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스크랩] 기독교 교리.예식,절기의 모형 미트라교(02)

평창군 대하리 2009. 9. 12. 20:59

제4장 미트라의 신비의 교리
3세기 이상 미트라교는 로마제국의 가장 먼 영역에서 지극히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실행되었다.
당분간은 이 기나긴 시기 동안 미트라교의 신성한 전통이 변치 않고 남아 있었다거나,
차례로 고대인들의 마음을 지배했던 철학자들이나 로마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그 전통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분명히 페르시아의 신비들이 서방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의 여러 단계를 확인하여 거기서 나타났을 지역적 차이를 확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트라교가 가르친 교의의 특성을 대강 묘사하고,
그 교의에 첨가된 내용과 수정된 내용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변화는 대체로 피상적인 것이었다.
가장 먼 시기와 장소에서 발견된 성상(聖像)과 그림,
성직자계급의 형태가 같다고 하는 것은 마즈다교가 라틴국가들에 들어와 개혁되기 전에 이미
그 신학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논리적 결합이 없이 신앙과 제의가 모여 있던 고대 그리이스-로마의 이교와 달리,
미트라교는 과학에서 근본적인 원리를 빌려온 독창적인 신학과 교리체계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미트라가 서방에 소개된 유일한 이란의 신이며,
미트라교에서 미트라와 직접 관련이 없는 모든 것은 후천적이고 최근에 덧붙인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우세하다.
이것은 근거 없고 잘못된 생각이다.
미트라는 마즈다교의 여러 신들이 대규모로 전해지는 가운데 이주한 것이며,
만일 미트라가 그 신자들의 눈에 미트라교의 주요한 영웅으로 보였다 하더라도,
그가 최고신은 아니었다.

 
주르반교의 제사장들의 신학을 이은 미트라교 신학에 의하면,
신들의 위계의 정점과 만물의 시초에는 가없는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그것을 아이온(Αἰών: 희랍어로 ‘시간’,
‘세대‘-역주), 사이쿨룸(Saeculum: 라틴어로 ’세대‘-역주),
크로노스(Κρόνος: 희랍신화의 시간의 신-역주),
또는 사투르누스(Saturnus: 로마신화의 농업과 문명의 신으로 희랍신화의
크로노스와 동일시됨-역주)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이름들은 편의상 우연히 붙은 이름이었다.
미트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이름도 성(性)도 욕망도 없는 신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동방의 원형을 모방하여,
그는 사자머리를 하고 몸통은 뱀이 감싼 인간괴물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조각상이 다양한 특징을 지닌 것은 미트라라는 신이 만화경(萬華鏡)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신성한 주권을 나타내는 홀(笏)과 큰 번개 지니고 있으며,
손에는 하늘들의 군주로서 하늘들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의 날개는 그가 빨리 날 수 있다는 상징이다.
그를 물결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뱀은 일식 때 태양이 가는 뒤틀린 길을 나타낸다.
그의 몸에 새겨진 12궁도(宮圖)의 기호와 계절의 상징은 천상과 지상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월이 영원히 흘러감을 나타낸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고 파괴한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4요소의 주인이자 지배자이다.
그는 실제로 그의 인격 속에 모든 신들의 권능을 결합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가 홀로 낳은 자들이다.
그는 때때로 운명과 동일시되며,
어떤 때는 태초의 빛이나 태초의 불과 동일시된다.
이 두 개념으로 인해 그는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최고의 원인과 비교할 수 있다.
그 열(熱)은 만유에 스며있고 만유를 형성했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숙명(宿命,
Εἵμαρμένη)이었다.
그림 20-23과 49를 보라.

 
미트라교 전파자들은 세대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으로 세계의 기원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풀려고 했다.
희랍뿐 아니라 인도에서 발견한 고대신앙에 의하면,
첫 번째 원리가 태초의 한 쌍인 하늘과 땅을 낳았는데,
땅은 오빠에 의해 임신하여 거대한 바다를 낳았다.
바다는 그 부모와 힘이 같았으며,
그들과 함께 미트라교 만신전(萬神殿)의 3명의 최고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3명의 신과 그들이 나온 크로노스(시간)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별이 있는 하늘들의 회전이 모든 사건의 경로를 결정한다고 믿었는데,
그 하늘들이 때로는 영원한 운명과 혼동되었던 것 같다.

 
 
그림 20. 영원한 시간을 나타내는 미트라교의 크로노스(아이온 또는 주르반교의 아카라나[Akarana])
 
 
이 신상은 앞에서 말한 오스티아의 미트라교 신전에서 발견했다.
거기서 C. 발레리우스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들들이 서기 190년에 이 신상을 봉헌했다.
이 사자머리 신상은 완전히 나체인데,
그 몸은 뱀이 여섯 번 감싸고 있고,
뱀의 머리는 신의 두개골 위에 놓여 있다.
등에서 나온 네 개의 날개는 계절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양손에는 열쇠를 하나씩 가지고 있고,
아울러 오른손에는 권위의 상징인 긴 홀(笏)을 들고 있다.
가슴에는 번개가 새겨져 있다.
신상의 좌대에는 불카누스(Vulcanus: 로마신화의 불과 대장장이의 신-역주)의 망치와 부집게와,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 로마신화의 의술의 신-역주)(어쩌면 태양이나 아티스)에게
바친 수탉과 솔방울과,

메르쿠리우스(Mercurius: 로마신화의 웅변가,장인,상인,
도둑이 신. 희랍신화의 헤르메스에 해당함-역주)의 지팡이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미트라교의 사투르누스의 특징적인 물건들이며,
그 안에서 모든 신들의 권능이 화현되었음을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T. et M.,p. 238).

 
 
이 세 명의 우주적인 신들은 덜 일시적인 다른 이름으로 인격화되었다.
하늘들은 다름 아닌 오르마즈드 또는 유피테르(Jupiter: '쥬피터‘는 영어식 발음임-역주)였고,
땅은 스펜타-아르마이티(Spenta-Armaîti) 또는 유노(Juno: 유피테르의 아내.
희랍신화의 헤라에 해당함-역주)와 동일시되었으며,
바다도 마찬가지로 아팜-나파트(Apâm-Napât: 인도신화의 바다의 신-역주) 또는 넵튠이라고 불렀다.
희랍신들의 계보처럼 미트라교의 전승도 세계의 지배에 관해 제우스가 첫 시대의 왕인
크로노스를 계승했다고 말했다.
부조(浮彫)들에서 마즈다교의 이 사투르니우스가 그의 아들의 손에 번개를 전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배권의 상징이었다.
그 후 유피테르와 그의 배우자인 유노가 모든 신들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 한 쌍의 신들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림 21. 플로렌스에서 발견된 미트라교의 크로노스(T. et M.,p.259)
 
 
 
 
그림 22. 미트라교의 크로노스(아이온 또는 무한한 시간)
 
지구에 곧게 서 있는 사자머리의 나체신상. 양손에 열쇠를 쥐고 있으며,
네 개의 날개가 있고,
뱀이 몸을 감싸고 있는데,
뱀의 머리는 신상의 두개골 위로 지나가 입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16세기에 로마의 퀴리날과 비미날 사이에서 발견한 미트라교 신전의 것을 바르톨 리가 모사한 것이다
(T. et M.,p. 196).

 
 
 
그림 23. 사자머리를 한 미트라교의 크로노스
 
 
흰 대리석에 새긴 부조. 그림 22의 신상과 같은 신전에서 발견. 허리까지는 나체이고 다리에는
넒은 바지를 입었으며,
팔은 벌리고 있고,
양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다.
등에서는 네 개의 날개가 나와 있는데,
두 개는 위로 두 개는 아래로 향하고 있으며,
각 날개 주위에는 뱀이 한 마리씩 있다.
신 앞에는 불이 타오르는 원형의 제단이 있고. 신의 입에서는 그의 숨을 나타내는
끈이 제단의 불까지 뻗쳐있다(T. et M.,p. 196).

 
 
올림푸스산의 신들은 실제로 천상의 유피테르와 지상의 유노의 결혼으로 나왔다.
그들의 맏딸은 포르투나(Fortuna primigenia: 이 란틴어는 '최초로 태어난 자 포르투나‘라는 뜻임-역주)인데,
그녀는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게 육체의 온갖 은총과 영혼의 온갖 아름다움을 준다.
그녀의 자비로운 아량은 운명의 변치 않는 엄혹함을 나타내는 아낭케(Anangke)와 대조적이다.
테미스(themis: 희랍어로 '법칙’이라는 뜻-역주)와 모이라(moira: ‘희랍어로 ’운명‘의 뜻-역주)는 운명의
다른 인격화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특성을 나타낸다.
이 지배자 부부는 또한 그들과 동등한 넵튠을 낳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불멸의 존재들을 낳았다.
성스런 시가(詩歌)가 영웅담을 전하는 아르타그네스(Artagnes) 또는 헤라클레스,
금속의 신이며 전투에서 신심 깊은 전사들을 구원하는 샤흐리바르(Shahrîvar) 또는 마르스,
불의 수호신인 불카누스 또는 아타르(Atar),
제우스의 전령인 메르쿠리우스,
성스런 음료를 제공해 주는 식물의 인격화인 박쿠스 또는 하오마(Haoma),
말들과 농업의 보호자인 실바누스 또는 드르바스파(Drvâspa)가 그들이다.
또 아나이티스(Anaïtis)가 있는데,
그녀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물의 여신으로,
비너스와 퀴벨레와 비슷하며,
전쟁을 주재하므로 미네르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화에 쓰이는 꿀을 만드는 디아나 또는 루나,
왕들에게 승리를 주는 바나인티(Vanaiti) 또는 니케,
완전한 덕(德)인 아샤(Asha) 또는 아레테와 기타 신들이 있었다.
이렇게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올림푸스산의 태양이 닿는 정상에서 유피테르 또는 제우스와 함께 왕좌에
앉아 천상의 왕실을 이루고 있었다.

 
지고한 신들이 눈부신 광명 속에서 거주하는 빛나는 곳과는 대조적으로 지구의 내부에는 어둡고
음침한 영역이 있다.
여기서 아흐리만 또는 플루토가 유피테르처럼 무한한 시간에서 태어나 헤카테(Hecate: 희랍어로
‘자신의 뜻을 행하는 여인’이라는 뜻. 지하세계와 관련 있는 희랍신화의 여신-역주)와 함께
불순한 포옹에서 나온 악한 괴물들을 다스리고 있다.

 
지옥의 왕과 이렇게 악마적으로 결합한 자들은 그 후 위로 올라가 하늘을 급습했으며,
크로노스의 후계자를 권좌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신들의 지배자에게 패한 희랍의 거인들처럼 이 반란자인 괴물들은 다시 자기들이 나온 심연으로
내팽개쳐졌다(그림 24).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서 도망쳐 지상을 배회하며 불행을 퍼뜨리고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켰다.
인간들은 자기들을 위협하는 악을 막기 위해 속죄제물을 바쳐 이 사악한 영들의 기분을 맞추어야 했다.
입문자들은 또한 예배에서 적절한 제의와 주문으로 그들을 찬양하는 법과 쳐부수고 싶은
적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이용하는 법을 알았다.

 
 
 
그림 24. 이탈리아산 흰 대리석에 새겨진 부조
 
 
노리쿰에 있는 비루눔에서 발견. 지금은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의 역사박물관인 루돌피눔에 있다.
기념물의 중앙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왼손 일부부터 태양신의 머리까지만 남았다(그림 11일 보라). 왼쪽 가장자리는 아후라-마즈다가 거인들과
싸우는 방식으로 악마들과 싸우는 그림이 희랍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같은 단편의 아래 부분은 미트라의 탄생을 보여 준다(T. et M.,
p. 336).

 
신들은 더 이상 그들의 영지(領地)인 에테르의 영역에 갇혀 있지 않았다.
만일 신통보(神統譜)가 그들이 올림푸스산에서 그들의 부모와 군주들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면,
우주론은 그들이 다른 상황에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의 기운이 세상을 채웠고,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적극적인 원리였다.
불카누스의 이름으로 인격화된 불은 이 자연력 중 가장 높이 받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온갖 형태로 나타나 숭배받았다.
그것은 별들이나 번개 속에서 빛나기도 했고,
살아 있는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했으며,
식물의 성장을 자극하거나,
땅 속에서 잠자고 있기도 했다.
그것은 지하의 토굴 깊은 곳에서는 제단에서 영원히 타올랐고,
그 신자들은 신성모독적인 접촉으로 불의 순수함을 더럽힐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불과 물이 형제자매라는 원시적인 무예술성(無藝術性)을 가지고 의견을 개진했으며,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미신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깊은 바다를 채우고 있는 염분이 있는 물도 숭배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넵튠이라고도 하고 오케아누스(Oceanus)라고도 했다.
그들은 또한 대지의 깊은 곳에서 콸콸 솟아나오는 샘물과 대지의 표면을 흐르는 강들과 맑은 광채로 빛나는
평온한 호수도 숭배했다.
샘물은 신전 근처에서 쉬지 않고 솟아났고,
신전을 방문하는 자들의 기도와 제사를 받았다.
이 항구적인 샘물(fons perennis)은 무한한 시간의 마르지 않는 자비가 온 우주에 뿌려 놓은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은혜의 상징이요,
지복의 영원함 속에서 지친 영혼들에게 주어진 영적 회춘(回春)의 상징이었다.

 
하늘의 물로 비옥해진 태초의 대지,
만물을 길러 주는 대지,어머니이신 대지(terra mater)는 제의에서가 아니라도 적어도
미트라교의 교리에서는 비슷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격화된 사계절과 관련이 있는 네 개의 주요한 바람은 두려움과 사랑을 함께 받는 수호신들로 여겨졌다.
그들은 기온을 변덕스럽게 바꾸어,
열기나 냉기,폭풍이나 고요함을 가져오고,
공기에 습기가 있게 하다가 건조하게도 하고,
봄에는 만물을 자라게 하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게 하므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모든 생명의 원리인 공기 자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므로 사랑의 대상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미트라교는 고대인들의 물리학에 따라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단순한 체(體)를 신격화했다.
사자는 불을 나타내고,컵은 물을 나타내고,
뱀은 땅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내용이 종종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대립하는 요소들의 싸움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 요소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삼키고 있고,
그것들의 변형과 무한히 다양한 결합은 모든 자연현상을 자극했다(그림 25).

 
환상적인 상징이 들어 있는 찬가는 이 네 요소들의 반명제가 세상에서 만들어내는 변형을 찬양했다.
최고신은 일정한 원 안에서 쉬지 않고 도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몬다.
빛나는 겉옷에 행성들과 성좌들의 표시를 지니고 있는 첫 번째 말은 튼튼하고 민첩하며,
일정한 원의 원주를 지극히 빠르게 가로지른다.
힘이 덜 세고 덜 빠르게 움직이는 두 번째 말은 거무스름한 옷을 입고 있는데,
햇빛이 그 한 쪽만을 비추고 있다.
세 번째는 훨씬 더 천천히 달리고,
네 번째는 같은 장소에서 천천히 돌면서 불안하게 강철재갈을 씹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중심에 있는 고정된 기둥을 돌듯이 그 주위를 돌고 있다.
그 사두마차는 천천히 방해받지 않고 정기적으로 그 영원한 행로를 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네 번째 말 위로 넘어지는 첫 번째 말의 불 같은 숨이 그 갈기를 태우며,
그 주변의 말은 기진맥진하여 땀으로 그 말을 적신다.
끝으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 네 마리의 말이 변형된다.
모든 말들의 실체가 가장 튼튼하고 열정적인 말에게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말들은 특성을 교환한다.
마치 조각가가 밀랍에 형체의 모형을 만들고 나서,
하나의 특질들을 빌려다가 다른 것들을 완성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형상 속으로 통합시키는 것과 같다.
다음에 이 거룩한 싸움에서 이기는 말은 자신의 승리로 전능해져서 전차를 모는 자와 하나가 된다.

첫 번째 말은 불 또는 에테르의 화신이요,
두 번째 말은 공기의 화신이며,
세 번째는 물의 화신이요,
네 번째는 흙의 화신이다.

마지막에 말한 말, 즉 땅에 임한 사건은 대화재와 대홍수를 나타내는데,
그것은 우리의 세계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미래에 폐허로 만들 것이다.
첫 번째 말의 승리는 만유의 존재하는 질서를 파괴할 마지막 싸움의 상징이다.

 
인식을 넘어선 원인(the suprasensible Cause)을 끄는 우주적 사륜마차는 성화(聖畵)에는 나온 적이 없다.
성화는 이 상징적인 집단을 눈에 보이는 신을 위해 보류해 두었다.
미트라의 신자들은 고대 페르시아인들처럼 날마다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가서 저녁에 바다 속에서
그 불을 꺼뜨리며 가라앉는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이 다시 지평선에 나타날 때,
그 눈부신 빛은 어둠의 영들을 쫓아버리고 모든 피조세계를 정화시켰으며,
태양의 광휘가 그들의 생명을 회복시켰다.
그들은 흰 황소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위의 영역들을 여행하는 달도 비슷한 방식으로 숭배했다.
그들은 재생산과 농업을 나타내는 그 동물이 식물의 증가와 살아 있는 생물의
생산을 지배하는 여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 요소들은 미트라교에서 신격화한 유일한 자연적 요소들이 아니었다.
자연을 비옥하게 하는 두 개의 발광체(해와 달-역주)는 여기서 초기의 마즈다교에서처럼 숭배를 받았다.
그러나 아리야(the Arya)들이 그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은 갈대아인들의
이론의 영향으로 심하게 변형되었다.

