인들에게 잡혀왔든,
이 노예들은 특히 이송이 쉽고 싼 해안도시에 많았다.
그들은 시리아 상인들과 함께 여기에 동방종교,
특히 미트라교를 가져왔다.
마트라는 지중해의 모든 항구들에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푀니키아의 시돈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미트라교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탈리아에서 뽀쭈올리와,
특히 나폴리를 포함한 그 주변은 미트라교 유적이 상대적으로 적은데,
그 이유는 뽀쭈올리가 2세기에는 더 이상 로마가 보급품을 가져가는 레반트 지역의
화물집산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뽀쭈올리의 튀르 식민지는 한 때는 부유하고 강력했으나 서기 172년에는
작은 거주지로 전락한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와 트라야누스의 엄청나게 큰 구조물이 오스티아에 세워진 후,
오스티아는 깜빠니아의 맞수의 번영을 계승했는데,
그 결과 모든 아시아 종교들이 곧 여기에 자신들의 예배당과 신자들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저 이란의 신보다 더 애호를 받은 신은 없다.
2세기에 적어도 4-5개의 동굴이 그 신에게 바쳐졌다.
그 중 하나는 늦어도 서기 162년에 세워진 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목욕장들과 통해 있는데,
외국의 배들이 정박하는 바로 그 곳에 있었다(그림 16). 또 하나는
‘위대하신 어머니’(Magna Mater)에 대한 공식적인 제의를 행하는 성전(metroon) 가까이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안티움(안찌오 항[港])의 작은 마을이 자신의 강력한 이웃의 예를 따랐다.
에트루리아. 루셀라이(그로세토),
피사이도 마찬가지로 이 마즈다교의 신을 호의로 맞이했다.
그림 16. 티베르강변의 오스티아에서 발견한 미트라교 신전 평면도
A.
B. 측면을 따라 배열한 긴 의자.
C. 입구
D. 안토니우스의 목욕장으로 통하는 출입구.
E. 성상들이 있는 높은 성가대석.
F. 층계.
G. 물러나 있는 방.
H. 성상들을 두는 벽감(壁龕).
I. 지탱해 주는 벽.
통로의 모자이크에 있는 명문(銘文)의 흔적은 다음과 같다:
“불굴의 태양 미트라께 L 아그리우스 칼렌디오가 선물을 바치다“
(Soli invict(o) Mit(hrae) d(onum) d(edit) L Agrius Calendio)(T. et M.,p. 240).
그림 17. 실바누스
그림 16에 나온 안토니우스의 목욕장 근처인 오스티아에 있는 미트라교 신전의
전실(前室) 벽감에 있는 모자이크. 실바누스는 한 손에 전나무 가지를,
또 한 손에는 손도끼를 잡고 있다.
제3장 미트라교 신비의 교리를 보라.
이탈리아 동부에서는 이뀔레이아에 미트라교 비문의 수가 가장 많다.
오늘날의 뜨리에스떼처럼,
고대의 이뀔레이아는 다뉴브강 유역의 영지들이 남부의 산물과 자신들의 산물을 교역하는 시장이었다.
이스트리아의 끝에 있는 폴라와 아르바와 브라티아의 섬들과 달마티아,
세니아,야데르,살로나이,나로나,에피다우루스의 해안에 있는 항구들
(여기에는 마케도니아의 뒤라키움도 포함된다)에는
모두 다소간에 저 불굴의 신의 영향을 받은 확실한 여러 흔적이 있으며,
미트라가 아드리아해의 상업도시들로 전파된 길을 분명히 보여 준다.
미트라는 서부 지중해로도 전파되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스와 팔레르모,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해안,
루시카다,
이코시움,
카이사레아,
스페인의 반대편 해안인 말라가와 타라코에는,
바다를 통해 이 도시들로 온 다양한 종족이 미트라교 신자들의 모임을 이루고 있었다.
더욱 북쪽으로는 리용의 만(灣)에 있던 나르본느라는 훌륭한 로마 식민지가
미트라에 대한 호의를 품고 배타성을 버렸다.
그림 18. 횃불을 든 사람들(dadophori)
오스티아의 한 미트라교 신전에서 출토. 지금은 라테란 대성당에 있음. “제4장 미트라교 신비의 교리“를 보라.
특히 고올에서는 우리가 본 미트라교 제의와 동방교통의 확대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상호관련성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알프스산맥과 세벤느산맥 사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론강 유역에 주로 집중되어 있는데,
론강의 흐름이 미트라교가 전파된 주요한 통로였다.
몽펠리에 근처의 섹스탄티오에서는 ‘거룩한 이들의 아버지’(pater sacrorum)의 비문이 있고,
프로방스의 엑스에는 아마도 미트라교의 것으로 보이는 사두마차(quadriga)를
탄 태양을 나타내는 그림이 있다.
다음에,론강을 따라 올라가면,
아를르에서 ‘사자머리를 한 크로노스’(leontokephalos Kronos)의 상(像)을 볼 수 있는데,
그는 미트라교 제의에서 숭배 받았다.
몽뗄리마르 근처의 부르-생-앙데올에는 한 샘물 곁의 살아 있는 바위에 황소를 죽이는 신이 조각되어 있다.
오랑쥬에서 멀지 않은 베종에는 입문자를 위해 만들어진 헌사(獻詞)가 새겨져 있다.
비엔나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여러 유적들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한 사자머리를 한 신 중 가장 독특한 부조가 나왔다.
끝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소아시아와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리용에서는
이 페르시아 종교가 대단히 유행했음이 분명하다.
론강을 더 올라가면,한 편으로는 제네바에,
다른 한 편으로는 사온강의 지류인 두강(the Doubs) 유역의 베상송과 만듀르에
미트라교가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신전들이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데,
이들은 분명히 끊임없이 서로 교류가 있었으며,
따라서 이들이 내륙에 있는 큰 바다의 해안과 독일의 군영들을 묶고 있었다.
이 외국종교는 론강 골짜기의 번영하는 도시들에서 나와 다우피니,
사보이,부게이의 산 속 깊이로 스며들었다.