 
 
 
그림 25. 독일 헤던하임의 거대한 미트라 부조
 
 
중앙에 미트라가 횃불 든 자 두 명과 함께 있다.
바로 위에는 12궁의 상징이 있고,
이들 바로 아래에는 미트라가 화살로 바위를 겨누고 있다.
황소 아래에는 사자와 컵과 뱀으로 된 집단이 있다.
이 부조의 앞면은 앞의 그림 14를 보라(T. et M.,p. 364).

 
 
이미 말했듯이,
페르시아인들의 신비는 바빌론에서 당시의 과학에 기초한 신학의 영향에 억지로 종속되었으며,
이란의 신들 대부분은 유프라테스강 골짜기에서 숭배되던 별들과 비슷해졌다.
이리하여 그들은 원래의 것과 완전히 다른 특성을 얻었으며,
같은 신의 이름이 서방에서는 이중의 의미를 얻었다.
제사장들은 이 새로운 교리들을 그들의 옛 종교와 융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셈족의 점성학은 희랍의 이교와도 그랬듯이 이란의 자연주의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을 하나이자 동일한 진리의 개념에서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면,
성직자들은 선택된 자들을 위해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관한 원래의 마즈다교 교리를 밝히는 것을 보류해
두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갈대아인들의 사유로 영감을 얻은,
찬란하지만 피상적인 상징으로 만족해야 했다.
정성학적인 비유로 인해 성직자들이 설명하는 진정한 영역은 대중의 관심에서 숨겨져 있었으며,
오랫동안 보류되었던 완전한 각성의 약속은 신비의 매력적인 유혹으로 신앙의 열정을 키웠다.

 
이 별의 신들 중 가장 강력하며,
사람들이 가장 자주 부르고,
가장 풍성한 제물을 바친 신들은 행성(行星)들이었다.
점성학 이론에 따르면,
행성들은 덕과 특성을 부여받고 있는데,
그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각각의 행성들은 일주일의 하루를 지배하는데,
각자에게 어떤 하나의 금속의 특성을 부여하고,
그 각각은 입문식에서 어떤 하나의 단계와 결합하며,
그들의 수는 특별한 종교적 능력을 일으켜 숫자 7에게 바쳐진다.
사람들은 영혼들이 가장 높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연속적으로 그들에게서 그들의 욕망과 특성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 행성들은 자주 기념물들에 표현되어 있는데,
때로는 그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나 그들에게 바치는 희생제물을 생각나게 하는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때로는 희랍의 올림푸스산에 앉아 있는 불멸의 신들,
즉 헬리오스,셀레네,아레스,헤르메스,제우스,아프로디테,크로노스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상징은 아후라-마즈다,제르반,
또는 미트라교의 다른 신들을 나타낼 때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때 하늘들이나 무한의 시간의 인격화는 그들 속에 보이지 않고,
오직 빛나는 별들만이 보이는데,
그들이 방황하는 길은 성좌들 가운데서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이중의 해석체계는 특히 태양에게 적용되는데,
때로는 미트라와 동일시되는 것으로,
때로는 그와 다른 존재로 여겨진다.
실제로 미트라교에서는 두 명의 태양신이 있다.
하나는 이란의 신으로 페르시아의 흐바레(Hvare)의 후계자요,
또 하나는 셈족의 것으로 바빌로니아의 샤마쉬(Shamash)의 대리자이며 미트라와 동일시된다.

 
여전히 이중의 성격을 지닌 행성의 신들 옆에는 순수하게 별의 신들이 충성의 제물을 받았다.
날마다 돌면서 피조물들을 불길한 영향에 복종시키는 12궁도의 열두 개의 표시는 전통적인 형태로 모든
미트라 신전에 그려져 있다(그림 26). 그들 각자는 분명히 그것이 지배하는 달 동안 특별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해당하는 계절에 따라 관습적으로 셋씩 무리를 지었으며,
계절의 숭배와 그들의 숭배가 결합되었다(그림 49를 보라).

 
그러나 12궁도의 표시들이 제사장들이 자신들의 신학 속에 받아들인 유일한 성좌는 아니었다.
한 때 미트라의 신비에서 채택한 점성학적 해석방법은 자유롭게 확장되어,
가능한 모든 상징을 포용하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별자리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은 대상이나 동물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갈가마귀,컵,개,사자는 보통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집단과 함께 했는데,
이들은 이미 같은 이름의 성좌와 동일시되었다.
지구의 위와 아래를 교대로 지나가는 하늘의 두 개의 반구(半球)는 인격화되어 디오스쿠리(Dioscuri)와
비슷해졌는데,희랍우화에 의하면,그는 살고 죽는 것을 반복했다.
찬가들은 한 영웅을 희랍의 아틀라스처럼 묘사했는데,
아틀라스는 지치지 않는 어깨로 천구(天球)를 짊어지고 있으며 점성학의 창시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반신(半神)들은 배경으로 사라지고,
행성들과 12궁도의 표시들은 끊임없이 명백한 우위를 유지했다.
점성학자들에 따르면,인간의 존재를 통제하고 만유의 행로를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림 26. 런던에서 발견한 대리석 부조
 
 
중심에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와 횃불을 든 사람들이 12궁도의 열두 개의 표시로 둘러싸여 있다.
아래 양쪽 구석에는 바람들의 흉상이 있다.
위쪽 구석에는 태양이 사두마차를 타고 있고,
달은 황소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아우구스타의 제2군단의 퇴역군인 울피우스 실바누스가 맹세하다”
(Ulpius Silvanus emeritus leg(ionis) II Aug(ustae) votum solvit)
(즉 오랑쥬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는 말)(T. et M.,p. 389).

 
 
 
그림 27. 미트라교 카메오(양각으로 새긴 보석이나 조가비 등-역주)
 취플릿(Chiflet)에 따름. C. W. 킹(King)의 책에서 복사함.
 
 
이것은 바빌론에서 마즈다교로 들어온 중심교리였다.
즉,숙명에 대한 믿음이 그것인데,
이 세상의 일들을 통제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개념은 별들이 있는
하늘의 회전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었다.
제르반과 동일시된 이 운명은 만유를 낳고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의 존재가 되었다.
우주의 발달은 불변의 법칙들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여러 부분들은 가장 긴밀한 결합 속에 통합되어 있다.
행성들의 위치,
그들의 상호관계와 상호간의 힘은 매순간 지상의 현상을 일으킨다.
점성학의 이 공리가 미트라교의 교리였으므로,
점성학이 성공한 것은 분명히 일부는 미트라교의 전파 때문이며,
따라서 미트라교는 이 유사과학이 오랫동안 오류와 공포를 일으키면서 서양에서 승리한 데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

 
 
 
미트라교 카메오
미트라가 미트라교 상징에 둘러싸여 디오스쿠리 사이에서 바위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상징 중에는 성만찬의 잔과 빵이 있다(왈쉬[Walsh]의 책에서 복사함).

 
 
대중들은 지옥의 권능들에 대한 믿음과 영들을 부르는 것에 대한 믿음에 더 지배당했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은 엄격한 연역논리로 인해 그러한 믿음보다도 (미트라교의)
이 엄청난 망상에게 더 지배당했다.
마즈다교가 악의 원리에게 독립적인 권능을 부여함으로써 온갖 종류의 밀교제의가 정당화되었다.
죽은 사람과 영혼을 교감하여 점을 치는 것,해몽,악한 영과 부적과 요술과 주문에 대한 믿음,

요컨대, 고대이교의 온갖 미숙하고 사악한 탈선이 정당화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사건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악마들의 역할로 인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신비들은 이러한 여러 미신들을 비록 정말로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묵과했다는 심각한 비난을 면치 못한다.
“제사장”(Magus)이라는 칭호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의 마음 속에서 “마법사”(magician)와 동의어가 되었다(magician이라는 영어가 magus에서
온 말이므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임-역주).

 
그러나 인류를 알 수 없는 목적으로 무자비하게 내모는 냉혹한 필연이라는 개념도,
심지어 인류를 파괴하려는 악한 영에 대한 두려움도 대중을 미트라교 신들의 제단으로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 어둠침침한 교리의 엄격함은 인간의 고통을 동정하는 자비로운 권능들에 대한 신앙으로 완화되었다.
행성들조차 이론적인 점성학자들의 교육적인 저술 속에서처럼 우주적인 권능이 아니었다.
그들의 호의적이거나 아니면 불길한 영향은 영원히 고정된 원의 회전에 따라 아주 증가하거나 줄어들었다.
그들은 옛 갈대아인들의 종교교리에서처럼 보고 듣고 기뻐하고 탄식하는 신들이었으며,
기도와 제물로 그들의 분노를 완화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신자들은 쉬지 않고 악의 권능들과 싸우는 이 자비로운 보호자들의 지원을 믿었다.

 
신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찬가는 불행히도 거의 모두 사라졌고,
우리는 이 서사적 전통을 오직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기념물들을 통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성시(聖詩)의 특성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단편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즈다교의 헤라클레스인 베레트라그나는 아르메니아에서 찬양을 받았다.
그가 어떻게 용들을 목 졸라 죽였으며,
유피테르가 거인들과 싸워 승리하도록 도왔는지를 여기서 말하고 있다.
아베스타 신자들처럼 마즈다교의 로마인 신자들은 그를 호전적이고 파괴적인 돼지로 비유했다.

 
그러나 이 전투 이야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영웅은 미트라였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에서 다른 신들이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어떤 강력한 행위가 그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이 종교에서 그에게 부여한 우세한 지위를 설명하는 전설들의 중심이 되었다.
천상의 위계에서는 최고의 지위에 있지 않은 이 신이 서방에 퍼진 페르시아 신비들에게 (미트라교의 신비라는) 자기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행한 놀라운 공적 때문이다.

 
이미 본 대로,
고대의 제사장들에게 미트라는 빛의 신이었으며,
빛은 공기에 의해 태어났으므로 그는 하늘과 지옥의 중간영역에 거한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 “메시테스”(μεσίτης: ‘중개자’-역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의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매월 16일이나 한 달의 중간에 해당하는 날을 그에게 봉헌했다.
그가 샤마쉬(바빌론의 태양신-역주)와 동일시될 때,
그의 제사장들은 그를 “중재자”라고 불렀는데,
이 때 그들은 갈대아인들의 교리에 따르면 태양이 행성들의 중간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중간위치는 꼭 우주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중요한 도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트라는 접근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중개자”였다.
그 하나님은 천상의 영역을 다스리고,
여기 아래에서 싸우고 고통당하는 인류를 다스렸다.
샤마쉬는 이미 바빌론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으며,
희랍철학자들도 이 세상에 빛을 쏟아 내리는 저 빛나는 구체(球體: 태양-역주)에서
눈에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의 영원히 현존하는 상징을 보았다.

 
미트라는 태양빛의 수호신이 지닌 이 부수적인 특성으로 서방에 가장 잘 알려졌으며,
그의 기념물들은 이렇게 빌려온 특성을 암시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두 명의 젊은이들 사이에 그를 그려 넣는 것이 관습인데,
한 명은 횃불을 위를 향해 들고 있고 한 명은 아래를 향해 들고 있다.
이 젊은이들은 “카우티”(Cauti)와 “카우토파티”(Cautopati)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미트라의 이중적 화신일 뿐이다(그림 18과 29).

 
 
 
그림 29. 횃불을 든 사람들의 조각상
 (빨레르모 박물관. T. et M.,p. 270)
 
 
다도포리(dadophori: 희랍어로 ‘횃불을 든 사람들‘-역주)라고 하는 이 두 사람과 황소를 죽이는
영웅은 셋이 하나를 이루는데,
이 “3중의 미트라”는 여러 모습의 태양으로 나타났다.
그는 아침에 닭이 울 때 나타나서,
한낮에는 의기양양하게 하늘 가운데를 지나고,
밤에는 노곤하게 지평선으로 떨어졌다.
또는 태양은 힘이 커졌을 때 황소좌로 들어가 봄의 시작을 알리고,
태양의 강렬한 열정은 한여름에 자연을 풍성하게 하며,
그 후에는 힘이 약해져서 전갈좌를 가로질러 겨울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렸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이 횃불 든 사람들 중 하나는 생명의 열(熱)의 상징으로,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냉기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황소를 죽이는 집단은 이성적이라기보다 더욱 교묘한 점성학적인 상징의 도움을 받아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별들에 관한 해석은 초신자들이 미트라에 관한 고대이란의 전설을 이루고 있는 밀교교리를
배우기 전에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고안한 지적인 오락일 뿐이었다.
이 전설은 없어졌지만 부조들은 그 일화의 일부를 말해 주는데,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단단한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한 하늘들에서 갑자기 나타난 빛이 마즈다교 제사장들의 신화에서는
바위에서 태어난 미트라가 되었다.
그 전승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전에서 서 있는 모양으로 숭배를 받았던 그 “생명을 낳는 바위”가 강둑의 성스런
나무 그늘에서 미트라를 낳았으며,
주변의 산에 숨어 있던 목자들만이 그가 세상에 들어온 기적을 보았다.
그들은 그가 머리에는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칼로 무장하고 아래의 어두운 심연을 비추는 횃불을 들고
바위덩어리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림 30). 목자들은 경배하며 다가가 거룩한 아이에게 자기네
양떼와 수확물의 첫 열매들을 바쳤다.
그러나 그 어린 영웅은 벌거벗었으므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무화과 나뭇가지로 자신을 가리고 칼을 이용하여 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고는,
그 잎을 따서 스스로 옷을 만들었다.
이렇게 전투준비를 하고 나서,
그 때부터 그는 자신이 들어온 놀라운 세계에 살고 있던 다른 권능들과 더불어
자신의 힘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가 태어날 때 목자들은 양떼를 먹이고 있었지만,
이 모든 일은 지상에 사람들이 있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림 30. 바위에서 태어나는 미트라
 로마의 성 클레멘트 토굴에서 발견한 부조
(T. et M.,p. 202)

 
 
미트라가 처음으로 힘을 겨룬 신이 태양이었다.
태양은 자기 맞수의 우월함에 충성을 바치고 그에게서 임관(任官)을 받도록 강요당했다.
그의 정복자는 자신이 지상에 내려온 후 매일 행로에서 쓰고 있던 빛나는 왕관을 그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다음에 그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자신의 오른손을 뻗어 그와 엄숙한 우정의 계약을 맺었다.
그 후 동맹을 맺은 두 신은 모든 일에서 신실하게 서로를 지원했다(그림 32).

 
 
 
그림 31. 바위에서 태어나는 미트라
 
손에는 포도를 잡고 있는데,
이것은 페르시아인들의 하오마를 서방에서 대치한 것이다(T. et. M.,p. 231)

 
 
 
 
그림 32. 비루눔의 부조 단편
 
미트라의 생애의 몇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미트라가 태양신에게 빛나는 후광을 씌워 주고,
그가 태양의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과,
그가 바위를 내리쳐 거기서 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있다(T. et M.,p. 336)

 
 
이 서사적 모험 중 가장 특별한 것은 미트라가 오르마즈드가 창조한 첫 번째 생물인 황소와 싸우는 이야기이다.
이 독창적인 이야기는 우리를 문명의 시초로 데려간다.
그것은 모든 부의 원천인 가축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목자들과 사냥꾼들 사이에서가 아니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이야기이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야생황소를 잡은 것은 분명히 신에 견주어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영예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림 33.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와 황소를 메고 오는 미트라. 그 사이에 개가 있다.
라누비움에서 발견한 토기(T. et M.,그림 80,p. 247)

 
 
무서운 황소가 산자락의 목초지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영웅은 대담한 전략을 짜고는 황소의 뿔을 잡고 등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격노한 짐승은 마구 달려 자기 등에 탄 자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허사였다.
영웅은 황소가 미친 듯이 날뛰어 등에서 떨어지기는 했으나,
잡은 뿔을 잠시도 놓지 않았다.
그는 짐승의 뿔에 매달려 질질 끌려갔다.
마침내 그 짐승은 지쳐 굴복했다.
그러자 정복자는 그 뒷발굽을 잡아 장애물들이 잔뜩 있는 길 위에서 뒤로 잡아당겨 자기 집으로 삼고 있던
동굴로 끌고 갔다(그림 33).

 
미트라의 이 고통스런 여행(transitus)은 인간의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황소는 감옥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다시금 산의 목초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닌 것 같다.
그러자 태양이 그의 전령인 갈가마귀를 보내어 그 도망자를 죽이라는 명령을 자신의 동맹자에게 전했다.
미트라는 자기 뜻과는 너무 다른 이 잔인한 명령을 받았으나,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여 민첩한 개를 이용해 그 게으른 짐승을 좇아가,
그것이 떠나온 동굴 속으로 피하려고 하는 순간에 그것을 따라잡고는,
한 손으로 그 콧구멍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의 사냥용 칼을 그 옆구리에 깊이 쑤셔 넣었다.
그 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죽어 가는 그 희생물의 몸에서 푸르름으로 대지를 덮고 있는 온갖 약초와 식물이 솟아나왔다.
그 짐승의 척수(脊髓)에서는 우리에게 빵을 주는 밀이 솟아났고,
그 피에서는 미트라의 신비의 성스런 음료를 낳는 포도나무가 솟아났다.
악령은 괴로움에 짓눌린 그 짐승 속에 있는 생명의 원천 자체를 독살시키기 위해,
그에게 그의 더러운 악마들을 내보냈지만 허사였다.
전갈과 개미와 뱀은 생식기 부분을 먹어 버리고,
그 다산(多産)하는 네 발 짐승의 피를 마셔 버리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할 힘이 없었다.
황소의 씨는 달에 의해 모아지고 정화되어 온갖 종(種)의 유용한 동물들을 낳았으며,
그 영혼은 미트라의 충실한 동료인 개의 보호를 받아 천상의 영역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신성의 영예를 받아 실바누스라는 이름의 약초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와 같이 황소를 죽이는 영웅은 자신이 그렇게 하는 수 없이 행한 희생을 통해 지상의 모든 자애로운
존재들의 창조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황소를 죽임으로써 옛 것보다 더욱 풍성하고 더욱 비옥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그림 34. 두 개의 명판(銘板)(바티칸)
 
왼쪽의 것은 유피테르(실바누스?)의 머리. 오른손에는 솔방울을,
왼손에는 뱀이 감싼 가지를 들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독수리가 있고,
가슴은 미트라 형상의 부조들로 장식되어 있다.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잔,
양의 머리,
다섯 개의 광채가 나오는 원반 등이 그것이다.
오른쪽 흉상은 프리기아 모자를 쓴 수염 난 동방사람인데,
오른손에 솔방울을,
왼손에는 뱀이 감싼 횃불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거친 작품이다
(T. et M.,그림 97과 98,p. 260).

 
그 동안 첫 번째 인간 한 쌍이 불려 나왔고,
미트라는 이 특권을 부여받은 종족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았다.
어둠의 영이 그들을 파괴하려고 치명적인 재앙을 불러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트라는 언제나 그의 치명적인 계획을 좌절시키는 방법을 알았다.
아흐리만은 먼저 장기간의 가뭄을 일으켜 그 땅을 황폐하게 했으며,
그 주민들은 목마름으로 괴로워 언제나 승리하는 그의 맞수에게 탄원했다.
거룩한 궁수(弓手)가 가파른 바위에 화살을 쏘니,
거기서 생명수가 솟아나왔으며,
간청하던 자들은 메마른 목을 축이려 그리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훨씬 더 끔찍한 홍수가 일어나 모든 자연을 위협했다.
거대한 홍수가 땅에 사는 이들을 쓸어버리고,
땅은 강물과 바닷물로 넘쳐났다.
신들에게 비밀리에 조언을 받은 한 사람만이 배를 만들어 천지에 가득 찬 물 위에 뜬 방주(方舟)를 타고
자기 가축과 자신의 목숨을 건졌다.
다음에는 큰 불이 세상을 파괴했고 사람과 짐승들의 거주지를 완전히 태웠다.
그러나 오르마즈드의 피조물들은 천상의 보호 덕분에 마침내 이 새로운 위험을 피했으며,
그 후 인류는 평화롭게 늘어날 수 있었다.

 
역사의 영웅시대는 이제 끝나고 미트라의 지상의 사명도 이루어졌다.
입문자들이 신비적인 사랑의 잔치로 축하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미트라는 헬리오스와 기타 함께 일한 동료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공통의 싸움이 끝났음을 축하했다.
그 후 신들은 하늘로 올라갔다.
태양은 미트라를 자신의 빛나는 사두마차에 태웠고,
바다는 미트라를 삼키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트라는 그 바다를 건너 나머지 불멸의 존재들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로 갔다(그림 35).

 
그러나 하늘 높은 곳에서 그는 경건하게 자신을 예배하는 신자들을 보호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았다.

 
세상의 기원에 관한 이 신화적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황소를 죽이는 신이 미트라교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이교신학자들이 “중개자”라는 칭호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다.
미트라는 유피테르-오르마즈드가 자연 속에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일을 맡긴 창조주이다.
당시의 철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로고스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누어 가졌다.
그는 조물주로서 세상을 창조한 후 신실하게 그것을 계속 보살폈다.
아흐리만은 처음 패배하고 완전히 무력해진 것이 아니었다.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은 지상에서 올림푸스의 통치자의 사자(使者)들과 어둠의 왕의 사자들
사이에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것은 천상의 영역에서 길성(吉星)과 흉성(凶星)의 대립 속에 고조되었으며,
우주의 축도(縮圖)인 인간들의 마음 속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림 35 다키아에 있는 아풀룸의 부조

 
 
중앙에는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가 두 명의 횃불을 든 사람과 함께 있다.
왼쪽에는 황소를 올라탄 미트라와 황소를 옮기는 미트라가 있다.
오른쪽에는 잔 위에 길게 뻗어 있는 사자가 있다(불과 물의 상징). 위 가장자리에는 루나(Luna)의
흉상이 있으며,
새로 태어난 미트라가 시냇물의 둑 가까이에 엎드려 있고,
목동이 양떼와 같이 서 있으며,
오막살이 속의 황소와 배를 타고 있는 황소가 있다.
아래에는 일곱 개의 제단이 있고,
미트라는 활을 당기고 있으며,
태양의 흉상이 있다.
아래 가장자리에는 미트라와 태양의 향연,
태양의 사두마차를 탄 미트라,
뱀에게 둘러싸인 바다가 있다(T. et M.,p. 309).

 
 
인생은 전투이며,
거기서 승리하여 벗어나려면 신 자신이 고대 제사장들에게 계시한 법칙이 충실하게 성취되어야 한다.
미트라교가 그 신자들에게 부여한 의무는 무엇인가? 그 신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받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은 무엇인가? 이 점이 심히 불확실하다.
우리에게는 아베스타에 나와 있는 것과 함께 미트라교의 신비에 나타난 계명을 확인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방의 제사장들의 윤리는 바빌론 종교들의 자유분방함에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이 여전히 고대 페르시아인들의 윤리의 높은 특성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완전한 순수함이 신자들의 삶이 지향해야 하는 종교를 그들에게 남겨 주었다.

 
그들의 제의는 반복적인 정화와 재계(齋戒)를 요구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정화는 마즈다교 전통에 맞는 것이었고,
그 시대의 일반적 경향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 경향에 따라,
미트라교도들은 그들의 원리를 지나치게 행했고,
완전함에 대한 그들의 이상은 금욕주의에 가까웠다.
어떤 음식을 절제하고 절대적으로 자제하는 것이 찬양받을 일로 여겨졌다.

 
관능에 대한 저항은 악의 원리와 싸우는 일 중 하나였다.
여러 형태로 세계의 제국을 차지하려고 신들과 다투는 아흐리만의 추종자들과 싸우는 이 전투를
지치지 않고 지원하는 것은 미트라를 섬기는 자들의 의무였다.
그들의 이원론적인 체계는 특히 개인적인 노력을 키우고 인간의 힘을 계발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그들은 다른 교파들처럼 명상적 신비주의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선이 행위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드러움보다 힘을 높이 평가했고,
관대함보다 용기를 더 좋아했다.
그들은 야만인들의 종교들과 오랫동안 결합했으므로,
그들의 윤리에는 잔인함의 잔재가 있었다.
군인들의 종교인 미트라교는 무엇보다도 상무정신(尙武精神)을 높이 평가했다.

 
 
 
그림 36. 미트라 나바르제(승리의 미트라)에게 봉헌한 비문
 
사르미제게투사에서 발견(T. et M.,p. 231)
 
 
열렬한 신앙의 전사가 악한 악마들과 쉬지 않고 벌이는 전쟁에서,
그 전사는 미트라의 도움을 받았다.
미트라는 도움의 신이므로 누구든 그를 부르면 도움을 얻었고,
그는 언제나 피할 항구요,
온갖 시련을 당한 인간을 위한 구원의 닻이며,
생의 온갖 고난을 통해 연약함에 빠진 신자들을 지탱해 주는 불굴의 전사였다.
페르시아인들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그는 여전히 진리와 정의의 보호자요,
거룩함의 수호자이며,
어둠의 권능들과 싸우는 용맹한 전사였다.
영원히 젊고 생기 넘치는 그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쫓으며,
“언제나 깨어 있고 언제나 주의 깊어” 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끊임없는 전투에서 그는 언제나 승리자로 나타난다.
이것이 비문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개념이요,
페르시아어 별명인 나바르제(Nabarze: '승리하는‘이라는 뜻-역주)가 표현하는 개념이며(그림 36),
희랍어 “아니케토스”(ἀνίκητος: ’정복할 수 없는‘이라는 뜻-역주),
라틴어 ”인빅투스“(invictus),
"인수페라빌리스”(insuperabilis: 둘 다 ‘이길 수 없는’이라는 뜻-역주)라는 별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군대의 신인 미트라는 자신이 보호하는 자들이 그들의 야만적인 적들에게 승리하게 했으며,
마찬가지로 도덕적 영역에서 그들에게 거짓의 영이 불어넣은 악의 본능에 대해 승리하게 했고,
그들에게 이 세상과 내세에서 구원을 약속했다.

 
모든 동방종교들처럼 페르시아의 신비들은 우주발생에 관한 우화와 신학적 사유를 구원론과 혼합했다.
그들은 사후에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본질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남아 무덤 저
너머에서 징벌과 보상을 받는다고 믿었다.

 
무한히 많은 영혼들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주지에 사는데,
그 영혼들이 여기 아래세상으로 내려와 인간의 몸을 입는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어쩔 수 없이 이 물질적이고 타락한 세계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거나,
여기서 악마들과 싸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사후에 타락의 신이 그 몸을 소유하고 그 영혼이 인간이라는 감옥을 떠날 때,
어둠의 신들(devas)과 하늘의 사자들이 그 영혼을 데려가려고 다툰다.
특별한 명령이 내려와 그 영혼이 다시 낙원으로 올라갈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한다.
만일 그 영혼이 불순한 생명으로 더러워져 있으면,
아흐리만의 사자들이 그를 지옥의 심연으로 끌고 내려가는데,
거기서 그들은 수많은 고문으로 그를 괴롭힌다.
또는 어쩌면 그 영혼이 타락했다는 표시로,
어떤 불결한 동물의 몸 속에 거하도록 정죄를 받는다.
반대로,만일 그 공덕이 과오보다 많을 경우에는 그 영혼은 높은 곳에 태어난다.

 
하늘들은 일곱 영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의 영역은 하나의 행성과 연결되어 있다.
여덟 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사다리는 항성들 중 최고의 영역에 이르는 길의,
신전에 있는 상징적인 암시였는데,
그 중 처음 일곱 개의 문은 각기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한 층에서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해 여행자는 매번 오르마즈드의 천사가 지키는 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적절한 주문을 배운 입문자들만이 이 냉혹한 문지기들의 마음을 달래는 법을 알았다.
영혼이 이 여러 지역을 지날 때,
마치 사람이 옷을 벗듯이,
영혼은 땅으로 내려올 때 받았던 욕망과 능력을 벗어 버린다.
영혼은 달에게 생명과 양분의 에너지를 버리고,
수성에게는 욕망을,
금성에게는 사악한 특성을,
태양에게는 지성적 능력을,
화성에게는 전쟁에 대한 사랑을,
목성에게는 야심 찬 꿈을,
토성에게는 기호(嗜好)를 버렸다.
영혼은 지고한 본질로서 그리고 신들을 목욕시킨 영원한 빛 속에서 끝없는 지복을 즐기기 위해
여덟 번째 하늘로 들어갈 때 모든 악과 모든 감성을 완전히 벗어버렸다.

 
사후에 영혼의 심판을 주재하는 이는 진리의 수호자인 미트라였다.
자신의 신자들이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갈 때 그들의 안내자가 된 이는 중개자인 미트라였다.
그는 먼 여행에서 돌아온 아이들처럼 그들을 자신의 찬란한 집에 맞아들인 천상의 아버지였다.

 
영적인 세계에서 본질로 환원한 이 단자들(monads)을 위해 준비해 둔 행복은 오히려 인식하기 어렵다.
이 교리는 분명히 대중의 마음에는 별 매력이 없었다.
일종의 누적에 의해 첫 번째 신앙에 첨가된 또 하나의 신앙은 좀 더 물질적인 즐거움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영혼불멸설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교리를 통해 완전해졌다.

 
선과 악의 원리들 사이의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계속되는 기간이 지나면,
아흐리만이 보낸 재앙은 세계의 파괴를 계획할 것이다.
최초의 황소와 비슷한 기묘한 황소가 지상에 다시 나타나고,
미트라가 다시 내려와 사람들을 생명으로 깨울 것이다.
모두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고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인류 전채가 하나의 커다란 모임 속에 결합하고,
진리의 신이 선을 악에서 갈라놓을 것이다.
다음에 지고한 희생 속에서 그는 신성한 황소를 희생시키고,
그 기름을 성별된 술과 섞어 이 음료를 의인들에게 주리니,
그것이 그들 모두에게 불멸을 줄 것이다.
그 때 유피테르-오르마즈드가 복된 자들의 기도에 따라 하늘들에서 삼키는 불을 내려오게 하여
사악한 자들을 모두 전멸시킬 것이다.
어둠의 영이 패배하고 우주적인 화재(火災) 속에서 아흐리만과 그의 더러운 악마들이
멸망하고 다시 젊어진 우주는 영원히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미트라의 은혜의 영을 체험하지 않은 우리는 우리가 재구성한 내용에서 본
이 교리의 일관성 없음과 불합리함에 당황하게 된다.
순진하면서도 부자연스런 신학은 여기서 아직 자연주의적 경향이 분명한 원시적인
신화를 점성학 체계와 결합하는데,
그 체계의 논리적 구조는 오직 근본적인 거짓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있을 수 없는 내용의 고대 다신론적 우화는 여기서 우주의 진화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철학적 사유와 나란히 존재한다.
여기서 전통과 사유의 불일치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숙명론과 기도의 효과와 예배의 필요 사이에서 보이는 모순으로 그 불일치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 종교도 그 형이상학적인 진실에 의해 평가할 필요는 없다.
이 신앙의 내적인 유기적 결함을 확인하기 위해 이 신앙의 차갑게 식은 시체를 해부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트라교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위대해졌으며,
왜 세계제국을 얻는 데 실패했느냐를 이해하는 것이다.

 
미트라교의 성공은 대부분 분명히 그 윤리의 힘에 기인한 것이었는데,
그 힘은 무엇보다도 활동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무질서하고 무력하던 시기에,
미트라교의 신비가들은 그 계명에서 자극과 지지를 발견했다.
신자들이 선의 원리와 함께 악의 권능에 대한 싸움을 계속하는 성스런 군대의 일부를 이룬다는
확신은 그들의 가장 경건한 노력을 자극하고,
그들을 열렬한 열심당원들로 변화시키는 대단한 힘이었다.

 
제의들은 또한 인간영혼의 가장 고상한 열망을 기르는 데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욕망과 최후의 정의에 대한 기대였다.
이 종교는 그 신자들에게 무덤을 넘어선 생명에 대한 바람을 심어 주었는데,
그것은 다가올 삶에 대한 근심이 모든 이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이 거친 시대에 미트라교가
지녔던 힘에 관한 비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몇몇 종파는 자기네 신자들에게 미래의 삶에 대한 위로의 전망만을 주었다.
그러므로 미트라교의 특별한 매력은 그 교리체계의 다른 특질에 있었다.
미트라교는 사실 교육받은 사람들의 지성과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만족시켰다.
시간을 제1원인으로 신격화한 것과 태양의 신격화,
태양이 물질적으로 나타나 지상에 열과 빛을 준다는 것은 매우 철학적인 개념이었다.
그 행로가 지상의 사건을 결정하는 행성들과 성좌들과,
무한한 결합으로 모든 자연현상을 낳는 4원소에 대한 숭배는 궁극적으로 고대과학이 인정한 원리들과
힘들에 대한 숭배로 환원할 수 있다.
또 미트라교의 신비에 관한 신학은 이 점에서 로마세계의 물리학과 점성학의 종교적 표현일 뿐이었다.

 
계시된 교리와 과학적 개념의 이 이론적인 일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한 대중의 영혼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다.
반면 그들은 물질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 전체를 신격화한 교리의 유혹을 받을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신들은 모든 곳에 있었으며,
그들은 인생의 모든 행위에 섞여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고 신자들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불,
그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고 그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물,
그들이 숨쉬는 공기,
그들의 길을 비춰 주는 빛은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이었다.
아마도 기도할 기회와 숭배할 동기를 신자들에게 더 강력하게 제공한 종교는 미트라교 외에
달리 없었을 것이다.
입문자들이 저녁에 스스로 고독한 숲에 숨겨져 있는 성스런 동굴로 갔을 때,
발걸음마다 새로운 감각이 그 마음에 어떤 신비적인 감정을 일깨웠다.
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잎에 속삭이는 바람과,
산자락에서 졸졸 솟아나는 샘물이나 재잘거리며 흘러내리는 시냇물,
그가 발로 밟은 땅조차도 그의 눈에는 신성하고,
주변의 모든 자연은 그 안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무한의 힘들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제5장 미트라교의 의식,성직자 계급과 신자들
고전고대의 모든 종교들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전에는 매우 두드러지고 아마도 모든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했겠지만,
오늘날은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예배의식이다.
미트라교의 신비도 이 불행한 규칙에 예외가 아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입문식과 축제의식을 하는 동안 기도문을 포함한 경전을 외우거나 노래로 불렀는데,
그 경전은 없어져 버려서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대에는 풍부했을 것이 분명한 모음집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거의 유일한 것은,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찬가에서 빌려온 어떤 한 구절뿐이다.
마즈다의 신들을 찬양하여 쓴 고대 가타(Gâtha)는 알렉산더 시대에 희랍어로 번역했으며,
희랍어는 오랫동안 서방에서도 미트라교 예배의식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미트라교도가 아닌 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희랍어 외의 언어가 경전 도처에 산재해 있어서 고대의 예식문에 대한 예배자들의 외경심과
그 효력에 대한 신뢰감을 더욱 키웠다.
미트라에게 적용되었단 “승리하는”이라는 뜻의 “나바르제”(Nabarze) 같은 별칭이나,
부조(浮彫)에 새겨진 “나마”(Nama),
"나마 세베시오“(Nama Sebesio) 같은 뜻이 모호한 호칭이 그러한 것인데,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전혀 없었다.