갑 근처의 라바티에,벨레이에서 멀지 않은 루세이와 비유-엉-발 로메이에는 비문들과
신전들과 신자들이 바친 조각상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미 말한 대로,동방의 상인들은 해안항구와 강의 나루터에 지부를 세우는 것으로 활동을 국한하지 않았다.
더욱 이문이 남는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전망으로,
그들은 경쟁이 덜 한 내지의 마을들로 몰려들었다.
아시아 노예들은 훨씬 더 완전하게 퍼졌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는 일이 좀체로 없었지만,
그들이 경매인들에 의해 아무렇게나 모든 곳으로 흩어졌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모든 나라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영지가 많고 고대의 자치도시가 있는 이탈리아에서,
그들은 로마귀족의 광대한 영지를 경작하는 노예군을 늘리러 가거나,
후에는 감독(actor,
villicus: 둘 다 노예나 영지를 관리하는 ‘마름’의 뜻-역주)의 지위로 승진하여
자기들이 전에 겪었던 비참한 삶을 사는 자들을 통솔했다.
때로는 어떤 자치도시가 그들을 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 그들은 공공의 노예(servi publici)로서 시장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행정부서에 들어갔다.
이런 식으로 동방종교들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지역으로 얼마나 신속하게 파고 들어갔는지는 알기 어렵다.
아펜닌 산맥 중심부의 네르사이에 있는 이중의 비문은 서기 172년에 도시의 재정을 맡고 있는
한 노예가 폐허가 된 미트라교 신전을 복구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베누시아에서는 어떤 부유한 시민의 청지기가 ‘태양신이신 미트라께‘(ʻΗλί Μίθρᾳ)라는
희랍어 명문(銘文)을 바쳤는데,
그의 이름 사가리스(Sagaris)는 곧바로 그가 노예계급이었고 아시아 출신임을 알려 준다.
이러한 예는 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외국 신의 숨어 있는 신자들은 로마시 안에서와 그 나라의 다른 대도시에서뿐 아니라
깔라비아에서 알프스산맥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트라교를 전파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요인들이었다.
우리는 루카니아의 중심부인 그루멘툼에서 이란종교를 믿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또 이미 말한 대로,
아풀리아의 베누시아와,아이퀴족의 나라에 있는 네르사이와,베스띠니족의 나라에 있는 아베이아와,
플라미니아 길을 따라 있는 움브리아와,인테람나와,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 동굴들이 있는
스폴레툼과,미트라교 신자들 모임의 후견인들의 명단이 발견된 센티움에서도 그랬다.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에서도 이 종교는 카시아로(路)를 따라 수트리움과 볼세나에 자리를 잡았고,
아마도 아레티움과 플로렌스에서도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미트라교의 흔적은 아펜닌 산맥 북부에도 잘 남아 있고 중요하다.
에밀리아에서는 그것을 드물게만 볼 수 있는데,
거기서는 볼로냐 영지와 모데나 영지만이 기름진 포강 골짜기에서처럼 좀 흥미로운 단편들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 아래에서 급격히 발전한 여기 밀라노는 이국종교가 대단히 사랑받고
공식적으로 보호를 받은 유일한 지역인 것 같다.
또르또나,인두스뜨리아,노바라에서 발견한 몇몇 비문의 단편들은 그 나라의
다른 곳에 미트라교가 광범하게 퍼졌음을 입증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상(上) 이탈리아의 풍부한 평원들보다 알프스 산맥의 거친 협곡에서 훨씬 더 풍부한
유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물론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인뜨롭비오와,꼬모 호수 동쪽의 발 사시나와,올료강으로 관개를 하는
발 까모니까에는 저 불굴의 신을 위한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봉헌한 기념물들은 아디제(엣취)강과 거기 있는 나라들을 따라 많이 볼 수 있다.
그 곳은 고대에는 브렌네르 고개와 뿌스떼르-탈을 넘어 알프스산맥의
북쪽 비탈로 가서 라이티아와 노리쿰으로 들어가는 통로 가까이에 있었다.
트렌트에는 작은 폭포 근처에 미트라교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산-제노 부근에서는 바위투성이의 골짜기에서 부조들이 발견되었다.
가스뗄로 디 뚜엔노에서는 양면에 봉헌하는 글이 새겨진 서판의 단편들이 나왔다.
에이사크강의 양안(兩岸)에서는 미트라와 태양에게 바친 비문이 발견되었다.
끝으로 마울스에서는 16세기에 유명한 명판(名板)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비엔나의 박물관에 있다.
미트라교가 이 산악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탈리아 변경에서 제지당하지 않았다.
만일 드라베강 골짜기를 통해 길을 따라서 이 지역에 남아 있는 흔적을 찾는다면,
우리는 즉시로 떼우르니아에서,
특히 노리쿰의 가장 큰 도시인 비루눔에서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거기는 3세기에 적어도 두 개의 신전이 초심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세 번째 신전은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숲 한 가운데 있는 작은 동굴에 세워졌다.
아뀔레이아시(市)는 분명히 이 로마 식민지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
이 곳의 중요한 교회는 주변지역에 미트라교를 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 항구에서 판노니아를 지나 다뉴브강 유역의 군사요새로 가는 길을 따라
나타난 도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외국신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도시들은 아이모나,라또비치,노비오두눔이었으며,
주요한 곳으로는 사베강 유역의 시스키아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북부 아드란스와 셀레이아,
포에토비오 쪽으로 가면,
거기서도 역시 미트라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식으로 아드리아해의 해안에서 모이시아로,
또는 카르눈툼으로 여행하는 신자들은 여행하는 곳 어디에서나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지역들에서는,
알프스산맥의 남쪽에 있는 나라들에서처럼,
동방의 노예들이 미트라교의 전도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도활동을 한 조건은 아주 달랐다.
이 노예들은 이 나라에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농업노동자나 부요한 지주들의 청지기나 자치도시의 고용인으로 ‘라티푼디아(latifundia:
라틴어로 ’넓은 땅’이라는 뜻. 노예노동으로 운영되던 대농장-역주)와 이탈리아 도시들에 있었기 때문이다.