 
 
  .
그림 37.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흰 대리석의 부조(볼로냐).
 
 
부수적인 존재들이 중요하다.
중심에는 개와 뱀과 전갈과 횃불을 든 두 명의 인물이 있고,
왼쪽에 있는 자 위에는 갈가마귀가 있다.
횃불을 든 자 가까이에는 솔방울(?)이 있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왼쪽부터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일곱 행성의 흉상이 있다.
태양,토성,금성,목성,수성,화성,달. 아래 가장자리에는 잔치에 참석한
세 명의 인물과 어린 아이 또는 에로스(?)와
기대어 있는 수염 달린 남자(오케아누스)가 있다(T. et M.,그림 99,p. 261).

 
 
미트라교의 전통적인 의식에 대해 매우 신중한 것이 소아시아의 제사장들의 특징인데,
이 특징은 그들의 라틴족 후계자들 중에서도 줄지 않는 열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교가 몰락해 갈 때도 라틴족 후계자들은 여전히 조로아스터가 제정했다고 하는
고대 페르시아의 전례(典禮)에 따라 신들을 예배하는 데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미트라교는 이 전례들로 인해,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행해지던 다른 모든 종교들과 예리하게 구분되었으며,
자신의 기원이 페르시아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떤 행운이 있어서 어느 날 미트라교의 제식문(祭式文)을 발굴하게 된다면,
우리는 거기서 이 고대의 관습을 연구하고 그 예배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필수불가결한 안내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성전에서 철저히 쫓겨나,
약간의 비밀을 누설한 몇 개의 자료를 통해서만 미트라교의 신비의 밀교적 원리를 알고 있을 뿐이다.
일련의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글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의 입문식에는 일곱 단계가 있으며,
그 신비(μύστης,sacratus)는 갈가마귀(corax),
비밀한 가르침(cryphius),병사(兵士)(miles),
사자(獅子)(leo),페르시아인(Perses),
태양의 행로(heliodromus),아버지라(pater)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 이상한 명칭은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빈 말이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칭호에 맞는 옷을 입었다.
우리는 부조들에서 그들이 동물과 병사와 페르시아인들의 가짜머리를 쓰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림 38을 보라). “몇몇은 새들처럼 날개를 치며 까마귀 울음을 흉내 내고,
다른 자들은 사자처럼 으르렁거린다.
지혜롭다고 불리는 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저급하게 희화화(戱畵化)된다”라고
4세기의 한 그리스도인 작가는 말하고 있다.

 
교회의 작가들은 이 성스런 표시들의 우스운 측면을 보여 주는데,
이교신학자들은 이것이 12궁도의 기호라고 해석하고,
심지어는 윤회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한 해석의 차이는 단지 이 동물가면들의 진정한 의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수많은 종교에 흔적을 남긴 원시적 종교행위의 잔재이다.
우리는 희랍과 소아시아에서 여러 신비들의 입문자들이 곰,황소,망아지의 이름과
기타 비슷한 이름들을 사용했음을 본다.

그들은 신들 자신이 여러 동물의 형태로 표현된 선사시대로 돌아간다.
예배하는 자가 자기 신들의 이름과 모습을 하고는 자신이 그들과 동일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사자머리를 한 크로노스는 시간의 화신이 되었는데,
그는 미트라교의 선구자들이 예배했던 사자들로 대치되었다.
비슷하게 로마의 신비가들이 얼굴을 가렸던 천과 종이로 된 가면은 그들의 야만족 선구자들이
원래 입고 있던 동물가죽을 대신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그들이 섬기던 기괴한 우상들과 친교를 나눌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가죽을 벗긴 동물들의 털가죽으로 자신들을 가림으로써 이 피투성이의 외투가
어떤 정화력이 있다고 믿었다면 말이다.

후에 성스런 숫자 7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갈가마귀와 사자라는 초기의 칭호에 다른 칭호들이 덧붙여졌다.
신비가들이 완전한 지혜와 순수함을 얻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일곱 단계의 입문식은 영혼이
복된 자들의 거주지에 이르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일곱 행성의 영역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입문자들은 갈가마귀가 된 후 비밀한 가르침(κρύφιος)의 단계로 나아갔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어떤 장막에 가려져서 아마도 집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ostendere)은 엄숙한 행위였다.
병사(miles)는 불굴의 신의 성스런 군대의 일부가 되어 그의 지시에 따라 악의 권능들에 대해 전쟁을 치른다.
페르시아의 작위는 마즈다교의 최초의 기원을 생각하게 하는데,
그것을 얻은 자는 성스런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프리기아 모자를 쓰는 동방의 관습을 따랐다.
그것은 미트라에게도 부여되었던 것이다.
미트라가 태양과 동일시되었을 때,
미트라 예배자들은 “태양의 행로(Ἡλιοδρόμοι)라는 이름을 지녔다.
끝으로 “아버지들”이라는 호칭은 희랍어 티아시(Thiasi)에서 빌려온 것인데,
거기서는 이 영예로운 호칭이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렇게 신들을 일곱으로 구분하면서,
부수적인 구분이 생겼다.
포르피리우스의 글에 나오는 구절을 근거로 하면,
첫 번째 세 단계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미트라교의 신비들에 참여할 권한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입문자들은 예배자들(ὑπηρετούντες)로,
그리스도교 교리문답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었다.
이 등급에 들어가려면 갈가마귀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갈가마귀들이라는 칭호는 신화에서 갈가마귀를 태양의 숭배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자가면을 받은 신비가들만이 참여자들(μετέχοντες)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비문들에서 다른 단계보다도 사자 단계를 더 자주 말하는 것이다.

끝으로,위계의 꼭대기에 아버지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스런 의식을 주관하고(pater sacrorum: 라틴어로 '성스런 일들의 아버지‘라는 뜻-역주) 다른 신자집단을 명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는 “아버지들의 아버지”(Pater Patrum)라고 부르는데,
때로는 Pater patratus라고 바뀌기도 했다.
이는 이제 로마에게 속하게 된 종파 속에 공식적인 성직자 호칭을 도입하려는 것이었다.
신자들의 이 대스승들이 죽을 때까지 그 종교는 일반적인 방향을 유지했다.
이 숭고한 고위성직자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았음은 아버지라는 칭호로 알 수 있는데,
그들의 권위 아래에 있는 신비가들은 서로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동료입문자들은 서로 사랑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낮은 서열로 받아들임(acceptio)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입문자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 등급들 중 어느 하나에 머물러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신참자가 더 높은 입문식을 받을 준비가 충분히 되었는지는 아마도 아버지들(Fathers)이 결정했을 것이다.
아버지들 자신이 그러한 입문식을 해 주었을(tradere: 라틴어로 ‘전해 주다’라는 뜻-역주) 것이다.

 
이 입문식은 성례전(sacramentum)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이는 신참자가 하는 맹세 때문이었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군대에 등록된 신병의 맹세와 비교할 수 있었다.
지원자는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알게 된 교리와 제의를 누설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지원자는 좀 더 많은 다른 서약도 해야 했다.
그러므로 병사라는 호칭을 바라는 신비가는 칼 위에 얹은 왕관을 받았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밀어내어 자기 어깨에 그것이 떨어지게 하면서,
미트라가 그의 유일한 왕관이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는데,
잔치자리에서나 아니면 군인의 명예로 그에게 왕관이 주어질 때도 그것을 쓰지 않고,
그것을 주는 사람에게 “그것은 나의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즉,
왕관은 저 불굴의 신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트라교의 일곱 개의 의식을 그것과 관련된 교리적 가르침만큼 이나 잘 알지 못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이란의 제의에 따라 신입자들이 그들의 죄악된 더러움을 씻기 위해 일종의 세례의식으로 목욕재계를 반복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것은 안다.
영지주의자들의 어떤 계층과 마찬가지로,
이 정화는 분명히 입문식의 각 단계에서 다른 효과를 지니고 있었으며,
단순히 성수를 뿌리느냐 아니면 이시스교(敎)의 경우처럼 실제로 물에 잠그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동료신학자의 증언을 듣고 그것을 군인의 이미에 “표시를 하는” 의식과 비교했다.
그러나 표시나 도장을 찍는 것은 그리스도교 의식의 경우처럼 기름을 바르는 것이 아니고,
군대에서 신병들이 맹세를 하기 전에 하는 것처럼 붉게 단 쇠로 표시를 찍는 것이었다.
이 이 지울 수 없는 표시는 맹세하는 자가 미트라교가 만든 기사제도의 질서 속에서 지키기로 한 엄숙한 약속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자(獅子)들 속에 들어가는 의식에서는 새로운 정화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 동물은 불의 원리의 상징이었으므로,
불에 대립하는 요소인 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죄의 더러움에서 입문자를 지키기 위해,
그 손에 꿀을 붓고 혀에 대게 했는데,
이는 신생아에게 하는 관습과 같은 것이었다.
페르시아인들(여기서는 일곱 단계 중 하나를 말함-역주)에게 준 것도 꿀이었는데,
포르피리우스가 말하듯이,
꿀이 방부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의 영향 아래에서 만들어졌다고 믿은 꿀과 놀라운 특성들을 연관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의 관념에 의하면,
그것은 “축복받은 이들”의 음식으로 신참자가 그것을 먹으면 신(神)들의 동료가 되었다.

 
마즈다교 예배에서 예배하는 자는 자신이 준비한 하오마(Haoma)라는 마취성 있는
음료와 섞은 물과 빵을 봉헌했다.
그는 희생제를 행하는 동안 이 음식들을 먹었다.
서방에는 알려지지 않은 식물인 하오마를 포도즙으로 대신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고대의 관습이 미트라교 입문식에 보존되어 있었다.
빵 한 덩이와 한 잔의 물이 신비가 앞에 놓이고,
제사장이 그에게 성스런 주문을 외웠다.
변증가들은 이렇게 빵과 물(분명히 나중에는 포도주와 섞었을 것이다)을 봉헌하는 것을
주의 만찬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성례전과 비교한다.
주의 만찬처럼, 그것은 긴 수련기간을 거친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아마도 사자의 등급에 이른 자들만 그것을 허락받았고,
그래서 그들에게 “참여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이 많다.
최근에 발간된 흥미로운 부조에서 이 성스런 식사 광경을 볼 수 있다(그림 38).
베게로 덮인 침상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앞에 네 개의 작은 빵 덩이가 놓인 삼발이가 있는데,
각각의 빵 덩이에는 십자가 그려져 있다.
그들 주위에 각기 다른 서열에 속하는 입문자들이 모여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인 페르시아인이 그 두 사람에게 뿔잔을 바치고 있고,
참여자들 중 한 사람은 손에 두 번째 그릇을 들고 있다.
이 애찬식은 분명히 미트라가 승천하기 전에 태양과 가졌던 주연(酒宴)을 제의를 통해 기념하는 것이다.
이 신비적인 주연과,
특히 성스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초자연적인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다.
취하게 하는 술은 몸의 활력과 물질적 번영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지혜도 주었다.
그것은 신참자에게 악한 영들과 싸울 힘을 주었으며,나아가,그의 신에게 그러하듯이,
그에게 영광스런 불멸성을 주었다.

 
 
 
 
 
미트라교 애찬식
왼쪽에 갈가마귀와 페르시아인이 있고,
오른쪽에는 병사와 사자가 있다(최근에 보스니아의 콘지카에서 발견한 부조의 단편)
(T. et M.,p. 175).

 
 
성례전의 식사는 다른 성격의 의식과 함께 또는 그보다 후에 진행되었다.
이것은 지원자에게 부여된 진정한 시련이었다.
성스런 목욕재계와 봉헌된 음식을 받기 위해,
참여자는 오랫동안 절제와 금욕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낯선 인물의 어떤 극적인 속죄행위에서 수난자의 역할을 했는데,
그 속죄행위가 몇 가지인지,
어떻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지는 모른다.
4세기 그리스도인 작가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
신입자의 눈을 가리고,
손은 닭의 내장으로 묶었으며,
그는 물이 가득 찬 도랑을 뛰어넘어야 했다.

끝으로, 해방자가 칼을 가지고 다가와 그 지긋지긋한 속박을 끊었다.
때로는 겁먹은 신비가가 배우로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관객으로서 가짜 살해에 참여했는데,
원래는 진짜 살해였음이 분명하다.
후기에는 제사장들이 폭력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의 피에 담근 칼을 보이는 것으로 만족했다.
황소자리(the Taurus)의 호전적인 부족 가운데에서 행해지던 아주 야만적인 주연(酒宴)이었음이
분명한 이러한 의식들의 잔인함은 서구문명을 접하면서 완화되었다.
어떤 사건에서든지, 그들은 두려워하기보다는 두려움을 주게 되었고,
육체적 고통보다 괴로운 것은 입문자의 도덕적 용기였다.
그들이 얻으려고 한 것은 스토아철학의 “무감동”(apathy),
즉 어떤 감정도 없는 것이었다.
너무 잘 믿거나 너무 독창적인 작가들이 미트라교의 신자들이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불가능할 정도로
단식을 하여 수척해졌다고 한 것은 우화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스런 토굴의 그늘 속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가짜 인간제물 이야기도 그러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일종의 고대의 프리메이슨 사상의 인자한
모습만을 보여 주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제의적 드라마 속에는 원래의 야만적 사상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숲과 어두운 동굴의 심연에서 술 마시고 왁자하게 떠들면서 동물가죽을 입고 제단에
그 피를 뿌리던 때의 것이었다.
로마의 도시들에서는,
산의 외딴 동굴 대신 강한 인상이 훨씬 덜한 지하동굴(spelaea)을 이용했다(그림 39).

 
그러나 이 인공동굴에서도 입문식 장면은 신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신입자는 신전의 입구를 가로질러 간 후 동굴계단을 내려가,
눈부시게 장식되고 빛나는 성전의 후진(後陣)에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고귀한 형상이 있음을 보았다.
다음에 사자머리를 한 크로노스의 신상이 특성들과 신비한 상징들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전히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양편에는 부분적으로 어둠 속에서 보조제사장들이 돌의자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성가대석 주위에 결린 등불들이 신들의 형상에 밝은 빛을 비추었고,
이상한 옷을 입은 제사장들은 새로운 개종자를 받았다.
빛이 그의 눈과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도록 기술적으로 깜빡였다.
그는 성스런 감정에 사로잡혀 참으로 조잡한 신상들이 가장 무서운 모습으로 보였다.
그가 만난 유혹이 그에게는 진지한 위험으로 보였으며,
자기가 그것을 극복했다고 느꼈다.
그가 마신 발효음료가 그의 감각을 자극하여 이성을 극도로 혼란케 했다.
그는 신비한 주문을 중얼거렸고,
제사장들은 그의 산란한 상상력 앞에 신성한 환영을 불러내었다.
그는 망아상태에서 자신이 세계의 경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간다고 믿었고,
그 황홀경에서 나와 아풀레이우스(Apuleius)의 신비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말을 반복했다.
“나는 죽음의 경계를 넘었도다.
다는 프로세르피네(Proserpine)의 문턱을 밟고 모든 요소들을 건너고 지상으로 돌아왔도다.
나는 한밤중에 태양이 순수한 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도다.
나는 아래에 있는 신들과 위에 있는 신들에게 다가가 얼굴을 마주하고 그들을 예배했도다.”

 
 
 
비엔나 동쪽 근처에 있는 카르눈툼,
즉 현대의 페트로넬에 있는 미트라교 신전

 
(트라간[Tragan]의 그림)
 
 
이 미트라교 신전은 같은 형식의 다른 신전들처럼 지하에 있다.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거대한 부조 앞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는데,
하나는 사각형이고 또 하나는 좀 더 작지만 장식이 풍부하다.
왼쪽에 있는 작은 신상은 바위에서 태어나는 미트라이다.
입구 오른쪽에서는 미트라의 사자(獅子)를 볼 수 있고,
왼쪽에는 성수반(聖水盤)이 있다.
횃불을 든 두 사람이 측면의 복도에 있는 주석(柱石) 위에 서 있다.
미트라신전은 층계를 내려가 성소(聖所)보다 훨씬 더 넓은 사각형의 홀
(또는 프로나오스[pronaos])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T. et M.,p. 493).

 
 
이 모든 비밀한 제의의 전통은 성스런 학문을 가르침 받아 다른 입문자 계층과는 구별되는
제사장 계급이 신중하게 지켰다.
그것을 처음 확립한 사람들은 물론 동방의 제사장 계급이었으나,
우리는 그 계급이 후에 선발되고 조직된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그들은 세습되었을까? 평생 그 직함을 유지했을까? 아니면 일정한 기간 동안 선출되었을까?
후자의 경우에는 누가 선출권을 가졌으며,
후보자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논점 중 어느 것도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럴 것 같아 보이듯이,
무관심하게 “사케르도스”(sacerdos: 라틴어로 ‘제사장’-역주)나 “안티스테스”
(antistes: 라틴어로 ‘대제사장’-역주)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던 제사장들이,
늘 그렇지는 않았더라도,
종종은 아버지들(Fathers)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 신전에 한 명의 부제사장 때로는 여러 명의 부제사장이 있음을 본다.
이 “성직자 집단”에 어떤 위계가 존재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최고 대제사장(summus Pontifex)은 결혼할 수 있었으나 한 번만
결혼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아버지들의 아버지”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불렸음이 분명하다.
그는 그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재판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아마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 조직이나 로마제국의 마니교
제사장 조직처럼 확고했을 이 조직에 대해 우리가 아는 유일한 내용이다.
같은 변증가(테르툴리아누스를 말함-역주)는 이 페르시아 신의 분파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그들의 처녀들과 금욕가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미트라교 수도원 제도가 존재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독신생활이 가치 있다고 하는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직자 계급의 역할은 분명히 고대 희랍과 로마의 종교들에서보다 더 광범위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자였다.
그의 기능에는 분명히 성례전을 집전하고 예배를 주관하는 것이 포함된다.
비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에 덧붙여 제사장은 공식적인 봉헌을 주관하거나,
그런 경우에 적어도 아버지들과 함께 신자를 대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제사장이 행해야 하는 의무 중 최소한의 것일 뿐이었다.
그의 몫인 예배는 아주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영원한 불이 제단에서 타오르는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그는 하루 세 번,해가 떠오를 때와 한낮과 해질 무렵에 태양에게 기도했는데,
아침에는 동쪽을 향해,낮에는 남쪽을 향해,저녁에는 서쪽을 향해 기도했다.
매일 드리는 전례에는 특별한 희생제물이 포함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집례자(執禮者)는 조로아스터교 제사장들의 옷과 비슷한 승복을 입고 높고 낮은 신들에게
여러 가지 희생물들을 바쳤으며,그 피는 도랑에 모였다.
또는 우리가 「아베스타」를 통해 알고 있는 성스런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신들에게 헌주(獻酒)를 바쳤다.
음악반주가 있는 긴 찬송과 찬양이 의식 여기저기에 들어 있었다.
예배에서 엄숙한 순간은-분명히 종을 울려서 표시를 했을 것이다-그 때까지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형상을 덮고 있던 가리개가 신자들 앞에서 벗겨질 때였다.
어떤 신전에서는,
성체(聖體)를 넣어 놓은 우리의 성궤(聖櫃)처럼,
조각이 되어 있는 석판(石板)이 회전축을 중심으로 돌아서 양면에 장식되어 있는
형상들을 감추었다 드러냈다 했다.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매일 그 날을 봉헌한 행성을 동굴신전의 일정한 장소에서 불렀다.
태양이 지배하는 일요일은 특히 거룩했다.
나아가,
제의력(祭儀曆)에는 어떤 날들을 축일로 정해 놓았으나,
이 축일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마 (페르시아에서처럼) 매월 16일이나 매월 한 가운데가 되는 날이 미트라가 수호하는 날이었을 것이다.
한 편,
서방에서는 아시에서 그토록 널리 퍼져 있던 미트라카나(Mithrakana: 미트라의 탄생-역주)의
예배에 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다.
그것은 분명히 12월 25일의 축하예배에 스며들었다.
아주 널리 퍼진 관습에 따르면,
동지(冬至)가 끝날 때 다시 커지기 시작하는 태양의 새로운 탄생(Natalis invicti: 라틴어로
‘불굴의 존재의 생일’-역주)은 성스런 축제로 축하해야 하기 때문이다.
춘분과 추분도 즐기는 날이며, 신격화된 계절들이 돌아오는 것도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
축하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입문식은 봄이 시작되는 3월이나 4월에 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부활절 때에 그리스도인들도 입문자들을 세례의식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축제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그런 것처럼,
우리는 이 모든 의식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전혀 없다.
미트라교 공동체들은 영적인 유대로 묶인 형제단이었을 뿐 아니라,
법률적으로 존재를 인정받고 재산소유권을 누리는 결사체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을 관할하고 그 때 그 때의 관심사를 돌보도록 하기 위해 관료들을 뽑았으며,
관료들은 입문자들이나 제사장들과 혼동해서는 안 되었다.
여러 설명을 보면,
이 위원회의 위원들이 지닌 칭호들은 미트라교 신자들의 집단이 자치도시나 성읍의 구조에 근거한
다른 종교의 결사체(sodalicia)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결사체들은 구성원들의 명단)(album sacratorum)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
그 속에서 그들은 직위의 중요성에 따라 등급이 매겨져 있다.
그들은 맨 앞에 십부장(十夫長: decurions) 협의회를 두었는데,
이는 총회에서 정한 지도위원회와 거의 비슷하고,
일종의 소규모 원로원이어서,
그 중 첫 번째 10명(decem primi)은 도시들에서처럼 특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매년 뽑는 우두머리들(magistri) 또는 의장들이 있었고,
재정문제를 맡고 있는 관리자들(curatores)과,
법정이나 공공 기관에서 그들의 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인들(defensores)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후견인들(patroni)이 있었는데,
미트라교는 이들에게서 효과적인 보호뿐 아니라 예산을 채워 주는 재정지원도 기대했다.

 
국가가 그들에게 아무런 보조금을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복지는 순전히 개인성금에 의존해 있었다.
자발적인 헌금과 각 분회(分會)의 정기적인 세입으로는 예배비용을 충당하기도 어려웠고,
최소한의 특별경비는 일반신도들의 주머니에 큰 부담이 되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의 이러한 모임들은 재정이 빈약했으므로 화려한 신전들을 세울 수 없었다.
보통 그들은 우호적인 지주들에게서 땅을 얻어서 거기에 예배당을 짓거나 팠으며(동굴신전을 말함-역주),
다른 후원자들은 건축비용을 부담했다.
또는 부유한 시민이 신비가들의 뜻에 따라 방을 하나 두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거기에 예배처소를 만들었다.
원래의 기부자가 동굴신전의 내부장식과 성스런 신상들을 만드는 일을 위해 돈을 낼 수가 없으면,
다른 형제들이 필요한 금액을 냈고,
그들의 시주는 기념비문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로마에서 발견한 세 개의 봉헌비문을 통해 우리는 이 미트라교 집단 중 하나가 설립되었음을 볼 수 있다.
자유민이 된 사람과 자유민이 대리석 제단을 바쳤고,
다른 두 명의 신자들이 두 번째 대리석을 바쳤으며,
노예 한 사람도 가장 합당한 공물을 바쳤다.
마음 넓은 보호자들은 작은 교회에서 그들의 관대함으로 인해 최고의 위엄을 얻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신전은 점차 제 모습을 갖추었으며,
마침내는 어떤 사치품까지도 들여놓게 되었다.
대리석이 보통 돌을 대신하고,
조각품이 석고상을 대신했으며,
모자이크화가 물감그림을 대신했다.
결국, 처음의 신전이 쇠퇴하면,
부유한 공동체는 그것을 새로 화려하게 다시 짓는 경우가 많았다.

 
비문에 나오는 보시품의 수는 신자들이 자기들이 속한 형제단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수천 명의 열심 있는 신자들,
즉 제자들의 끊임없는 헌신 덕분에 거대한 종교집단의 유기적 세포인 이 모임들이 살아가고 번성할 수 있었다.
교단은 서로 강하게 결합되어 같은 성전들에서 같은 의식을 행하는 소모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신전들의 크기를 보면,
구성원들의 수가 늘 아주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여자들(일곱 등급의 하나-역주)만이 지하의 동굴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낮은 등급의 신자들은 전실(前室,
pronaos)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각 모임들은 100명을 넘을 수 없었다.

 
수가 너무 늘어나면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 모임을 분리했다.
이렇게 신자들이 밀집한 교회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알고 도왔으며,
대가족의 친밀함을 유지했다.
귀족사회에서 보는 분명한 구분이 여기서는 사라졌다.
같은 신앙을 택했다는 것이 소모임(decurion)과 클라리시무스(clarissimus)에서
노예들을 평등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더 우월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같은 규율을 따랐고,
축제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고귀한 손님이었으며,
죽으면 모두 분명히 공동의 무덤에서 안식했다.
현재까지 미트라교 공동묘지를 발견한 적은 없지만,
미래의 삶에 대한 교단의 특별한 믿음과 아주 명확한 의식으로 보아,
로마의 대부분의 결사체(sodalicia)처럼,
미트라교도 종교적인 모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례식을 위한 회합도 있었을 것이다.
미트라교는 분명히 매장을 행했으며,
미트라교 신자들의 가장 활발하고 가장 열렬한 욕망은 명예롭고 종교적인 매장을 당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의 날을 평안하게 기다릴 수 있는 “영원한 집”이었다.
신자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형제들이라는 이름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면,
그들은 서로에게 적어도 이 마지막 의무는 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미트라교 비밀집회의 내부상황에 대해 우리가 아주 불완전하게밖에 묘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급속하게 증가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처음에 이 지하교회에 들어온 수많은 비천한 평민들은 이 회중들의 형제애 속에서 원조와 위로를 발견했다.
그들은 평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고립과 포기에서 벗어나 위계질서를 완전히 발전시키고,
전 제국에 걸쳐 촘촘한 그물망 같은 지부를 만들어 강력한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일정한 칭호를 부여받음으로써,
세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자기 동료들의 눈에 인정을 받으려는,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자연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더 강력한 신앙의 동기가 이 순수하게 세속적인 이유와 결합했다.
이 작은 집단들의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먼 동방에서 온 고대의 지혜를 소유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상상했다.
이 측량할 수 없는 비결을 감싸고 있는 은밀함이 외경심을 증대시켰다.
“알 수 없는 모든 것은 찬양을 하기 위한 것이다“( Omne ignoratum pro magnifico est).
단계적인 입문식은 초신자의 마음에 훨씬 더 고상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으며,
이상한 의식은 초신자의 영혼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개종자들은 그러한 신비한 의식 속에서 자신들이 격려와 위로를 발견했다고 믿었으며,
그 암시는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그러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목욕재계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가 정화되었다고 믿었으며,
이 세례의식은 그들의 양심에서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었다.
그들은 이러한 연회(宴會)애서 힘을 얻고 나왔는데,
그런 연회에는 이 세상의 고통이 완전히 보상을 받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트라교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된 것은 대체로 이 엄청난 환상 때문이었다.
그 환상이 그토록 깊이 또 철저하게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 페르시아의 종파가 로마황제들의 치하에서 인간영혼의 제국에 대한 논쟁 속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교회들과 싸울 때,
이들에게는 그 싸움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한 가장 약점이 있었다.
동방종교들 대다수는 교회에서 여성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여성에게서 믿음의 열렬한 지지자들을 보고,
때로는 그들에게 우월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트라교는 그들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으므로,
미트라는 이 전도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교단의 이 무례한 제자들은 성스런 군대에서 등급을 받을 수 없었으며,
동방의 마즈다교도들처럼 그들은 신자사회에서 부수적인 지위만을 차지했을 뿐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수백 개의 비문 중 여자제사장이나 여신자나 심지어 여자기부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보편적이기를 원하는 종교가 신성한 일들에 관한 지식을 인류의 절반에게만
전파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성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로마에서 동맹을 맺었는데,
이는 분명히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나머지 이교에 대한 미트라교의 정책을 고찰하지 않고는 동방 미트라교의 역사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제6장 미트라교와 로마제국의 종교
동방의 순교자들의 행전(行傳)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국가적인 성직자제도가 편협했다는 것에
대해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또 고대제국의 조로아스터교 제사장들은 설혹 박해자들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배타적인 계급,
아마도 심지어는 특권층을 이루고 있었다.
미트라의 제사장들이 비슷한 태도를 지녔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교처럼,
미트라교는 소아시아에서 희랍문명에 의해 완화되었다.
미트라교는 낯선 세계로 옮겨져 그 곳에 퍼져 있는 관습과 관념에 적응해야 했다.
사람들이 미트라교를 호의로 받아들이자,
미트라교는 용기를 내어 유화책을 견지했다.
미트라와 함께 그의 편력에 동반한 이란의 신들은 서방에서 희랍이름과 라틴이름으로 숭배를 받았다.
「아베스타」의 야자타(yazata: ‘신‘의 뜻-역주)는 거기서 올림푸스산에 자리 잡은
불멸의 존재들의 모습을 취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아시아 종교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고대 그리이스-로마의
신앙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고,
스스로 그들에게 적응하려고 했음을 알려 준다.
경건한 신비가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도 카피톨(로마에 있는 언덕으로
여기에 유피테르의 신전이 있었음-역주)에 있는 세 명의 신인
유피테르,유노,미네르바에게 명문(銘文)을 봉헌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이 신들의 이름을 보통 받아들이는 의미와 다른 의미로 해석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말하듯이,
미트라교 신자들에게 다른 예배에 참석하지 말라는 금령이 있었다면,
미트라교는 제국의 이교가 지닌 혼합주의적 경향을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4세기에 “아버지들의 아버지들”이 모든 종류의 신전에서 제사장제도의
최고위직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림 40.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S. H. 제인스(Janes) 소장(所藏). 캐나다 토론토의 제인스 빌딩 소재. 보통의 장식.
왼쪽 윗부분 구석에 태양의 흉상이 있고,
오른쪽 윗부분 구석에 달의 흉상이 있다.
신의 왼손은 파손되었지만 분명히 황소의 콧구멍이 아니라 뿔을 잡고 있다.
부분적으로 복원했지만,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아도,
횃불을 든 자들이 모두횃불을 위로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T. et M.,그림 418,p. 483).

 
 
미트라교는 어디서나 최고의 기교로 자신이 사는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알았다.
다뉴브강 골짜기에서는 미트라교가 토착종교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미트라교가 그들과 오랫동안 접촉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라인강 지역에서는 켈트족의 신들이 페르시아 신의 동굴신전에서,
아니면 적어도 그 곁에서 나란히 숭배를 받았다.
이와 같이 마즈다교 신학은 자신이 번성한 나라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띠었는데,
그 정확한 색채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미묘한 교리의 차이는 단지 그 종교의 부수적인 내용을 변화시켰을 뿐이고,
근본적인 통일성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았다.
이 유연한 교리가 분화하여 이단을 만들어 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미트라교가 양보한 것은 순전히 형식의 문제였다.
실제로 미트라교는 완전히 성숙한 상태로,
심지어는 노쇠함의 징표마저 보이면서 서방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주변생활에서 빌려온 요소들을 동화시키지 않았다.
그 특성을 심각하게 변화시킨 유일한 것은 초기에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받은 영향뿐이었다.

 
미트라와 이 나라의 어떤 신들이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미트라교가 희랍과 로마의 이교에 대립하여 자연적인 친근성을 가지고 동방의 모든
이주자들을 결합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집트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고대의 종교적 적대감은 로마황제들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이란의 신비는 공개적으로 대립하지는 않았더라도 은밀한 경쟁관계에 의해 이시스의
신비와 분리되었던 것 같다.

반면에, 미트라의 신비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함께 이주해 온 시리아 종교와는 쉽게 결합되었다.
갈대아인들의 이론으로 완전히 물든 그들의 교리는 셈족의 종교들의 교리와 놀랄 정도로 유사했을 것이다.
유피테르 돌리케누스(Jupiter Dolichenus)는 그가 기원한 콤마네게에서 미트라와 함께 동시에 숭배받았고,
미트라처럼 대단히 전투적인 신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는 서방의 모든 나라에서 미트라 곁에서 발견되었다.
판노이아의 카르눈툼에서는 미트라 신전과 돌리케누스의 신전이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하늘들의 주님인 바알(Baal)은 유피테르-카일루스
(Jupiter Caelus: ‘하늘의 유피테르’라는 뜻-역주)가 된 오르마즈드와 쉽게 동일시되었고,
미트라는 시리아인들의 태양신과 쉽게 유사해졌다.
두 개의 예배의식조차 비슷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콤마네게에서처럼 프리기아에서도 미트라교는 그 나라의 종교와 공통의
이해를 지닐 수 있는 근거를 추구했다.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결합 속에서,
상대방은 위대한 토착신들인 앗티스와 퀴벨레의 친밀함과 같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두 쌍의 신들의 이 조화는 이탈리아에서도 계속되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미트라교 신전은 오스티아의 메트룬(metroon: 퀴벨레의 신전-영역자 주. metroon이라는 라틴어는 ‘어머니’를 뜻하는 mater에서 온 말임. 즉,
“어머니 여신의 신전”-역주)에 근접해 있었으며,
우리는 저 이란의 신에 대한 예배와 프리기아 여신에 대한 예배가 로마제국의 전 영역에서
서로 긴밀한 교류 속에 행해졌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성격이 매우 달랐지만 정치적 이유로 결합되었다.
위대하신 어머니(Mater Magna)의 제사장들을 달래기 위해,
미트라교 신자들은 강력하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성직자제도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리하여 어느 정도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나아가,페르시아 제의의 비밀의식에는 남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으므로,
그것을 완전케 하기 위해 여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른 제의가 전자와 일종의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위대하신 어머니는 아나히타의 자리를 계승했다.
미트라가 자기 “아버지들”이 있었듯이,
그녀에게는 그녀의 “어머니들”(Matres)이 있었고,
그녀의 신자들은 서로에게 “자매들”로 알려졌으니,
이는 그의 모임의 신자들이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과 같았다.