옛 문명국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인구감소로 인해 그렇게 황폐화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밭을 경작하거나 도시들을 운영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고용할 의무는 없었다.
여기서 많은 인간을 수입하는 것은 개인이나 자치단체가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행정장관이나 재정담당관이나 제국영지 담당관이나,
또는 노리쿰의 경우처럼 총독들 자신이 휘하에 수많은 세리(稅吏)와 재무관과
온갖 종류의 사무관들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들이 관할하는 영역에 흩어져 있었다.
대개 이 하급관리들은 자유민으로 태어난 자들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광산과 채석장의 생산물을 임차하거나 관세집행보고서를 임차한 대사업가들은
그들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수많은 직원들을 고용했는데,
거기에는 보수를 주고 고용한 자들과 노예들이 다 있었다.
황제의 관리이거나 세리들인 이 계층출신인 사람들의 직함이 남부 판노니아와 노리쿰의
미트라교 비문에 가장 자주 나온다.
모든 영지들에서,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는 하급고용인들이 외국종교들을 퍼뜨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중앙권력의 이 관리들은 지역주의와 대조되는 로마제국의 정치적 통일성을 대표자들이었으며,
또한 지역종교에 대립하는 보편적 종교의 사도들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군주들의 명령 아래 두 번째 군대(‘군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집단’이라는 뜻-역주)를
만들었으며,이교(異敎)가 발전하는 데 그들이 끼친 영향은 군대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들은 군인들처럼 아시아의 나라들에서 대규모로 선발되었다.
그들은 또한 군인들처럼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계속 거주지를 바꾸었다.
그들의 명단에는 군단(軍團)의 명단처럼 온갖 국적의 개인들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제국의 행정은 사무원들과 병참장교들과 함께 이 정부에서 저 정부로
미트라의 제의에 관한 지식도 전해 주었다.
캅파도키아의 케사레아에서 나온 독특한 유물을 보면,
아마도 토착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한 노예,
즉 제국재정 담당 사무원(arcarius dispensatoris Augusti)이 아주 훌륭한 라틴어로
태양의 형상을 미트라에게 바치고 있다.
달마티아의 내지에 페르시아신의 유적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것은,
이 영지가 일찍이 그 군단과,
재정업무와 우편업무와 관세업무 담당자들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몇몇 비문에 그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특히 변경의 영지들은 로마황제들의 재정담담관들이 많았음이 분명하다.
이는 상품을 수입하는 업무가 여기에 모여 있을 뿐 아니라,
제국재정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이 군대유지비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키아와 아프리카의 미트라교 문서에서 출납원과 세리와 세입징수원
(dispensatores,exactores,procuratores)과 기타 비슷한 직함을 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란의 신이 군영에 인접한 도시들로 파고 들어간 두 번째 방법이 있다.
이미 보았듯이,
군영에서 미트라는 동방의 병사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이 행정관들과 장교들의 정치적 기능뿐 아니라 일반적인 가정생활로 인해 공적인
노예와 개인노예들은 모든 주둔지로 옮겨 다녔다.
여기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새로워졌으므로,
상인들과 무역상들이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이 지역들로 몰려들었다.
또한 이미 지적했듯이,
퇴역군인들은 항구와 대도시에 정착했으며,
거기서 상인들과 노예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미트라가 이러저러한 식으로 어떤 지역에 전파되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할 때,
우리의 보편화가 분명히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미트라의 제의가 전파된 공통의 원인은 서로 뒤섞이고 한데 얽혀 있어서,
그 얽힌 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 풀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자주 그렇지만,
우리는 유일한 안내자로 연대가 불확실한 비문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신의 이름 옆에 단지 입문자나 제사장의 이름이 나온다.
각각의 경우에 새로운 종교의 전파를 촉진한 상황을 확정할 수는 없다.
더욱 일시적인 영향을 받은 곳은 우리의 시야를 거의 완전히 벗어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즉위할 때(서기 69년),
태양을 숭배하는 데 충실했던 시리아 군대가 이탈리아에 장기간 주둔한 것은
지속적인 영향이 있었던 것일까? 알렉산더 세베루스(서기 222-235년)가 독일로 이끌고 들어간 군대,
즉 람프리디우스가 기록한 대로,
대체로 아르메니아인들과 오스로이니아인들과 파르티아인들로 구성된
(potentissima per Armenios et Osrhoenos et Parthos) 그 군대는 라인강 양안(兩岸)에 미트라교를
전파하는 데 새로운 자극을 주었는가? 로마가 해마다 유프라테스강의 변방에 보낸 고위관리들 중
일부가 자기들이 다스리는 민중들의 신앙을 받아들였는가? 캅파도키아나 폰투스에서 온 제사장들이
시리아여신의 전도자들처럼 대중의 신뢰를 얻어 거기서 생계를 확보하려는 기대를 가지고 배를 타고
동방으로 갔는가? 공화정 아래에서 갈대아인 점성술사들이 이탈리아의 큰 도로를 방랑했는가?
유베날리우스(서기 55/60-127: 로마의 시인이자 풍자작가-역주) 시대에 콤마네게와 아르메니아의
점술가들이 로마에서 자기들이 받은 신탁(神託)을 팔았는가? 이러한 부수적인 전파방법은
동방종교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사용하던 것으로,미트라교 전파자들도 유용하게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트라교를 전파하는 데 가장 적극적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병사들과 노예들과 상인들이었다.
이미 제시한 증거 외에도,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상업활동이 있었던 지역과,
아시아인 이민자들이 엄청난 규모로 흘러들어온 나라들에 미트라교 유적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정을 확립하기에 충분하다.
다른 지역에 이러한 유적들이 없다는 것 또한 우리의 입장을 뒷받침해 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저 페르시아의 제의는 왜 원래의 아시아(Asia Propria)와 비티니아와 갈라티아와,
여러 세기 동안 미트라를 예배한 그 지역들에 인접한 영지들에서는 아무 흔적도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 나라들의 생산이 소비를 능가했기 때문이며,
그들의 외국교역이 희랍인 선주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이 사람들을 수입하지 않고 수출했기 때문이며,
적어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는 아무 군단도 그 영역을 방어하거나 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랍은 민족적 자존심과 자신들의 영광스런 과거를 숭배함으로써 외국신들의 침입을 막았다.