 
이 동맹은 일반적으로 성과가 좋았으나,
특히 이제 로마에서 자연스러워진 페시누스(Pessinus: 갈라티아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퀴벨레 예배로 유명했음-역주)의 고대제의에 유익했다.
그 축제의 화려함은 그 교리가 공허한 것을 애처롭게 가리는 가면이었다.
그 교리는 신자들의 갈망을 더 이상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 조잡한 신학은 마즈다교 신앙의 일부를 채택하여 격조가 높아졌다.
그것과 관련된 정화와 불멸의 개념을 가지고 행하는 황소를 죽이는 의식이,
안토니우스 황제들의 치세 기간에 아나히타의 신전에서 ‘위대하신 어머니’의 신전으로
전해졌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격자를 단 대(臺) 위에서 죽인 희생동물의 피를 아래 구덩이에 누워 있는 신비가에게
떨어뜨리는 야만적인 관습은 아마도 기억할 수 없이 오래 전부터 아시아에서 행해졌을 것이다.
원시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개념에 따르면,
피는 생명력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그것을 자기 몸에 붓고 그것으로 혀를 적시는 자는 그로 인해 도살당한 동물의 용기와 힘을 얻는다고 믿었다.
이 성스런 목욕은 캅파도키아의 수많은 신전,
특히 위대한 토착신인 마(Mâ)의 신전들과 아나히타의 신전들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여신들에게는 황소를 바쳤는데,
희랍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여신들을 자기네의 아르테미스 타우로폴로스(Artemis Tauropolos)와
비슷하게 여겼다.
또 그들의 제의에서 행하는 세례의식은 “타우로폴리온”(ταυροπόλιον)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민간어원설에 의해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ταυροβόλιο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미래의 삶에 대한 마즈다교 신앙의 영향으로,
이 세례에 좀 더 깊은 의미가 부여되었다.
세례를 받을 때 신자들은 더 이상 그들이 황소의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제는 생명을 지닌 액체가 육체적인 힘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든 일시적으로든 인간 영혼을 새롭게 해 준다고 생각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타우로볼리움이 이탈리아에 소개되었을 때,
여신을 위해 그것을 봉행하면서도 그 여신의 라틴어 이름을 무어라고 해야 할지는 처음부터
아주 분명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녀에게서 천상의 비너스를 보았고,
다른 이들은 그 여신의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그녀를 미네르바와 비교했다.
그러나 퀴벨레의 제사장들은 곧 그들의 제의에 이 의식을 도입했는데,
공식적인 당국과 함께 논의한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공인된 종교의 제의는 15인의 제사장회의(quindecemvir)들의 인가 없이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다.
황제들조차도 구원을 위해 이 끔찍한 희생을 행하는 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특별한 호의를 베푼 동기는 분명하지 않다.
피를 통한 이 정화가 지녔다고 하는 효력. 그것을 통해 기대하는 영원한 신생(新生)은 미트라교의
신비가들이 신화적인 황소를 희생할 때 기대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교리들이 비슷한 것은 그들의 기원이 같다는 것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동방종교들의 여러 의식들처럼 타우로볼리움은 심령론적 신학(the spiritualistic theology)이
도덕적인 목적으로 채택한 야만적인 과거의 잔재이다.
특징적인 사실은 프리기아의 여신(퀴벨레를 말함-역주)의 제사장들이 행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런 종류의 최초의 희생이 오스티아에서 일어났으며,
위에서 본대로 거기서는 “메트룬”(metroon)이 미트라의 동굴신전에 인접해 있었다는 것이다.

 
신비들의 상징은 분명히 “위대하신 어머니”에게서 만물을 기르는 대지를 보았는데,
이 대지는 해마다 하늘들이 비옥하게 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채용한 그리이스-로마의 신들은 그들의 교리체계 속으로 들어가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때때로 이 신들은 마즈다교의 영웅들과 동일시되었으며,
그 때 야만인들의 전설은 그들이 행한 새로운 공적을 찬양했다.
때로 그들은 우주의 여러 변형을 일으킨 인물들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 그랬듯이 다시 자연주의적으로 된 이 만신전의 중심에 태양이 놓였다.
태양이 모든 행성의 운동을 지배하고 심지어 하늘들의 회전을 지배하는 최고의 주님이요,
그 빛과 열기로 여기 아래의 모든 생명을 충만케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원래 점성학에서 나온 이러한 개념은 미트라가 희랍사상과 좀 더 긴밀한 관계가 될 수록 점점 더 우세해졌으며,
로마국가의 좀 더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 뒷면에는 큐피드와 프쉬케가 있다(파손됨).



그림 41. 미트라교의 보석
앞면: 자신의 사두마차에 똑바로 서서 손에 네 방위가 표시되어 있는 구(球)를 들고 있는 태양신. 뒷면: 황소를 끌고 가는 미트라(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박물관).

벽옥(碧玉)(T. et M.,p. 449)
 
 
태양숭배는 태양이 매일 베풀어 주는 은혜를 인정하는 정서의 산물로,
우주체계에서 태양이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관찰함에 따라 더욱 확대되었는데,
이 신앙은 이교신앙의 논리적 결과였다.
비판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성스런 전통을 설명하려고 하여,
대중적인 신들에게서 자연의 힘과 요소들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우리 지구가 그 존재 자체를 의지하고 있는 별(태양-역주)에게 어쩔 수 없이
지배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가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것 속에서,
즉 세상 밖에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주장하는 데에 이르기 전에는,
오직 한 종교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태양숭배였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희랍철학은 천체들을 영혼이 있고 신성한 피조물로 여겼다.
스토아철학은 이러한 견해를 옹호하며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다.
반면에 신파티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지성적인 하나님의 영원히 현존하시는
상징인 발광체의 성스런 특성을 훨씬 더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상가들이 동의한 이러한 신앙은 책을 통해,
특히 낭만적인 소설로 신학적인 가르침을 교묘하게 포장한 작품들을 통해 널리 퍼졌다.
태양숭배가 날[日]에 대한 철학적 가르침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그것의 정치적 경향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는 황제숭배와 “불굴의 태양”에 대한 숭배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보여 주려고 노력해 왔다.
3세기의 로마황제들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을 가장했을 때,
그들의 상상력을 정당화하자 그 결과로 신에 대한 대중의 예배를 제도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에게서 나온 방사체들이라고 믿었다.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alus)는 에메사의 바알(Baal of Emesa)이 이교의 모든
만신전을 다스린다고 주장했다.
한 쪽으로 치우친 이 사람은 기괴함과 폭력으로 자기 일에서 후회스러운 파국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필요에 대한 응답이었고,
곧 다시 채택되어 좀 더 성공을 이루었다.
마르스 벌판 동쪽에 있는 플라미니아 도로 가까이에서,
아우렐리아누스(서기 270-275 재위-역주)는 자기에게 시리아에서 승리를 안겨 준
수호신에게 거대한 건축물을 봉헌했다.
그가 세운 국가종교를 미트라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훌륭한 신전,과시적인 의식,4년마다 행하는 경기,
주교제도 등을 보면 미트라교의 제의를 행하던 어두운 동굴이 아니라 동방의 거대한 성전들이 생각난다.

 
그러나 황제들이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화려함으로 경배하려고 했던 저
“불굴의 태양”은 미트라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림 42. 미트라교의 카메오(붉은 옥)
앞면: 중앙에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와 함께 개,
전갈,두 명의 횃불 든 사람 등이 있다.
뒷면: 사자 한 마리와 그 입에 든 꿀벌이 있다.
위에는 일곱 개의 별들이 희랍어로 된 마법의 비문에 둘러싸여 있다
(T. et M.,p. 450).

 
 

그림 43. 태양신 솔(Sol: 라틴어로 '태양‘의 뜻-역주)

태양신은 세계의 지배자인 미트라가 임명했다.
오른쪽에는 권위를 나타내는 구(球)가 있다(T. et M.,p. 202).

 
 
제국의 정책은 태양에 대한 공식적인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미트라교도들이 전파한 갈대아인들의 사상에서 왕의 별이 다른 별들을 다스리듯이,
군주는 태양의 방사체이다.
양면에서 모두,우주를 비추는 저 빛나는 별(태양-역주)을 유일신,
또는 적어도 유일신의 인식할 수 있는 상징으로 보고,
지상을 다스리는 군주를 모방하여 하늘에 유일신 사상을 세우려는 경향이 증가했다.
마크로비우스(Macrobius,서기 400년)는 자신의 책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에서
학자답게도 신들은 궁극적으로,
여러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는 한 존재에게로 환원되며,
신들을 예배할 때 쓰는 여러 이름은 헬리오스(Helios: 희랍어로 ‘태양’의 뜻-역주)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급진적인 혼합을 옹호한 신학자 베티우스 아고리우스 프라이텍스타투스
(Vettius Agorius Praetextatus)는 로마제국의 최고위 인사 중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 신비의 마지막 대제사장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적어도 4세기에 미트라교는 거대한 종합 속에 모든 신들과 모든 신화를
통합하는 것을 목적과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지배적인 철학과 정치적 구조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종교의 기초였다.
이 종교는 별들의 권능에 최소한의 자리만을 내 준 그리이스-로마의 이교와 고대
이란의 마즈다교에서도 멀리 떨어져 나왔다.
미트라교는 어느 정도 처음부터 우상을 숭배했으며,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그 신화 속에서 자연의 신격화를 발견했다.

 
예배의 국적에 관한 로마의 원리와 부딪치면서,
미트라교는 불굴의 태양과 동일시하는 미트라의 우주적 지배를 확립했다.
그 신자들은 모든 헌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붕괴된 신앙들에게 새로운 응집력을 부여하기를 바랐다.
태양범신론은 이제 고대의 전(全) 질서를 말살시키고자 하는 혁명적인 선전
(그리스도교의 전파-역주)에 위협을 받고 있던 보수적인 영혼들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이 이교적 유일신론이 로마에서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하던 때에,
미트라의 신비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싸움이 오랫동안 시작되고 있었다.
두 종교의 전파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비슷한 조건에서 퍼져나갔다.
동방에서 온 두 종교는 모두 동일한 일반적인 이유,
즉 제국의 정치적 통일과 도덕적 무질서 때문에 퍼져나갔다.
그 종교들은 비슷한 속도로 급속히 퍼졌으며,
2세기 말이 되어갈 무렵,
그 종교들은 로마세계의 가장 먼 지역에서도 신자들을 확보했다.
미트라교 신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의 과장된 말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제의 사람들이요,
이제는 너의 것이 모든 것을 가득 채웠다“(Hesterni sumus et vestra omnia implevimus).
저 페르시아 종교가 우리에게 남긴 기념물의 수를 생각하면,
세베루스 황제(Lucius Septimius Severus,서기 146-211,
재위 193-211-역주) 시대에 미트라교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쉽게 품을 수 있다.
대립하는 이 두 신앙 사이의 또 한 가지 유사점은,
이 종교들이 처음부터 주로 로마사회의 하층계급에서 신자들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철학적 교파들과는 달리,
그들의 포교는 원래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교양인들에게보다 대중들에게 더 노력을 기울였으며,
결과적으로 이성보다 감성에 더 많이 호소했다.

 
그러나 대립하는 이 두 종교의 전개방법에는 이러한 유사점들과 나란히 엄청난 차이점도 있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diaspora: 로마에 의해 나라를 잃고 흩어진 유대인들-역주)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정복을 반겼으며,
처음에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 식민들이 살고 있던 나라들에 퍼졌다.
그러므로 주로 지중해 유역의 나라들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발전했다.
그들은 그 도시들 밖으로 자신들의 행동영역의 확장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대부분 “민족들을 가르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수가 늘었다.

반면에,미트라교의 확장은 본질적으로 사회-정치적 요인들의 자연스런 산물이었다.
즉,노예수입,군대의 이전(移轉),공무원들의 이주의 결과였다.
미트라교는 통치집단과 군대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을 확보했다.
이들은 공식적인 이교신앙을 혐오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거의 없었던 집단들이다.
이탈리아 밖에서 미트라교는 주로 국경지방을 따라 퍼졌으며,
도시와 시골에 동시에 기반을 마련했다.
미트라교는 다뉴브강 유역의 영지들과 독일에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으나,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급속히 퍼졌다.
그러므로 이 두 종교세력의 영역은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은 오랫동안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3세기 동안미트라 숭배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경쟁이 특히 활발했던 곳은
두 경쟁자들이 가장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론강 골짜기와 아프리카와 특히 로마라는 도시였다.

 
두 개의 대립하는 종교 사이의 투쟁은 그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두 종교의 신자들은 긴밀하게 결합된 비밀집회를 만들었고,
그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행한 의식은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페르시아 신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세례로 자신들을 정화했으며,
일종의 견진례(堅振禮)에 의해 악의 영들과 싸우는 데 필요한 힘을 얻었고,
성만찬에서 육체와 영혼의 구원을 기대했다.
그들은 일요일을 거룩하다고 여겼으며,
12월 25일에 태양의 탄생을 기념했는데,
이 날은 적어도 4세기 이래로 오랫동안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해 온 바로 그 날이다.
그들은 둘 다 윤리학의 범주적 체계를 설파했고,
금욕주의가 덕이 된다고 여겼으며,절제와 금욕,
포기와 자제를 주요덕목으로 삼았다.
세계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비슷했다.
그들은 둘 다 축복받은 자들이 사는 위의 영역에 있는 천국과,
지구의 내부에 있는 악마들이 사는 지옥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둘 다 역사의 초기에 홍수가 있었다고 보았으며,
태초의 계시가 자기들의 전통의 근원이라고 주장했고,

끝으로,영혼의 불멸과,
우주가 마지막으로 소멸된 후에 있을 마지막 심판과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우리는 미트라교 신학이 “중개자“ 미트라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로고스와 동일하게 여겼다는 것을 보았다.
미트라처럼 그리스도도 ”중개자“(μεσίτης),
즉 천상의 아버지와 인간들 사이의 조정자였으며,
또 미트라처럼,그도 삼위일체 중 하나였다.
물론 이교(異敎)의 해석학이 두 종교 사이에서 이러한 유사성만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를 창조하고 구원하기 위해 마지못해 자기의 희생물을 죽이는,
즉 황소를 죽이는 신의 형상은 분명히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구원자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반면에,
교회의 작가들은-예언자 말라기ㅡ이 비유를 되살려 “정의의 태양”을 “불굴의 태양”과 대조시켰으며,
사람들을 비추는 저 눈부신 구체(태양-역주) 속에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상징을 보는 데 동의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저 박사들의 미묘한 구별을 보는 데 늘 실패했고,
그들이 정통파에서 그리스도에게 하는 헌신의 맹세를 이교의 관습을 따라 한 낮의 빛나는
별(태양-역주)에게 했다고 해서 놀라야 하는가? 5세기에는 이교도들뿐 아니라 신실한 신자들조차도
여전히 저 눈부신 원반(태양-역주)이 지평선에 떠오를 때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를 읊는 데 익숙했다.

 
 
 
그림 44. 태양신  미트라 하나님의 수난
흔히 사람들은 이 조각상이 죽어가는 알렉산더라고들 한다.
페르가몬학파에서 나온 조각상들의 유형으로,기원전 2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를 태양신으로 이상화한 초상화가 카피톨의 유명한 미트라상의 머리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를 보라).
이 작품의 특징인 슬픔,비애,연민을 나타내는 얼굴표정은 미트라의 희생을 나타내는
훨씬 더 중요한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의 조각상은 부분적으로 복원한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 원래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를 묘사한 아시아 조각상들의
일부인지는 확실히 단정할 수 없다
(T. et M.,서론,p. 182).

 
 
적대적인 두 교회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여서 고대인들의 마음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3세기부터 희랍의 철학자들은 저 페르시아 종교와 분명히 희랍철학에 대해 완전히
우호적이었던 그리스도교 사이의 유사성을 찾아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변증가들도 두 종교의 유사점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을 자기들의 종교의 가장 거룩한 의식의 희화화(戱畵化)라고 설명했다.
미트라교도들의 논쟁적인 작품들이 보존되었더라면,
우리는 분명히 그들이 그리스도인 적들에게 동일한 비난을 하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당대 사람들을 분열시킨 문제를 오늘날 해결한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문제는 분명히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초기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로마의 마즈다교의 교리와 제의에 대해 아는 것은 너무도 불완전해서,
그들이 동시에 발전하면서 서로에게 어떤 영향이 끼쳤는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사점이 반드시 모방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미트라교 교리와 카톨릭 신앙이 여러 가지로 일치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동방에서
기원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개념들과 의식은 하나의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오히려 이러한 이전(移轉)을 분명하게 인식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영웅의 전설에서 예수의 삶에 해당하는 자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었으며,
페르시아 제사장들의 제자들은 아마도 목동들의 미트라 예배와 미트라의 성만찬과 승천 등과
복음서에 나오는 같은 내용이 직접적으로 대조된다고 보았을 것이다.
빛의 수호자를 낳은 탄생의 바위는 심지어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교회의 기반인
부동(不動)의 바위와 비교할 수 있다.
황소가 죽은 동굴은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하는 베들레헴의 동굴과 짝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억지스런 비교는 단지 풍자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마즈다교가 겨우 신화적인 구원자를 믿었다는 것은 마즈다교가 열등하다는 강력한 자료였다.
여러 가르침과 십자가 위에서 희생된 하나님의 수난이 제공하는 종교적 정서의
마르지 않는 샘은 결코 미트라의 제자들을 위해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한편,
서기 1세기 동안에 점점 솟아나온 그리스도교 정통파와 이단의 제의는 모든 이교 중에서
그리스도교의 제도와 가장 유사한 미트라교 신비에서 풍부한 영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성례전의 제의와 그에 의거한 소망이 마즈다교의 교리와 제의에 의해 변화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매일 세 번-해 뜨기 전, 한낮, 해 질 무렵-태양을 부르는 관습은 교회의
일과기도(日課祈禱)에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또 불굴의 신이 다시 태어난 것(Natalis invicti)을 축하하는 날이 동지였기 때문에,
성탄절을 12월 25일로 정했다는 것도 분명한 것 같다.
성스런 축제로 보편적으로 구별된 이 날을 택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는 자신이 억압할 수 없었던 이교의 관습을 어느 정도 정화한 것이다.