이러한 과거숭배는 로마제국 아래에서 희랍정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러나 외국인 병사와 노예들이 없었기 때문에,
희랍은 그 민족종교에서 벗어나는 일이 전혀 없었다.
끝으로 미트라교 유적은 고올지방의 중심부와 서부지역과 스페인 반도와 영국남부에는
거의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달마티아 내지에서도 드물다.
이 지역들에서도 군대가 지속적으로 주둔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시아인들이 유입되지 않았다.
이 나라들에서는 또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국제적인 교역의 큰 중심지도 없었다.
반면에 로마시에서는 온갖 종류의 것이 특히 풍부하게 발견되었는데,
사실상 어떤 영지들보다도 더욱 그랬다.
실제로 로마는 제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미트라교가 성공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에는 항상 대규모의 수비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끌고 온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퇴역군인들이 영예롭게 퇴직하고 나서 말년을 보내려고 거기로 몰려들었다.
부유한 귀족계급이 거기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의 궁전은 황제의 궁전처럼 수천 명의 동방노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로마는 제국의 중앙행정부가 있는 곳으로,
공적인 노예들이 각 부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끝으로,
모험심을 지녔거나 재난을 당해 명성과 행운을 찾아 이리로 오게 된 모든 사람이
이 “우주의 숙소”에 모여들었으며,
그들의 관습과 종교들을 그리로 가져왔다.
아울러, 로마에 아시아의 수많은 왕자들이 가족과 수행원들과 더불어 볼모나 도망자로 살고 있었는데,
이것도 마즈다교 신앙의 전파를 촉진시켰다.
대다수의 외국신들처럼 미트라도 분명히 종교구역(pomoerium) 밖에 신전들이 있었다.
이 기념물들 중 많은 것이 이 경계 너머에서,특히 근위병 군영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서기 181년 이전에 미트라는 성스런 장벽을 넘어가 그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았다.
이 거대한 도시에 미트라교가 들어간 과정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은 불행히도 불가능하다.
이 페르시아 종교의 로마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에는 정확한 날짜와 확실한 기원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다.
우리는 미트라교가 로마에서 얻은 고도의 명성을 겨우 일반적인 방법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미트라교가 매우 유행했음은 백여 개의 비문들과,
75개 이상의 조각상 파편과,
도시의 모든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일련의 신전들과 예배당들로 입증할 수가 있다.
이 동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카피톨의 동굴 속에 르네상스 시기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것인데,
거기에서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거대한 보르게시 부조가 나왔다(그림 4를 보라). 어느 모로 보나,
이 유물은 2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트라가 그 때까지 부분적으로 애매한 상태에 있었다가,
로마귀족들과 제국궁정이 애호하는 신들 중 하나가 된 것은 이 시기였다.
우리는 미트라가 추방되거나 이주한 아시아인들의 경멸받는 신으로서 동방에서 온 것을 보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사회의 하층계급들 사이에서 최초의 신자들을 얻었다는 것이고,
중요한 사실은 미트라교가 오랫동안 하층민의 종교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고대의 비문들은 이러한 주장이 진실이라는 데 대한 웅변적인 증거인데,
그것들은 예외 없이 노예나 자유민,
현역군인이나 퇴역군인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민이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얼마나 좋은 운명을 갈망할 수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퇴역군인들이나 백부장들의 아들들이 부와 영향력을 갖춘 시민들이 된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연스런 발전에 의해,
라틴 땅에 이식된 종교는 영향력뿐 아니라 재물도 많이 늘 수밖에 없었으며,
그 신자들 가운데는 수도의 영향력 있는 관리들과 자치도시의 교회와 성곽의 고관들도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치세(서기 138-180) 하에서 학식 있는 이들과 철학자들이 이 동방종교의
교리와 의식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 학식 있는 루키아누스는 미트라교의 제의를 풍자했으며,
서기 177년에 켈수스는 그의 「진실한 가르침」(True Discourse)에서 분명히 미트라교의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겨루게 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팔라스라는 사람이 미트라교에 특별한 작품을 바쳤으며,
포르피리우스는 유불루스라는 사람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몇 권으로 된 「미트라교 연구」(Mithraic Researches)라는 책을 출판한 사람이었다.
만일 이 작품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분명히 대대로 로마제국의 적으로 있던 자들의 신앙으로 넘어간 로마기병대
전체(장교와 사병)의 이야기와,
자기 조직의 노예들에 의해 개종한 주인들의 이야기를 그 책에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유물들에는 자유민들의 이름뿐 아니라 노예들의 이름도 적혀 있는 경우가 자주 있으며,
노예가 입문자들 중 최고위에 이른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집단들에서는,적어도 겉보기에는,마지막인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인 자가 마지막이 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우리가 인용한 구체적인 사실들에서 한 가지 주요한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저 페르시아 종교가 지극히 빠르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총구에서 나온 화염처럼 갑자기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 거의 동시에 나타났으니,
로마,다뉴브강 유역의 카르눈툼,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에서 그러했다.
분명히 마즈다교의 이 개혁교회는 2세기의 사회에 강력한 매력을 풍겼는데,
우리는 오늘날 그 원인을 겨우 불확실하게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 황소를 죽이는 신의 발 아래 군중을 끌어 모은 자연스런 매력에는 가장 강력한 외적인 요소,
즉 로마제국의 호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람피리디우스(Lampiridius)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에 의하면,
콤모두스 황제(서기 180-192년)가 미트라교에 입문하여 그 제의인 피의 의식에 참가했는데,
비문들에 의하면,
미트라교 제사장들에 대한 군주의 이러한 겸양은 로마세계에 엄청한 파문을 일으켰으며,
저 페르시아 종교에 대단히 도움이 되었다.
이 때부터 로마제국의 고관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따라 저 이란 종교의 열렬한 신봉자들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호민관들과 장관들과 사절들과,
후에는 페르펙티시미(perfectissimi)와 클라리시미(clarissimi)가 비문을 봉헌한 자들로 자주 나온다.