 
 
 
그림 45. 메이앙스의 부조
활을 당기고 있는 미트라와 바람의 신
 
 
그리스도교가 미트라교를 어디까지 모방했느냐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예술분야이다.
처음 발전한 미트라교 조각은 고대 그리스도교의 대리석 조각가들에게 수많은 모형을 제공했고,
그들은 그것을 채택하거나 개작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화살로 쳐서 생명수가 솟아나도록 하는 미트라의 형상에서 영감을 얻어 호렙산의 바위를 막대기로
치는 모세의 형상을 창조했다(그림 45). 그들은 뿌리 깊은 전통(미트라교-역주)에 충실하여 새로운 신앙
(그리스도교-역주)이 명백히 금지한 하늘들과 바람들 같은 우주적 신들의 모습을 재생하기도 했다.
우리는 세밀화에 나오는 성찬식(sacrophagi)과 심지어는 로마교회의 정문들에서 미트라의
성스런 동굴들을 장식한 훌륭한 작품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의 의미를 과장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미트라교가 대단히 유사하고,
그 중 주요한 것이 영혼의 정화에 대한 믿음과 복된 부활에 대한 소망이라 하더라도,
적지 않은 차이점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로마 이교에 대한 관계가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마즈다교 신비는 적응과 타협을 통해 이교를 융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다신론과 싸우지 않고 유일신론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로는 늘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원칙적으로는 어떤 형태의 우상숭배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반대했다.
미트라교의 태도가 분명히 더 현명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페르시아 종교는 더 유연하고 강력하게 적응할 수 있었고,
고대의 전통과 당시 사회의 고통스런 결렬의 공포 속에 있는 모든 이들을 황소를 죽이는 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신앙과 자기 나라를 싫어하지 않고도,
더욱 순수하기를 갈망하고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마음을 만족시켜 준 교리를 더 좋아했음이 분명하다.
교회가 박해를 받았으면서도 점점 더 세력이 커짐에 따라,
이 타협책은 먼저 미트라교에게 더 많은 관용을 보장해 주었고,
나중에는 공공권력의 호의까지 얻게 해 주었다.
그러나 또한 미트라교는 그로 인해 그 예배와 제의를 복잡하게 만드는 조잡하고
우스운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미트라교는 엄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티스의 추종자들의 종교와 대등한 동맹을 맺어 그러한 것을 받아들였다.
또 미트라교는 그로 인해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과거의 무게 전체를 짊어지게 되었다.
로마화한 마즈다교가 승리했다면,
다양한 이교 신비주의를 잊지 않게 보존했을 뿐 아니라,
그 교리가 의거하고 있던 그릇된 물리학설도 계속 유지했을 것이다.
자연숭배와 부딪친 그리스도교 교의는 이 불순한 관념에서 벗어나 있었고,
일체의 타협적인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대단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부정적인 가치(미신이나 우상숭배 등과 같은 오류를 부정하는 가치-역주),
깊이 뿌리박은 편견에 대한 투쟁은,
그리스도교가 약속한 소망과 마찬가지로,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교로 오게 했다.
그리스도교는 법령과 제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고대세계에 대해 승리하는 기적적인 공적을 세웠으며,
미트라교의 신비는 국가의 보호가 사라지고 적대감으로 바뀐 순간에 신속하게 폐지되었다.

 
미트라교는 3세기 중엽에 그 힘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한 순간은 마치 세상이 곧 미트라교로 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만인들의 1차 침입과 특히 다키아(Dacia)의 결정적인 상실(서기 275년)로 곧
아그리 도쿠마테스(Agri Documates)의 시대가 왔고,
로마세계의 주변부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마즈다교에게 끔찍한 일격을 가했다.
판노이아 전역과 이탈리아 변방의 비루눔에서는 미트라교 신전이 약탈당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그리스도교의 급속한 전진으로 위협을 받은 당국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가력한 적대자(미트라교-역주)를 다시 지원했다.
전반적인 몰락 속에서,군대가 남아 있는 유일한 영역이었으며,
군단들이 만들어 낸 로마황제들은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이 좋아하는 종교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 273년,아우렐리아누스는 황소를 죽이는 신의 신비들과 나란히 공적인 종교를 세웠는데,
그는 “불굴의 태양”(Sol invictus)에 대한 경의로 그 종교에 풍부한 재정지원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은 복잡한 위계질서와 그 주님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과
수많은 환관들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사산조를 모방한 것이었는데,
그는 당연히 자기의 독재적인 본능을 미화하는,
페르시아에서 나온 교리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자신과 결합한 황제와 군주들은 서기 307년에 카르눈툼에서 회의를 갖고,
거기에 그들이 새로 만든 제국의 천상의 보호자의 신전들 중 하나를 복구했다.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미트라교 제사장계급이 갈레리우스 치하의 대박해를 부추겼다고 믿었다.
이란에서처럼 로마제국에서도,
막연하게 일원론적인 태양숭배가 유일하고 편협한 국가종교가 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개종하자 그의 전임자들의 정책이 태양숭배자들에게
내세웠던 약속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그가 한 때 자신이 믿었던 신앙을 박해하지는 않았지만,
그 신앙은 공인된 종교를 이룰 수 없었고 단지 관대하게 포용되었을 뿐이다.
그의 후계자들은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잠재적인 도전이 있은 후에 공개적인 박해가 이어졌다.
그리스도교 논객들은 마즈다교 신비의 전설과 제의를 풍자하는 것으로 공격을 제한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신비들을 만든 자들이 로마와 화합할 수 없는 적이라고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우상숭배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들의 주장은 신속하게 실현되었다.
한 수사학자는 말하기를,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는 이제 아무도 감히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것을 볼 수 없었으며,
농부와 선원들조차 별들을 보기 꺼려했고,
벌벌 떨면서 눈을 땅바닥에만 고정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이 강한 표현에서 당시 모든 이교도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공포의 과장된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서기 331-363)의 선언은 갑자기 뜻밖의 상황전환을 일으켰다.
고올의 군대가 왕좌에 앉힌 철학자였던 율리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태양에 대한 비밀한 헌신을 마음에 품었다.
그는 이 신이 젊은 시절을 위태롭게 한 위험에서 자신을 구원했다고 확고하게 믿었다.
그는 자신이 그에게서 신의 사명을 위임받았다고 믿었으며,
자신을 그의 종, 아니 영적인 아들이라고 여겼다.
그는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차가운 신학적 논설 곳곳을 열렬한 시가(詩歌)로 바꿔버린 글을
이 천상의 “왕”에게 바쳤으며, 그가 예배한 별(태양-역주)에 대한
그의 신앙의 열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결코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 젊은 군주는 아마도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미신적인 편향성 때문에 미트라교에 이끌렸을 것이다.
그가 즉위하기 전에,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그는 철학자인 에페수스의 막시무스를 통해 비밀리에 미트라교 비밀집회에 소개를 받았을 것이다.
그의 입문식은 그의 정서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그 후로 자신이 이 생과 내생에 미트라의 특별한 가호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면을 벗어 던지고 공개적으로 자신이 이교도임을 선언하자마자,
그는 막시무스를 자기 곁으로 불러, 자신이 그리스도인들의 세례와
성만찬을 받음으로써 얻은 오점을 씻기 위해 특별한 목욕재계와 정화의식을 치렀음이 분명하다.
그는 왕좌에 오르자마자(서기 36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페르시아 종교의식을 서둘러 도입했으며,
거의 동시에 아테네에서 최초의 타우로볼리아(taurobolia) 의식을 거행했다.

 
미트라교의 신자들은 모든 면에서 머리를 들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대주교 그레고리가 미트라교 신전의 유허(遺墟)에 교회를 세우려고
피비린내 나는 봉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행전장관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찢겨 361년 “불굴의 신이 탄생한 날” 전야인
12월 24일에 대중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황제는 세라피스시(市)에 아버지다운 충고를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배교자(율리아누스 황제-역주)는 페르시아에 대한 역사적인 원정에서 곧 죽음을 맞았다.
그는 아마도 자기에게 신앙을 전해 준 땅을 점령하고픈 은밀한 욕망과,
자신의 수호신이 가기 적들의 맹세보다는 자기의 맹세를 가납(嘉納)해 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 원정을 했을 것이다.
저항을 하려는 간헐적인 시도는 이와 같이 사라지고,
이제는 결정적으로 승리자가 된 그리스도교가 그토록 자기를 근심하게 하던 그릇된
교리를 근절하는 과제에 착수했다.
황제들이 우상수배를 금지하기도 전에,
점성학과 마법에 반대하는 그들의 칙령이 미트라의 제사장들과 제자들을 공격하는 간접적인 수단이 되었다.
서기 371년에, 비밀한 제의를 행한 수많은 사람들이 날조된 음모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밀교의 비법전수자인 막시무스 자신도 이런 고소의 희생자가 되어 죽었다.

 
오래지 않아 제국정부는 공식적이고 직접적으로 이 수치스런 종파에 반대하는 법률을 정했다.
로마의 영지들에서는 대중봉기가 일어나 행정장관들이 미트라교를 박해할 것임을
예견하게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폭도들은 당국과 공모하여 신전들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미트라교 신전의 유허들은 그들의 광분하여 폭력으로 미트라교를 황폐하게 만들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로마에서도 서기 377년에 그락쿠스(Gracchus) 사령관이 세례의 특권을 추구하며,
자신의 개종이 진지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담보로 미트라교 동굴신전과 거기 있는
모든 신상들을 “파괴하고 흩어버리고 전율하게 했다.
” 제사장들은 그들의 동굴신전이 약탈당하지 않기 위해 거기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출입구에 벽을 쌓아 막거나 보호가 잘 되는 은닉처에 그들의 신상들을 옮겨 놓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들에게 닥친 폭풍이 일시적인 것일 뿐이고 시련이 날이 지나면 그들의 신이 다시
마지막 승리의 빛을 발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 편,그리스도인들은 그 곳에 시체를 두어 더럽혀서 나중에라도 예배에 적합하지 않게 하려고,
때때로 순종하지 않는 미트라교 제사장들을 죽여 그들의 성전의 유허에 묻어 영원히 더럽혔다
(그림 46).

 
 
 
그림 46. 사슬에 묶인 해골
로렌지방의 사레부르에 있는 미트라교 신전에서 발견
(T. et M.,p. 519)

 
 
미트라교가 회복되리라는 희망은 특히 이교의 수도로 남아 있던 로마에서 확고했다.
여전히 자기 조상들의 전통에 충실한 귀족계급은 자기들의 부와 권력으로 이 종교를 지원했다.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불멸의 미트라의 아버지이자 전령”이라고 자칭했으며,
제물과 기금을 늘렸다.
그라티아누스가 서기 382년에 그들의 부유한 신전들을 파괴했을 때 그들은 미트라에게
두 배로 더 많은 것을 바쳤다.
한 대지주는 초라한 시구(詩句)에서 자기 할아버지가 플라미아 도로 근처에 세운 눈부신
동굴신전을 자기가 어떻게 복구했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는 어떤 종류의 공공보조금도 필요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뽐내고 있다.
에우게니우스의 왕권찬탈로 기대했던 미트라교의 부활이 잠시 일어나는 듯했다.
근위대(praetorium) 사령관인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는 엄숙한 타우로볼리아를 거행하고
성스런 동굴에서 왕위를 노리는 자와 “동행하시는 하나님”(deum comitem)의 신비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서기 394년 테오도시우스의 승리로 고대 마즈다 신앙의 이 시대에
뒤떨어진 일당의 희망은 단번에,그리고 영원히 깨졌다.

 
몇몇 비밀스런 집회는 억척스럽게도 궁전들의 지하은신처에서 계속 열렸다.
저 페르시아 신의 종교는 알프스 산맥과 보스게스 산맥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아마도 5세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미트라교 의식은 협곡이 그 입구를 막고 있는 번영하는 골짜기의 주인들인 아나우니족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라틴국가들에 있던 이 마지막 제자들은 도덕적 정치적 타락에 물든 종교를 점점 버리게 되었다.
미트라교는 탄생지인 동방에서 아주 완강하게 그 기반을 유지했다.
미트라교는 로마제국의 나머지 지역에서 쫓겨나,
자신이 나온 나라들에서 피난처를 찾았으며,
거기서는 그 빛이 서서히 꺼져갔을 뿐이다.

 
그러나 미트라교가 300년 동안 로마제국 전역에 퍼뜨린 개념들은 미트라교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 아니었다.
그 중 일부,
심지어는 지옥에 관한 개념,
성만찬의 효력,
육체의 부활과 같은 미트라교의 가장 특징적인 개념들조차도 미트라교의 적수(그리스도교-역주)에게
받아들여졌다.
미트라교는 그런 개념들을 퍼뜨리면서 단지 그것이 전반적으로 지배적인 개념이 되도록 촉진했을 뿐이다.
성스런 제의행위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교 축제와 대중적 관습 속에서도 계속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교리는 정통 그리스도교와 융화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교 밖에서만 지배력을 유지했다.
별들의 영향에 관한 이론은 비판받기도 하고 용납되기도 하면서 점성학자들에 의해 현대의
문턱에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저 페르시아의 신비는 이 거짓 과학(점성학-역주)이 아니라 좀 더 강력한 종교에게
교회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그 핵심적인 개념과 그 개념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마니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요 오랜 진화의 산물이 아니지만,
그것은 여러 유사성으로 이 페르시아의 신비와 관련되어 있다.
그 창시자들이 페르시아에서 미트라의 제사장들과 교류했다고 말하고 있는 전승은 형식에서는
부정확할지 모르지만,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
두 종교는 모두 고대 바빌로니아 신화와 페르시아의 이원론의 혼합으로 동방에서 생겨났으며,
후에는 희랍적 요소를 흡수했다.
마니교는 4세기 동안 로마제국 전역에 퍼졌는데,
그 때는 미트라교가 숨을 거두고 있을 때였으므로,
마니교가 미트라교를 계승했다고들 했다.
이교를 비판하는 교회의 논객들이 흔들어 댔지만 개종시키지는 못했던 신비가들은 조로아스터와
그리스도를 동시에 예배할 수 있는 이 새로운 포용적인 신앙에 빠져들었다.
갈대아 사상과 혼합된 마즈다교 신앙이 널리 퍼짐으로써 로마제국 사람들이
새로운 이단(마니교-역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이 새로운 이단은 길이 이미 평탄하게 닦여 있음을 보았으니,
이것이 마니교가 갑자기 퍼지게 된 비밀이다.
미트라교 교리는 이렇게 새로워져서,
여러 세기 동안 모든 박해를 견디고 중세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 다시 한 번
고대 로마세계를 뒤흔들었다.

 
 
 
 
 
 
제7장 미트라교 예술
서방의 영지(領地)들과 심지어는 동방에서조차 수없이 발견된 미트라교 유물들은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
로마예술사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특징을 집어 말하는 바람직할 것이다.
사실,
그 예술적 가치는 역사적 자료로서 그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보다 훨씬 못하며,
그 주요한 가치는 미학적이라기보다 종교적인 것이다.
이 작품들은 후기에 생산되었는데,
그 시기에는 그 작품들에서 진정한 창조력의 표현이나 독창적인 발전과정에 따른
표현을 찾기를 바랄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편협한 아티스주의(Atticism)의 부추김을 받아 그것들
모두에게 일종의 비난을 퍼붓는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인 재능이 없다고 해도 고대의 주제를 변용하는 그들의 영특함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손재주-그들은 온갖 종류의 기술적 재능을 보여 준다-만으로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부 부조는-보존되어 온 그림과 모자이크는 거의 없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것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지만-로마제국 시대가 우리에게 남겨 준 수많은 조각작품에서 아주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며,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설명(그 제사장의 모습은 미트라교가 서방에 전파되기 전에
확정되어 있었다)이 페르가몬 학파의 한 조각가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있는 아테나 니케(Athena Nike)의
신전의 난간을 장식한 희생하는 승리를 모방하여 창조한 모습을 다소 충실히 반복한 것임은 입증할 수 있다.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발견한 어떤 대리석은(예를 들어 그림 4,5,6,10을 보라) 분명히
2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전히 헬레니즘시대의 힘 있는 창작의 광휘를 반영하고 있다.
그 신은 황소를 열심히 쫓아간 끝에 지상에 추락한 그것을 붙잡았으며,
한 쪽 무릎을 그 엉덩이에 대고 발은 그 발굽에 댄 채,
그것을 땅에 찍어 눌렀다.
그는 한 손으로는 황소의 콧구멍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 옆구리에 칼을 쑤셔 넣었다.
이 생생한 장면의 강렬함은 저 불굴의 영웅의 민첩함과 힘을 부조에 새겨 넣었다.
또 한편으로는,
죽음의 고통으로 사지를 움츠리고 마지막 숨을 쉬며 죽어가는 희생물의 고통과,
승리자의 의기양양함과 후회가 묘하게 결합된 상태가 이 성스런 드라마의 애처로운 측면을 두드러지게 하고,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마음에 고대의 신앙인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느꼈을 감정을 불어넣어 준다
(그림 44와 표지그림을 보라).

 
횃불을 든 사람들의 전통적인 모습은 비슷한 감정으로 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고의 표본 속에서,
예술가가 넓은 프리기아 외투와,
또 두 명의 젊은이의 얼굴에 그려 넣은 희망과 슬픔의 상이한 감정을 강조함으로써 조각에 효과를
부여한 것을 알아차린다.
티베르강 근처에서 발견한 두 개의 조각상에는 이 신성한 두 젊은이가 놀랄 만큼 그대로 다시 나타나 있다.
초에가(Zoëga)는 이 조각상들을 하드리아누스 때의 것으로 보는데,
이것들은 동방에서 이탈리아로 수입되었을 것이다(그림 47,
48을 보라). 그것들을 만든 사람은 두 조각상을 맞수로 만들려고 했는데,
이 조각상이 둘 다 외투를 오른쪽 어깨에 묶어 오른쪽으로 늘어뜨림으로써 대칭이 불완전해진 것을
그가 어떻게 잘 상쇄하고 있는지가 보일 것이다.

 
안토니우스 시대의 작품의 특징을 보여 주는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사람들은 강렬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적절하게도 좀 근래에 해당하는 유물들에도 그런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콤모두스(재위 176-192-역주)의 치세기간에 해당하는 오스티아의 작품들이나 그것들과 동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빌라 알바니의 부조를 생각해 보라.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개발한 어려운 기술을 보여 주려고,
외투의 주름과 머리카락의 물결모양의 많이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이상한 버릇은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세부적인 작업은 좀 더 작은 차원의 단편들에서 좀 더 교묘하게 성공했다.
근래 아퀼레이아에서 발견하여 이 책의 표지에 실은 작은 대리석 하나는 이러한 측면에서
그런 것들과 달리 “현란한 기술”을 보여 준다.
섬세하게 조각한 인물들은 거대한 기반에서 거의 완전히 잘라냈는데,
아주 얇은 지지대로만 그 기반에 붙어 있다.
그것은 조각가가 다루기 힘든 재료를 가지고,
유연한 금속을 가지고 작업하는 이들이 얻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내어 자신의 예술적 기교를 보여 주는
예술적 과장이다.

 
 
 
그림 47. 미트라교의 횃불 든 사람
파리스로 잘못 복원함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은 트로이의 왕자-역주)

 
 
그러나 이 상대적으로 완벽한 작품은 이탈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고,
특히 로마의 영지(領地)들에서는 보기 어려운데,
미트라교 기념물들이 아주 거대하기 때문에 그런 작업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돌을 잘라내고 깎아 내는 사람들-그들은 다른 이름(예술가라는 이름-역주)을 지닐 자격이 없다-은
이러한 작업에 책임이 있는데,
그들은 종종 끌을 몇 번 내리쳐서 다시 만들려고 하는 모양의 윤곽을 대강 잡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에는 번쩍거리는 색을 칠해 어떤 부분을 강조했다.
때로는 일을 신속하게 진행하느라고 마치 상형문자처럼 몸통만을 분명하게 표시했다.
단지 표현하려는 것의 윤곽만을 그리는 것으로 충분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모든 신실한 신자들은 그 의미를 알았고,
그 조각상은 상상 속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어색하고 애매한 작품들의 불완전함을 그토록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무지이다.
더 작은 부조들도 여전히 소박하게 윤곽을 그리는 수준을 넘지 못했으며,
기괴함에 가까웠다.
그 모양이 기형적이어서 가게에서 파는 생강빵으로 만든 인간이라는 작은 장난감이 자꾸 생각난다.

 
 
 
그림 48. 미트라교의 횃불을 든 사람
파리스로 잘못 복원함
 
 
이 부조판들을 이렇게 부주의하게 다룬 것은 그것들을 설치할 장소 때문이기도 했다.
미트라의 신비가들은 그것들을 자기들의 신전에 봉헌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로 자기들의 기품 있는 거처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정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종교가 들어간 곳 어디에서나 이 조각상들을 엄청나게 많이 볼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신자들이 이러한 조각상을 끊임없이 요구했으므로,
그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그것들을 조각하는 작업장에서는 신속하게 대량으로 생산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싸구려 조각품을 만들어 내는 자들은 신자들의 요구를 값싸게 만족시키려는 생각밖에 없었고,
신자들은 예술적 감각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고대의 조각품 생산자들은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의 좀 더 작은 조각상 수백 개를 만들었는데,
이는 현대의 성상제작자들이 똑같은 십자가 수난상과 동정녀 마리아상을 대량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당시의 종교적 상징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성상처럼 예술적이지는 않았다.

 
이 제작자들은 똑같은 전통적 유형의 모조품을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온갖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수입이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위해 상품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단지 다키아에 있는 사르미체게투사의 미트라 신전에서 발견한 일련의 봉헌물을 보라.
우리는 여기서 그 곳의 공방(工房)에서 만든 온갖 유형의 표본을 본다.
만들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높은 돋을새김은 피했다.
기껏해야 황소를 죽이는 신의 집단을 나타내기 위해 대리석 곳곳에 구멍을 파냈을 뿐이다.
그러나 성전의 벽에 새겨 넣은 작은 돋을새김은 놀랍도록 다양하다.
단지 하찮은 사각면을 장식하기 위해 조각판들을 구했는데,
그것은 황소의 희생장면만을 담기 위한 것이었다.
때로는 서너 개의 좀 더 작은 장면으로 나누어진 일종의 제단대(祭壇臺)를 첨가하여 가치를 높였다.
또 그 작품은 부수적인 장면들로 장식한 윗판으로 구성이 더 복잡해졌다.

끝으로, 이것들은 또한 기념물의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네 면에서 주요한 장면을 둘러쌌다.
또 작업자의 상상력이 비상하여,
황소를 죽이는 신을 12궁도로 장식된 원이나 잎으로 된 왕관으로 에워싸기도 했다.
테두리는 첨가하거나 생략하기도 했다.
조각한 명판(銘板)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려면 대단한 독창성을 발휘해야 했다.
그것들은 사각형,타원형,반원형,사다리꼴이었으며,원형도 있었다.
두 개가 정확하게 똑같은 것은 없었다.

 
만일 고용노동의 이 상업적 생산물이 예술과 거의 관계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고대의 석물절단업(石物切斷業)에 대한 가치 있는 자료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영지의 도시를 위한 조각의 상당한 부분이 제국시대의 로마에서 만들어졌다는 여러 증거를 갖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고올에서 발견한 일부 기념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런던의 미트라교 신전을 장식한 조각품들도 그러할 것이다.

반면에,
수도에서 발견한 어떤 조각상들은 아마도 소아시아에서 수입했을 것이다.
비루눔의 아름다운 부조도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들여온 것인데,
필시 아퀼레이아를 통해 들어왔을 것이다.
우리는 네 명의 황제의 열정을 통해 3세기에 판노이아의 채석장들의 중요성을 안다.
거기서는 대리석을 떠낸 것이 아니라 대리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
이 돌 야적장은 미트라교의 공물을 제작하는 중요한 중심지였다.
어쨌든 독일의 신전들에서 파낸 몇 개의 야적장이 있는데,
그 신전들은 물론 다뉴브강의 양안(兩岸)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교시대에 교회의 장식품이 어떻게 거래되었는지를 흥미롭게 밝혀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트라교 기념물은 분명히 그 곳에서 만들어졌다.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벽들에 새겨진 조각들에서는 문제가 분명히 보인다.
그것들은 불행히도 모두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용한 돌의 특성을 보고서,
다른 많은 것들을 만든 지역의 제작소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러한 파편들의 구조도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외국인 장인들과 몇몇 거대한 예술품 제작소의 작품이 아니고,
심지어 유리하거나 영예로운 고용을 찾아 나라를 건너온 떠돌이 조각가들의 작품도 아니며,
이웃 마을의 순수하게 돌 자르는 이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가장 큰 기념물들이 어느 지역에서 나온 것인지는 분명히 확정할 수 있다.
그것들이 수많은 위험과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옮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모은 거대한 미트라교 부조들은 로마제국 영지(領地)의 예술 연구를 위해
아주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전해진,
공물로 바친 다수의 석판들처럼,
신자들의 숭배를 위해 신전의 후진(後陣)에 있는 이 조각품들도 위대한 예술품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역시 무성의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들을 보면 그 조각가들이 거기에 최고의 힘을 쏟아 부었음을 느낀다.
만일 그 예술가들이 주제를 만들어 내는 독창성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그들이 조각상들을 배치하는 데 독창적이며,
재료를 다루는 솜씨가 있었다는 증거는 된다.

 
나아가 이 파편들을 판단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화가가 조각가를 도우러 왔으며,
끌로 윤곽만 그린 것을 붓으로 완성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대리석이나 회반죽을 입힌 돌에 번지르르한 색을 칠한 것이다.
녹색,파란색,노랑색,검은색,온갖 종류의 붉은 색 등이 마구 혼합되어 있다.
이 번쩍이는 색의 대조는 조각상의 몸통을 강조하고,
부수적인 부분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여러 경우에,세부적인 내용은 붓으로만 표현했다.
끝으로 도금을 하여 보조적인 얼굴모양을 강조했다.
지하 동굴신전의 어두움 속에서,
이렇게 조각된 부조들은 이 빛나는 여러 색의 옷이 없으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색깔의 생생한 다양성은 동방예술의 전통 중 하나였으며,
루키아누스는 이미 희랍 신들의 단순하고 우아한 형태와 아시아에서 들어온
신들의 노골적인 겉치레가 대조적이라고 보았다.

 
이 조각품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고올 북방,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라인강 변경에서 나왔다.
우리는 이 기념물들 전체를 2세기와 3세기에 벨기에에서 번성했던
흥미로운 조각학파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학파의 작품들은 분명히 남부의 공방들의 작품들을 능가한다.
그 연작(連作) 중 가장 완전한 작품인 오스터부르켄의 부조를 보면,
이 거대한 작품의 풍요로움과 전체적인 조화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물들과 집단들이 쌓여 있는 데서 오는 혼란스런 인상-이것은 미트라교 기념물들이
그 시기의 다른 여러 기념물들과,
특히 일반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통해 만드는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관(石棺)과
더불어 보여 주는 결함이다-은 여기서 그 무리들과 전체의 구조를 분리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통해 완화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작품들의 세부내용을 비판하려고 한다면,
그 인물들 중 일부가 비율이 맞지 않으며,
그들의 일부 동작이 어색하고,
때로는 그들의 태도와 옷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이 있다고 해서,
쉽게 부서지는 재료로 만든 작품의 섬세함과,
특히 웅장함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한 놀라운 재주를 잊어서는 안 된다.
돌에 신들뿐 아니라 미트라교의 우주발생론과 미트라 전설의 일화를 황소의 희생에
이르기까지 표현하려고 한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며,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어도 칭찬할 만한 업적이다.
이것보다 이른 시기에도,
특별히 정교한 조각이 있는 석관에 드라마의 연속적인 순간들을 포개거나
평행한 석판 위에 묘사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의 거대한 부조와 비교할 만한 로마 이교의 기념물을 단 하나도 알지 못한다.
또 비슷한 작품들을 보려면,
그리스도교 모자이크 화가들이 교회벽면을 장식한 긴 작품들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기념물들에 그려져 있는 상이한 표현들의 기원을 탐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표현되어 있는 두 개나 심지어 세 개의 계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할 것이다.
그 인물들 중 몇몇은 그리이스-로마 예술의 전통적인 유형에서 공공연히 빌려온 것이다.
자신에게 대항하여 일어선 괴물들을 죽이는 아후라-마즈다는 번개로 거인들을 죽이는 희랍의 제우스이며,
베레트라그나는 헤라클레스로 바뀌었고,
헬리오스는 보통의 사두마차를 타고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한 젊은이이다.
넵튠,베누스,디아나,메르쿠리우스,마르스,플루토,사투르누스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의 것으로 알려진 옷과 특징을 지닌 채,
일반적으로 알려진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바람과 계절과 행성들은 미트라교가 전파되기 오래 전에 인격화되었으며,
미트라교의 제의는 오래 전부터 대중화된 모습을 그 신전들에서 다시 연출하기만 하면 되었다.

 
한 편,
한 인물은 적어도 아시아적인 원형의 변형인데,
이것은 사자머리를 한 크로노스이다(그림 20-23을 보라). 대부분의 그의 동료들처럼,
이 동물머리를 한 괴물은 동방적 상상력의 창조물이다.
그의 계보는 틀림없이 앗시리아 시대의 조각으로 소급할 것이다.
그러나 서방의 예술가들은 희랍의 만신전에 완전히 낯설고 어떤 학파의 전통에도
구애받지 않는 신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그들의 환상에 따랐던 것이다.
그들이 그 인물에게 가한 여러 가지 변형은 부분적으로는 종교적 사고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 사고는 이 신격화한 추상적 개념의 상징을 복잡하게 하고,
그의 특징을 점점 더 늘리며,
부분적으로는 미학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게 보일까 염려하여 가능한
이 야만적인 인물의 괴물과 같은 특성을 완화하고,
점차로 그것을 인간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사자의 머리를 가리고,
이 동물을 그 발만으로 표현하거나,
그 짐승의 머리를 그 인물의 가슴에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그림 49).

 
사자머리를 한 영원의 신은 미트라교의 가장 최초의 피조물이며,
만일 그것에게 은혜의 매력이 전혀 없다고 해도,
거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측면이 있고,
그 특징들이 도발적으로 축적되어 있어 호기심을 일깨우고 반성을 자극했다.
이 시간의 신을 예외로 하면,
우리는 지팡이 꼭대기에 씌어 있는 프리기아 모자나 하늘들을 나타내는 독수리로
둘러싸인 영역과 같은 어떤 상징들이 단지 동방에서 왔다는 것만을 확정할 수 있다.
황소를 죽이는 미트라처럼,
이 영웅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른 장면들도 분명히 대부분 헬레니즘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주제들을 옮겨온 것이다.
비록 우리가 로마의 대리석 자르는 사람이 모방한 원본이나,
그가 자기 작품 속에 결합시킨 요소들을 결코 다시 발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이러한 개작의 예술적 가치는 일반적으로 아주 적다.
고대 희랍의 도공들이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창조한 뛰어난 예술적 효과를 보려면,
우리는 단지 바위에서 나오는 미트라에 관한 생기 없는 조각들(그림 30)을 희랍의 꽃병에 그려진
에리크토니오스(Erichthonios)의 탄생에 관한 살아 있는 듯한 그림과 비교해 보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면,그림 50을 보라).

 
 
 
그림 49. 미트라교의 크로노스,
또는 무한한 시간의 인격화

 
 
12궁도의 표시에 둘러싸여 있다.
구석에는 바람의 신들이 있다.
여기서는 사자머리가 없이 표현되어 있고,
사자머리는 인물의 가슴에 나온다.
동방신의 소름끼치는 모습을 로마식으로 미화한 것이다
(모데나의 부조. Rev. arch.,1902,I.,p. 1).

 
 
미트라교 성상(聖像)에 혁신적인 면이 부족한 것은,
고통스럽게도 그것을 자극한 종교운동의 중요성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우리는 페르시아의 신비가 로마제국 전체에 퍼진 시기에 고대의 조각은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추가로 가지고 있다.
헬레니즘 시기 동안에 조각가들은 여전히 이집트 신들의 특성에 맞춘 새로운 형상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한 편 로마제국 치하에서 대다수의 마즈다교 신들은 여하간 그들의 아주
특별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의 형상과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주제로 인해,
새로운 유형을 실제로 발명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든 경우에 비참할 정도로 진부한 것이었다.
고대의 세대들에게서 물려받은 지나치게 많은 부(富)는 예술의 생산력을 빼앗았고,
이 부유한 저장고에서 꺼내 쓰는 데 익숙해진 예술은 개별적인 모든 생산력을 잃었다.

 
 
 
그림 50. 에리흐토니오스의 탄생
희랍의 꽃병에서(바우마이스터)
 
 
그러나 우리는 미트라교 신자들에게 그들이 제공하는 체하는 것을 강요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그들이 전한 종교는 아름다움의 종교가 아니었으며,
유연한 형태의 사랑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비록 비난할 정도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헛된 경향으로 보였다.
그들의 눈에는 종교적 정서만이 중요했으며,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들은 주로 이성(理性)을 다루었다.
미트라교가 희랍 조각가들이 창조한 유형들에서 많이 도용을 했다고는 하지만,
미트라교 예술은 미트라교의 제의와 같이 본질적으로 아시아적이었다.
미트라교 예술은 그 제의의 표현이었다.
그 지배적인 개념은 미적 인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이 아니라,
미트라교의 사명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그것은 고대동방의 전통에 충실했다.
일부 부조들에 표현된 인물들과 집단들이 뒤범벅이 된 모습,
미트라교가 영원한 크로노스에게 지나치게 많이 부여한 특징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이상이 태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투박하고 호소력 없는 상징들과 기념들이 보여 주는 여러 용도를 보면,
그것들이 그 우아함이나 고귀함으로 우리를 매혹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알 수 없는 신(神)의 황홀한 매력으로 마음을 사로잡았고,
영혼 속에 고귀한 신비에 대한 외경심을 자극했다.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세련된 이 예술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예술과 특성이 비슷하고,
그것을 통해 서방에서 대중화된 상징은 그것이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저 페르시아 신의 신자들이 아주 풍부하게 재생산한 우주적 순환이라는 상징적인 모양조차도
(그들에게 자연은 모두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정교하게 장식된 석관과 모자이크화와 세밀화에 그토록 자주 나타나는 것들은
본질적으로 그 정신과는 정반대였지만). 하늘들과 땅과 바다의 상징들,
태양과 달과 행성들과 12궁과 바람과 계절과 요소들의 상징들이 그렇다.

 
예술가들이 미트라 전설의 일화들을 표현하려고 했던 평범한 작품들도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모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시대는 그 공방들의 전통을 떨쳐 버리기에는 그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더 무력했다.
교회의 승리 이후에 그리스도교 조각가들은 지금까지 시도된 일이 없는 주제와 만났으며,
돌 위에 성서의 인물들과 이야기를 묘사해야 하는 당황스런 의무에 직면했다.
그 때 그들은 다행히도 저 페르시아 신비가 널리 퍼뜨린 그림에서 영감을 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의상과 자세를 약간 바꾸면 이교적인 장면을 그리스도교적인 그림이 되었다.
미트라가 바위에 화살을 내리치는 것은 호렙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한 모세가 되었고,
바다에서 자기의 동맹자(태양신의 황금빛 전차,
즉 태양-역주)를 끌어올리는 태양은 불의 전차를 타고 승천하는 엘리야를 표현하는 데 기여했으며,
중세까지도 황소를 죽이는 신의 모습은 사자를 찢는 삼손의 모습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편집:http://cafe.daum.net/AdConversion

출처 : 개종
글쓴이 : 古他馬 원글보기
메모 :