그리고 이교가 몰락할 때까지 귀족사회는 그토록 오랫동안 군주들의 사랑을 받은 저 태양신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관들이 저 새로운 신앙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인 정치적 도덕적 동기를 이해하려면,
군주의 권력에 대한 미트라교의 교리와,
로마황제들의 신정론적(神政論的)인 주장과,
그것의 연관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제3장 미트라와 로마제국의 권력
미트라교가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앞서 전해진 다른 동방종교의 운명,
특히 이시스(Isis)교가 겪었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초기 황제들의 치하에서 여러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추방당한 점성학자 또는 “갈대아인들” 가운데에는,
페르시아신들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랑하는 점술가들은 엄격하지만 무력했던 원로원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수도에 나타났지만,
그들은 명확한 종교를 전파하지도 못했고 정식으로 성직자 집단을 이루지도 못했다.
1세기 말경에 미트라교가 서방 전체에 퍼졌을 때,
외국 전도자들에 대한 로마정책의 특징이었던 오만한 침묵이나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내 놓고 호의로 바뀐 것은 아니라고 해도 자비로운 관용정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네로(서기 54-68년)는 이미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가 로마에 데려온 조로아스터교
제사장들의 인도 아래 미즈다교 제의에 입문하려는 욕망을 표현했으며,
티리다테스는 네로에게서 미트라 자신이 투사된 모습을 보고 그를 예배했다.
불행히도,
우리는 “불굴의 태양 미트라의 예배자들”(Cultores Solis invicti Mithrae)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집단의 존재를 처음에 단순하게 수용했는지,
아니면 국가가 인정을 하고 나서 처음 재산을 소유하고 사업을 할 권리를 얻었는지에 대해 어떤 문서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여하튼 행정과 군대분야에서 언제나 그토록 많은 추종자들이 있던 종교가 권력에 의해
오랫동안 변칙적인 상태로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아마도 법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이 종교집단은 장례모임으로 조직화되어
이런 종류의 협력에 걸맞는 특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을 되찾았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페르시아 종교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이 뻬시누스(Pessinus)의 “위대하신 어머니”(Magna Mater)의 흔적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위대하신 어머니” 신앙은 3세기 전에 로마인들이 엄숙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나아가 황소의 피로 하는 세례의식(taurobolium)은 고대 마즈다 신앙의 영향 아래에서
프리기아 여신의 제의 속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아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서기 161-180년) 때부터 시민적 특전을 허가받아 촉진된 것으로 보인다.
진실로 우리는 두 신의 이러한 결합이 원로원이나 군주에게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다.
그랬다면,이 외국신은 즉시로 이탈리아 시민권을 얻었을 것이고,
퀴벨레나,코마나의 벨로나(Bellona of Comana)와 같은 특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적인 권력 편에서 어떤 공식적인 선언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트라가 아티스(Attis)처럼(미트라는 아티스를 닮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예배에서
위대하신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위대하신 어머니가 누린 공식적인
보호에 철저히 동참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미트라교의 성직자계급은 국가재정에서 정규의 기부금을 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제국의 지갑과 자치도시의 돈궤가 예외적인 경우에 그들을 위해 열린 적은 있지만.
2세기 말경에,이 이란종교를 다소 신중하고 상냥하게 대하던 로마황제들이 갑자기
이 종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콤모두스 황제(서기 180-192년)는 이 종교의 신봉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비밀제의에 참석했다.
이 군주의 안녕을 빌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그의 통치시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든 간에,
수많은 봉헌비문들이 발견되었으므로,
우리는 이 제국적인 회심이 미트라교의 전파에 상당한 힘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토니우스 시대의 마지막 황제(콤모두스 황제-역주)가 그렇게 고대의 편견을 부순 후에,
그의 후계자들의 보호는 이 새로운 종교를 결정적으로 보증해 주었던 것 같다.
3세기 초부터 미트라교는 아우구스투스 시대(the Augusti)의 궁정에 예배처가 있었고,
그의 신자들은 세베루스 황제와 필립푸스 황제를 보호해 달라고 가도와 희생제물을 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불굴의 태양“(Sol invictus)의 공식적인 제의를 제도화한 아우렐리아누스(서기 270-275년)는
자신의 제사장들에게 예배하라고 시킨 신과 동일시되는 이 신에 대해 단지 공감만을 느꼈을 수 있다.
서기 307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갈레리우스,리키니우스는 카르눈툼의 회의에서 다같이
”그의 제국의 보호자“(fautori imperii sui)인 미트라에게 신전을 바쳤다(그림 19).
황제자리를 차지한 마지막 이교도인 배교자(背敎者) 율리아누스는 이 수호신의 열정적인 신자였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를 예배하도록 했다.
그렇데 다양한 유형과 성향의 군주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미트라를 좋아한 것은 일시적인 유행이나
개인적인 기호 때문이었을 리는 없다.
거기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이 로마와 싸우기를 쉬지 않았던 적들 속에서 태어난
이 외국종교에 2백 년 동안이나 그토록 큰 편애를 보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국가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실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미트라교의 교리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정력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자신들의 개인적인 정책에 대한 지지와 독재적인 주장에 대한 든든한 옹호를 발견했다.
우리는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원수정치(元首政治)가 점차 발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존재하는 군주가 된 것을 알고 있다.
황제의 권력은 이론적으로는 국민에게서 나왔지만. 처음에 그는 단순히 로마의 제1행정장관이 이었다.
그는 집정관의 후계자요 최고의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직함으로 인해 이미 불가침이요 성스런 특성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법에 의해 제약을 받았던 그의 권력이,
일련의 권력찬탈을 겪은 후 완전한 전제주의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로,
그 국가의 절대군주도 비슷한 발전과정을 통해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
아니 신 자신(dominus et deus: '지배자이자 신‘이라는 뜻-역주)이 되었다.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 직후 우리는 케사르주의라는 본질적인 민주주의적 허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곧 서둘러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신전을 세웠으며,
특별한 제의로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
이 민족들의 군주에 대한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탈리아인들이 무리하게 노력하고 있던 미묘한 구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는,
군주는 언제나 왕(βασιλεύς)이자 신(θεός)이었다.
제국권력의 이러한 변형은 동방의 특성이 로마인들에 대해 거둔 승리였으며,
이는 종교적 개념이 법적 개념에 대해 거둔 승리였다.
그림 19. 카르눈툼에서 발견한 받침대
디오클레티아누스,발레리우스,리키니우스의 선물(T. et. M.,p. 491)
어떤 역사가들은 이 황제숭배의 조직화를 상세히 연구하여,
그것의 정치적 중요성을 밝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학적 토대의 특성을 아마도 그리 분명하게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시기에 군주들이 사후에 신적인 숭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에도 이러한 충성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살아 있는 인간을 왜 이렇게 신격화하는지,
또 상식과 건전한 로마의 전통에 아주 상반되는 이렇게 새로운 종류의 신격화가
어떻게 결국 거의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여론의 샐쭉한 저항은 아시아 종교들이 대중을 장악하자 사라졌다.
이 종교들은 군주가 인간보다 차원이 높다고 하는 교리를 이탈리아에 퍼뜨렸으며,
만일 그 종교들이 황제들과 특히 절대권력을 갈망한 자들의 호의를 얻는다면,
그것은 그 종교들이 그들의 전제정치를 교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지배라는 고대의 원칙 대신에 초자연적인 영향에 대한 믿음이 나타났는데,
이 믿음에는 상세한 설명이 붙었다.
이제 우리는 이 중요한 변화에서 미트라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역사자료에는 불완전한 정보만이 있을 뿐이다.
겉보기에 비슷한 점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로마인들이 이러한 모든 개념을 이집트에서 끌어왔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의 제도는 아주 여러 면에서 로마제국의 행정개혁에 영감을 주었는데,
이집트는 또한 로마에 신정정부(神政政府)에 대한 완전한 모델을 제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집트의 고대신앙에 의하면,
왕족의 기원이 태양신 라(Râ)에게 있을 뿐 아니라,
각 지배자의 영혼은 태양신 호루스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파라오들은 위대한 태양이 계속해서 화육(化肉)한 것이었다.
그들은 신들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하늘들을 가로질러 가는 것들(천체들-역주)과 같은 등급에서 예배를 받는 살아 있는 신들이었으며,
그들의 표지(標識)는 이 신의 것을 닮았다.
나일 골짜기의 지배자가 된 아케메네스 왕조와 그 후의 프톨레미 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들에게 바치던 충성맹세를 계승했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집트의 정치제도뿐 아니라 종교적 관습도 모두 신중하게 존중했다.
그들은 3천 년의 전통을 통해 이집트의 군주들이 지니게 된 특성을 계승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희랍인들도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이 신정설(神政說)은 거기서부터 로마제국의 아주 먼 변방에까지 퍼졌다.
이시스의 제사장들은 이집트에서 그것을 가장 대중적으로 전파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사회의 최고위층 가운데에서 개종시킨 자들은 그 사상에 물들었다.
이러한 특성이 황제들의 은밀한 또는 공공연한 야심을 부추겼으므로,
그들은 곧 공개적으로 그것을 편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이 이집트 교리의 전파로 힘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러한 교리를 즉시 거리낌 없이 강요할 수는 없었다.
1세기부터 그들 가정의 노예들과 하인들은 그들을 “우리의 신”(deus noster)라고 불렀는데,
이미 이들 중 반은 동방에서 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들은 이러한 이름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삼을 만큼 뻔뻔하지 않았다.
황제들 중 칼리굴라나 네로 같은 자들은 프톨레미 왕조가 작은 왕국에서 했던 역할을
세계무대에서 행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들은 여러 신들이 그들 자신 속에 화육했다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몽된 로마인들은 늘 그들의 과장에 분노했다.
라틴정신은 동방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엄청난 허구에 반발했다.
지배자의 신격화는 훨씬 후대에도 마지막 이교도들 가운데에서 완강한 적대자들을 만났다.
그 교리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알렉산더의 화현설(化現說)보다 훨씬 덜 조잡한 이론이 필요했다.
이러한 교리를 제공한 것이 바로 미트라교였다.
페르시아인들은 이집트인들처럼 자신들의 군주에게 복종했으나,
군주를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로마에서 황제의 “수호신”에게 그러했듯이 자신들의 왕의 “신”(demon)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그들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거하며 그 영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신적인 요소를 경배한 것일 뿐이다.
군주들의 권위는 단지 그것이 아후라-마즈다에게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은 아후라-마즈다의 신성한 뜻에 의해 왕좌에 앉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천지의 창조주의 “은총에 의해” 다스렸다.
이란인들은 이 “은총”을 눈부신 광휘,
또는 “영광”의 후광(後光)과 같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불로 묘사했다.
그것은 특히 신들에게 속하지만,
또한 군주들에게 빛을 발했으며,
그들의 권력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아베스타」에서는 이를 “흐바레노”(Hvaren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합법적인 군주들을 비추어 주고,
권력을 찬탈한 자들은 경건치 못한 자들로 보아 그들에게서는 그 빛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찬탈자들은 곧 재산과 더불어 왕관과 생명을 잃게 되었다.
한 편,
왕권을 얻고 지킬 만한 자들은 끝없는 번영과 명성과,
적에 대한 지속적인 승리를 보상으로 받았다.
페르시아인들의 이 특별한 개념은 다른 신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고대의 이민족들은 마즈다의 “영광”을 운명처럼 생각했는데,
이는 아주 그릇된 것이었다.
셈족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가다”(Gadâ)와 동일시했으며,
희랍인들은 그것을 “튀케“(Τύχη: ‘신들에게서 온 좋은 것’,
‘행운’-역주)라고 번역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붕괴하고 그 뒤를 이은 왕조들은 자신들의 계보가
고대의 지배자 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으므로,
당연히 이 특별한 ”튀케“를 경배했다.
그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합법적인 권력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흐바레노“도 마찬가지로 경배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데,
같은 동기로 캅파도키아,폰투스,박트리아나의 왕들과,
이란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셀류코스왕조의 왕들도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저 ”운명“의 보호자(protégé)들로 여겨졌다.
콤마네게의 안티오쿠스의 묘비에는 그가 자신을 여신과 동일시하기까지 한 것으로 나온다.
군주의 권력에 대한 마즈다교의 개념은 미트라교의 시대에 이렇듯이 서방에 속한 아시아 지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그것은 미트라교처럼 셈족의 교리와 뒤얽혔다.
운명이 왕권을 주고 또 다시 앗아간다는 믿음은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도 나타난다.
갈대아인들에 의하면,이제 운명은 별들이 있는 하늘의 회전에 의해 결정되며,
다른 모든 동료들을 명령하는 저 빛나는 천체(태양-역주)는 특히 왕의 별로 여겨졌다.
이와 같이 미트라와 동일시된 저 ‘불굴의 태양’(Ἥλιος ἀνίκητος)은 알렉산드리아 시대 동안에 일반적으로,
승리로 이끄는 ”흐바레노“를 주는 자로 여겨졌다.
이 신성한 은총을 받은 군주는 보통 사람들보다 높임을 받았으며,
신하들에게서 신과 대등한 자로 경배받았다.
아시아의 공국(公國)들이 몰락한 후,
그들의 왕조들이 행했던 그 공국들에 대한 공경은 로마황제들에게로 전해졌다.
동방사람들은 곧 이 지배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에게 경배를 드렸다.
왕들의 저 ”운명“은 그들에게 전능한 권력을 주었던 것이다.
시리아의 종교들과 특히 미트라교가 로마에 퍼짐에 따라,
셈족의 이론에 다소 물들기는 했지만,
고대의 마즈다교 이론은 공식적인 로마세계에서 점점 더 많은 전사들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수줍은 듯이,
그러나 나중에는 점점 더 대담하게,
성스런 제도들과 황제들의 공식적인 호칭에 나타나는 것을 본다.
황제들의 그러한 호칭의 의미는 마즈다교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
공화정 시기 이래로 로마인들의 ”운명”은 로마에서 다른 여러 이름으로 숭배를 받았다.
이 고대의 국교는 곧 동방의 신앙으로 가득 찼다.
동방에서는 모든 나라뿐 아니라 모든 도시도 자신의 신성한 “운명”을 예배했다.
플루타르크가 “튀케“가 앗시리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을 버리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나
팔레스타인 언덕에 거처를 정했다고 말할 때,
그의 비유는 그가 마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참되다.
또한 황제들은 아시아의 선임자들을 모방하여,
그들 자신의 특별한 보호자인 여신,
즉 이 국가의 여신 곁에서 숭배를 받는 데 쉽게 성공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래로 ”거룩한 운명“(Fortuna Augusti)이 동전에 새겨지는데,
전에 디아도키(Diadochi,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역주)의 신하들이 그랬듯이 이제는 황제들의 신하들이
자기 군주들의 ”운명“을 걸고 맹세를 했다.
자신들의 보호자인 여신에 대한 이 지배자들의 미신적인 헌신은 아주 대단해서,
적어도 2세기에는 언제나,
심지어 잠자는 동안이나 항해 중에도 그 여신의 황금상을 앞에 두었다.
그들이 죽으면 그 황금상은 후계자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왕의 운명”(Fortuna regia)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튀케 바실레오스”(Τύκη βασιλέως)의 번역어이다.
실제로 이 수호신이 그들을 버리면,
그들은 파멸당하거나 적어도 액운과 재난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 수호신이 그들과 함께 있는 한,
그들은 오직 성공과 번영밖에 몰랐다.
로마에서 이 동방종교들,
특히 미트라교가 승리한 때인 콤모두스(서기 180-192)의 치세 이후,
우리는 황제들이 공식적으로 피우스(pius: 라틴어로 ‘신을 향한’,
‘거룩한‘, 경건한’이라는 뜻. 영어 pious의 어원-역주),
펠릭스(felix: 라틴어로 ’행운을 가져오는‘,'복된’이라는 뜻-역주),
인빅투스(invictus: 라틴어로 ’불굴의‘라는 뜻-역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보는데,
이러한 호칭들은 3세기부터 정식으로 제국의 조약문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별칭은 로마가 동방에서 빌려온 특별한 운명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군주의 헌신만이 하늘이 그에게 주신 특별한 호의를 지속시킬 수 있으므로,
군주는 ’신을 향하고 있다‘(pius).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비춤을 받는다는 결정적인 이유로 인해,
군주는 ’복되다‘(felix,εὐτυχής). 끝으로,
제국의 적들의 패배는 그의 수호자의 “은총”이 쉬지 않고 그를 돌본다는 가장 분명한 표시이므로,
군주는 ’패배하지 않는다‘(invictus). 합법적인 권력은 세습이나 원로원의 투표가 아니라
신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고대 마즈다교 사상과 일치하며,
위에 말한 세 개의 형용사 중 마지막 것은 파르시즘Parsism: 조로아스터교-역주)과
혼합된 점성학 이론의 영향을 보여 준다.
‘불패‘(不敗,invictus,ἀνίκητος)라는 말은, 이미 보았듯이,
동방에서 들어온 별의 신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특히 태양의 특징이다.
황제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천상의 신과 닮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를 채택했다.
그것은 즉시로 그 신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국가의 운명이 개인의 운명처럼 별들의 행로와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는 교의는,
천체들의 우두머리가 왕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왕들을 왕좌에 앉히거나 폐위시키거나 하는 것은 바로 그이다.
그들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고 재난을 가져다 주는 것도 바로 그이다.
태양은 황제의 동료(comes)이자 개인적인 구원자(conservator: 뀌몽은 이 라틴어 단어를
’구원자‘[saviour]로 번역했으나 원래는 ’보존자‘라는 뜻임-역주)로 여겨졌다.
우리는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미트라를
“그의 제국의 보호자”(fautor imperii sui)로 경배한 것을 보았다.
“불패”(不敗,invictus)라는 별명을 택함으로써,
황제들은 자신들이 태양과 친밀한 동맹을 맺었음을 공식적로 선언했으며,
자기들이 태양과 닮았음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영원한”이라는 훨씬 더 야심 찬 별명을 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일상적으로 쓰였지만,
3세기에는 결국 공식적인 전례문(典禮文)에 나오게 되었다.
이 별칭은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동방의 태양신에 의해 태어났다.
태양신 숭배는 서기 초에 이탈리아에 퍼져 있었다.
그것이 군주들에게 적용되면,
그것은 태양과 그들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군주가 자연인 태양과 실제적인 동일성에 의해 결합되었다는 확신을
처음에 말한 별명보다 더 분명히 보여준다.
이 확신은 또한 궁정의 관습에도 나타나 있다.
황제의 궁전에서 타오르며 공식적인 의식에서 황제 앞에 가져다 놓는 저 꺼지지 않는 불은,
별들 속에서 영원히 빛나며 언제나 어둠에 대해 승리하는 천상의 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이 등불은 또한 페르시아 왕들에게도 그들의 권력이 항구적이라는 상징적 역할을 했다.
그것은 디아도키에게는 신비적인 개념의 표현이었으며,
그들에게서 로마인들에게로 전달되었다.
또 셀류코스 왕조와 프톨레미 왕조를 모방하여 네로 이래로 황제들이 군주권의 상징으로
채택한 빛나는 왕관은,
이러한 정치-종교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그것은 태양과 그것이 발하는 광선의 광휘를 상징하는 것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별의 신(the planet-god)의 모습을 군주에게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들을 비추는 저 빛나는 원반(태양-역주)과 지상에서 그것을 대신하는 인간의 형상 사이의 성스런 관계는 무엇인가? 동방인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왕을 신격화하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사산조의 왕들은 그들 이전의 파라오들처럼 자신들이 “해와 달의 형제들”이라고 선언했으며,
거의 비슷하게,
로마황제들은 아시아에서 헬리오스(희랍신화의 ‘태양신’-역주)가 연속해서 화신한 것으로 여겨졌다.
어떤 독재자들은 이 신과 비슷해졌다고 인정하여 조각상을 세우고,
헬리오스의 특징들로 그 조각상을 장식했다.
그들은 미트라의 방사체(放射體,
emanations)로 숭배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라틴인들의 깨어 있는 의식은 이러한 비이성적인 주장을 거부했다.
위에서 말했듯이,서방은 그러한 절대적 주장을 조심스레 피했다.
그들은 비유로 만족했고,군주가 인간세상을 다스리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피할 수 없지만,
그를 우주를 비추며 그 운명을 통제하는 저 천상의 발광체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온갖 해석을 할 수 있는 애매한 표현을 더 좋아했다.
그들은 군주가 불멸의 존재들과 인척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은 인정했으나,
그 특징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조심했다.
그러나 태양이 황제를 보호하고,
초자연적인 힘이 태양에게서 황제에게로 내려온다는 개념은 점차로 그들의 본질이 같다는 개념으로 나아갔다.
이제 영혼론은 미트라의 제의 속에 이 본질적 동일성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갖추어져 있다고 가르쳤으며,
거기에 거의 과학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이 교의에 의하면 영혼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 선재(先在)했는데,
그들이 땅으로 내려와 육체를 입었을 때(그 후 그들은 거기 갇히게 되었다),
그들은 행성들의 영역을 지나오면서 각 영역에서 그 행성의 특질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모든 점성학자들에게 태양은 별의 왕이었으며,
결국 그가 자신이 선택한 자들에게 군주의 덕을 주고,
그들을 왕의 영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이 로마황제들의 주장과 얼마나 잘 맞았는지는 즉시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올 때부터 별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도록 정해져 있었으므로,
태생적으로 세계의 주인(deus et dominus natus)이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태양의 일시적인 화신이었으며,
그들 속에는 태양의 요소들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신성했다.
그들은 별들이 있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사후에는 그들과 동급인 신들과 함께 영원을 넘어 거기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죽은 황제들이,미트라가 생의 마지막에 그러했듯이,
빛나는 전차를 탄 헬리오스에 의해 하늘로 옮겨져 거기 태어난다고 묘사했다.
그러므로 페르시아의 신비에 관한 교리는 군주들을 인류의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기원이 다른 두 개의 이론을 결합한 것이었다.
한 편에서는 고대 마즈다교의 “흐바레노”라는 개념이 왕을 천상의 은총으로 비추어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왕의 운명”이 되었다.
또 한 편으로는 군주의 영혼은 “운명”이 지상의 영역으로 내려오도록 한 순간에
태양에게서 지배권을 받는다는 개념이 있었는데,
이 개념은 그 지배권을 받은 자가 태양의 신성을 나누어 갖고 지상에서
태양의 대리자가 된다는 주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불합리하거나 심지어는 기괴해 보이지만,
수 세기 동안 다양한 유형과 국적을 지닌 수백만의 사람들을 통제했으며,
그들을 같은 군주에 대한 믿음의 깃발 아래 결합시켰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학문적 전통을 통해 언제나 고대의 공화주의적 정신의 잔재를 보존하여
이 점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대중의 정서는 분명히 이 이론적 망상을 받아들여 이교가 지속하는 동안 그 망상에 지배당했을 것이다.
이 개념들은 우상파괴의 시기를 견뎠으며,
궁정의 제의에서나 대중의 숭배를 통해 군주라는 인물은 초인간적인 특징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다.
아우렐리우스(서기 270-275)는 그의 통치영역에 있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아주 포괄적인
공식적 종교를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페르시아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국의 절대주의를 정당화하고 지탱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의 반발로 깨져 버렸다.
그래도 3세기의 황제들이 꿈꾸었던 왕권과 제단의 동맹(종교와 정치의 동맹-역주)은 다른 형태로 실현되었다.
운명이 이상하게 바뀌어,
교회가 그 기초를 부숴버린 그 건물을 교회 자신이 지탱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라피스와 바알과 미트라의 제사장들이 길을 닦아놓은 일이,
그들 없이,그들과 대립하여,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방지역에 왕의 신성한 권리를 선포한 최초의 인물들이었으며,
그 메아리가 “역사시대의 마지막 시기까지” 울려 퍼질 운동을 시작한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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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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